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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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문숲길1]사상의 리베로, 데리다
이름 시냇물 이메일

[인문숲길1]

* 시에 대해 쓰다가 막히면 인문학에 대해 쓴 글을 올리려 합니다. 혜량 바랍니다.  

 

사상의 리베로, 데리다

 

 

  월드 리베로 사상가, 자크 데리다 
    월드컵의 계절에 축구를 좋아했던 한 사상가를 떠올린다.
    축구 포지션 중에 ‘리베로’(libero)라는 독특한 역할이 있다. 스위퍼 같은 최종 수비수 역할을 맡으면서 공격에도 적극 가담하는 선수를 말한다. 한국의 홍명보가 그랬듯이, 리베로는 급작스레 롱슛을 때리거나, 셋트 플레이가 되면 전방 깊숙이 솟아 헤딩슛 한다. 

    

    평생 축구를 좋아했고, 가장 힘들 때 외로울 때 차별받을 때 볼을 차며 울분을 참았을 그을린 얼굴,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20세기 사상사에서 숱한 고정관념을 펑펑 차대며 리베로의 책무를 다했다. 
    프랑스령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사상가를 흔히 ‘순수하지 알제리아인’(Algerians improper)이라고 한다. 데리다는 에스파냐에서 15세기에 쫓겨난 토착유대인 공동체의 후손이었다. 알제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알베르 카뮈, 알뛰세르, 사르트르, 프란츠 파농은 모두 알제리를 거쳐 사상의 변화를 겪는다.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난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에서 병역을 마치기 위해 정신병원에 근무한다.

   여기서 파농은 정신병자로 감금된 환자들에게 축구경기를 즐기게 한다.

   알제리대학 축구부 골키퍼를 했던 알베르 카뮈도

   데리다처럼 프로축구 선수가 꿈이었다.

   차두리처럼 축구를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면, 

   어린 시절 지독한 왕따를 당한 많은 헝그리 축구광은 볼을 차며 울분을 참지 않았을까.

   『문학의 길』『쑈쑈쑈』등을 남기고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간 문학평론가

   고 이성욱도 사립국민학교 시절 부자 아이들 틈에서 겪었던 열등감으로 볼을 차댔다. 
    

    뿐이랴, 알제리 태생에다가 데리다는 ‘유태인’이란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비시정권 때 다니던 중학교에서 1년 동안 쫓겨나기도 했다. 고교생 때 울분에 볼을 더 찼던 데리다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떨어졌다. 재수 기간 중에 독서에 열중하고 시를 써서 발표한다. 이때부터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 대신에 데리다는 인생을 걸고 전통적 철학사와 한 게임 치룬다. 

   어린 시절 왕따 당했던 데리다는 이후 프랑스 철학계에서 말이 비판이지, 차갑게 따돌림 받았다. 철학체계를 망치로 부수려 했던 ‘망치의 철학자 니체’를 창조적으로 이어받은 데리다는 ‘리베로 사상가’로서 모든 기록의 고정 관념을 발로 차댔다. 그는 '환대 받지 못하는 인생'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리베로 데리다’의 시합은 대부분 다수보다는 소수,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위한 사상투쟁의 한 판이었다. [데리다가 평생 싸워온 사상의 그라운드 이야기는 김형효 선생이 쓴 『데리다의 해체철학』(민음사)에 비교적 쉽게 설명되어 있다.] 

 

    괴물에 대한 관용을 넘어, ‘환대’를 위하여
     커니(Richard Kearney)가 이방인을 ‘악마화’해 온 서양사를 지적했듯이, 타자는 악마로 표상되어 왔다(커니,『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 그러나 이방인에 대한 환대란, 우리에게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소수자, 외국인, 이방인, 디아스포라 등의 어휘는 이미 우리에게 난감한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영화<파이란>(2001)을 생각해 보자.
   이 영화는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불법체류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저당 잡힌 파이란이 처음 보내진 곳은 술집이다. 바닷가 마을 세탁소에서 고되고 초라한 생활을 꾸리며 빚을 갚아 나가면서 파이란은 죽어간다. 그런데도 파이란은 한국 사회에 감사하고 강재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가짜 결혼을 해준 불량배 강재에게 파이란은 질문과 감사가 가득찬 편지를 남긴다.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주시겠습니까? 만약 오신다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당신의 무덤에 같이 묻어 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으시겠습니까? 응석부려 죄송합니다.”
  

   파이란은 자기가 죽으면 매장에 대해 법 문제가 생기리라 생각하고 편지를 남겼던 것이다. 파이란은 이렇게 스스로 존재가 처할 죽음의 장소까지 묻는다. 이방인이 개입할 때 토박이 공동체는 이방인과 함께 물음을 던지는 존재가 된다. 그 물음은 이방인에게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방인은 ‘물음을 던지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방인이란 물음으로-된-존재, 물음으로-된-존재의 물음 자체, 물음-존재 또는 문제의 물음으로-된-존재”(데리다,『환대에 대하여』2004. 57면. 이후 면수만 표기한다)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렇게 한 공동체에서 당연시 여기는 세계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스스로 이방인으로 데리다는 소크라테스의 예를 든다. 아테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방인으로 대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공동체의 관습적 질서에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계인, 이방인들은 토박이 공동체 안에 의미있는 자극을 준다. 또한 이방인 자신도 스스로 불안정하고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 공동체에게도 비교와 물음을 통한 자극과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데리다의 논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3부작 중의 두 번째 이야기인『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시작된다.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가 오랜 방랑 끝에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클로노스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다가오는 클로노스인에게 “이방인이여!”라고 불러 세운다. 이 장면은 ‘이방인’이 위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호칭임을 보여준다. 즉 오이디푸스는 클로노스 땅에 이제 막 도착한 방랑자요, 외국인이요, 이방인이지만, 오이디푸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 고장 사람들이 ‘이방인’인 것이다. 외국인으로 대우받는 기본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

   

   외국인은 우선 환대의 의무, 비호권, 그 한계, 그 기준, 그 치안 등이 명시되어 있는 법의 언어 앞에서 이방인이다. 그는 정의상 자신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집주인, 주인[접대인], 왕, 영주, 권력, 국민, 국가, 아버지 등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언어로 환대를 청해야 한다. 주인은 그에게 자기 자신의 언어로의 번역을 강요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폭력이다.(64면) 

 

   그리고 서로 이방인이 된 입장에서, 예언에 따라 안정한 죽음의 장소를 제공받고자 하는 오이디푸스와 클로노스 고장 사람들 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오이디푸스 같은 이방인은 콜로노스의 토박이 공동체들에게 위협되지 않는 한, 관용(tolerance)될 수 있다. 데리다는 관용이 권력자의 양보와 자비, 은혜 베풀기에 기댈 수 밖에 없는 한, 그것은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최강자의 논리” 편에 있게 된다고 지적한다. 데리다는 강자의 자비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여기서 관용을 극복할 윤리적 이념으로 데리다는 ‘환대’(hospitality)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절대적 환대의 윤리적 이념’은 ‘타자 혹은 타인’을 ‘그 자체의 충만함’으로 받아들이는 타자 중심의 윤리적 지향을 갖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타자에 대한 데리다의 차이의 윤리가 레비나스의 윤리적 태도와 이 지점에서는 같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콜로노스의 숲에 도달한 오이디푸스가 그랬듯이, 이방인은 항상 법과 지식에 대해 잉여이자 초과이다. 언어 밖도 안도 아닌 곳에 있는 자이자, 국가의 영토 밖도 안도 아닌 곳에 있는 자, 그가 바로 이방인이다. 그런데도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를 말한다.

 

   절대적 환대는 내가 나의-집을 개방하고, 이방인(성을 가진, 이방인이라는 사회적 위상 등을 가진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름없는 미지의 절대적 타자에게도 줄 것을, 그리고 그에게 장소를 줄 것을, 그를 오게 내버려둘 것을, 도래하게 두고 내가 그에게 제공하는 장소 내에 장소를 가지게 둘 것을, 그러면서도 그에게 상호성(계약에 들어오기)을 요구하지도 말고 그의 이름조차도 묻지 말 것을 필수적으로 내세운다. 절대적 환대의 법은 권리의 환대와 결별할 것을, 권리로서의 법 또는 정의와 결별할 것을 명령한다.(70~71면)

 

   이렇게 볼 때 절대적 환대는 관용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절대적 환대는 스스로를 주인이면서도 동시에 손님으로 여기는 태도다. 불어에서 Hôte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불어에서 hospitalité는 베푸는 사람과 아울러 받는 사람을 동시에 말한다. 
   비교컨대 관용은 주체(혹은 주인)의 입장이지만, 환대는 타자에게 선택권을 넘겨준다. 따라서 관용은 ‘조건부 환대’다. 이러한 환대는 “나는 나의 ‘내-집’을, 나의 자기성을, 나의 환대 권한을, 주인이라는 나의 지상권을 침해하는 이는 누구나 달갑지 않은 이방인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원수(敵)처럼 간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타자는 적의에 찬 주체가 되고, 나는 그의 인질이 될 염려가 있는 탓이다”(89면)라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따라서 관용이란 주인에 의한 ‘초대(invitation)의 환대’를 말하고, 무조건적 환대는 이방인에 의한 ‘방문(visitation)의 환대’(135면)를 말한다. 
   그런데, 환대받아야 할 이방인은 항상 친숙한 모습으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강도이거나 도둑일 수도 있다. 사건처럼, 진리처럼, 잉여이자 초과인 상태 그대로 이방인은 환대받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에 기반한 무조건적 환대’에 대해서 데리다는 해체철학의 창시자답게, 자신이 세운 개념과 체계를 스스로 반성한다.

   달리 말하면 이율배반이 있다. 환대의 법과 환대의 법들 사이엔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 변증법화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 있는 듯하다. 한편 환대의 법은 무제한적 환대에의 무조건적 법(도래자에게 자신의 자기-집과 자기 전체를 줄 것, 그에게 자신의 고유한 것과 우리의 고유한 것을 주되 그에게 이름도 묻지 말고 대가도 요구하지 말고 최소의 조건도 내세우지 않을 것)인가 하면, 다른 한편 환대의 법들은 언제나 조건지어지고 조건적인 권리들과 의무들로서, 그리스-라틴 전통이, 유대-그리스도교적 전통이 규정하고 있으며, 칸트 그리고 특히 헤겔까지의 모든 권리(법)와 모든 법철학이 가족·시민 사회·국가에 걸쳐 규정하고 있는 환대의 권리들과 의무들이기 때문이다.(104~105면)

   레비나스와 달리,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직시한다. 우선 그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과장적인 환대의 (유일무이한) 법(la loi)”과 “한계들·권한들·권리들·의무들을 정해 놓음으로써 환대의 법에 도전하는 환대에 관한 모든 법들(le lois)”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령 새터민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처소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집들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법들’이 준비되고 시행되어야 한다. 결국 무조건적 환대를 위해서는 환대의 법들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법들에 의해 선별되는 환대란 무조건적일 수 없다. 데리다가 무조건적 환대의 “환원 불가한 타락 가능성(pervertibilité)”(72면)에 대해 말하거나, “이방인은 타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절대적이고 야생적이고 야만적인, 전(前)문화적이고 전(前)법적인 외부에 내밀어 버리는 극도의 타자, 가족과 공동체와 도시와 국민 또는 국가의 저쪽 외부로 추방해 버린 극도의 타자가 아니다. 이방인에 대한 관계는 권리에 의해, 정의의 권리의 생성에 의해 규제된다”(99~100면)라며 무조건적 환대의 윤리와 조금 다른 주장을 펼치는 구절도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타인의 이름을 불러야만 관용, 이 ‘이율배반’을 어찌할 것인가? 

   이 딜레마는 끊임없이, 한편으로 권리나 의무나 정치까지도 초월하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다른 한편 권리와 의무에 의해 테두리가 정해지는 환대 사이에서 우리를 번민하게 할 것이다. 한쪽 환대는 언제나 다른 한쪽을 타락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타락 가능성은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질문 삼가(“오시오, 들어오시오, 우리 집에서 머무시오, 당신 이름을 묻지 않겠소, 책임 있게 행동하라고도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겠소”)는 유보 없이 증여를 제공하는 절대적 환대에 훨씬 합당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게다가 어떤 이들은 거기서 언어의 가능성을 가려낼 수도 있을 터이다. 침묵하기(le se-taire)는 이미 발언 가능한 말의 양태가 아니던가. 우리는 언어의 개념에 있어서도, 또한 환대의 개념에 있어서도 이러한 두 가지 의미 확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할 것이다.(141~142면)

   영원한 번민, 발언하기와 침묵하기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투쟁, 이것이 데리다의 결론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이 공허하다는 비판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는 결국 필연적으로 환대의 법들, 권리들, 제약들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떤 권리나 법에 의해 매개된 환대는 더 이상 무조건적 환대가 아니다.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바디우가 말한 ‘진리에 대한 충실성’은 데리다가 말한 ‘환대의 윤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방인이 항상 낯설게 내 집에 도래하는 것처럼, 진리는 항상 그처럼 낯설게 의견들 속으로 도래한다.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 알랭 바디우의 윤리라면,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 또한 윤리이다. ‘진리의 윤리학’(바디우)과 ‘환대의 윤리학’(데리다)는 이렇게 만난다. 
    

   환대를 위한 너머 
   데리다의 사상이 미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6년부터 르네 지라르의 초청으로 존스 홉킨스 대학의 학술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했고 1975년부터는 예일대학에서 일년에 몇주씩 강의하면서부터다. 그는 예일의 폴 드만, 해롤드 블룸 등의 문학비평가들과 교류하면서 ‘예일학파’라고 불리는 해체주의 문학운동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당시 주요 저서 『글쓰기와 차이』(1967), 『그라마톨로지』(1967), 『입장들』(1972) 등을 냈다. 1980년 파리 10대학 철학과 폴 리쾨르의 후임 교수를 선발할 당시에는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쉰살의 나이에 데리다는 뒤늦게 소르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지만, 리쾨르 후임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이즈음부터,  데리다는 프랑스내 알제리 이주민의 권익을 위해 싸웠고 인종차별주의및 동성애자 차별 철폐에 적극 나선다.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구명운동과 반인종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팔레스타인 지식인들과 교제를 나눈다. 1981년엔 프라하에서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비밀회합을 갖다가 체포돼 미테랑 대통령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편 끝에 추방되기도 했다.  그후 데리다는 1983년 리오타르와 함께 ‘국제철학학교’를 창설,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1990년에는 뉴욕대학교 법대에서 정의(Justice)를 주제로 강의하면서 법이론과 윤리학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다. 도발적이고 난해한 그의 이론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허무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일각에서 제기됐고 프랑스의 정통 학계에서도 때론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환대론은 파시즘적 국가행태를 해체하는『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에서 확대된다. 서구의 존재-신학적 동일성 철학의 '해체'에 전념했던 데리다는 ‘역사의 종말’, ‘자본주의의 완전 승리 세계화’ 담론이 극성을 부리던 1990년대부터 『마르크스의 유령』(1993)을 출간한다, 이어  『환대에 대하여』(1997)에 이어 『불량배들』(2003)을 내고 현실정치를 해체한다.
     데리다의 '불량국가' 담론은 미국이 일방적 외교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 북한 등을 '불량국가'로 규정한 이래, 노엄 촘스키와 윌리엄 블룸을 비롯한 지식인들과 함께 미국의 초법적 국제 테러행위를 비판하면서 불러일으킨 담론이다.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서구적 '자유' 이념에 기반을 둔 '자기결정권'에 따라 힘을 행사하는 것을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힘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에게 '불량배'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고 처벌할 수 있으며,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폭력(테러리즘)'과 '전쟁'은 그러한 논리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그렇다고 말하는 모든 국가가 불량국가'라면, '테러리스트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미국도 마찬가지로 불량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UN회원국이 주권으로 정한 국제규범을 무시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예외적 주권'을 가졌다면, 테러리스트들도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예외적 주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강자의 이성은 사실상 '정의'가 아니라 '법'이며, '법의 힘'에 의해 통치되는 현존 민주주의 국가는 모두 '불량국가'에 불과하게 된다. 데리다는 '최강자의 이성'이 '법'이 되고 '정의'가 되는 '현존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다가올 민주주의(democratie a venir)'를 역설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 이상의 진전은 보이지 않는다.
   

   글을 맺으며 다시 축구를 좋아했던 데리다가 남긴 명언을 써본다. 

   “터치라인 너머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Beyond the touchline there is nothing)”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조건적 은혜(≒조건적 환대), 무조건적 은혜(≒절대적 환대) 사이, 그 틈, 그 짬에서,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한 팀이 무한한 드리볼과 패스와 태클과 슛을 하며,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한다고 자크 데리다는 말하고 까마득한 하늘 그라운드로 떠났다. 

 

.............. 이 글은 계간 『미래와 희망』(2010년 가을호) 발표글입니다.

김응교(http://twitter.com/sinenmul) 


許弛 2010.08.06. 10:31 pm 

놀라워라, 응교형의 내공! 그나저나 데리다는 늘 내 양가감정을 자극한다는....

시냇물 2010.08.08. 6:54 pm 

지난주부터 막내를 유소년 축구팀에 입단시키고, 무릎과 인대가 부서져 2년 동안 재활한 저도 막내 옆에서 조금씩 볼을 차고 있습니다. 아직 볼 트리핑은커녕 드리볼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짧은 패스만 연습하고 있습니다. 축구할 때마다 축구를 사랑했던 많은 사상가와 김명인 선배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다리 이제는 온전하신지요. 일본에 오셨을 때 잘 모시지 못했던 제 처지가 늘 죄송합니다. 건강하시고요~

김영 2010.08.07. 10:32 am 

김응교 선생의 부지런함을 누가 따라갈 수 있으리오. 홈피 준비하랴 발표 기획하랴 글 올리랴 동분서주 바쁘신데, 그래도 늘 건강에도 유념하시기를!

시냇물 2010.08.08. 6:57 pm 

늘 게으른 후학이 인사 올립니다..... 지난주 혼인식 축복이 넘쳤고 평화롭고 기품있어 부러웠습니다. 요즘 개신교 혼인식이 너무 산만한 경우가 많아 실망했었는데, 천주교의 오래된 형식은 형식 자체에서 오는 간결한 숭고미가 있었습니다. 가벼운 세련미보다 필요한 과거로 정리된 정치한 형식의 숭고미가 웅숭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복에 복이 더하는 가족과 함께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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