현대시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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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의 탄생 5 : 메타포, 은유가 말하기를
이름 시냇물 이메일

* 오랜만에 글 올립니다. 이제 되도록 금요일에 맞춰 글 올리겠습니다. 이 글은 계간지『시현실』 2011년 여름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메타포, 은유가 말하기를

 

 

 

      영화<일 포스티노>와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                

 

 

 

 

 

 

   시는 메타포

   눈아리게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인 이탈리아 어느 작은 섬에 유명시인 파블로 네루다(Neruda)가 망명되어 온다. 네루다에게 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 마리오(Mario)의 영혼은 네루다를 만나고 그의 시를 읽으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네루다에게 오는 우편물 대부분이 여성 독자에게 오는 편지인 것을 아는 마리오는 이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 루소에게 반하면서, 시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어느날 우체부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시가 뭐냐고 묻는다. 네루다는 너무도 간단하게 대답한다.

    “시는 메타포(metaphor)다.”

   그렇지만 우체부 마리오는 은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싱거운 대답처럼 들렸다.

시창작론 교재마다 ‘메타포’ 곧 “은유는 직유, 제유, 환유, 활유 등과 함께 비유법 중의 하나”라고 친절히 설명이 나와 있지만, 궁벽한 시골청년 마리오에게 그런 책을 읽어볼 은총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리오는 그녀에게 자랑하기 위해 네루다 시집에 네루다의 싸인을 받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은 싸인에 맘에 들지 않아 속앓이도 한다.

“선생님. 큰일났어요. 저 사랑에 빠졌어요. 너무 아파요.”

“그거 큰일이군. 빨리 나아야겠네.”

“아뇨. 전 그냥 아프고 싶어요.”

   네루다와 만나면서 마리오는 무한한 은유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나요?”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감상해보게.”

“그러면 은유를 쓰게 되나요?”

“틀림없을 거야.”

   이후 네루다와 헤어진 마리오는 궁벽한 섬마을의 파도소리, 새소리, 임신한 산모 배속의 아이 숨소리, 종소리 등을 녹음해서, 그것을 은유화 한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를 네루다에게 남긴다.  

   “이걸 들으면 저와 이탈리아가 생각나실 거에요. 전 선생님이 모든 아름다움을 가지고 가신 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절 위해 남긴 게 있는 걸 알겠어요.”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1994)>에서 소개하는 메타포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동 마리오는 메타포를 통해 점차 세상을 새롭고, 아름답게 보기 시작한다.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세상의 다른 객체들에 빗대어 담아낸다.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은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들으면서, 은유의 원리를 깨우치고 무슨 말이든 메타포로 전환시킨다. 자연 청년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시가 된다. 세상이 곧 다른 것의 은유이고, 은유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은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은유법만으로 써야 시가 된다는 말일까? 아니다. 잘 알려진 중요한 시들 중에는 은유법이 전혀 나오지 않는 시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과연, 그 은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은유

   비유 언어(figurative language)란 무엇인가. 일상적인 말을 다른 표현과 비교하여 의미를 새롭게 만드는 수사법을 비유라고 한다. 비유법은 직유(直喩,simile), 은유(隱喩 또는 暗喩,metaphor), 환유(換喩,metonymy), 제유(提喩, synecdoche) 등으로 나눈다.

  은유(隱喩)의 어원은 metaphora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초월’(meta)과 ‘전한다’(pherein, transfer)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다. 다시 말해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다(a carrying from one place to another)’라는 뜻이다.

   가령 “호수 같은 내 마음”이라 하면 우리는 직유라고 한다. 그런데 시인 김동명은 “내 마음은 호수요”“내 마음은 촛불이요”“내 마음은 나그네요”“내 마음은 낙엽이오”(「내 마음은」)라는 표현으로 “내 마음”을 다양하게 ‘은유’ 곧 전이(transference)하고 있다. ‘내 마음’을 원관념이라 부르고 마음을 비유한 호수・촛불・나그네・낙엽을 보조관념이라고 한다. 은유는 A=B, 즉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완전히 동일시하도록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사실 이 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단순하고 인습적이어서, 참신한 상상력을 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긴장이 일어나는 경우를 우리는 은유의 기교를 가장 이용했다는 김춘수의 시「나의 하나님」에서 만날 수 있다(김춘수가 예수에 관해 쓴 시에 대해서는, 김응교「김춘수의 ‘예수詩’」,월간『기독교사상』2011년 6월호를 참조바란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悲哀다.

푸주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女人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純潔이다.

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나의 하나님」전문

     풀리지 않는 텍스트를 새로운 시각으로 통역하고 위무(慰撫)하기 위해 비평가는 존재한다. 이 시를 푸는 열쇠는 ‘나의 하나님’과 연결되는 비애, 살점, 놋쇠항아리, 순결, 연둣빛 바람 등 보조관념들의 비의(秘意)를 푸는 것이다. 이러한 보조관념은 원관념을 은유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地平)을 보여준다. ‘A=B’의 은유적 나열, 다시 말해서 A는 원관념 하나님이요, B는 다양한 보조관념으로 나열된 은유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은유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첫째 ‘A is(like) B’. 둘째 ‘A is as B’라는 두 가지이다.

   첫째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A1)은 애처로운 늙은 비애, 희생물인 푸줏간의 고기 살점, 묵중한 슬라브 여인의 놋쇠 항아리다. 성큼 늙어 버린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비애를 느끼는 존재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육체는 푸줏간에 걸린 고기 살점으로 은유된다. 또한 푸줏간 고기처럼 인간에게는 하찮게 보이기도 한다. 다만 슬라브 여자(도스토옙스키를 좋아했던 김춘수 시인에게는 당연히 선호할 인물 유형이다)의 마음 속에 무겁게 자리한 놋쇠 항아리처럼 쉬 사라지지 않는 존재로, 하나님은 변두리에 사는 이의 삶 그 중심에 놓여 있다.

   둘째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A2)은 순결한 어린애 같은 순결, 연둣빛 바람이다.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순결”이라는 표현은 시의 앞부분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과 전혀 다른 은유다. 벌겨벗긴 채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의 모습이 시의 앞부분에서는 ‘커다란 살점’으로, 뒷부분에서는 ‘어리디어린 순결’로 대조되고 있다. 이쯤되면 사물을 삐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적 차원의 응시(gaze)를 느끼게 된다. 시인은 상투적인 부활의 계절인 4월을 피하고, 겨울이 막 끝나는 3월의 “젊은 느릎나무 잎새에서 이는 / 연둣빛 바람”으로 마무리 한다.

   이렇게 이 시는 원관념 ‘나의 하나님’(A)을 많은 보조관념들(B)이 꾸며주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원관념에 여러 개의 보조관념이 있는 경우를 확장은유(擴張隱喩)라고 한다. 확장은유를 통해 원관념은 보다 입체적이며 다성적(多聲的)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보조관념들은 ‘시인의 정서를 가시화하고 구체화해주는 일련의 사물・상황・사건’(T.S.Eliot)을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기도 하다.

   나아가 은유로 이루어진 텍스트는 ‘드러난 의미’(외연의미, denotation)와 ‘숨어 있는 의미’(내포의미, connotation)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데, 우리는 보조관념들 사이에서 외연의미(B)와 내포의미(A)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tension)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 시의 보조관념(혹은 객관적 상관물)들은 하강과 상승으로 긴장을 발생시킨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물질적 상상력으로 비유하자면, 앞부분은 비극적 정서로 무거워진 ‘하강의 역동성’(逆動性), 뒷부분은 밝은 정서로 하늘로 오르는 ‘상승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두 상상력을 극렬히 충돌시켜, 이질적인 충격을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는 응축 긴장된 작품인 것이다.

   이런 식의 설명이 이 시에 대한 보편적인 설명일 것이다.

   여기에 성서학자인 민영진 선생은 나열되는 보조관념들을 보다 미시적으로 해체한다. 선생은 김춘수 시의 한 단어 한 단어를 성서신학의 현미경으로 들여보라고 안내한다. 하나님의 “늙은 비애”를, 하나님을 그렇게도 배반했던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호세아서 11장 8절)를 든 설명부터,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의 의미를 원어로 푸는 방식은 성서학자 민영진 교수가 아니면 보통 평론가가 도저히 할 수 없다.

 

   요한복음서 1장 14절은 ‘로고스’ 곧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륵스’가 되었다고 진술한다. 그리스어 ‘사륵스’를 우리말로는 중국어 번역과 함께 일찍이 고기 육(肉)자에 몸 신(身)자를 써서 육신(肉身)이라고 번역했다. 신학에서는 당신 자신의 몸, 곧 살과 피를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일컬어 “말씀이 육(肉)이 되었다”고 하여, ‘화육(化肉)’ 또는 ‘성육(成肉)’이라고 하는 신학 개념까지 만들어서 쓰고 있다. 그러나 한 시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불경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착상과 진술이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성서적인 신관의 반영이라는 점 때문에 신학 쪽의 주목을 받는다.

ㅡ 민영진『교회밖에 핀 예수꽃』(창조문예사, 2011.16면)

 

   여기에,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며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복음26:26)이라는 성서구절로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의 의미를 풀어낸다. 또한 “연둣빛 바람”에 대한 풀이도 새롭다.

 

   ‘바람’이라는 말이 그대로 히브리어 ‘루악흐(바람)’을 생각나게 하고, 상상은 그대로 삼위(三位) 중의 한 분이신 ‘성령(聖靈)’으로 이어진다.(민영진,21면)

 

   저자 말대로 김춘수 시인이 히브리어를 알고 있었을까 묻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 문제는 시인이 하나님을 ‘바람’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이고, 그것이 기독교적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말년에 인간의 정신구조를 논한 보로메오 매듭(Borromean Knot)으로 설명하자면, 위 시는 기독교적 삼위일체를 완벽하게 재현한 시가 된다. 라캉에 따르면, 각각의 매듭은 제거될 수 없는 ‘실재계’(the Real)로서 육체로 표현된다. 하나의 완결된 구조는 ‘상징계’(The Symbolic)를 의미하며, 의미(meaning)로 표현된다. 이미지 형태로 제시되는 것은 ‘상상계’(the Imaginary)를 의미한다. 여기서 상상계는 예수이고, 상징계는 하나님이며 사실계는 성령이 된다. 그렇다면 김춘수는 무의식의 모든 영역을 동원하여, 기독교적 개념의 하나님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하나님」은 성부(늙은 비애), 성자(커다란 살점), 성령(연둣빛 바람)이라는 삼위일체를 완벽한 은유로 담아낸 시다.

   이렇게 저자는 김춘수 시의 텍스트를 해설하기 위해, 성경과 신학적 정보를 동원한다. 문장에 저자의 오래 묵은 경험과 사유가 오래 익은 포도주처럼 익어 흐른다. 이로 인해, 김춘수 시의 은유(metaphor)은 새롭게 생성된다. 진정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신형철『느낌의 공동체』)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A 곱하기 B, 은유

   정신분석학에서 ‘은유’ 개념은 새로운 의미로 해석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은유의 항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논의이기에 써놓는다.

   라캉에 따르면 무의식의 매커니즘은 언어 법칙을 따른다. 곧 프로이트의 응축과 치환은 은유와 환유에 해당한다. 정신분석학에서 강조된 응축(condensation)과 환치(displacement)의 개념을 야콥슨의 은유, 환유 개념과 연결시켰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다”라고 말하고, 꿈의 작동원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가령, 한 여인의 형상에 어머니・누이・애인 등 유사성을 갖는 여러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응축(凝縮)이다. 한편, 남자의 성기 대신 그에 인접한 뾰족한 막대기나 바위 등으로 대체되는 것이 치환(置換)이다. 그런데 이 응축과 치환과정은 바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나타나는 계열관계(은유)와 연쇄관계(환유)에 상응한다.

 소쉬르에게 기표는 대상이 아닌 언어의 사슬이다. 영속적인 의미화 연쇄를 거치는 이유는 기표는 항상 기의를 예견(anticipation)하기 때문이다. S/s (S는 기표이며, s는 기의이다. /는 장벽 혹은 미끄러짐) 다시 말해, 소쉬르에게서 차용한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를,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도달할 수 없는 상태, 즉 / 로 나타낸다.

   여기에 야콥슨은 그의 실어증에 대한 연구에서 언어장애를 연구하면서, 대치능력과 관계있는 것은 은유, 조합능력과 맥락파악능력은 환유적 측면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페터 비트머,『욕망의 전복』한울, 1998. 5장).

 

프로이트

응축

치환

소쉬르

계열관계

연쇄관계

야콥슨

은유(유사성)

대치능력

환유(인접성)

조합능력과 맥락파악능력

라캉

은유

환유

 

   라캉에게 꿈이란 은유와 환유에 의해 다양한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조직된 텍스트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이란 언어를 형성하는 매우 불안정한 요소들의 연쇄, 즉 결합과 대체라는 기표의 이중운동을 통해 규정되며 환유와 은유에 의해 기의를 생성한다고 본다. 물론 라캉은 응축을 은유로, 전이를 환유로 단순화시켰다는 지적을 받는다.

다시 영화<일 포스티노>와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으로 돌아가자.

   무의식의 은유는 풀리지 않는 비문(秘文)의 경계를 넘나들도록 독자를 도와 비의(秘意)로 인도한다. 시인 신경림은 이 영화를 인용하여 은유에 대하여 말한다.

 

   시란 메타포 즉 은유(隱喩)입니다. 좋은 시라는 건 결국 비유를 잘한 시입니다. 네루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젊은 우체부가 찾아와 “시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네루다는 “시란 메타포다”라고 대답하지요. 두 사람이 바닷가를 걷는데, 파도가 밀려오는 걸 보고 젊은 우체부가 “파도가 걸어옵니다”하고 말하자, 네루다는 “이 순간부터 너는 시인이다. 바로 비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다”라고 말하지요. 한 가지 사물을 다른 사물을 들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라는 거죠. 제 생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좋은 시인은 비유를 잘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비유를 썩 잘 할수록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ㅡ신경림「생명력있는 시를 쓰려면」에서

 

   비교컨대 소설의 본질이 픽션이고, 시의 본질은 메타포라고 한다면, 은유야말로 종요로운 시적 기교이다. “시가 은유다”라는 말은 시의 전체적인 기운이 은유를 통해 전해진다는 말일 것이다. 가령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윤동주「병원」2연)라는 표현에는 은유적 구절은 없으나, 독자에 따라서 시 전체를 통해 한 개인의 병을 넘어서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윤리적 은유’를 느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시대를 병원, 인간을 환자로 은유한다면 우리는 이 시를 무력한 시대의 인간 존재로 은유해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시의 ‘은유’를 단순하게 A=B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은유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시 속에 작용하는 역동성(力動性)이다. 시적인 에너지가 저급할 때 은유는 서술이나 직유의 형태로 낙하할 것이다. 비유컨대 저급한 이념문학은 라캉의 분류에서 은유에 해당한다. 높은 수준의 이념문학도 있으나, 저급한 이념문학은 그 이데올로기의 문학적 표현으로 기본적으로는 은유적 성격을 갖지만 ‘빈곤한’ 은유로 떨어지는 작품이 있었다.

   시인은 세상의 여러 객체들에 자신의 상상력을 부여할 자유와 사명이 있다. 서술과 직유의 차원인 A=B에 머물지 않고, A+B를 넘어, A 곱하기(X) B가 되는가에 따라 시의 긴장이나 정서적 증폭은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영화<일 포스티노>의 마리오는 은유의 자유를 누렸고, 「나의 하나님」의 시인 김춘수는 은유의 사명을 지켰다. 마리오와 김춘수는 시적인 것과 비시적(非詩的)인 것의 경계를 은유로 허물고 있다. 시인의 심연에서 솟아나오는, 우리 곁에 있어 왔지만 전혀 낯선 메타포로 인해 ‘기념비’(들뢰즈・가타리)적 시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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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 2010.05.01. 2844
시의 탄생 5 : 메타포, 은유가 말하기를
시냇물 2011.07.12. 2589
21 시의 탄생 4 : 만요슈와 일본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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