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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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저항의 보헤미아- 프라하(Prague)

joyman 쪽지





 

프라하는 정말 춥고 음울했다. 부활절 기간인데도 방한복을 입을 정도였다. 여름에 이곳을 왔을 때도 그렇게 추웠다. 아내는 귀가 시리다고 방한모까지 사서 쓰고 다녔다. 그 덕분에 진짜 프라하의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었다. 춥고 음울한 북유럽의 고딕적 이미지! 검은 색 벽돌의 뾰족 지붕이 회색 빛 하늘을 찌르는 그런 광경이다. 해가 질 무렵 카렐교에 서서 프라하 성을 바라보거나 구시가 광장에서 틴 성모교회를 보노라면 이곳의 지형과 기후와 건물들이 음울한 고딕의 동일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면 바로 프라하에 온 것이다.

그런데도 ‘음울한 낭만’이라고 할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남부 유럽처럼 밝고 경쾌하지는 않지만 그 음울한 도시의 풍경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늦가을 저녁이나 찬비 내릴 때, 뭔가 인생이 어그러졌다고 느낄 때, 주변에 마음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인생의 달콤함과 신산함을 모두 다 겪고 이제는 회한만이 남아있을 때, 너무 괴로워 죽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을 때, 그때 프라하로 와야 한다. 진정 자신의 모습과 유사한 상처 입은 풍경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이 도시는 당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줄지도 모른다. 카프카를 읽어야할 때가 그때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출구 없는 성(城)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라하를 찾아서

 

이런 매력 때문인지 매년 1억 명의 사람들이 프라하를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파리 다음으로 가장 많이 가는 곳이 프라하다. 김정은이 나오는 <파리의 연인>에 이어 전도연이 등장하는 <프라하의 연인>이란 TV 드라마가 방영될 정도로 프라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프라하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의 인기 때문인지 동유럽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에서 바로 가는 직항로가 개설돼 있기도 하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 구시가지의 어느 식당에서는 한글판 메뉴도 등장했을 정도다.

우리가 흔히 보헤미아라 부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유럽의 박물관’ 혹은 ‘유럽의 미술관’이라 부를 정도로 다양한 건축양식의 문화유산들이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이 도시는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에 의해 문학으로 묘사되었고,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에 의해 아름다운 선율로 채워져 있다. 카프카는 대부분의 인생을 이곳에서 보내며 많은 작품의 무대를 프라하를 위해 기꺼이 제공했으며, 쿤데라는 파리에서 글을 쓰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향수>를 통해서 고향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프라하로 돌아가려는 체코 지식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어디 그뿐인가. 프라하의 어디를 가든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블타바(혹은 몰다우)’의 선율을 들을 수 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강을 이루어 흘러간다는 그 선율은 다소 구슬프면서도 웅장하고, 끊어질듯 하면서도 지속된다. 이 선율은 프라하 그 자체다. 프라하에서는 역에서, 전철에서, 상점에서, 어디를 가도 이 선율이 따라온다.

그리고 프라하는 1968년 저 유명한 ‘프라하의 봄’을 일으킨 민주화 운동의 성지다. 신시가지의 바츨라프 광장은 소련군 탱크에 맞서며 자유를 갈구하는 보헤미안의 절규가 울려 퍼졌던 곳이다.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에 그 격렬한 역사의 현장이 등장한다. 이렇게 프라하는 문학과 음악과 영화로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들어왔다.

우리는 부활절 기간을 이용하여 이곳에 왔고, 여름에도 다시 찾았다. 주로 기차로 프라하를 찾았는데 내리는 역이 시내에 있는 중앙역이 아니라 변두리에 있는 홀레쇼비체 역이어서 시내로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나 트램을 타기 위해서는 체코 돈인 코루나로 환전을 해야 하고, 정류장을 표시한 낯 설은 체코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시내로 들어오는 트램을 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행선지를 물어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중에는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 우리의 목적지로 가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프라하에 입성했다. 카프카의 성(城)처럼 정망 프라하는 들어오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블타바 강을 건너 저 멀리 프라하 성이 보이자, 아, 이제 프라하에 도착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음울한 고딕의 도시, 프라하

 

괴테는 일찍이 프라하를 ‘황금의 도시’라 찬양했지만 황금색 보다는 칙칙한 검은색이 어울리는 도시가 프라하다. 중세의 탑이나 건물들이 모두 오랜 세월을 지내느라 검은색으로 변해 도시의 분위기를 한층 어둡게 한다. 그 검은색 건물에 황금의 장식은 유난히 찬란하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뾰족 지붕은 어디선가 날개 달린 악마가 날아올 것 같은 중세 고딕적 분위기를 풍긴다.

프라하는 유난히 고딕 건물이 많다. 그건 이 도시가 14세기 중엽 ‘프라하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던 카를 1세(나중에 카를 4세가 됨)에 의해 번창했기 때문이다. 사실 프라하의 역사는 바츨라프 1세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921년 왕위에 올라 작센의 성 비투스를 봉헌한 비투스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지만 동생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 대성당이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10세기에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게 된다. 신시가지의 바츨라프 광장이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1세기에는 보헤미아도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되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일곱 선제후의 반열에 들게 된다.

14세기 초 바츨라프 3세가 아들 없이 암살당하자 바츨라프 2세의 사위인 룩셈부르크 가의 얀이 왕위를 이었고, 그의 아들이 1346년 왕위를 이어 카를 1세가 되었고,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도 선출되어 카를 4세가 되어 프라하의 황금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그의 아들 벤첼이 또한 바츨라프 4세가 되어 보헤미아의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면서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위용을 떨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고딕 건물의 철학은 모든 것이 신의 피조물이라는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기에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첨탑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도달하고자 하는 중세인들의 바람을 나타낸 것이다. 게다가 수직적 질서를 중시하여 국가에서 황제로부터 왕과 귀족, 평민과 농민, 노예에 이르기까지 수직적 계급을 가시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딕양식이다. 이런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프라하 성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과 프라하의 상징인 카렐 다리를 비롯하여 구시가 광장의 구시청사 탑, 틴 성모교회, 화약고 탑문 등이니 프라하의 오랜 건물들은 모두 고딕양식인 셈이다.

 

구시가 광장에 새겨진 저항의 역사

 

프라하 시내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프라하의 관광 1번지인 구시가 광장을 찾았다. 이곳은 언제 오더라도 생기가 넘치는 그야말로 프라하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마침 우리가 처음 갔을 때가 부활절 축제기간이어서 광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구시가 광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는 구시청사의 시계탑이다. 1490년에 하누쉬란 시계공이 만들었다는 오를로이 천문시계가 정시마다 시간을 알리는데 그 광경이 흥미롭다. 시계의 중심 부분에 조각된 해골이 줄을 당겨 종을 울리고 모래시계를 거꾸로 놓으면 맨 위의 창이 열리며 12사도가 등장하여 한 바퀴를 돌고 이어서 닭이 울고 종이 울린다. 이 재미있는 광경을 보려고 매시 정각이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목을 빼고 시계탑을 올려다 본다. 마침 우리는 그 옆의 카페 2층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어서 이 명장면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구시청사의 천문 시계탑이야말로 다른 곳에는 찾아보기 힘든 프라하의 진정한 랜드 마크다. 거기서 바라보는 뾰족 지붕의 틴 성모교회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애니메이션에 흔히 등장하는 마법의 성과 같다. 특히 조명을 밝힌 밤의 천문 시계탑과 틴 성모교회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프라하의 상징이 아닌가 싶다. 프라하의 여러 이미지 중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다.

광장의 중앙에는 카렐대학의 총장이자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Jan Huss.1370~1425)의 군상이 우뚝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체코의 사상가로서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통렬히 비판하다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고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이단으로 화형당한 인물이지만 체코 민족의 자존심과 양심으로 부활하였다. 사실 후스의 사상은 체코의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후스는 가톨릭 교단의 부패를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라틴어 미사 대신에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체코어의 미사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니 성직자가 독일인이 대부분인 신성로마제국 내의 가톨릭 교단으로부터는 민족주의의 상징인 후스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뒤 1세기가 지난 뒤 후스는 종교개혁의 선각자로 떠올랐고 신교도뿐만 아니라 체코 민중들의 우상으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군상은 1915년 후스 서거 500주년을 맞아 라디슬로프 샬로운에 의해 만들어졌다. 후스의 주변으로 두 그룹의 군상들이 있는데 하나는 후스의 처형 후 여기에 반발해 일어난 종교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스파 전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200여 년 후에 추방당했던 신교도들과 체코의 부흥을 상징하는 젊은 어머니상이다. 체코 민족의 저항의 상징인 이 기념물이 세워지고 3년 뒤에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함으로써 체코는 슬로바키아와 같이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게 되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 가의 400년 가까운 지배에서 해방된 것이다.

체코의 자존심이자 저항의 상징인 후스의 군상 벽에는 “진리는 승리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하필이면 여기다 한국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촬영하기 위해 남주인공이 연인을 만나려고 노란 메모지를 잔뜩 붙여놔서 체코당국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이곳 사람들에게 핀잔을 산 적이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이나 충무공상에 일본의 드라마 촬영을 위해 그들이 개인적인 쪽지를 붙여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좋은 영상을 얻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서로가 지켜야할 예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스의 군상을 보면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괜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군상의 뒤로 마치 중세 영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 틴 성모교회가 있다. 독특한 뾰족탑을 거느린 쌍둥이 탑이 우뚝 솟아있는 이 교회는 1365년에 지금의 모양으로 개축됐는데 원래의 명칭은 ‘틴(세관)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다. 교회 앞에 예전에 세관이 있었다 한다. 이 교회는 성 비투스 대성당과 함께 프라하에서 상징적인 교회인데 종교개혁가 후스를 따르는 후스파의 거점이기도 하여 여러 모로 후스상과 관련이 있다.

그러고 보면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은 후스의 군상을 중심으로 보헤미아 민족의 자존심과 저항의 상징으로 가득하다. 마침 이 광장에서는 1621년 합스부르크의 황제에 대하여 반란을 주도했던 보헤미아 신교도 귀족들이 처형되기도 했다. 사건의 경과는 이렇다. 당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는데 신교도들인 보헤미아의 지도층들이 황제와의 갈등으로 인해 황제의 고문관 3명을 성 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을 일으켰다. 고문관들은 해자의 낙엽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이 일로 인해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나게 되었다. 1620년 보헤미아의 의회, 신교도 연합군은 합스부르크 군대와 프라하 근교의 빌라호라에서 싸웠지만 조직화되지 못한 군대와 열악한 무기로 인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다음 해 구시가 광장에서는 반란을 주도했던 보헤미아의 신교도 귀족 27명이 처형당했고 남은 귀족들은 망명하거나 토지를 몰수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 것이다.

그 저항과 좌절의 역사가 또한 이 광장에 남아있다. 구시청사의 돌출창이 달린 예배당 아래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판이 있으며, 오른 쪽 아래의 길 위에는 27개의 흰 십자가가 그려져 있어 그들을 기린다. 말하자면 이 구시가 광장은 부패한 가톨릭에 의한 저항과 합스부르크 지배에 대한 반항이 아로새겨진, 저항과 좌절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198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체코 작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Jaroslav Seifert,1901~1986)는 <프라하>란 시를 통해 그 저항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프라하!

그 도시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이름을 노래하리라.

영원히 가슴 속 깊이.

그 도시는 세월로 짜인 노래이고

우리는 그 도시를 사랑하리라.

(중략)

한번은 나는 뺨을 대보았지.

고색창연한 성벽의 돌담에.

이는 성 아래의 어딘 가였고

나는 귀청을 울리는 우렁찬 소리를

지나간 역사의 함성을 들었지.

하지만 빌라호라의

촉촉하게 젖은, 보드라운 흙은

내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지.

가라, 가서 찬미하라.

그리고 노래하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역사가 흐르는 프라하의 대동맥, 카렐교

 

구시가 광장을 둘러 본 우리는 프라하의 상징, 카렐교를 찾았다. 구시가와 왕궁을 이어주는 이 다리는 아마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다리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카렐교는 1357년 카를 4세의 명에 따라 성 비투스 대성당을 지은 페테르 파를레르시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건설되기 시작하여 바츨라프 4세 때인 1402년에 완공되었다. 이 때문에 비종교적 고딕 건물로는 특이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구시가지가 프라하의 심장이라면, 이곳 카렐교는 그 뜨거운 피를 공급하는 대동맥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프라하에서 가장 활기찬 장소로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 다리 또한 프라하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다. 유럽의 어디를 가도 이렇게 유서 깊은 다리는 없다. 더욱이 다리 위에는 30개에 이르는 수많은 성상이 조각돼 있어 야외 조각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17세기부터 조각된 것으로 프라하의 수호성인인 성 비투스를 비롯하여 황금시대를 가져왔던 카를 4세, 다리를 만든 바츨라프 4세 등 수많은 성인들의 성상이 있는데 가장 흥미로운 성상은 제일 먼저 제작된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석상이다. 그는 바츨라프 4세가 왕비의 고해성사를 폭로하기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해 산채로 이곳 블타바 강에 던져져 순교했던 인물이다. 그의 석상 밑에는 당시의 상황을 동판에 부조로 새긴 것이 있는데 이를 만지면 무병장수 한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동판을 만져 반질반질하고 빛이 난다. 순교자의 고귀한 희생에 기대어 나약한 인간의 소원을 비는 것이리라.

카렐교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자잘한 물건을 파는 수많은 노점상과 늘 이벤트를 벌이는 거리의 악사들이다. 혼자서 북치고 건반악기를 연주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우리가 갔던 부활절 기간에도 있었고, 6월에 동생들과 같이 갔을 때도 그 자리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아마도 카렐교의 터줏대감이 아닌가 싶은데 연주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클래식 명곡들을 막힘없이 연주하여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곤 한다. 이들 노점상과 거리의 악사들은 대개가 시청으로부터 허가를 받고 생계형 영업을 하는 셈이어서 각기 시청으로부터 부여받은 허가증을 내걸고 장사를 하고 있다.

카렐교는 일종의 노천시장인 셈이어서 좌우가 툭 터진 고색창연한 다리 위에서 벌어지는 좌판과 공연은 매일 다리 위에서 벌어지는 축제와 같다. 그렇다. 카렐교는 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다. 축제가 별건가, 사람들이 모여 흥겹게 놀면 그것이 축제가 아닌가. 이곳은 황제와 왕들이 프라하로 들어올 때 지났던 곳이고, 프라하의 온갖 역사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 밑으로는 스메타나가 그토록 찬양했던 블타바 강이 말없이 흐르고 있다. 아니 프라하의 역사가 흐르는 것이리라. 마침 그 기념비적 곡을 작곡했던 스메타나의 박물관이 구시가 광장 쪽 왼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블타바 강을 늘 가까이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저물 무렵의 카렐교는 가장 아름답다. 우리도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카렐교로 나왔다. 저녁노을이 흐라트차니 언덕의 비투스 성당과 프라하 성에 떨어지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지만 구름은 걷히지 않았고 가끔 비까지 뿌렸다. 프라하는 좀처럼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 번을 왔지만 흐린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프라하는 고딕 건물과 더불어 음울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처럼 따가운 태양이 하루 종일 내려쬔다면 어떻게 카프카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마침 카렐교 건너 오른 쪽에 새로 단장한 카프카 기념관도 있었는데 그날은 이미 시간이 지나 갈 수가 없었다.

카렐교에서 보는 프라하 성의 야경은 구시가 광장의 틴 성모교회처럼 프라하를 상징하는 명장면이다. 다리 위의 가로등, 성상과 저 멀리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프라하 성의 모습은 그대로 프라하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사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는 비슷한 풍경이 많다. 여기 프라하 성의 야경도 부다 성의 야경과 그 구도는 동일하다. 강 위의 언덕에 우뚝 솟은 성이며, 교회 그리고 강을 가로지르는 고색창연한 다리(프라하에 카렐교가 있다면 부다페스트엔 세체니 다리가 있다.)와 야간 조명까지 전체적인 윤곽은 비슷하지만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세체니 다리에서 바라 본 부다 성의 야경이 경쾌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면, 카렐교에서 바라 본 프라하 성의 야경은 침울하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왜 그럴까? 아마도 강폭이 좁은 데다 뾰족한 고딕 건물이 주를 이루고 조명도 그리 밝지 않아 그런 것이라 여기지만 그럼으로써 나름대로 그 도시의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다.

 

중세의 요새, 프라하 성과 아랫마을, 말라스트라나

 

다음날 우리는 프라하 성과 그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프라하는 구시가지와 프라하 성이 관광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볼거리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아침을 일찍 먹고 프라하 성을 향했다. 일단 트램을 타고 올라가 다 둘러본 다음 내려오면서 아랫마을인 말라스트라나에서 점심을 먹고 그곳을 보기로 하였다.

프라하 성은 요새화된 하나의 도시였다. 성 비투스 대성당을 중심으로 왕궁과 성 이르지 교회, 그리고 연금술사가 살았던 황금골목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고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성벽 위로는 각종 갑옷과 무기를 전시하여 이곳이 예전 치열했던 전투의 장소였음을 일깨워주었다. 성벽 밑으론 천 길의 성벽과 해자가 있어 공격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프라하 성은 왕이 거주하는 아름다운 궁궐로서 성이 아니라 정말 전쟁을 했던 요새였다.

프라하 성에서 최고의 건물은 프라하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926년 바츨라프 1세가 지금의 장소에 교회를 세운 것을 기점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냈던 카를 4세에 의해 지금의 고딕식 원형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 뒤 수없이 증개축을 거듭해서 1929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됐다고 하니 대성당이 완성되는데 무려 천 년 이상이 소요된 셈이다. 이 비투스 대성당이야말로 프라하의 역사 그 자체로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프라하의 이미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장소다. 비엔나에 스테판 대성당이 있다면 프라하에는 비투스 대성당이 있는 것이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어두침침한 건물 외관에 124m에 달하는 첨탑과 황금색 장식이 빛나는 전형적인 고딕 성당으로 내부는 왕가의 묘소와 유물들로 가득하다. 우선 카를 4세와 바츨라프 4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으며 바츨라프 예배당에는 수호성인이 된 바츨라프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보물실에는 보헤미아의 왕관이 보관되어 있는데 일반에게는 공개하지는 않는다. 주제단의 오른 쪽 옆에는 왕비의 고해성사를 발설하지 않은 죄(?)로 카렐교에서 순교한 네포무츠키의 묘소가 있어 이를 찾는 사람이 많다. 위대한 왕보다 진실을 지킨 사제가 더 추앙받으니 역사의 평가란 그런 것이 아닌가. 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중에는 체코 출신의 대표적 아르 누보 화가 무하(Mucha)의 그림도 있는데 뒤쪽 예배당 창문에 그려진 <성 그리스도와 성 메토디우스>가 그것이다. 섬세한 선과 화려한 색이 어우러진 아르 누보 풍의 스테인드글라스여서 찾는 사람이 많다.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인 장소는 연금술사들이 살았던 황금골목이다. 지금은 장난감 같은 15채의 집들만 남아 성벽에 바싹 붙어 있는데 그 중에서 푸른색으로 칠한 22번의 집이 카프카가 글을 썼던 집이라 한다. 원래 누이동생이 살던 곳으로 1917년 카프카가 머물렀던 곳이다. 그곳에서는 카프카 관련 책이나 엽서를 팔고 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지금 그곳의 집들은 모두 기념품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어져 있다. 대부분 1~2평 남짓하여 여기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았을까 싶다. 처음에는 성을 지키는 보초병들이 살았던 곳이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슬럼화 됐다고 한다. 이곳의 집들은 중세의 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어 흥미롭다. 돌이 깔린 골목과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들은 마치 우리의 산동네 골목과 집들처럼 정겹다. 어디선가 중세의 아이들이 나타나 뛰어놀고 뚱뚱한 아줌마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아이들을 부를 것 같다. 이곳은 사람이 많고 골목은 좁아 빨리 지나가야 하는 곳인데 정겨운 느낌이 드는 곳이어서 늘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아예 프라하 성 자체를 폐쇄하니 밤에 이 거리를 걸을 수도 없어 더욱 그렇다.

프라하 성을 구경한 우리는 우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네루도바 거리로 내려갔다. 이곳은 우리로 하면 먹자거리인데 1857년까지 주소가 없어서 집들에서 다양한 심벌을 붙여 주소로 대신했다.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있어 다양한 심벌로 가게를 표시하는데 ‘백조’, ‘황금열쇠’, ‘붉은 양’, ‘금잔’ 등 주로 음식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거리의 유래가 된 체코의 극작가 얀 네루다가 살던 집 47번가도 ‘두개의 태양’이다. 네루다의 이름을 따서 네루도바 거리로 불렸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30년 동안을 살면서 이곳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 세태소설 <말라스트라나 이야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간판이 재미있고 어디가 맛있고 싼 집인지를 알기위해 여기저기 다니다가 마침 ‘붉은 사자’ 집이 가장 싼 것 같아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아내는 심벌로 표시한 간판이 흥미롭다며 그 모든 간판을 찍기에 바빴다. 나중에 디자인을 참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기는 대사관이나 귀족들의 저택이 많은 곳으로 구시가에 고딕식 건물이 모여 있는 것과 달리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건물은 성 미쿨라세 성당이다. 바로크의 대표적 건축가인 딘첸호퍼가 1704년부터 1756년에 걸쳐 건설했다. 성당 천정의 프레스코화는 성 니콜라스의 생애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바로크의 프레스코화로는 유럽 최대의 규모다. 안에 있는 황금천사가 장식된 오르간은 1787년 모차르트가 연주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성당에서는 음악회가 자주 열리는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에도 모차르트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성 미쿨라세 성당에서 길을 건너가면 왕국의 총사령관이었던 발트슈타인 장군의 저택인 바로크 양식의 발트슈타인 궁전이 있다. 발트슈타인 장군은 30년 전쟁에서 황제군을 지휘하여 신교도 군대를 맞아 싸운 인물이다. 이를 계기로 점차 권력을 장악하여 왕이 되길 꿈꾸었으나 황제에 의해 암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가 왕궁인 프라하 성에 버금가는 궁전을 짓고자하여 건축한 것이 바로 이 저택이다. 프라하에 지어진 최대의 바로크 궁전으로 ‘기사의 방’의 천정 프레스코화에는 자신을 전쟁의 신 마르스로 분장해 승리의 마차에 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왕이 되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기도 하고 합스부르크에 대항했던 민족영웅으로도 볼 수 있다. 독일의 실러는 이 인물에 흥미를 가지고 적국인 스웨덴과 결탁하여 합스부르크에 대항하려고 했지만 부하의 배반으로 죽음을 맞는다는 3부작 희곡 <발렌슈타인>을 썼으며, 스메타나도 이 작품을 바탕으로 작곡을 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저택은 궁전과 다름이 없었는데 주인은 간 데 없고 화려한 건물만 남아있어 권력의 무상함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카프카의 불안한 언어와 쿤데라의 경쾌한 언어

 

프라하는 유난히 많은 작가들을 가지고 있다.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를 비롯하여 카프카(Franz Kafka,1883~1924), 하섹(Jaroslav Hasek,1883~1923), 흐라발(Bohumil Hrabal,1914~1996) 등을 거쳐 쿤데라(Milan Kundera,1929~)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언어에 의해 프라하는 장식되었다. 릴케는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시를 썼기에 프라하와는 거리가 있는 시인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프라하에서 보낸 카프카야말로 프라하의 이미지와 가장 잘 들어맞는 작가다. 황금골목 뿐만 아니라 구시가 광장에도 골스 킨스키 궁전이 있는데 그곳 중등학교에 카프카가 다닌 탓으로 그 건물 1층에서도 ‘프란츠 카프카’란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카프카는 이곳 프라하에 살면서 <변신>, <심판>, <성> 등의 작품을 통해 현대인의 절망과 실존의 문제를 다루어 그의 사후 실존주의 작가들에 의해서 재평가됐던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 <성>의 첫 문장을 보면 음울한 프라하 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K가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으며, 어렴풋이나마 큰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불빛도 없었다. K는 오랫동안 큰길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허공으로 보이는 데를 쳐다보았다.

 

어디에도 길이 없고 또한 다가갈 수도 없는 성은 현대인의 실존과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 우리는 누구이며, 과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1926년에 집필된 카프카의 <성>은 측량기사 K가 어느 날 낯선 마을에 도착한 것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성으로부터 측량의 부탁을 받고 왔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성의 실권자에게 가서 자신이 왔음을 알리려 해도 다가갈 방법이 없다. 결국 그는 마을에 안주하여 살기로 하고 학교에서 일자리를 얻었지만 업무를 보지 않고 잠을 잤기에 그곳에서도 쫓겨날 처지가 되었다. 술집에서 알게 된 프라다도 다른 남자와 도망해 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구박만 받는 것으로 소설은 미완인 채 끝난다.

1925년에 쓴 <심판>도 그렇다. 은행의 주임인 K는 어느 날 이유 없이 형사들에 의해서 구속당한다. 그는 자신이 왜 끌려갔는지 알지 못한다. 나중에 구속에서 벗어나 풀려나지만 가끔 경찰에 불려가 심문 당하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유명한 변호사를 찾았지만 별효과를 보지 못하고, 친지와 화가를 통해서는 재판 기구의 불투명한 조직과 권력 기구의 미로 같은 모습만 확인할 뿐이었다. 나약한 개인으로서는 <성>에서처럼 그 실체에 도저히 다가갈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집행인에게 끌려가 아무 재판도 거치지 않고 처형된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이처럼 외부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지고 그 상황 속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통과 불안 속에 괴로워하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은 마치 출구 없는 방에 갇힌 인간의 모습처럼 답답하고 절망적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현대의 우리가 아니겠는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을 반복하면서 그 출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평생을 바치지 않는가.

마침 카렐교를 건너면 오른 편에 카프카 기념관이 있어 오후에는 그곳에 들렸다. 그곳에는 카프카의 육필 원고와 사진 그리고 편지며 메모들을 전시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카프카가 스케치 한 것을 바탕으로 만든 영상자료였다. <심판>의 내용을 카프카가 단순한 선으로 그린 것이 있는데 이것으로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폐쇄된 공간에 갇혀 어떤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충격적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카프카의 소설의 내면풍경이 프라하의 음울한 이미지를 그대로 닮았다는 사실이다. 정말 카프카는 프라하와 동격이다. 프라하가 아닌 다른 도시에 살았던 카프카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1991년에 개봉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카프카>란 영화도 그렇다. 작가 카프카의 모습에다 <심판>의 내용을 뒤섞은 것 같은 영화로 자신도 모르게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여기서 빠져나오려 하지만 점점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갑갑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뚜렷한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모호한 불안을 기막히게 그려냈다. 어딘지 모를 안개 낀 밤거리, 누군가에게 쫓기며 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주인공, 무관심한 주변 인물들을 통해 카프카 소설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그려낸 것이다. 프라하의 돌을 깔아 만든 길이나 어두침침한 뒷골목을 걸으면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카프카 소설의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에 비해 쿤데라는 경쾌하고 에로틱 하다. 그 자신도 프라하를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도시”라고 했거니와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야말로 이런 프라하에 대한 찬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바람둥이이자 프라하의 외과의사인 토마스가 시골의 병원에 수술을 하러 갔다가 시골 식당 여급인 테레사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반해서 짐을 챙겨서 무작정 그를 찾아 프라하에 온다. 수많은 여자들과 섹스를 하며 육체를 탐닉했던 토마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모세의 아기 바구니’처럼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강제 진압한 소련군의 만행을 중심으로 체코의 정치적 상황을 오이디푸스에 빗대어 쓴 글이 문제가 되어 처음엔 망명을 했다가 다시 돌아와 시골로 추방되어 유리창 닦이로 전전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여자들에 대한 성적 탐닉은 멈추지 않는다. 말하자면 영혼과 분리된 육체에 대한 탐구인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런 토마스의 행위에 대한 철학적 규명인 셈이다. 토마스는 “사랑을 섹스에 붙인다는 것은 창조주의 가장 기이한 아이디어다.”라고 하여 “만일 섹스가 우리의 창조주가 스스로 즐기기 위한 메커니즘이라면 사랑이란 우리의 고유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 때문에 창조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즉 사랑이란 존재론적 자유개념으로서 섹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를 별개로 생각하는 토마스의 특이한 생각 때문에 늘 괴로워하던 테레사는 어느 비오는 날 마을의 회관에서 토마스와 같이 춤을 추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죽음을 맞는다.

이 작품은 섹스와 사랑에 대한 혹은 육체와 영혼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자 소설적 형상화인 것이다. 특히 소련군 탱크에 의해 유린되는 프라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비록 몸은 파리에서 거주하지만 프라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더욱이 이 작품은 1988년 카우프만에 의해 <프라하의 봄>이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프라하의 봄’ 당시에 소련군 탱크가 프라하 시내에서 민주화 항쟁을 진압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쿤데라의 모든 소설적 원천은 프라하에 있다. 그런 프라하에 대한 귀소본능을 다룬 작품이 <향수>다. <향수>는 프라하를 그리워하는 보헤미안의 정서를 담고 있는 프라하에 대한 헌사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고 이곳을 떠났던 보헤미안들이 1989년 공산권 붕괴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향을 찾아 연어처럼 돌아온다는 내용으로 덴마크에서 돌아오는 요셉과 프랑스에서 남편과 사별하고 스웨덴 남자 친구와 귀국하는 이레나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7년 동안 에게 해를 떠돌다 마침내 고향 아티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처럼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리라. 그들은 “미지의 것에 대한 열정적인 탐험(모험) 대신에 익숙한 것에의 예찬(귀환)을 택했다.”고 한다. <향수>는 말하자면 체코판 <오디세이아>인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프라하를 떠났던 사람들이 <향수>에서는 귀환하는 이야기로 결말을 맺는 것을 보면 쿤데라에게 프라하는 그런 향수병에 걸린 도시리라. 비록 몸은 파리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고향을 향하고 있어 프라하는 쿤데라에게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체코 민주화의 성지, 바츨라프 광장

 

카프카 기념관을 본 우리는 발길을 신시가지로 돌렸다. 체코 민주화의 성지인 신시가지의 바츨라프 광장을 보기 위해서다. 바츨라프 광장은 우리의 광화문 광장과 비슷하게 체코의 수호성인이자 건국영웅인 바츨라프의 동상을 중심으로 조성된 광장이다. 광장의 주변은 국립박물관과 국립오페라 극장을 비롯한 고급 호텔 등 아르누보 건물로 둘러싸여 화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가 프라하의 민주주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 광장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포한 곳이며, 1968년 개혁파인 두프체크가 등장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시회주의’를 주장하고 사전검열제 폐지와 언론의 자유를 강조한 이른바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곳이고, 체코의 정치개혁이 동유럽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소련이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움직여 5개국 20만 명의 군대가 프라하에 침입하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곳이다. 당시 프라하 시민들은 소련군 탱크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프라하의 봄은 무력 앞에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바로 그 항쟁과 패배의 기억을 안고 있는 곳이 이 바츨라프 광장이다. 거기에는 소련군 습격에 항의해 분신자살한 얀 팔라흐와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동상이 광장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그로부터 21년 후 1989년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체코의 민주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른바 ‘벨벳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역사의 격변기 마다 바츨라프 광장에 사람들이 모였고 그들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바츨라프 광장은 언제나 젊은이들이 모여 생기가 넘친다. 이곳은 옛날의 역사를 간직한 구시가나 프라하 성과는 다르게 프라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맛있는 체코의 맥주, 분위기 있는 선술집

 

이제 맛있는 체코의 맥주 이야기를 해야겠다. 북부 유럽인 독일, 체코,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여행하면서 남부와는 다르게 유난히 맥주가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당연한 것이 맥주를 순보리로 만들어 맛도 좋지만 저녁을 대신해도 좋을 정도로 영양가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주를 ‘흐르는 빵’ 혹은 ‘액체 빵’으로 부르기도 하고 체코에서는 “저녁을 마신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1인당 맥주 소비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이 체코이니 그런 말도 무리는 아니다. 저녁이면 체코 사람들은 늘 선술집에 모여 맥주 한잔으로 배를 채우고 담소를 나누며 웃고 떠든다.

한국에 돌아와 맛있게 먹던 맥주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 맥주를 마셨지만 영 그 맛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연히 세계 맥주 전문점에 갈 기회가 있어 지인들과 함께 유명한 북부 유럽 맥주들을 다 꺼내놓고 품평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모두가 가장 맛있다고 지목한 맥주가 바로 체코의 북보헤미아 지방인 플젠에서 생산되는 ‘필스너’ 맥주였다. 쌉쌉한 맛이 일품이어서 톡 쏘는 맛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체코의 대표적인 맥주가 이 ‘필스너’와 남보헤미아 지방 부데요비치에서 생산되는 ‘부트바이저(미국산 버드와이저의 원조)’ 그리고 모라비아 지방인 브르노에서 생산되는 ‘스타로브르노’다. 하지만 이 외에도 수많은 양조장들에서 우리의 막걸리처럼 수천 종의 맥주를 생산하고 있어서 그 맛이 수천 가지에 이른다. 사실 이곳의 맥주와 비슷한 것이 우리의 맥주가 아니라 막걸리다. 수많은 양조장에서 순곡물로 만들어 몸에도 좋고 맛도 일품인 것이 그렇다.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집은 흑맥주로 유명한 ‘우 플레쿠’로 15세기부터 장사를 했으니 무려 500년이 넘은 셈이다. 신시가지 블타바 강변 쪽에 있는데 늘 사람들이 넘친다. 홀이 여기저기 있고 각 홀에는 동파이프가 연결되어 즉석에서 맥주를 따라준다. 맥주 맛도 일품이지만 맥주 한잔으로 모두가 흥겨워하는 분위기가 특히 좋다. 이 광경을 보면 프라하가 결코 음울한 도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시커먼 고딕건물이 하늘을 찌르는 침울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을 즐기고 있어 한편으로는 모순되게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여기 맥주집에 들어오면 마치 중세의 어느 선술집에 들어온 기분이다. 그렇게 프라하의 밤은 맥주집의 유쾌한 웃음소리 속에 저물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선술집 우 플레쿠의 벽에는 이런 낙서가 있다. “우리 선조도 맥주를 마셨고, 우리 아들들도 맥주를 마시며, 아들의 아들도 맥주를 마실 것이다.…죽을 때까지 마시고, 노래하자. 맥주를 마시고 죽는 자나 안 마시고 죽는 자나 마찬가지다.” 마치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이어 매어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 곧 가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야 뉘우친들 어찌하리”의 어법과 동일하다. 바로 이 순간을 즐기자는 ‘카르페디엠(carpediem)’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카르페디엠! 프라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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