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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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부다페스트(Budapest) 2

joyman 쪽지





1956년 헝가리 혁명과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헝가리의 절망감과 복잡한 민족문제는 그 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편에 서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부다페스트는 2차 세계대전의 격전장이 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같이 소련의 지배 하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운이 없을까? ‘머피의 법칙’처럼 하는 것마다 일이 꼬여 계속 잘못된 선택을 했고 결국 몰락의 길을 자초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저항의 정신과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 마자르 족이 그냥 소련의 지배에 묵묵히 순응하지는 않았다. 1956년 제 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시발로 헝가리 국민들은 독자적인 국가정책 수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소련은 17개 사단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0월 23일 시위가 시작되어 11월 4일에 소련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는데 사망자만도 2,500명에 이르고 부상자는 13,000명에 달할 정도로 격렬했다. 이 헝가리 혁명을 통해 민중들의 요구를 수용한 사람이 수상 임레 나지(Imre Nagy,1896~1958)였다. 그는 헝가리의 독자노선을 추진해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고 헝가리를 중립국화 하는 등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했지만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2년 뒤 비참한 죽음을 맡게 되는 비운의 정치가다. 하지만 현재 헝가리 국민들의 염원을 담은 그의 동상은 국회의사당 뒤 코슈트 러요시 광장에서 자유 광장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물끄러미 사람들을 쳐다보는 개혁적인 정치가의 허망한 모습은 보는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소련제 탱크 앞에 좌절된 민주주의의 꿈을 보는 듯하다. 1989년 헝가리 공화국이 수립되고 처형이 위법이라고 판결됨에 따라 임레 나지는 명예를 회복하고 국민의 영웅으로 부활했다.

이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을 소재로 쓴 시가 저 유명한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다. 이 시는 이렇게 비장하게 시작된다.

 

다늅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數發의 쏘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처음 부다페스트에 가면서 1961년 『사상계』에 실린 그 시를 복사해 갔다. 그래서 헝가리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어주고 한국이 얼마나 헝가리에 관심을 가졌는가를 얘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의 소재가 됐던 당시 부다페스트에서 죽은 소녀의 사진을 찾으려고 애썼다. ‘1956년’은 헝가리사람들에게 특별한 해여서 기록 사진이 많았지만 결국 총탄을 맞아 죽은 소녀의 사진은 찾지 못했다. 2500명 정도가 사망했으니 그 속에 어린 소녀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이 시를 자세히 보니 김춘수는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을 한국의 상황과 일치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세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까,/ 죽어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열세살 난 한국의 소녀는/ 잡히는 것 아무것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갔을까”라고 한강에서 죽어간 소녀를 애도하고 있다.

한강의 소녀는 도대체 누구이며, 왜 죽어갔을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4.19에서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급박한 형국이었고 그 과정에서 이 소녀는 희생된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부다페스트에서 죽은 소녀와 한강에서 죽은 소녀를 일치시켰던 것이다. 김춘수는 반공이 아니라 탄압에 항거하는 저항의 의미로 부다페스트에서 죽은 소녀의 죽음을 얘기한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고 말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얘기하면서 우리의 자유에 대한 저항을 말했던 것인데 교과서에서는 ‘한강 소녀’ 부분이 빠지고 부다페스트에서 죽은 소녀만 부각되어 ‘반공시’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일종의 교과서 왜곡인 셈이다.

 

부다페스트의 상처와 영광, 왕궁의 언덕

 

부다페스트는 다뉴브 강을 끼고 동쪽으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전반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 페스트 지역을 보면 앞이 툭 터진 평야를 볼 수 있다. 여기에 도시가 형성된 것은 몽고의 침입으로 첫 도읍이었던 에스테르곰이 공격을 받아 황폐해진 뒤다. 1241년 벨라 4세가 도읍을 이곳으로 옮기고 부다 왕궁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에서 부다 왕궁처럼 수난을 많이 당한 건물도 없다. 잦은 전쟁으로 왕궁은 늘 수난을 당해 부서지곤 했다. 파괴와 재건이 반복된 왕궁이야말로 상처와 영광을 간직한 헝가리의 역사 그 자체다.

부다의 황금시기는 15세기 후반 마차시(Mátyás,1440~1490)왕 시절이다. 헝가리에 르네상스를 꽃피우고 부다 왕궁을 르네상스식으로 재건하여 유럽에서도 최고의 건물로 손꼽힐 정도였다. 지금 부다 왕궁의 모습이 그때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마차시 왕의 강인한 모습은 헝가리 1,000포린트 지폐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왕궁 안에 있는 미술관에는 그의 두상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 왕궁의 모습은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과 2차 대전이 끝난 1950년대에 재건된 것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위주로 하여 고딕에 바로크식까지 가미되었다. 왕궁에 들어서면 마자르족을 이끌고 이곳에 왔던 건국의 영웅 아르파드를 낳았다는 독수리를 닮은 투룰상이 ‘왕의 칼’을 발에 쥐고 다뉴브를 향해 날아오를 듯 버티고 서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르파드의 어머니가 투룰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르파드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새는 왕가의 상징으로 왕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뉴브 강 쪽 왕궁의 앞뜰에 말을 탄 청동상이 있는데 바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자였던 유진 왕자로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1세를 섬겼던 인물이다. 이 청동 기마상은 1697년 그가 지휘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군이 오스만트루크에게 젠타에서 대승한 것을 기념하여 1900년에 세워진 것이다.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이니 두 나라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는 의미에서 이 청동상이 제작되었을 것이다.

왕궁에는 현재 헝가리 국립미술관,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 국립 세체니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어 옛 영광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왕궁의 언덕’이라는 바르 헤지 위에 우뚝 솟은 왕궁의 모습은 그 자체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특히 해질 무렵이나 야간에 유장한 다뉴브를 배경으로 우뚝 선 왕궁의 모습은 웅장하고도 의연하다. 사자상이 조각된 세체니 다리와 부다 왕궁은 바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다페스트의 상징이다. 특히 저녁이나 야간의 모습이 더욱 그렇다. 만약 한 장의 사진으로 부다페스트를 설명한다면 야경으로 보는 세체니 다리와 부다 왕궁일 것이다. 밑으로는 다뉴브 강이 흐르고 사슬처럼 조명이 점점이 박힌 세체니 다리와 저 멀리 우뚝 솟은 부다 왕궁이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장면이야말로 바로 부다페스트의 확고한 상징이자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처음 비엔나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헝가리로 들어오는데 부다페스트 상공에 이르자 저 아래로 사슬처럼 조명이 밝힌 세체니 다리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다뉴브 강위에 점점이 박힌 세체니 다리의 조명! 정말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그 다리의 조명을 보고 비로소 부다페스트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왕궁에서 마을이 있는 부다 지역으로 가다 보면 18,9세기의 고전주의 혹은 바로크 풍의 집들이 즐비한 동네가 나오는데 우리(Úri)거리이다. 그곳 중심에 흰색으로 단아하게 지어진 옛 부다 시청 건물이 있으며 주변으로 온통 당시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18,9세기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언젠가 이곳에 갔다가 200년 된 빵집에 들어가 우리의 들깨를 넣은 것 같은 헝가리 전통 빵을 샀던 기억이 있다. 그 맛도 맛이지만 집과 동네의 분위기가 그 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아서 감회에 젖은 적이 있다. 그 거리에서 광장으로 나오면 그 중앙에 삼위일체 탑이 있다. 이곳은 중세에 시장이 있었던 곳인데 이 탑은 1691년 페스트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18세기 초에 시위원회가 세웠다고 한다. 꼭대기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삼위일체 탑의 앞에 고딕 양식으로 우뚝 솟은 건물이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유서 깊은 마차시 성당이다. 고딕 양식의 외관과 졸너이 타일로 장식된 마자르 양식의 지붕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원래 이 성당은 부다페스트로 도읍을 옮긴 벨라 4세에 의해 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파괴되어 14세기에 현재의 모습처럼 고딕식으로 재건되었다. 본래 이름은 ‘성모 마리아 교회’인데 마차시 왕에 의해 80m에 이르는 고딕식 마차시 탑이 세워지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마차시 왕가의 문장과 왕의 머리카락이 보관되어 있기에 마차시 탑으로 불려진 것이다. 오스만 트루크 시대에는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었지만 그 뒤 이중제국 시절 예전의 건축자재를 다시 사용해 지금의 고딕식 건물로 재건축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마차시 성당은 헝가리의 자존심이다. 여기서 수많은 왕들의 대관식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마차시 왕의 결혼식이 거행된 곳도 여기이며, 합스부르크 이중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요제프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 영광의 날 리스트는 <헝가리 대관 미사곡>을 작곡해 직접 지휘를 하기도 했다. 이민족의 침략에 저항하여 민족혼의 불을 당겼던 곳도 바로 이 마차시 성당이다. 그래서 특이하게 지금도 주일의 대미사를 마친 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헝가리의 <애국가>를 합창한다.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애국가>를 부른다니! 이 얼마나 희한한 광경인가! 하지만 부다페스트에선 그것이 자연스럽다.)

마차시 성당을 나오면 그 주변에 네오고딕 양식의 뾰족 지붕을 가진 ‘어부의 요새’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몽고 쪽의 라마탑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고깔모자를 형상화한 것 같기도 한 7개의 성채는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는 건축물로 기획되어 1902년에 마차시 성당을 재건축한 슐레이크에 의해 완공되었다. 7개의 성채는 마자르 7부족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애초 18세기에 성벽이 있었던 곳을 활용하여 새로 덧붙여 지은 것으로 건물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다뉴브 강의 풍광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어부의 요새로 불리게 된 것은 이 성 아래에 어부들이 살았고 그들이 이 성채의 방어를 맡았기 때문이다. 원래 어부의 요새는 마차시 성당을 보조하는 기념물로 건축되었지만 지금은 시원한 다뉴브의 풍광과 잘 어우러져 성당보다 더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다.

 

마자르 인의 자존심

 

부다페스트는 수많은 전화를 겪으면서 도시가 파괴되었고 그 도시를 다시 재건하는 사업이 건국 1,000년이 되는 1896년에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파리가 19세기 오스만 양식에 의해 정비되듯 당시 부다페스트도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대부분 재건축되고 정비되었다. 그래서 부다페스트의 도시적 이미지는 우아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준다.

자, 우선 어부의 요새에서 내려와 다뉴브 강을 건너 페스트 지역으로 가보자. 왕궁과 페스트 지역을 잇는 그 유명한 다리가 바로 세체니 다리다. 모두가 인정하는 부다페스트의 진정한 랜드 마크다. ‘가장 위대한 헝가리 인’이라는 세체니(Széchenyi István,1791~1860)백작에 의해 건설된 다리여서 그렇게 부른다. 그는 헝가리의 개혁가로 아버지와 함께 사재를 털어 다리의 건설과 과학아카데미 설립 등 1830년대의 개혁을 주도했지만 합스부르크와 타협함으로써 급진파와 갈등을 일으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헝가리의 5,000 포린트 지폐에는 이러한 공로를 기려 그의 초상을 새겨 넣었으며 다리 건너 헝가리 학술원 앞에는 그의 동상이 자신이 세웠던 다리와 다뉴브 강을 바라보고 있다.

네 귀퉁이에 네 마리 사자가 앉아있는 이 유명한 다리는 파리의 에펠탑처럼 부다페스트의 상징으로 확고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영화 <글루미 선데이>에 등장하여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탔다. 우리도 저녁을 먹고 늘 다뉴브 강변을 걸어 세체니 다리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저녁에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 이 다리 주변이어서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거리의 악사가 있어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나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했다. 음악이 어떤 장소와 만나면 그 감동이 증폭되는데 다뉴브 강의 다리 위에서 연주되는 그 곡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어두운 밤, 잔잔히 흐르는 다뉴브 위에서 들리는 그 구슬픈 가락은 정지된 풍경처럼 우리의 뇌리에 남아있다.

다리 건너 다뉴브 강변에서 가장 눈에 띄게 화려한 건물은 고딕과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국회의사당이다. 인구 천만 명밖에 안 되는 조그만(?) 동유럽의 국가에서 이렇게 거창하게 국회의사당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한참 잘 나갈 무렵인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당시 건국 천 년을 맞아 뭔가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어 마자르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고 그래서 공모한 결과 당선된 작품이 부다페스트 기술대의 교수 임레 쉬테인들의 작품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면서 비엔나의 국회의사당을 그리스 신전 모양으로 지었던 것처럼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은 입헌군주제의 발상지인 런던의 그것을 모방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런던의 국회의사당과 유사하다. 네오고딕 양식을 위주로 바로크와 르네상스 양식을 혼합하여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의 길이는 268m, 최대 넓이는 123m이며 르네상스 양식의 둥근 돔의 높이는 96m로 건국 원년인 896년과 일치한다. 외관도 화려하지만 내부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이중제국을 이루었던 비엔나의 국회의사당을 능가하기 위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내부를 장식했다 한다.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지어진 건물이니만큼 모든 자재와 기술을 헝가리 자체의 능력으로 충당했다. 기술이 부족하면 외국의 기술진에게 그 기술을 배워 현장에 적용했다고 할 정도로 민족자존의 원칙을 지켰다. 그래서 지붕에 헝가리 왕과 지도자들의 동상이 서 있으며 내부의 중앙에도 16명의 헝가리 지도자 동상이 원주 위에 서있다. 이 국회의사당이야말로 이중제국의 성립과 건국 천 년을 맞아 세계사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는 마자르 민족의 자존심과 기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것이리라. 이 웅장한 국회의사당을 보고 있으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헝가리의 영광이 느껴진다.

그 국회의사당 주변으로 네 명의 지도자 동상이 있는데 그들이 내세웠던 민족적 자존심을 세웠던 인물들이다. 시대별로 보면 남쪽에 위치한 동상이 라코치 페렌츠(Rákóczi Ferenc,1676~1735)로 1703년 트란실바니아에서 농민과 합세하여 합스부르크에 대항했지만 실패하여 망명에 올랐던 인물이며, 북쪽에 위치한 동상은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1802~1894)로 1848년 합스부르크와의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인물로 이 광장의 이름을 남긴 장본인이다. 같은 북쪽에 카로이 미하이(Károlyi Mihály,1875~1975) 동상이 있는데 1차 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된 헝가리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으나 다음 해 망명을 했던 인물이며, 자유 광장 쪽으로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이끌었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어 처형됐던 총리 임레 나지의 동상이 있다. 이렇게 보면 그들 모두는 마자르 민족의 자존심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헝가리 역사가 그렇듯이 비운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역사투쟁’이라고 했던가? 비록 현실에서는 힘이 약하여 졌지만 그들의 좌절과 패배는 민족의 자존심을 세운 자랑스러운 자취로 남아 마자르 인의 가슴 속에 살아있을 것이리라.

 

천 년 뒤에 부활한, 영광의 기념물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건물들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 건국 천 년을 기념하여 재건축 되거나 새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부다 왕궁과 마차시 성당이 그렇게 재건됐으며 자존심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이 또한 건국 천 년을 맞아 새로 지어졌다. 여기에 또 기념비적 건물이 페스트 지역의 중심에 우람하게 서 있는 이스트반 대성당이다. 페스트 지역의 랜드 마크라고 부를 만한 이 성당은 헝가리 건국 천 년을 기념하여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로 헝가리에서는 가장 큰 성당인 셈이다. 역시 마자르 민족의 자존심을 살린 요제프 힐드와 미클로시 이블의 작품이다. 1848년 기공식을 가졌지만 독립전쟁으로 인하여 건설이 중단되었다가 1851년 다시 재개되어 1905년에 마무리 되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체의 모양은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중앙에 돔이 있어 그 높이가 국회의사당과 같은 96m로 헝가리 건국의 896년과 일치하며 정치와 종교가 하나일 수 없다는 제정일치의 이념을 보여준다. 사실 국회의사당과 이 성당은 부다페스트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로 96m의 높이를 건국의 해와 일치시켜 천 년 뒤에 그 영광을 정치와 종교로 각각 재현한 셈이다.

내부도 웅장하고 화려한데 이스트반 왕이 성모 마리아에게 헝가리 왕관을 바치는 모습이 오른 쪽 벽에 그려져 있다. 자신의 외아들 임레를 잃고 자신이 죽은 후 이 나라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혹은 이 나라가 가톨릭을 신봉함으로써 당당하게 유럽의 일원이 됐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기도 하다. 화려한 돔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카로이 로츠의 작품이다. 제단 뒤의 이스트반 예배당에는 이스트반의 오른 손 뼈가 보관되어 있어 동전을 넣으면 그 손이 ‘성스러워지는 오른 손’으로 바뀌어 기도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성당에서는 주말에 늘 음악회가 있어 주로 <아베 마리아> 공연을 하는데 음악적 수준은 별로지만 이 장엄한 성당에서 음악을 듣는 분위기가 기막히다. 신자가 아닌 경우에는 성당을 들어가 미사를 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음악회는 편하게 참가할 수 있어 좋다. 우리도 따뜻한 봄날 이곳에서 하는 아베마리아 저녁 공연을 보았는데 음악적 수준보다도 그 분위기가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스트반 대성당에서 영웅 광장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이 안드라시 거리다. 부다페스트에서 명소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거리로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곳이다. 이 유서 깊은 거리는 이중제국이 수립되고 당시의 총리였던 안드라시가 1868년에 오스만에 의해 정비된 파리를 보고나서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집을 헐어내고 좁은 골목을 정비하여 직선의 대로를 만들고 집들도 5층짜리 큰 저택을 지어 거리를 정비한 것이다. 집들은 대부분 네오 클래식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기품이 있으면서도 육중한 느낌을 준다. 부다페스트의 거리와 건물 표정을 전형화 시킨 것이 바로 이 거리다. 안드라시 거리는 파리의 중심대로나 오스트리아의 링 스트라세처럼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거리인 셈이다.

이 거리에 있는 가장 유명한 건물이 국립 오페라 극장이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한 건물로 내부 또한 화려하기 짝이 없다. 말발굽 모양의 박스는 황금색으로 빛나며 좌석과 바닥은 온통 붉은 벨벳으로 싸여져 황금색과 조화를 이룬다. 파리나 비엔나의 오페라 극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우리도 이 극장과 얽힌 사연이 있다. 아들이 성탄절 무렵 우리가 있는 이곳에 오기로 했고 그때를 기념하여 이 유서 깊은 극장에서 오페라를 한편 볼 생각으로 예약을 하려고 했다. 해서 한 달 전에 사이트에 들어가 성탄절에 주로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의 표를 사려고 했더니 이미 다 팔린 것이 아닌가. 티켓을 살 수 있는 사이트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공연은 몇 달 전에 이미 매진된다고 한다. 소득과 관계없이 음악을 애호하는 헝가리 인들의 삶의 여유가 부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곳이 위대한 음악가 리스트의 고향이 아니던가.

길을 건너 조금만 위쪽으로 올라가면 리스트 음악원과 기념관이 있다. 그리 요란하게 꾸미지는 않았지만 리스트의 유품들을 잘 정리하여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와볼 만하다.

안드라시 거리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조성된 영웅 광장이 나온다. 천 년 뒤에 부활한 영광이 마무리 되는 지점이다. 그 영광의 길은 부다 왕궁과 마차시 성당에서 시작해서 세체니 다리를 지나 국회의사당을 돌고 이스트반 대성당을 거쳐 여기 영웅 광장에 이르러 멈춰진다. 중앙의 기둥에 대천사 가브리엘 상이 우둑 솟아있고 주변에 마자르족의 지도자 아르파드와 그를 따르던 7명 족장의 기마상이 있다. 가브리엘 천사장의 인도로 이곳에 마자르 족이 정착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그 뒤로 헝가리를 빛낸 14명 영웅들의 입상이 반원형의 열주 사이로 자리 잡고 있다. 맨 처음을 장식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스트반 왕이고 그 옆으로 벨라 4세, 마차시 왕 등이 보이며, 오른 쪽 열주 사이에는 독립의 영웅인 코슈트 러요시도 보인다. 입상의 하단에는 헝가리 역사를 14장의 그림으로 표현한 부조가 있는데 맨 처음에는 이스트반 왕이 교황에게 왕관을 받는 장면이 새겨져 있고 맨 마지막에는 이중제국의 요제프 황제가 대관식을 치르는 장면이 새겨져 있어 영광의 순간들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했다.

가브리엘 상 앞에는 무명용사를 기리는 제단이 있어 바닥의 동판에 “마자르 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그들 자신을 희생한 영웅들을 기억하며”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어느 면에서 위대한 왕이나 영웅들보다 이들이 진정한 영웅이고 이 광장의 주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상보다도 앞 쪽에 이들을 위한 기념제단을 만들었던 것이리라.

영웅 광장 뒤로 넓은 시민공원이 펼쳐져 있는데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성채가 있다. 일명 ‘드라큐라 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바이다 후너드 성으로 마차시 왕의 아버지인 야노시 훈야디가 트란실바니아에 가지고 있던 성을 복제한 것이다. 건국 1,000년을 맞아 헝가리 여러 지역의 건물들을 한 곳에 모으기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성 주변에 인공호수가 있고 그 안에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교회, 농업박물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언젠가 한국에서 원빈이 나오는 ‘악마의 유혹’이라는 커피 광고를 이곳에서 찍어 한국 사람들에게는 사진을 찍는 명소가 됐다.

이 영광의 길을 따라 유럽대륙(영국을 제외하고)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지하철 1호선이 달린다. 건국 1,000년을 맞아 1896년에 건설됐으니 1863년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셈이다. 그래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동판이 1호선이 시작되는 뵈뢰슈머르티 역에 붙어 있다. 바치 거리가 시작되는 뵈뢰슈머르티 광장에서 시작되는 이 지하철은 시민공원까지 이어지는데 갱도가 지면에 붙어있을 정도로 낮고 속도가 느려 놀이동산의 관광열차를 타는 기분이다. 우리가 바로 이 근처에 살아 늘 이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조그맣고 낡은 차량은 달릴 때마다 덜컹거리며 삐걱대고 하여 기계로 이루어진 지하철이 아닌 마차같이 정겨운 느낌이 들곤 했다. 그 1호선 지하철 역시 천 년의 영광을 재현하는 상징인 것이다.

 

온천 위에 세워진 도시

 

다뉴브 강변에 위치한 이 아름다운 도시는 강물뿐만 아니라 뜨거운 온천수도 솟아나는 곳이어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온천을 보유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하더라도 무려 118개에 이르며 하루에 공급되는 온천수는 3만t에 달한다고 한다. 목욕을 좋아하던 로마인들이 이미 1세기에 14개의 온천원을 확보하여 사용했으며, 목욕을 중시했던 터키 지배 기간에도 많은 목욕탕들이 만들어졌다. 이 당시 만들어졌던 대표적 온천이 ‘왕의 온천’이라는 키라이 온천과 루더시 온천이다.

우리는 매주 엘리자베트 다리 건너 루더시 온천으로 목욕을 가곤 했다. 이곳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물이 좋다는 곳인데 우리의 목욕탕처럼 47도가 넘는 뜨거운 물이 솟아나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주 알맞은 온천이었다. 남자를 존중하는 이슬람 방식으로 주로 남자 전용으로 욕장을 운영하는데 일주일에 하루 정도 여성 전용 목욕일이 있다. 그리고 토, 일요일은 남녀가 수영복을 입고 같이 목욕하는 날이어서 우리는 주로 그날을 이용했다.

터키 지배 시절인 16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둥근 돔에 여러 색깔의 많은 원형창이 나 있어서 그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혀주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형형색색으로 비치는 햇살은 목욕탕의 수증기와 어울려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게다가 허브 향이 나는 우리식의 습식 사우나까지 있어서 목욕하기가 그만이었다. 400년이 넘은 터키 시절의 역사유적에서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노라면 다른 시공간에 우리가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온천은 영웅 광장 뒤의 시민공원에 위치해 있는 세체니 온천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온천으로 네오 바로크 양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은 물론 엄청난 규모의 온천수영장까지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로 와서 놀기가 좋다. 우리도 조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하루 종일 논 적이 있는데 나중에 집에 가기 싫어해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햇볕에 일광욕을 하기 좋아하는 서구인들에게는 아주 적당한 장소다. 이곳에서는 물에 몸을 담그고 물 위에 체스판을 띄워 놓고 체스를 두는 할아버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온천은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겔레르트 온천일 것이다. 겔레르트 언덕 밑의 겔레르트 호텔에 달려 있는 온천으로 터키 지배 시절 온천이 있던 자리에 새로 건축된 곳이다. 헝가리의 역사와 신화를 표현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아르누보의 장식이 어울려 귀족적이고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는 한국에서 목욕탕을 가듯이 매주 온천을 갔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시 온천을 좋아하여 그곳에서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한번은 유럽 여러 곳에서 사는 할머니들이 이곳 온천에 단체로 온 적이 있는데 우연히 온천에서 만나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1970년대 독일에 간호사로 왔던 분들인데 지금은 이곳 유럽에 정착하여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나중에 비엔나에서 살고 계신 분과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분의 안내로 그라츠를 가기도 했는데 세계 어디를 가든지 주변의 환경과 잘 적응하여 살아가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부다페스트는 물의 도시다. 다뉴브가 유장하게 흐르고, 이렇게 많은 온천이 뜨거운 물을 뿜어내고 있다.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수많은 온천이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에 집중된 것도 특이한 일이다. 다뉴브 강 밑으로는 뜨거운 온천의 기운이 흐르는 것이리라. 어쩌면 마자르 인의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이 물에 녹아 그렇게 뜨거운 온천을 뿜어대는 것이 아닌가. 아, 부다페스트여! 부다페스트여!! (끝)

 


joyman 2010.11.29. 3:03 pm 

이제 날씨가 추워지면서 종강 주에 접어들었습니다. 저의 <유럽 문화산책>도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아테네를 시작으로 제가 1년 동안 살았던 곳인, 부다페스트까지15개 도시를 돌아다녔습니다. 괜히 여러 선생님들의 눈을 어지럽히지는 않았나 걱정됩니다. 서양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 동안 변변찮은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모두 즐겁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김영 2010.11.30. 2:09 pm 

권순긍 선생님, 유럽 여러 도시의 문화와 예술을 훌륭한 그림과 멋진 사진을 곁들여 친절하게 안내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곳 도시들의 겉모습 뿐만 아니라 도시의 형성과정 건축양식 그들의 생활상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답니다. 저도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프라하와 부다페스트가 마음에 들었었는데, 1년간 그곳에 머무시면서 정말로 많은 것을 체험하신 것 같습니다. 곧 책으로 출간되어 많은 이들의 교양을 넓혀주리라 기대합니다.

許弛 2011.01.07. 9:34 am 

연재 동안 좋은 글 때문에 마음이 즐거웠고, 좋은 그림 때문에 눈도 즐거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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