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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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에 세운 ‘소금의 성’-잘츠부르크(Salzburg)

joyman 쪽지





유럽의 도시들은 저마다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연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룬 도시를 들라면 알프스 주변에 위치한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산과 호수 그리고 바로크 양식의 예쁜 집들이 조화를 이뤄 정말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도시다. 아니, 그림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츠부르크를 가게 된 사연은 좀 복잡하다.

 

호수를 찾아서

 

부다페스트에서 5월 1일 메이데이가 마침 목요일이었고, 그 다음 날은 샌드위치 데이라 놀고(이곳은 샌드위치 데이는 무조건 쉰다. 도대체 언제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주말은 당연히 쉬는 날이어서 무려 나흘간의 연휴가 생겼다.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가 아내가 평소 가고 싶어했고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배경이 되는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를 가기로 했다. 소설도 그렇고 마침 영화에서도 그림 같은 호반이 펼쳐져있어서 그런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에서 며칠을 보내고자 했다. 호반을 거닐며 얘기도 나누고 목가적인 마을을 한가로이 산책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연휴를 보내고 싶었다. 해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부다페스트에서 바로 가는 기차가 있었다.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호반도시를 상상하며 무려 7시간이나 걸려 드디어 그라츠에 도착했다. 그런데 역에 내리는 순간 그라츠가 우리가 생각한 그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로서 남부 오스트리아의 중심지답게 제법 규모가 큰 상업도시였고 우리가 생각했던 한적한 호반의 도시는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호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마 시가지를 벗어나면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나겠지.’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그런대로 구시가지는 볼만해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숙소에 들어와 종업원에게 호수를 보려면 어디로 가느냐 물으니 “레이크?”하며 엉뚱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여기는 호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아름다운 호수를 보기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호수가 없다니. 기가 막혔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종업원은 호수를 보려면 잘츠부르크로 가야 한다며 여기서 4시간이며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내일 아침 11시에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가 있다고 알려주고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설명하는 것이었다.(그 종업원의 고향이 혹시 잘츠부르크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래 호수를 못 보면 웅덩이라도 봐야지, 내친 김에 아예 잘츠부르크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에 역으로 가보니 과연 종업원의 말대로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가 있었는데 왕복 기차 삯이 무려 우리 돈으로 20만원이나 하는 것이 아닌가. 악명 높은 오스트리아 철도 ÖBB(정말 에비비!)를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부다페스트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비싼 덕분에 차 한 칸을 온통 전세내서 알프스의 산록을 가로 질러 잘츠부르크로 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알프스 산록을 가로 질러 가는 길이 하도 아름다워 비싼 기차 삯에 대한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감탄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경치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키는가 보다. 그렇게 우리는 잘츠부르크와 만났다.

 

<사운드 오브 뮤직>, 그 황홀한 파노라마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험이 끝나면 대개 단체영화를 관람하곤 했다. 그 칙칙한 시절에 본 영화가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 황홀한 경치에 매료되어 ‘저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천국의 모습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알프스를 배경으로 그림 같은 호수와 아름다운 집, 낭만적인 사랑, 거기에 기막힌 노래까지… 그 영화를 본 뒤론 그 아름다운 경치가 늘 눈앞에 어른거렸고, 경쾌한 노래가 귓가를 맴돌았다. 어딘지도 모르지만 그 아름다운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LP판을 사서 수시로 듣곤 했다.

그런데 사춘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그 정경이 바로 여기 잘츠부르크였던 것이다. 잘츠부르크 역에 내리니 웅장한 알프스를 배경으로 바로크 풍의 아름다운 도시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마침 이곳 잘츠부르크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가 있었다. 마리아가 있었던 논베르크 수녀원(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겉으로만 구경했음), 트랍 대령의 저택으로 사용됐던 레오폴츠크론 성과 호수, <도레미 송>을 부른 모차르트 다리와 미라벨 정원, 결혼식이 거행된 몬트제 교회, 트랍 대령의 맏딸이 연인과 같이 노래 부르던 정자 그리고 마리아가 노래 부르던 알프스 산록을 돌아보는 투어였다. 시내에서 버스로 손님을 태우고 촬영지를 돌면서 가이드가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할리우드의 상업성이 이곳까지 오염시키는구나고 생각했지만 사춘기 시절의 감동을 확인할 수 있어 그런대로 좋았다.

사춘기 시절 가슴 설레며 봤던 그 영화의 현장을 직접 다녀보니 천국이라 생각했던 장면들이 신비감을 떨어졌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특히 시가지를 벗어나 호수가 많은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로 들어오자 정말 우리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장면들이 등장했다. 바로 산과 어우러진 호수였다. 푸슬 호를 시작으로 ‘달의 호수’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몬트제 호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알프스 산의 빙하가 녹아 계곡을 이루고 그것이 흘러내려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호수를 이루는 것이다. 아름다운 산과 바닥이 보일 정도의 맑은 호수 그리고 목가적이고 예쁜 집들은 기막히게 조화를 이뤄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가 원했던 그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냥 멈춰버리고 싶은 순간들이었다. 카메라로 어디를 들이대도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장면이 나오는 정말 사진 속에 들어온 것과 같은 곳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는 몬트제 마을에서 트랍 대령이 마리아와 결혼했던 몬트제 교회를 방문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우리는 교회 앞의 카페에 앉아 이 맑고 아름다운 곳을 천천히 음미했다.

세계 어디에도 호수는 많이 있지만 이곳 알프스의 산과 어우러진 호수야말로 오염이 전혀 안된 맑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지저분한 인간세계와는 다른 청정함이 있다. 그 뭐랄까? 아름다운 호수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그런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곳 잘츠카머구트에는 무려 76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 알프스 산의 눈 녹은 물로 이루어진 맑은 호수다. 정말 신선들이나 살 법한 곳이다. 신석정의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같은 시에 등장하는 “깊은 산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와 같은 목가적인 풍경이나 고전에 흔히 등장하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바로 여기가 아니던가.

 

할슈타트로 가는 길

 

호수의 매력에 반한 우리는 호기심이 발동해 이참에 더 나아가 잘츠카머구트의 명승지라는 할슈타트(Hallstatt)까지 가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침에 할슈타트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생각하고 호텔에서 아침을 먹는데 한국인 일가족이 식당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낯선 곳에서 관광시즌도 아닌데 한국인을 만난 것이 반가워 그들과 자연스레 합석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체코에서 한인민박을 운영하는 송 사장 일가족으로 그들도 할슈타트로 가려는 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차가 있으니 같이 합승하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기름을 넣어주고 같이 다니기로 하였다.

차가 있으니 가는 길에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들르기에 좋았다. 사진촬영을 즐겨하는 아내로서는 그만이었다. 할슈타트 가는 길은 명성 그대로 아름다운 산과 호수를 거쳐 가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모차르트의 외가가 있는 볼프강 호는 정말 장관이었다. 상류 쪽은 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고 깨끗하여 수영하고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여유로운 모습에서 풍요로움이 묻어났다. 하류 쪽은 바다와 같이 깊고 푸르며 파도까지 치는 것이 이게 호순가 싶었다. 깊은 곳에는 선착장까지 있어 배가 건너편으로 오가는 모양이었다.

가는 길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별장이 있다는 바트 이슐을 지나갔다. 여기가 바로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가 처음 만나 첫눈에 반했던 곳이다. 원래 어머니의 계획은 자신의 큰 조카딸인 헬레나와 맞선을 보기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바이에른 왕가로 시집간 두 자매가 자신의 아들과 딸을 맺어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요제프는 생기발랄한 동생인 엘리자베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이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효과도 있었으리라. 그가 바로 엘리자베트 황후가 된 것이다. 그곳에 황제의 별장 카이저 빌라가 있지만 시간이 충분치 못하여 들르지는 못했다.

바트 이슐에서 할슈타트로 넘어가는 산과 계곡은 우리의 설악산을 닮고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다만 산 위에 흰 눈을 이고 있는 모습이 이곳이 알프스라는 점을 상기시켜주지만 그 외에는 설악산의 계곡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이국적인 것이 주는 경이로움도 있지만 익숙한 것에서 느끼는 편안함도 있어 타지에 와서 우리는 거꾸로 우리 것에 대한 향수를 찾는가 보다. 한국에서 본 풍경과 비슷한 것이 보이면 괜히 가슴이 설렜다.

할슈타트는 기원전 40년부터 900년까지 천년 가까운 시간 동안 소금을 채굴하던 소금광산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당시 이곳에서 채굴된 소금이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발트해까지 운반되었다 한다. 당시는 지금처럼 천일염이 없고 암염으로 필요량을 조달했기에 소금은 곧 ‘백색 황금’으로 통했다. 모든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야 하니 소금은 그야말로 귀한 것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음식들은 대체로 우리 입맛에 짠 편인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이 귀한 소금을 듬뿍 쳐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 잘츠카머구트는 곧 ‘소금의 영지’란 뜻이니 이곳의 소금들이 ‘소금의 성’ 잘츠부르크를 부유한 도시로 만들었던 셈이다.

지금은 근대화에 밀려 소금채굴을 중단한 탓에 그 아름다운 경치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지금 할슈타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암염갱이 남아있다.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언덕에 건물들이 제비집처럼 붙어있어 호수와 그 집들이 기막히게 어울리는 곳이다. 아름다운 세계의 풍광을 찍은 엽서나 달력에서 많이 보던 장면으로 마을을 다니면 그림엽서 속을 다니는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파묻혀 지내고 싶은 곳이다. 마을 앞의 호수를 장식한다고 여러 조형물을 물 위에 띄웠는데 오히려 안 하느니 못했다. 이 아름다운 자연으로도 충분한데 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우리는 호수 위의 카페에 앉아 산 그림자가 호수에 어리는 것을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산비탈에 그림처럼 앉아있는 마을, 짙푸른 색의 호수, 호수에 어리는 산 그림자, 호수 위를 나르는 물새들…고즈넉한 오후의 풍경이 그림엽서처럼 정지된 장면으로 다가온다. 산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우리도 자리를 떴다. 그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숙소가 있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대주교의 도시, 소금의 성

 

잘츠부르크는 도시의 이름 그대로 소금으로 세워진 도시다. 주변 잘츠카머구트에서 채굴한 소금이 이 도시를 알프스 산중에 우뚝 세운 것이다. 7세기말 이곳의 성인으로 뒤에 지정된 루퍼트 주교가 이곳으로 와서 주교청을 세우고 성 페터 수도회와 논베르크 수녀원을 세움으로써 잘츠부르크는 알프스 산속에서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8세기말에는 칼 대제의 요청으로 대주교청으로 격상되었으며, 10세기말 신성로마제국이 성립하면서 오토 3세로부터 시장권, 주화권, 통행세권 등 자치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신성로마제국의 자치도시로 발전하였다. 잘츠부르크는 수많은 공국이 난립하던 시절 자치권을 가진 대주교의 도시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하지만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사이에 늘 정치적 갈등이 심했다.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르 7세의 권력 다툼 중에 교황의 편이었던 대주교 게프하르트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1077년 120m에 이르는 언덕 위에 호엔 잘츠부르크(Hohensalzburg) 성채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그 뒤 이 성채는 끊임없이 증개축을 되풀이하다 15세기 레온하르트 대주교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성채가 개축됐으며 무기고를 갖추고 대포를 설치하는 등의 전투용 성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잘츠부르크의 랜드 마크인 호엔잘츠부르크는 이런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대주교로서는 황제와 교황의 싸움 속에서 신변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셈이다. 대주교가 완전히 산 위의 성채에서 내려온 것은 전쟁이 잠잠해지고 세상이 안정된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호헨잘츠부르크 성채는 수비와 공격이 가능한 전투용 성으로서 건립되었다. 깍아 지른 바위 절벽 위에 난공불락의 견고한 요새를 건립한 것이다. 호헨잘츠부르크는 왕이 거주했던 궁전으로서 성이 아니라 전쟁 시에 필요한 성채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아름다운 외관보다는 실용을 강조하여 대포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요새를 지은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전투용 성으로서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내부에는 대주교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대주교의 방은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기도실과 성당, 도서실도 갖추고 있었다. 성채의 마당에는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도 있었고 심지어는 인형극 극장도 있어 이곳에서 문화생활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화려한 것이 주교관과 별 차이가 없는 듯했다. 성채에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어 대부분 전동열차를 탄다. 우리도 돔 광장의 언덕길을 올라 전동열차를 탔더니 성채 안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대신 내려올 때는 주변의 풍경도 볼 겸 걸어서 내려왔다.

사실 이 성채는 멀리서 볼 때 가장 멋있다. 어디서 보더라도 눈에 확 띤다. 언덕 위에서 시가지를 굽어보며 우람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어미 닭이 새끼들을 보호하려는 형상이다. 어찌 보면 이 성채의 모습을 통해서 아름다운 도시를 지키려는 강한 결의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높은 언덕 위에서 하얀 색으로 빛나는 성채는 결코 뺏길 수 없는, 소금으로 부를 쌓아올린 이 도시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호헨잘츠부르크는 이 도시의 영원한 상징이자 역사로 인식되는 것이다.

 

바로크의 도시

 

잘츠부르크는 호헨잘츠부르크로 인해 요새화된 도시의 이미지를 느끼지만 시가지는 완전히 바로크 풍이다. 대성당을 비롯하여 주교관인 레지덴츠와 그 주변의 건물, 미라벨 궁전 등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 북쪽의 ‘작은 로마’로 불리기도 한다. 전쟁이 잠잠해지고 세상이 안정된 17세기 이후 대주교는 산 위의 성채에서 시가지로 내려오게 되는데 그때 지어진 건물이 대성당과 주교관이다. 지금 잘츠부르크 구시가지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다.

이 바로크식 건축을 주도적으로 짓기 시작하여 잘츠부르크를 ‘북방의 로마’로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볼프 디트리히(Wolf Dietrich)대주교였다. 그는 화재로 소실된 대성당 터에 로마를 본떠서 바로크식의 거대한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대성당은 알프스 북쪽에서는 처음으로 지어진 바로크 성당이었다. 그 성당은 2대 대주교였던 팔리스 로드론에 의해서 완성되지만 디트리히의 계획은 이곳을 로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옆에 역시 바로크식의 화려한 주교관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 주교관도 18세기 팔리스 로드론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그 외에 광장을 중심으로 화려한 분수와 조각들도 로마를 본뜬 것이다.

대성당은 광장에 위치한 거대한 성모상을 앞세우고 양쪽에 쌍둥이 탑이 있는 이태리 바로크 양식이다. 가운데 지붕 위에서는 공위의 십자가를 들고 있는 예수상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외관은 미색의 대리석으로 장식하여 밝고 환한 느낌을 준다. 이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은 유럽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데 모차르트도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1779년부터 오르간 주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레지덴츠야말로 주교가 통치하는 잘츠부르크에서 정치, 종교, 외교의 중심 건물이다. 가운데 광장이 있는데 로마의 트레비 분수를 본뜬 거대한 바로크식 분수가 물을 뿜고 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보면 남쪽으로는 대성당이, 동,서쪽으로는 신구 레지덴츠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주택가가 있어 정치와 종교와 시민들의 삶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진정한 잘츠부르크의 중심 광장인 것이다. 레지덴츠 신관의 종루 바로크 탑에는 35개의 종 글로켄슈필이 있어 매일 7시, 11시, 18시에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한다. 완전히 바로크 일색이다.

대주교 디트리히가 꿈꿨던 도시의 모델은 교황이 다스리는 로마였다. 잘츠부르크 역시 왕이나 영주가 아닌 대주교가 통치하기에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일치된 그런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대성당, 주교관, 심지어는 분수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화려한 바로크 양식을 고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마의 상징성을 차용하여 잘츠부르크에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대주교 디트리히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주교의 신분이지만 세속적인 사랑도 중시하여 상인의 딸이었던 아름다운 여인 살로메 알트와의 사이에 무려 15명의 자식을 두었다. 게다가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지도 않고 공공연히 인정했다. 인간적인 아름다운 사랑으로 보아야 할지 절대 권력자의 문란한 사생활로 보아야 할지 어려운 문제지만, 이 일로 그는 가톨릭 교단이나 영주와의 갈등으로 인해 정치적 힘을 잃게 되었고, 1612년 체포되어 호헨잘츠부르크 요새에 감금되었다가 5년 뒤에 사망했다. 그가 살로메를 위해 지어준 바로크식 궁궐이 바로 지금의 미라벨 궁전인 알테나우 궁이었다. 디트리히가 실각한 뒤 살로메는 궁에서 쫓겨났으며 그 궁은 보수를 거쳐 ‘아름다운 경치’란 의미의 미라벨 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미라벨 궁은 디트리히와 살로메의 흔적보다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와 아이들이 흥겹게 뛰놀며 노래를 부르던 장소로 더 유명해졌다. 특히 분수를 돌며 <도레미 송>을 부르는 장면은 압권이다. 경쾌한 노래는 바로크식의 건물과 묘한 조화를 이뤄 한층 격조 있게 들린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성공은 경쾌한 노래를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치와 바로크풍 도시의 이미지에 접목시킴으로써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모차르트, 모차르트, 모차르트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곳을 다스리던 대주교가 아니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다. 잘자흐 강을 건너서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한 모차르트 초콜릿 가게를 만난다. 거기서 모차르트의 얼굴을 상표로 내세운 ‘모차르트쿠겔른’이라는 초콜릿 볼을 맛볼 수 있다. 비엔나에 ‘시시 초콜릿’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모차르트 초콜릿’이 있는 것이다. 하찮아 보이는 이런 초콜릿에 붙은 이름이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표상이 되는 것이다. 오죽 유명하면 과자의 상표로 등장했겠는가. 부다페스트에서 우리가 살던 옆집에 초콜릿 가게가 있었는데 그 가게가 바로 모차르트 초콜릿을 파는 가게였다. 모차르트 초콜릿은 유럽에서 꽤나 유명한 초콜릿이기에 관광기념품으로 인기가 높아 손님들이 많아 찾는다. 아마도 그 달콤한 속에는 모차르트 음악이 녹아있기 때문이리라.

모차르트는 이곳 구시가지의 번화가인 게트라이데가세(Getreidegasse)의 9번지에서 1756년 1월 27일 태어났다. 지금 그곳은 모차르트 생가라 하여 박물관으로 공개하고 있는데, 어린 시절의 바이올린, 건반 악기, 악보, 초상화, 편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많은 가게가 몰려있는 게트라이데가세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늘 사람들로 붐빈다. 이 거리는 중세의 전통 그대로 철제간판을 고수해 모든 상점이 중세식의 철제간판을 달고 있어 이채롭다. 철제간판에는 그 상점을 알리는 그림이나 엠블럼이 들어있는데 중세에 글을 모르던 사람들을 위해 고안한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맥도날드 햄버거 집도 중세식 철제간판을 달고 있어 간판만 보면 중세의 거리를 거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곳 거리의 상점들은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물건들을 많아 갖추고 있는데 특히 이곳의 특산물인 다양한 형태의 암염이 인기가 좋다. 여러 가지 허브를 첨가해서 가공한 것도 있고 천연 소금덩어리도 있는데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아 좋다. 이 도시의 이름이 소금이라는 ‘잘츠(Salz)'에서 유래했기에 이 도시를 기억하는 기념으로는 그만이다.

아내와 같이 옷 파는 상점에 들어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웃으며 “곤니찌와”라고 일본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화낼 수도 없고 난감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정체성은 밝혀야 하겠기에 다가가 “위아 코리안”이라 했더니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뀌며 싸늘해지는 것이었다. 물건을 안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가 물건을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제 값을 다주고 사면서도 영 개운치 않았다.

그들에게 일본은 일등국민이고 한국은 삼등국민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에게는 잘해주지만 한국이나 중국인들은 약간 경멸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유럽을 다니면서 이런 일을 수없이 겪었다. 처음에는 발끈했지만 나중에는 대꾸하기도 귀찮아 그냥 웃어주고 마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이 정도인 것을 어찌하겠나 싶었다. 다만 개인 여행객보다도 국가적 차원에서 이미지 관리나 홍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시가의 중심인 레지덴츠 광장 옆에는 모차르트 광장이 있고 그 중심에 모차르트 동상이 세워져 있다. 1842년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 동상이 세워졌고 그때부터 모차르트 음악제가 시작되었다 한다. 그런데 1917년 비엔나의 탁월한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가 이 도시로 오게 되면서 종합적인 잘츠부르크 축제로 확대되었다. 모차르트 음악을 위주로 1920년부터는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호프만스탈의 희곡 <예더만(Jedermann)>이 추가로 공연되어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모차르트를 통해 잘츠부르크의 근대적 문화콘텐츠가 만들어졌던 셈이다.

게트라이데가세의 뒤편 호프슈탈가세(Hofstallgasse)에 복합건물인 축제극장이 있고 그 옆에는 로마의 트레비 분수와 같은 화려한 ‘말 우물’이 있다. 산 밑의 바위를 파서 만든 대주교의 마구간에서 기르던 130마리나 되는 말이 물을 마시던 곳이다. 지금 그 말들은 사라지고 준마를 그린 대형 벽화만이 남아있어 옛날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잘츠부르크 축제는 처음엔 바위를 파서 만든 이 대주교의 마구간을 개조하여 시작되었다. 그것이 점차 번창하여 지금 3곳에 이르는 축제극장으로 발전되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은 2006년부터는 이 축제극장의 명칭이 아예 ‘모차르트 하우스’로 바뀌었다.

모차르트는 어떤 수식이나 찬사도 필요 없는 ‘음악의 신’ 혹은 ‘음악’ 그 자체다. 고흐가 누구나 좋아하는 화가라면, 모차르트도 세상사람 누구나 좋아하는 음악가다. 그러니 잘츠부르크로서는 모차르트를 대대적으로 띄워서 도시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활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그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런데 모차르트는 그의 천재성과 아들을 유명하게 만들려는 아버지의 수고로 잘츠부르크에 머무는 일보다 비엔나, 파리, 런던, 뮌헨,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녀야 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음악은 길 위에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게다가 24세 이후 인생의 후반기에는 아예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에 머물렀다. 거기서 콘스탄체와 결혼하고 하이든과도 교유하며 빈 고전파 음악의 양식을 확립했다. 이때 만들어졌던 작품이 그의 대표작인 <피가로의 결혼(1786)>, <돈 조반니(1787)>, <마술피리(1791)> 등이다. 음악적으로 보면 비엔나가 모차르트의 근거지인 셈이지만 여기는 바로 그의 고향이 아닌가. 구시가지에서 나와 신시가지로 들어가는 곳에도 모차르트가 살았다는 집이 있으며 잘자흐 강을 가로질러 모차르트 광장으로 이어지는 근대식 철제다리도 모차르트 다리로 이름붙일 정도로 모차르트의 흔적은 잘츠부르크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그렇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도시다. 모차르트로 인해 영혼을 얻고 모차르트로 인해 생명을 얻은 도시인 것이다. 그래서 잘츠부르크 어디를 가나 생명력이 넘치는 모차르트의 경쾌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잘츠부르크는 적어도 세 개의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하나는 호헨잘츠부르크로 대표되는 중세 ‘소금의 성’이란 이미지다. 소금으로 부를 축적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알프스의 산속에 거대한 성채를 쌓은 도시의 굳건한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정치와 종교를 일치시켜 ‘북방의 로마’를 만들었던 바로크적 이미지다. 구시가지의 대성당과 주교관을 중심으로 한 장소가 바로 그런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구시가지의 동쪽은 이런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심지어는 분수와 장식들조차 그런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반면 구시가지의 서쪽은 시민적이고 경쾌한 모차르트의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모차르트 생가를 중심으로 상점 거리인 게트라이데가세와 그 뒤로 이어지는 축제극장과 호프슈탈가세는 늘 사람들로 북적이며 그 앞의 대학광장은 토요일에는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변한다. 우리도 마침 토요일에 그곳에 가, 골동품 장터에서 그곳 사람들의 예전 생활품을 구경하다가 아내가 그림의 재료로 쓴다며 오래된 도자기와 자잘한 생활소품을 사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잘츠부르크는 중세 대주교의 도시로부터 바로크 시대를 거쳐 근대로 이어지면서 이제는 모차르트가 중심에 오게 된 셈이다. 모차르트는 진정 잘츠부르크의 중심 이미지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이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구시가를 나와 슈타츠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로 들어오는 초입에 유명한 캐롤 <고요한 밤>을 작곡한 요제프 무어(Joseph Mohr)의 생가도 있다. 그 옆으로 한적한 슈타인 소로(Steingasse)가 이어져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잘츠부르크는 인간이 사는 도시와 자연이 기막히게 어우러진 곳이다. 게다가 모차르트와 <사운드 오브 뮤직>,그리고 <고요한 밤>의 음악이 있어 그곳을 한층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알프스의 산속에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와 바로크 풍의 건물들, 그리고 경쾌한 음악으로 이곳이 지상낙원임을 알려준다. 인간의 삶과 자연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가장 이상적인 조합을 잘츠부르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사실 잘츠부르크가 너무 마음에 들어 그곳을 우리 나름대로 ‘아름다운 도시’로 선정하고 하루를 더 묵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아, 아름다운 잘츠부르크여! 잘츠부르크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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