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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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문숲길2] 백석, 윤동주, 전태일
이름 시냇물 이메일
 

[인문숲길2]

* 시에 대해 쓰다가 막히면 인문학에 대해 쓴 글을 올리려 합니다. 혜량 바랍니다.  

 

백석, 윤동주, 전태일

 백석

   지난주 연변에 학술대회를 다녀왔다. 조선족 작가들과 평론가도 많이 만나고 왔다. 이번에   「신경(新京) 디아스포라 백석「흰 바람벽에」」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만주국의 수도로 계획된 모던 대도시 신경에서 발표한 백석의 시들을 만주 개척 유이민시 계열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신경'이란 모던 대도시에 간 백석 시를 배고파 최후수단으로 땅을 찾아 만주로 간 개척 이민시의 시각에서 보면 전혀 틀린 해석이다라는 시각에서 기존의 연구사를 부정했다. 

   일행들이 백두산에 가는 다음날, 나는 연변 둘레의 오래된 도서실을 기웃거렸다. 

   궁핍해진 북한의 시골 동네 도서관에서 책들이 통채로 연변에 흘러 들어오곤 하는 현상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연변대학교 도서관이 아니라, 연변 자치주 주변의 도서관을 다녔다. 그중 한 도서관이 아주 낡아서 거의 1920년대 건물 같았는데, 허물어질 것 같은, 밤마다 납량특집 유령이 나올만한, 부서진 문짝이 달린, 섬마을 초등학교 공중변소 같은 2층 짜리 도서관에 갔다. 놀랍게도 서고라기 보다 창고라 해야 어울릴만한 그곳에는 귀한 '물건'이 있었다.

   이제까지 백석은 북한에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었고, 이후 몇몇 연구자들이 몇편의 시를 찾아냈다. 지금까지 3편 정도 발견되었기에, 평가를 위한 절대량이 부족하다. 


   그런데 그날 나는 백석이 북한에서 1960년대에 발표한 새로운 시를 만났다.

   멈칫하며 너무 반가워서 온몸이 갑자기 긴장되고, 앞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백석 시를 넘어서 '백석 씨'가 내 눈 앞에 나타나는 환상 같은 걸 느꼈다.  복사하면 안 된다는 그 시집을 나는 동행의 아이폰을 빌려 사진으로 모두 찍었다.

   그 시집은 김일성을 찬양한 시집이었다. 다른 시인들은 김일성이나 수령이나 태양 등의 상투적 상징어를 명확히 넣었는데 반해 백석이 쓴 시는 '영웅'이란 자리에 아무 이름이나 넣어도 될만한 시였다. 수령형상문학을 안 쓰려고 포즈로 쓴 찬양시였는데, 거짓말인 게 너무 훤하게 보였다. 그러면서 북녘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 말수 적었다는 이태준이며, 백석을 비판했던 임화나, 멋쟁이 안회남 같은 이들의 얼굴이 영화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생애는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백석이 북쪽에서 남긴 시, 그 체제를 따라갈 수 없었던 주변인의 고뇌를 읽으면서 눈시울이 자꾸 흔들렸다. 백석을 너무 좋아했고, 또 그 시를 읽으니 북한에서 백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지냈을까 짐작되었다.  

 

윤동주

   백석 시집『사슴』(1936)이 출판되었을 때, 찬사가 잇따랐으나 식민지 모더니즘적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한 이는 임화였다. 백석이 평안도 풍물과 음식을 나열하는 것에 대해 임화는 에그조티즘, 즉  이국주의(異國主義), 이국적 취미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너무도 비슷한 시기다. 파리에서 유학한 아프리카 작가들이 아프리카 신화나 풍물을 나열하는 시를 썼을 때, 프란츠 파농도 임화와 비슷한 비판을 했었다.

   임화의 비판이 부분적으로 맞으나 백석 이후에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백석의 영향이 거대한 제국처럼 한국 시 문학사에 자리잡고 있다. 백석을 가장 먼저 자기 시 안에 끌어들인 시인은 윤동주다. 윤동주의 시에는 백석의 흔적이 너무 많다.

   5년전쯤 윤동주 가족에게서 윤동주가 베껴쓴 백석 시집을 보고 나는 전율했었다.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을 틀린 맞춤법, 의도적인 띄어쓰기까지 똑같이 옮겨 놓았다. 그리고 좋은 글 귀에는 "좋다"고 메모한 흔적이 있었다.

   이번 연변 여행에 나는 윤동주의 생가와 그가 다니던 교회, 그리고 명동촌을 찾아갔다. 93년과 98년에 갔었던 용정중학교는 사실 그리 감흥이 없다. 지어진 건물도 한국 관광객을 의식해 다른 건물을 옮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93년에 갔을 때 나는 친구들과 옆 운동장에서 용정 사람들과 축구시합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명동촌에 갔을 때, 훅 불면 부서질 것만 같은 집들이 겨우 버팅겨 서 있는, 그 마을에서 나는 영적인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물리적인 세련됨이 아니라, 폐허가 들이대는 장엄 같은 것이었다. 윤동주의 정신적 지도자인 김약연 목사의 기념비를 보았을 때, 가슴 밑둥에서 뭔가 큰 덩어리가 느껴졌다.

   연변 윤동주 생가 가는 내리막길에 윤동주가 다니던 낡은 교회가 남아 있다.교회 바로 앞에 김약연 목사님 비석이 있다. 김약연 목사의 더 큰 비석은 명동촌에서 자동차로 10분쯤 떨어진 곳에 또 있다. 그는 윤동주,문익환의 그늘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생가에서 버스로 약 20분 정도 달려야 다가가는 윤동주 묘지가 있는 구릉으로 갔다.

   윤동주 묘지 가는 길은 묵상의 길이다. 비는커녕 조금만 습해도 질퍽하여 도저히 발을 디딜 수 없는 1~2킬로의 긴 진창 언덕길이다. 다행히 그날 햇살이 쨍쨍하여 갈 수 있었으나, 대신 우리는 햇살을 마치 소나기로 여기며 온몸이 땀으로 흠씬 젖은 채 구릉을 올라야 했다. 고행하지 않고서는 동주 형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하듯이.

   윤동주 묘지에 가면 사람의 흔적이 있다. 묘테두리도 건실하고, 새로 만든 가족 비석도 있고, 옆에 그늘이 될만한 작은 소나무가 벗처럼 서 있다. 그 작은 그늘이 그렇게도 고마운 허허 구릉이었다. 윤동주 묘지에서 가장 먼저 묵념이든 기도든 마음을 모아야 하는데, 반가운 마음에 기념 사진부터 찍을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여기서 기념 사진 찍고 돌아오면 안 된다.

   왼쪽 10미터쯤 떨어져서 아주 초라한 묘가 하나 있다. 윤동주와 같이 사상범으로 잡혀 갔던 길벗 글벗 영벗 송몽규의 묘다.  거기서 꼭 인사해야 한다.

 

  전태일  
   연변에서 돌아와 『리얼리스트』 편집회의에 참여했다.

   여러 기획에 대한 토론이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특집을 '전태일'로 하기로 한 것은 의미 깊어다.

지금까지 늘상 얘기하던 전태일 이미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 그리고 지금 현재와 미래를 잇는 '우리 시대의 전태일들'을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편집회의 내내 함께 했던 글벗들을 고민하게 했다.

   나는 전태일을 한국 현대사의 출발로 생각해왔다. 전태일의 영혼과 박정희의 정신이 투쟁/억압해온 '갈등의 다이나믹'으로 나는 한국 현대사를 간단히 표현한다. 그래서 수업 때마다 '전태일'이라는 아이콘이 한국 문화와 문학사에 얼마나 거대하고 은밀한 충격이 되었는지 거의 한 시간에 걸려 강의하거나, 차라리 영화<아름다운 청년>을 보여주곤 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처음 만났던 전태일을 생각해보곤 한다. 그 충격은 시간이 지난 뒤 다른 글을 통해 따로 써야할 정도로,  아직 내 마음에서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 충격은 아마 시간이 더 흘러야 쓸 수 있을 거 같다. 다만 나는 먹물쟁이로 두 선생께서 전태일을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  

   1980년대 초반기에 민중신학을 공부했을 때, 고 서남동 교수는 전태일을 '부활한 예수'로 비유했다. 그리고 튀빙엔 대학교 유르겐 몰트만 교수도 방한하여 전태일을 '젊은 예수의 제자'라고 강연했다. 대학 1학년이었던 나는 그것이 큰 충격이었다.

   나에게 전태일이 예수와 같으냐 부활이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예수의 길이 있듯, 전태일도 자신의 길을 걸었다. 전태일은 예수다라고 강조할 필요도 없다. 예수는 예수고, 원효는 원효고, 윤동주는 윤동주고, 전태일은 전태일이다.

   이런 분들의 삶을 하루 단 1초라도 따를 수 있다면 그것이 중요하고 행복한 것이지. 누가 누구라고 비교하는 것이 나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는 전태일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의 삶이 떠오른다. 그래서 고 서남동 교수나, 유르겐 몰트만의 생각도 심중으로 이해한다.

   내가 전태일을 생각할 때 늘 기억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8~9)
   나는 전태일을 의인으로 용감히 죽은 자로 생각한다. 나는 이 구절을 생각하며, 내가 좋아하는 젊은 예수, 백석, 윤동주, 전태일의 삶을 늙은소가 되새김질 하듯 생각하는 것이다.  
 

장기

   백석과 윤동주와 전태일은 아주 오랫동안 내 삶에 큰 영혼의 스승들이다.

   백석과 윤동주는 도연명 같은 변방인, 이름이 없는 사람들, 고아의 불타버린 몽둥발이, 벌판에 버려진 당나귀, 저 멀리 산 속의 갈매나무 같은 존재들과 마음을 같이 하는 시인이었다. 전태일은 그러한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한 구도자다.

   특히 올해는 전태일 40주기다.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책무감처럼 따랐다.

   한때 내 삶의 잣대에 비해 고액연봉자였지만 이제 나는 원고료 앵벌이 같은 하류 글쟁이로 근근히 흔들리는 가계의 생활비를 대고 있다.

   어떤 헌신이 필요할텐데...... 뜬금없는 일이라 생각하실지 모르나,  여러 방법 중에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장기기증을 하고 싶었다. 장기기증은 내가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뭔가 의미 깊은 일로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다.

   장기이식을 다짐했었던 것은 작년 2월이었다.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져 수술하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인대이식이며 온갖 장기이식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었다. 물론 장기기증에 대해 여러 비판도 많다. 영화<아일랜드><아저씨>를 비롯해서 불법 장기판매는 이미 영화판에서 흔한 소재가 되어 버렸다. 죽지도 않은 사람을 산 채로 마취시켜 장기를 팔아먹는 사건도 실제로 번번히 일어난다. 내가 번역했던 양석일 장편소설 『어둠의 아이들』이 10살 이하의 어린애들 장기를 팔아먹는 그런 이야기다. 인조인간의 장기를 아예 공장처럼 키우는 영화도 있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그런 일은 없으리라 믿고 서약하기로 했다. 이미 우리나라 인구의 1% 정도가 장기 기증을 하기로 서약했고,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헌신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장기기증을 생각할 때마다 아내가 떠올랐다.

   아내가 과연 찬성할까? 내가 뇌사할 때 심장기능이 멈춰질 때, 6시간 이후 곧바로 내 각막과 심장과 신장과 간장을 떼어 가는 것을 아내와 두 아들이 용납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언젠가 내가 장기기증 하겠다는 것을 메일로 보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주 우리 부부는 장기기증을 권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용지를 슬쩍 가방에 넣으며 따로 써서 서명하여 보낸 뒤, 아내에게 메일로 말하려 했다.

그래서 서명 용지를 가방에 넣으려는 바로 그 순간, 어? 아내는 장기기증 신청서에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자기 이름을 쓰고 있었다.

   각막기증, 심장기증, 신장 기증, 간장 기증 등 모든 란에 O표로 표식하고 주소며, 이메일, 전화번호까지 모두 써서 나보다 먼저 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아내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아내에게 아무말도 묻지 않고 나도 신청서에 써서 제출했다.

 

   나는 백석만치 윤동주만치 시를 잘 쓰지도 못하고, 전태일처럼 살아 있을 적에 온몸을 던져 이웃의 삶에 헌신하지 못했다.

   그들은 죽어서 시로써 삶으로써 우리 영혼에 되살아나 인간이 가야할 길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이 분들의 삶, 아니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죽어서라도 장기를 기증한다는 데에 조금 위로를 얻었다. 이 분들에게 배워서 조금 흉내 내는 것이니 내 장기는 예수, 백석, 윤동주, 전태일의 장기라고 과장되이 부풀려 상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차피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땅에 묻히거나 화장하거나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죽은 뒤 내 장기를 꺼낼 때 고통이 있을 리 없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했기에 대단한 일도 아니다. 그저 나누는 것뿐이다. 내 장기를 어머니에게서 받았듯이. 

  

   내가 죽을 때 나의 주검이 죽음의 침상이 아니라, 적어도 9명이 눈과 심장과 신장과 간장을 얻고 살아, 내 주검이 생명 탄생의 침상이 되는 걸 생각하면, 넉넉치 않아도 건강한 몸을 가진 것이 다만 다행이다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며, 백석이며, 윤동주며,전태일을 생각해본다.   

김응교(http://twitter.com/sinenmul) 


마당 2010.08.31. 1:48 pm 

댓글을 쓰려는데 한참 머뭇거려 집니다. 언제나 긴 생각거리를 주시는 김응교 선생님.

김영 2010.09.04. 11:26 am 

우리 김 선생의 글은 가슴을 저리게 하는 울림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의식이 잠들지 않도록 하는 진실이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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