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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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문숲길.7] 역사란 무엇인가, 영화<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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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숲길.7]


역사란 무엇인가, 영화 <변호인> 

 


김응교(시인, 문학평론가)




“괜히 봤어. 안 볼 껄. 에이, 이건 병이야. 가만 있다가 틈만 나면, 나즈막히 아무에게나 <변호인> 보라고 권하는 증세가 생겼어. 그냥 놀고 싶은데 놀다가도 쇼파에 늘어져 있는 내가 불현듯 비겁하고 부끄럽다니까. 변호인이 되어달라고 중음신(中陰身)들이  자꾸 속삭인다니까.”

영화<변호인>을 보고나서 며칠 뒤 트위터에 올렸던 글이다. 저 글 올리고 거의 세 주가 지났다. 영화가 끝날 때 나 역시 눈물이 나왔다. 무언가 쓰고 싶었지만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올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단 한 명이라도 더 보게 만들려면 이 열기가 식어갈 때 글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밤,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멀어지는 지금이 써야 할 때 같아 몇 자 남긴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해야할 숙제는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첫째, 이 영화에 나오는 책에 대해 쓰자는 숙제다. 둘째, 평생 여당을 투표하신 장인 어른을 모시고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오늘 첫 번째 과제를 메모한다. 

 
1. 금서

<변호인>을 보고 숙명여자대학교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깜짝 놀랐을 부분이 있다. 부림사건의 희생자들이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장면 말이다. 숙명여대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할 교양교재 첫 인용문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1장이 요약문으로 실려 있다. 30년전이라면 이 책을 읽은 숙대생들은 모두 빨갱이였을 것이란 말이다. 숙대에 입학하자마자 첫달에 배우는 이 책이 과거에 금서(禁書)였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이해가 될까. 

숙대에 와서 교양교재를 받아들고 한 학기 동안 『역사란 무엇인가』1장부터 6장까지 모두 강독한 적이 있다. 중요한 부분은 영문과 대조하며 강독했다. 나는 한 권의 책이 어떻께 쓰여지는가를 책 한 권을 강독하며 보여주고 체험케 하고 싶었다. 사과를 씹어봐야 단맛 신맛을 알듯이, 한 권의 건축물을 모두 걸어보는 체험을 하게 했다. 학생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에 지금은 1장만 강의하고 있다.

 E.H.카아 『역사란 무엇인가』을 쉽게 봤다가는 낭패다. 일본에서도 대학생들에게 필수로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한 학기 내내 원서와 대조해가며, 랑케니 크로체니 나오는 인물들 한 명 한 명 확인해가며 읽어야 할 책이지,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니다. 학생이나 일반인들이 읽기 쉽도록 강의록을 최대한 쉬운 말투로 써서 설명했었다. 

실은 영화에서 불온서적에 대한 장면이 나왔을 때, 변기물에 회오리 도는 더러운  배설물처럼 괴롭게 20여년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20대에 처음 수배 되었을 때가  『역사란 무엇인가』 『루카치 선집』등의 책 때문이었다. 요맘께 시린 겨울에 몇 주간 맨발로 쓰레빠만 신고 사설도서실에 숨어 있다가, 걱정 말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용산경찰서에 들어갔었다. 조사실 창문 너머에서 시골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가 돈이 들었을 흰 봉투를 형사들에게 돌리는 장면을 보았다. 불구속으로 나와서 아버지가 용산역 앞에서  추어탕을 사주시는데, 고개 숙이고 얼마나 울었을까. 아버지는 아무말도 안 하셨다. 

와세다대학 선생이 되고나서 중앙도서실에 한국에 금서라고 하는 책들이 아무렇게 꽂혀 있는 서고를 보고, 지하서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입 틀어막고 꺼이꺼이 울었던, 그 너절했던 순간을 이 영화가 온통 되살려 놓았다. 학문의 발전은 자료 싸움이기도 하다.  이미 일본 학계는 우리가 못 읽는 자료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마어마한 자료 싸움에서 이미 일본 학계에 한국 학계는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독재정권이 얼마나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을 목 죄이는 해괴망측한 괴물인가를 증명하는 상징이다. 비루하게 요즘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아리랑>을 국방부에서 금지곡으로 규정한 '어처구니 없는 반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인륜을 배반한 파시즘, 혹은 민주주의인 척 하는 독재는 고전을 금서로 평가한다.  



2. 역사란 무엇인가

이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사람들은 대부분 한 인물을 연상하며 본다. 이 글에 '그'의 이름 석자를 쓰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이 영화의 실제인물은  '그'를 회감(回感)한다. 잘 나가는 세법변호사가 이익을 버리고 인권변호사로 변하는 내용은 영화<간디>를 연상케 한다.
 
둘째 희생을 주제로 하는 희생의 영화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그저 영웅영화로 볼 것이다. '그'를 모르더라도 <레 미제라블>처럼 한국적인 희생의 서사로 이 영화는 세계인의 감성을 울릴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갖고 있다.  

셋째 민주주의를 담은 한국 현대사 영화다. 지금도 고전으로 평가되는 책들이 왜 당시 금서에 올랐던가 관련서적 이름들도 나온다. '그'를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한국 현대사를 알 수 있는 이 영화는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추천할만 하다. 

넷째, 국가보안법이 나오는 한국적 법정 영화로도 본다. 법대생이나 그 길을 지망하는 사람은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다섯째, 이 영화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이면에 깔린 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테제다. 관객에게 역사가 이래도 좋은가를 귀찮을 정도로 끈질기게 묻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숨겨진 아젠다가 그대로 표출되는 부분은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쟁하는 법정 씬이다. 
 
검찰이 1981년 부림사건 피고인들이 『역사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불온서적들을 탐독했다고 하자, 변호사 송우석은 말한다.

“본 변호인은 『역사란 무엇인가』를 포함해서 피고인들이 읽었다는 불온서적 십여 권을 오늘 아침 서점에서 사가지고 왔습니다. 시중에서 아무나 살 수 있는 이 책들은 서울대에서 권장도서로 추천도 했습니다. 이 책들이 불온서적이면 대한민국 최고 대학이라 카는 데도 불온단체라 이 얘깁니까?” 

이어서 압권은 영국 외교부를 통해 받았다는 공식입장이다.
“영국 외교부는 E. H. 카아를 영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자 영국이 자랑스러워하는 학자로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도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 보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도 역사학과는 물론 필수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교양고전이다. 그런데 당시 검찰은 이 책을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빨갱이들의 사상서로 조작했다. 이 세계적인 고전을 수업에서 가르칠 때 나는  1장 <역사가와 사실>과 5장 <진보로서의 역사>에 대해 반드시 강조한다. 1장의 핵심은 아래 부분이다.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으며,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고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의 최초의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상호작용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The historian without his facts is rootless and futile; the facts without their historian are dead and meaningless. My first answer therefore to the question, What is history? , is that it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과거의 사실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또한 현재의 해석도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교학사의 왜곡 역사교과서 사태를 겪으며,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해석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를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언설은 역사적 사실을 판단할 때 냉엄한 대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책은 어떤 한 부분 빼놓을 수 없는 명문이다. 특히 5장<진보로서의 역사>의 핵심은 아래 부분이다.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잠재 능력이 진보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것이다.” (Belif in progress means belief not in any automatic or inevitable process, but in the progressive development of human potentialites.) 

진보(progress)한다는 것은 진보당이나 노동당이나 민주당 당원이어야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에 속하면 진보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카아는 보다 근본적인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의 잠재능력이 진보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진보적 발전( progressive development )이 진보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역사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안에 있는 냉소주의다. 독재자에게 가장 손쉬운 통치술은 냉소주의를 대중에 주입하는 것이다.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마약을 먹이는 것이다. 오늘도 무의미하다고 허무에 빠뜨리는 것이다. 지난주 나갔던 촛불광장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나가서 뭐하야고 자꾸 세뇌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카아 선생이 말하는 진보란 인간의 궁극적 잠재 능력이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것을 믿는 신념이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는 “쫄지 마!”다. 진보에는 패배가 없다.  “애썼지만 실패했어. 쫄지 마. 또 해. 다시 실패하자고. 더 잘 깨지자고.”(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이런 자세가 진보주의자다. 쫄지 마!


3. 변호인

영화<변호인>을 보면 내부고발자인 장교를 탈영병으로 모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 국방부 사이버 댓글달기를 거부했던 심리전단 과장이 오히려 상관모욕죄로 걸려 있다.  과거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곧 지금의 현실이라는 말이다.  http://is.gd/oUyLDq

영화에서 피의자들이 변호인을 접견하지 못하고 몇 달 간 고문 받아 조작된 고백을 하는 과정이 나타난다. 그것이 과거 이야기일까. 새누리당에 김진태라는 어처구니 없는 인물이 국가전란 사범에게 변호인 접견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반인륜적 법안을 상정한다고 한다. 아마 이 정권에 반대하면 그에겐 모두 반국가사범일 것이다. 영화<변호인>이 현재성을 갖는 이유는 이런 인물들이 아직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http://is.gd/kEQRhB  

영화 후반부 최후변론에서 변호인은 “국가란 무엇입니까?”를 묻는다.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인공은 절규한다. 혼란의 소용돌이를 살아 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똑같은 절규를 외치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소수자는 다수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한 무력하다. 그렇게 되면 소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소수자가 그 온 힘을 다하여 버티면 그것을 당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국민이 맹목적인 충성을 거부하고 공무원이 사직할 때, 혁명은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른다. 양심이 상처를 받을 때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가?“ㅡ쏘로우『시민불복종』

이 영화를 보면서 다가올 올해 봄이 무섭게 느껴졌다. 부정선거로 세워진 정부의 눈에 영화<변호인>의 비극은 맹점(盲點)으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거짓과 비극을 반복하는 부정한 정부에 시민이 당연히 할 일은 저항이다. 쏘로우의『시민불복종』이 이 심야에 무섭게 메아리친다. 

칠흑어둠에서 만난 가냘픈 빛 때문에 빛의 중요성과 어둠의 답담함을 깨닫는다. 
거짓조작과 통제의 시스템 속에서 질식하다가 만난 영화<변호인>으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새삼 깨닫고, 이 사회가 지독한 파놉티콘 조작사회라는 것을 깊이 각인한다.

"이라믄 안 되는 거잖아요"라는 퉁명한 말이 내 걸음을 자꾸 멈추게 한다.
내일이 가장 추운 날이고, 다음날부터 봄이 다가온다고 한다. 


【우연히 만나는 고전들. 시즌2】
소포클레스  비극 3부작, 아비의 죄 http://is.gd/6kHTiy
E.H.카아 『역사란 무엇인가』, 영화<변호인> http://is.gd/sXdSAx 
E.H.카아 『역사란 무엇인가』 http://j.mp/18moGHC

(>>>【우연히 만나는 고전들. 시즌1】http://is.gd/egVpt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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