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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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에서 제3제국으로- 뉘른베르크(Nurnberg)

joyman 쪽지





쾰른에서 대성당을 본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라인 강을 따라 ‘대학과 낭만의 도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내려갔다. 마침 기찻길이 라인 강변을 따라 있어서 라인 강과 고성들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우리가 애초 계획했던 독일 여행의 루트는 '고성가도'인 하이델베르크, 로텐부르크(Rothenburg), 뉘른베르크를 거쳐 다시 '로맨틱 가도'로 방향을 바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를 본 다음 뮌헨(München)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와 퓌센(Füssen)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이 경로는 고성과 문화유적 등 볼거리가 풍성하게 갖춰져 있어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루트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여 보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구시가지가 규모도 작은데다가 하이델베르크 성이 여러 번 전화(戰禍)를 겪고 많이 파괴되어서 볼 것이 그리 많지 않아 하루면 충분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여행 정보를 검색해 보니 멀지 않은 곳인 튀빙겐(Tübingen)에 독일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호엔촐레른 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장 아름답다는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은 퓌센에 가서 볼 예정이었기에 여기까지 왔으니 아예 독일의 아름다운 성은 다 보자고 아내와 의기투합하여 하루 날을 잡아 튀빙겐으로 향했다. 그 때까지는 좋았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날씨도 추운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었다. 호엔촐레른 성이 있다는 헤닝겐에 내렸지만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정말 '진퇴양난(進退兩難)'이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기왕 왔으니 가자고 강행하여 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교통수단이 택시 밖에 없었다.) 성을 오가는 셔틀버스가 다니는 산중턱까지 올라갔다. 그리곤 비를 맞아가며 셔틀버스를 타고 성으로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더 세게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산 정상에 위치한 성에 도착하니 정말 비와 물안개가 뒤섞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당연히 사진은 찍을 수도 없었고 구경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할 판이었다. 그래도 용감하게 성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비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부지하세월이라. 어쩔 수 없어 성안을 돌아다니다 그냥 내려가 대학도시로 유명한 튀빙겐이나 보자고 내려오는 셔틀버스를 다시 집어타고 산을 내려왔다.

그 순간 사고가 일어났다. 평소 발밑을 잘 살피지 않고 덤벙대는 성격에다가 마침 비가 와서 버스의 철제계단이 물기로 미끄러운데 아무 생각 없이 내리다가 그만 미끄러진 것이다. 버스가 높아 두 번을 미끄러지면서 허리부분이 꽝 소리가 날 정도로 철제계단에 세게 부딪쳤다. 그리곤 땅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엉덩이와 허리가 너무 아파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제 드디어 허리가 나가 장애인이 됐구나'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내와 버스기사가 들쳐 업고 사무실로 가서 앰뷸런스를 불렀다. 한국에서도 타보지 않았던 앰뷸런스를 독일까지 와서 타고 헤닝겐 시내 병원의 응급실로 향했다. 참 기가 막혔다. 독일에 구경하러 왔다가 병원신세까지 지다니…

다행히 독일의 병원 시스템은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서 여권을 보지도 않고 황급히 침대에 눕히고는 X 레이부터 찍는 것이었다. 조금 있더니 여자의사가 서둘러 다가와 "당신 뼈는 이상이 없으니 약이나 바르고 푹 쉬면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세게 부딪쳤는데 뼈에 이상이 없다니 이상해서 그들이 보여주는 필름을 자세히 보니 정말 멀쩡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해야 할까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엉덩이 부분이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아무래도 신경 쪽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 여겼지만 달리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독일의사는 타박상이라며 진단서를 끊어주고 처방전을 주며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격려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곤 다음에 어디를 갈 거냐고 물어 프랑크푸르트라고 했더니 그곳의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보여주고 치료하면 된다고 했다. 게다가 병원비는 자기들이 버스회사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가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돈보다도 환자의 치료가 우선인 유럽 의료 복지시스템의 철저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일단 모든 일정을 다 취소하고 우선 가까운 대도시인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어차피 뼈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병원치료는 의미가 없고 우리의 한의원과 같은 침술원을 찾을 생각을 하고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자마자 호텔 근처의 한인식당을 찾아갔다. 우선 저녁을 먹으며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주인아저씨가 자신도 예전에 축구선수여서 사정을 아는데 어혈이 진 것이라며 웅담으로 만든 알약까지 챙겨주고 친절하게도 한국 사람이 하는 침술원까지 소개시켜 줬다.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이 이런 것이리라.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것인 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 덕분에 프랑크푸르트에 무려 사흘이나 머물면서 침술원에 가서 침을 맞으니 어느 정도 운신이 가능했다. 운신이라고 해야 간신히 발을 떼는 정도였다. 아내의 부축을 받아가며 한발 두발 겨우 옮겨가며 걷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작 본인보다도 환자를 부축해서 다니느라 아내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내는 그냥 부다페스트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냥 가기 아쉬워 한 군데만 더 보자고 몸을 어기적거리며 찾아간 곳이 바로 뉘른베르크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작은 보석상자’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선 어차피 뮌헨에 가서 기차를 타야 하니 그 중간에 위치한 뉘른베르크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 주의 제2 도시로 특히 독일에서 르네상스를 열었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가 살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 화가가 살았던 곳이니 그 자취를 찾아보자고 아내가 제의를 하여 뮌헨보다는 우선 뉘른베르크를 택한 것이었다. 더욱이 뉘른베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제국국회가 개최되었던 곳이고,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며, 장난감의 도시로도 유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히틀러가 이 도시를 좋아해 나치의 전당대회를 여기서 개최하고 저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을 재판했던 ‘뉘른베르크 재판’이 여기서 진행되어 역사의 심판이 내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파괴와 단죄가 같은 곳에서 진행됐으니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도시는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중앙역에 내려 둥근 탑의 쾨니히 성문과 환상성벽으로 둘러싸인 구 시가지를 보니 정말 중세의 독일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사가 급격한 붉은 색의 뾰족 지붕과 회를 바르고 목재가 겉으로 드러난 예쁜 격자무늬의 건물 외벽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북유럽 집들이 옛 길을 따라 오롯이 모여 있었다. 사진을 보며 상상해왔던 독일의 전형적인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독일 혹은 게르만 양식이다. 눈이 많이 오고 춥기에 지붕을 뾰족하게 하고 벽을 두껍게 하여 추위를 방비하는 대신 겉에 회를 바르고 나무를 대어 외관을 아름답게 치장한 것이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봤던 그 모습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아픈 것도 잊고 이 아름다운 곳을 다닐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뉘른베르크는 정말 ‘독일식’으로 예쁜 도시였다. 이탈리아에 피렌체가 있고, 프랑스에 파리가 있으며, 스페인에 세비야가 있다면 독일에 뉘른베르크가 있는 것이다. 가장 독일다운 아름다운 도시를 본 우리는 보석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즐거웠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둥그런 성벽이며, 목조 격자무늬가 선명한 예쁜 집들이며, 깨끗하고 활기가 넘치는 중세의 거리며, 시가지를 가로 지르는 페그니츠(Pegnitz) 강과 오래된 다리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형성하며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2차 대전의 공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복구되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뉘른베르크의 별칭을 ‘신성로마제국의 작은 보석상자’로 불렀던 것이 이해가 됐다.

신성로마제국은 예전 독일의 이름인 셈인데 분열된 독일을 통일시키고 이탈리아로 원정하여 교황 요한 12세를 이탈리아의 귀족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준 오토 1세(OttoⅠ,재위;936~973)에 의해 처음으로 불려졌다. 962년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오토 1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이 거행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이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영토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왕들과 제후들 사이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맹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의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체코 등의 북유럽 지역의 왕이나 제후들 중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직위를 받는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물론 이탈리아에도 관심을 가져 교황과 가톨릭을 보호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신성로마의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은 7명의 선제후(황제를 선출한다 해서 그렇게 불렸다.)에게 있었는데 그들은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와 브란텐부르크, 작센, 팔츠, 보헤미아의 제후들이었다. 선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했고, 대관식은 아헨 대성당에서 했으며 독일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거처했다. 뉘른베르크도 신성로마 황제가 거처하는 거성 ‘카이저 부르크(Kaiserburg)’가 구 시가지의 북쪽 끝자락의 언덕에 있다. 이 성은 1050년에 축성되어 약 22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황제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성 내부에는 황제의 방과 기사의 방이 있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2층 예배당도 갖추고 있다.

성의 안마당에 있는 브르넨하우스에는 48m 깊이의 우물이 있어 그것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려주기 위해 안내인이 물을 떨구어 보기도 하고 촛불을 넣어 그 깊이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언덕에 성이 위치해 우물이 그렇게 깊은 것이리라. 성 내부는 생각보다 단조롭고 썰렁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보았던 것처럼 황제의 성이라 화려하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원래 검소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곳을 옮겨다니다보니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장식 하나 없이 단조로운 것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그리 대단한 부를 소유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이곳 뉘른베르크는 1356년 “신성로마제국의 모든 황제는 뉘른베르크에서 첫 번째 제국국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카를4세의 ‘금인칙서’ 덕분에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적인 도시가 되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구 시가지의 중앙광장에 위치한 파이프 오르간 모양의 성모교회에서는 정오에 맞춰 시계 인형이 도는데 그 인형들은 각각 이곳에 영광을 가져다 준 카를 4세와 7명의 선제후들로 구성되어있다. 1509년 뉘른베르크의 장인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12시가 되면 성모교회의 꼭대기에 있는 시계 밑에서 이들이 나와 빙글빙글 돌기에 이를 보려는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것뿐이 아니다. 광장에 있는 19m 높이의 황금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샘(Schoner Brunnen)’에도 이들 7명의 선제후를 동상으로 만들어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이 아름다운 샘은 황금색의 고리를 세 번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신혼부부나 여행객들이 다가와 고리를 돌리곤 하는 곳이다. 팔각형 피라미드 모양 위에 40명의 인물을 동상으로 만들어 장식했는데 그 40명의 인물들은 신성로마제국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맨 위에는 모세와 7명의 예언자가 있으며, 그 다음은 신약복음 저자와 교회 창시자가 장식되었고, 그 밑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7명의 선제후, 그리고 9명의 영웅이 뒤따르고 있다. 즉 예언자와 사도들, 그리고 교회창시자와 성인, 황제와 선제후와 영웅들이 신성로마제국을 이루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곳이 중세기에 역대 황제들의 보호 아래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도시로 발전했기에 이런 상징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 신성로마제국의 영광은 1806년 나폴레옹에게 패망하여 라인동맹 16영방이 탈퇴하고 프란츠 2세가 황제의 직위를 사양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도 무려 800년 이상 유지된 셈이다. 뉘른베르크의 운명도 신성로마제국의 소멸과 함께 내리막길을 걸어 바이에른 주에 편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최초로 1835년에 철도가 연결되면서 근대 공업단지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특히 예전부터 이름을 떨쳤던 장난감 제작을 근대 공업과 연결시키면서 장난감 문화산업으로 도시는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크리스마스 장터로 흥겨운 장난감의 도시

 

원래 뉘른베르크는 이미 중세에 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들이 많아 장난감 도시로 이름을 떨쳤다. 목제 장난감을 비롯하여 주석으로 만든 장난감들이 상인들의 손을 통해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한다. 처음에는 뉘른베르크 근처의 산악 지역에서 나무를 이용해서 사람이나 동물들을 정교하게 조각하고 색을 입혀서 이들 장난감들을 제작했다. 이것이 뉘른베르크의 장난감 상인들에 의해 세계 각지로 팔려나가면서 ‘장난감 도시’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장난감 제작과 판매의 전통이 근대 산업구조와 맞물려 장난감 산업으로 발전된 것이다. 장난감이라는 어찌 보면 하찮은 아이템으로 한 도시의 산업을 발전시킨 창의력과 저력이 놀랍다.

중앙역 바로 앞의 구 시가지로 들어가는 쾨니히 문 옆에는 이런 장인들이 모여 살았던 ‘수공예인 광장(Handwerker Hof)'이 남아 있어 이곳에서 장인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살았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아직도 그곳에는 목제와 철제로 된 각종 장난감이나 기념품을 만들어 팔고 있어 그 시절의 분위기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한다.

뒤러의 집에서 내려오는 길에 다른 도시에는 보기 어려운 ‘장난감 박물관(Spielzeugmuseum)’도 있어 이곳이 장난감 도시임을 실감케 하는데 전시된 장난감의 수준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인형을 비롯하여 집의 모형과 전기나 증기를 이용한 움직이는 장난감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다. 특히 기차 모형은 장난감이라기보다 정교한 기계장치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현재는 이곳에 플라이쉬만, SGB, Trix 같은 모형 기차 회사가 남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고 한다. 장난감의 주종은 당연히 인형인데 크기와 모양, 제재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함이 놀랍다. 현재 이곳에는 Playmobile, Big, Carrera 등의 인형제작회사가 있어 세계 최고 품질의 장난감을 제작한다고 한다. 뉘른베르크가 세계 장난감의 메카이기 때문에 해마다 70여 개국 이상의 국가가 참여하는 대규모 장난감 박람회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뉘른베르크는 장난감으로 이름을 알리고 장난감으로 먹고 사는 셈이다.

일견 하찮아 보이는 장난감이 한 도시를 먹여 살리는 데에는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장인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백 년을 이어서 장난감 제작에만 매달렸으니 그 숙련된 기술과 정보는 엄청난 것이다. 문제는 한 우물을 파는 자세일 것인데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길드를 조직해 지금의 노동조합처럼 장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리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고 이것이 장인정신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즉 물건을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이 또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대대로 이어질 수 있지 않았겠는가. 오늘 날 독일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것은 이런 장인들의 자부심이나 노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독일이 가장 정확하고 빈틈이 없다. 그래서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안심이 된다. 어떤 일이 있던지 속는 일은 없다. 음식점에 가더라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쪽 지역은 아무 것도 서비스하지 않으면서 대부분 10~15% 정도의 팁을 계산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독일은 그런 적이 없다. 고마워서 음식 값을 계산하고 남은 돈을 테이블에 놓고 나오면 따라 나오면서 “당케 쉔”을 연발한다. 이런 정확하고 정직한 삶의 자세는 물건을 만드는데 빈틈이 없도록 했고 그것이 오늘의 기술 강국으로서 독일을 만든 것이리라.

장난감은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것으로 명성을 날리니 당연히 크리스마스 마켓이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크리스마스 장터’인데 이때는 아이들에게 줄 선물이 가장 인기가 있으니 장난감으로 유명한 뉘른베르크가 부상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장터가 뉘른베르크에서 열린다. 16세기 중반부터 그 장터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셈이다.

우리가 뉘른베르크에 갔을 때는 여름이라 크리스마스 장터를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살았던 부다페스트에서 중심가에 위치한 뵈뢰슈머르티 광장을 온통 크리스마스 장터로 만든 것을 보았다. 우선 광장의 중앙에 큰 전나무를 베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그 옆에 작은 마구간에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꾸며 놓았으며 광장을 둘러 온통 점포들을 조성했다. 무슨 행사가 있을 때 천막으로 부스를 만들어 온갖 물건을 파는 우리의 경우와 유사하지만 크리스마스 장터에는 축제의 성격이 강하게 들어있다. 부스도 나무로 예쁘게 만들고 물건도 정성스럽게 진열하고 무대를 꾸며 다양한 이벤트를 공연하여 온 동네가 즐기는 축제로 만들었다. 보통 12월이 시작되면 행사를 시작해서 1월 초까지 이어진다. 우리의 설이나 추석처럼 그렇게 흥청망청 거리고 한 달 이상을 즐기는 것이 크리스마스 장터인 것이다.

뉘른베르크에서 우리는 장난감 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나무로 깍은 콧수염 난 독일병정 인형을 샀다. 이 도시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크리스마스 장터에는 와보지 못했지만 온갖 장난감으로 가득한 그 동화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 상상이 간다.

 

알브레히트 뒤러를 찾아서

 

독일에서 르네상스를 열었던 뒤러가 누군지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르네상스 하면 워낙 이탈리아를 떠올리고 그 중에서도 세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에 당시 미술의 변방 독일에서 르네상스를 열었던 뒤러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거나 특별히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가 그린 저 유명한 <기도하는 손>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그림이다. 섬세하고 가는 손이 포개져 있는 이 그림은 주로 버스의 앞 유리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와 함께 붙어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른바 ‘이발소 그림’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만원버스에 짐짝처럼 실려 가던 시절, 버스의 앞에 붙은 <기도하는 손>이나 <소녀의 기도>는 묘하게 마음의 깊은 곳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아마도 하루하루가 힘겨웠던 시절을 보내야했기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는 그 힘든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았던가 싶다. 그런데 바로 그 그림이 ‘이발소 그림’이 아니라 독일에서 르네상스를 열었던 대가 뒤러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감동적이었구나.

뉘른베르크가 일찍부터 장난감의 도시로 이름을 떨쳐 조각과 판각 기술이 발달한 탓에 뒤러의 가족도 일찍이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1455년경 뒤러의 아버지는 헝가리를 떠나 뉘른베르크에 정착하여 이곳이 고향인 바르바라 홀퍼와 결혼했다. 뒤러의 아버지는 금을 세공하는 장인이었기 때문에 금세공과 조각으로 유명한 이곳에 머물렀던 것이었다. 그래서 뒤러도 아버지를 따라 처음에는 금세공 기술을 배우고 그 뒤 목판, 동판을 거쳐 수채화, 유화로 영역을 확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금세공사인 아버지의 밑에서 일을 배우다가 16세 되던 해인 1486년 아버지의 주선으로 뉘른베르크에서 목판 삽화가로 유명한 미카엘 볼케무트의 도제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3년 동안 도제로 지내면서 목판화를 통해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미술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다.

그가 도제 훈련을 마친 때가 19세 되던 1489년이었다. 그는 더 배우기 위해 바젤, 스트라스부르, 비엔나, 베네치아 등을 여행했는데 특히 그는 1494년~1495년의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피렌체,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화가들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되어 그의 그림이 고딕적 분위기에서 이상미를 추구하는 르네상스의 일반적 경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뒤러는 이탈리아 미술에 감동을 받고 10년 뒤 결혼하고 다시 이탈리아를 찾았다. 두 번째로 1505년에서 1507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는 화려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접하면서 그의 그림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거기서 뒤러는 조반니 벨리니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고 자신과 미켈란젤로가 관점이 같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벨리니나 다빈치는 뒤러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만 미켈란젤로와는 4살 차이로 거의 동년배였다. 특히 베네치아 화파의 대부 벨리니의 화려하고 섬세한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아 그의 그림이 화려하고 섬세한 경향으로 나아가게 됐던 것이다.

그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를 얼마나 자신의 정신적 고향으로 삼고 있는지는 그가 베네치아를 떠날 때 친하게 지냈던 인문주의자 빌리발트 피르크하이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오, 이제 태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춥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신사로 지냈지만 고향에서는 한낱 식객에 지나지 않을 것이네.”라고 이탈리아를 떠나는 자기의 참담한 심정을 술회할 정도였다.

이 무렵 뒤러가 그린 <자화상>이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고전회화관)에 있는데 차분하고 잘 생긴 얼굴에 깊이 있는 눈매가 사람들을 압도한다. 이 <자화상>은 예수의 얼굴과 비슷해 예수의 모습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아내도 처음 이 그림을 접했을 때 예수를 그린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뭔가 결의에 찬 모습 같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자신의 내면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탁월한 데생 능력을 가진 뒤러는 전성기를 맞이한 피렌체, 베네치아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도 정교한 그림을 그렸는데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성삼위에 대한 경배>가 그 절정을 보여준다. 예수를 중심으로 구약, 신약의 인물들이 반원형을 이루며 운집한 그림으로 베네치아 식의 화려한 색채 사용과 옷의 무늬까지 묘사할 정도의 북유럽 회화의 섬세함이 조화를 이루어 독일 르네상스의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뒤러는 이렇게 정신적 심화와 내면성을 작품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근대적 회화의 길을 개척했다. 이탈리아의 티치아노나 스페인의 엘 그레코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의 뒤러도 인간의 깊은 내면성을 드러내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미술사의 화려한 족적을 남긴 유화 작품보다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은 동물과 식물을 정밀하게 그린 작품들이었다. 뒤러가 살았던 집을 갔다가 거기서 동식물을 드로잉 한 것을 보았는데 거의 오늘날의 그래픽 수준이었다. 동식물의 특징들을 잡아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 뒤러라는 이름을 지우고 책으로 낸다면 <현대 그래픽 동식물 도감>으로 보일 정도다. 어떻게 이 정도의 ‘현대적’인 기법이 가능했을까? 그의 뛰어난 묘사 능력과 내면세계를 그리고자 했던 욕구가 만나 이런 독특하고 현대적인 그림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그 집 앞에는 뒤러가 그린 <젊은 토끼>를 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다소 이상하고 기괴하게 생긴 토끼를 볼 수 있다. 그 조각을 통해 뒤러가 얼마나 기발하게 사물을 묘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마치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 나오는 토끼처럼 생겨 우리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뒤러의 집은 구시가지 북쪽의 티어가르트너(Tiergärtner) 성문 앞에 있는데 5층 규모의 전형적인 독일식 집이다. 뒤러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이 집을 사들여 대략 1507년부터 1528년 죽을 때까지 살았다 한다. 내부는 생활하는 공간과 작업하는 공간이 나누어져 있는데 그의 작업실은 주로 목판화와 동판화를 만들고 찍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지금도 작업이 가능하게 보존을 잘 해서 안내인이 뒤러의 판화 작업을 설명하면서 직접 시연해 보이기도 할 정도다. 마치 뒤러가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면서 작업실로 들어설 것만 같다.

뉘른베르크는 독일의 최고 화가 뒤러를 보유함으로써 뒤러와 그의 그림들의 이미지를 간직한 도시가 되었다. 마침 중앙 광장에서 위로 올라가면 1340년에 지어졌던 옛날 시청사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들은 바로는 1520년 뒤러가 이곳에 벽화를 그렸다 한다. 엘 그레코가 자신이 사랑하는 똘레도의 전경을 그린 것처럼 뒤러도 자신의 고향인 뉘른베르크의 모습을 그렸으리라. 뒤러의 화집을 보니 뉘른베르크를 동판화로 제작한 것이 있는데 이런 식의 그림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그 시청사가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 보는 것은 1960년대에 새로 복원한 건물이어서 벽화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 아쉬움이 컸다.

뒤러는 죽기 2년 전인 1526년 뉘른베르크 시를 위해 <네 명의 사도>라는 그림을 그려 시에 기부했는데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에 있는 그 그림은 두 장의 패널화로 이루어져 있다. 한 장에는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드로와 복음의 저자 요한이 성경을 들여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고, 다른 한 장에는 지팡이를 쥐고 있는 바울과 역시 복음의 저자인 마르코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마르코는 바울을 쳐다보고 바울은 화면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신념에 찬 사도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걱정하고 의심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그렸을까?

뒤러는 1512년부터는 이미 최고의 화가로 명성을 얻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언 1세에게 고용되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 무렵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자 뒤러는 주저 없이 아우구스부르크로 직접 가서 루터를 만나고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이 <네 명의 사도>는 종교개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여 가톨릭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림이다. 예수의 최고 제자였던 베드로와 바울, 4대복음의 저자인 요한과 마르코가 불안에 떨며 걱정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이렇게 “성서만이 권위가 있고, 의인(義認)은 선행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루터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림 속의 인물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이렇지 않았을까?

베드로; 이봐 요한, 오직 <성서>만이 권위가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가?

요한; 글쎄, 어디 한번 보지. 어, 정말 그런데.(걱정스럽게 <성서>를 들여다 본다.)

바울; 이봐 마르코, 의인(義認)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네.(사람들이 이걸

알 텐데 하는 식으로 바깥을 보며 눈치를 살핀다.)

마르코; 그러면 어떡하지. 지금 교회에서 선행을 하라고 면죄부를 팔고 있잖아.(불안해

하며 바울의 얼굴을 쳐다본다.)

뒤러는 그림을 통해서 독일의 르네상스를 개척했지만 또한 당시의 민감한 사안이었던 종교개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도 한 셈이다. 피렌체의 미술가 조르조 바사리는 이탈리아의 화가와 조각가를 언급하면서 독일의 뒤러에게도 그 지면을 할애해 “진실로 위대한 화가이자 가장 아름다운 동판화의 창작자”라고 평할 정도로 뒤러는 독일뿐만 아니라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도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았다. 뒤러의 집에서 내려가는 바이스게르버 소로(Weissgerber gasse)에도 뒤러의 동상이 우뚝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뒤러는 분명 독일 예술의 자부심이고 뉘른베르크의 긍지인 것이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신성한 독일예술의 찬양

 

뒤러가 한창 활동하던 무렵인 16세기 뉘른베르크는 수공업이 발달한 도시답게 다양한 수공업자들의 길드가 조직됐는데 그 중에는 ‘마에스터 징어(Meistersinger)조합’도 있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가수조합’인 셈이다. 마에스터 징어는 ‘시정가수’이지만 궁정음악인 미네징거를 모방 계승한 것으로 엄격한 음악적 규칙들을 지켜야 했다. 우리도 조선후기에 김천택(金天澤)이나 김수장(金壽長)과 같은 이른바 ‘평민가객’들이 등장하여 시조를 발전시켰던 바, 이와 유사한 형태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마에스터 징어였던 것이다.

바그너가 이런 시대와 인물들을 배경으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내용은 이렇다.

아름다운 처녀 에바의 아버지인 금세공사 포크너는 성요한 축제일에 마에스터 징어 경연대회를 열고 여기서 우승한 자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이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한편 에바와 사랑하는 사이인 발터는 할 수 없이 마에스터 징어 조합에 들어가려고 오디션을 보지만 노래의 규칙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낙망하고 만다. 이제 에바는 마을의 서기인 베그메서가 차지할 판이다. 발터는 어쩔 수 없어 에바와 도망치자고 하지만 이 역시 여의치 못했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난다. 구원자는 구두수선공이자 마이스터 징어인 한스 작스로 그 역시 에바를 짝사랑하지만 에바가 좋아하는 발터에게 양보하기로 하고 발터에게 노래를 가르친다. 그 결과 발터는 마에스터 징어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에바와의 사랑도 이루게 한다.

이 오페라는 16세기 뉘른베르크에 살았던 시정가수들의 삶과 사랑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를 통해서 당시 뉘른베르크의 사람들이 얼마나 음악과 예술을 사랑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확대하면 독일 민중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음악과 예술을 얼마나 애호했는가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특히 바그너를 좋아했던 히틀러에 의해 독일국민의 예술성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홍보되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든 시정가수들이 총출동하여 ‘신성한 독일 예술의 영광’을 찬양하는 합창을 부른다. 그야말로 ‘독일예술 만세!’다.

독일 국민의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그너에 의해 16세기 뉘른베르크의 마에스터 징어가 선택됐다는 것은 이 도시가 그만큼 높은 음악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독일의 르네상스를 개척한 뒤러와 동시기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마에스터 징어를 통하여 뉘른베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예술의 본향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것이고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이에 대한 확인서인 셈이다.

 

뉘른베르크를 떠도는 제3제국의 망령

 

뉘른베르크가 이렇게 신성로마제국의 작은 보석상자같이 아름다운 도시로, 크리스마스 장터가 흥겨운 장난감의 도시로, 르네상스를 열었던 뒤러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대변되는 독일예술의 본향이라는 이미지를 보유한 도시로 규정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여기에 제3제국의 망령이 끼어든다. 히틀러는 유난히 이 도시를 좋아해 여기서 1927년부터 나치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유대인을 탄압하는 그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했다. 아마도 뉘른베르크가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적인 도시이기에 그 뒤를 이었다고 여기는 제3제국으로서는 게르만의 문화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도시가 탐이 났으리라. (마침 여기에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독일의 예술과 문화에 관한 자료를 보유한 독일에서 가장 큰 게르만 국립박물관이 있기도 하다.)그 뒤 이 도시는 제3제국의 정신적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매년 나치 전당대회를 개최했는데 그 절정은 1934년 전당대회다. 히틀러는 나치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르에게 10만 명의 군대가 열병식을 거행할 체펠린 광장과 40만 명이 들어갈 게르만 스타디움의 건설을 지시했고,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였던 것이다. 당시 전당대회의 장면이 레니 리벤슈탈이 만든 <의지의 승리>란 제목의 홍보영상으로 남아있어 그 광기의 현장을 직접 보여준다.

그 영상물을 보면 정말 집단의 광기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처음 히틀러가 공군 전용기를 타고 뉘른베르크의 창공을 날아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아래로 아름다운 뉘른베르크의 카이저부르크와 뾰족 지붕과 성벽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건물 위로 나치의 깃발이 드리어져 있다. 고색창연한 중세식 건물에 드리어진 나치의 깃발은 묘한 느낌을 준다.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이미지를 뺏어와 제3제국의 그것으로 덮어씌운 것이다.

전당대회의 하이라이트는 게르만 스타디움에서의 히틀러의 연설과 체펠린 광장에서의 열병인데 그야말로 집단 광기의 도가니다. 거대한 독수리 상(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이 나치의 휘장을 잡고 있는 연단에서 마치 신이 강림하듯이 히틀러가 집중조명을 받으며 나타나 선동적안 어투로 연설을 할 때마다 운집한 100만 명이 넘는 군인들과 당원들은 거의 광적으로 발악을 해댄다. 거기에 이어지는 탁월한 선동가이자 나치의 2인자인 루돌프 헤쓰의 멘트. “독일이 히틀러고, 히틀러가 독일입니다!” 그러자 분위기는 군중들의 연호하는 소리로 절정에 이른다. 거의 미쳐서 발악을 해대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체펠린 광장에서의 열병식도 엄청나다. 10만 명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군인들이 나치의 독수리 휘장과 깃발을 앞세우며 행진하는 모습은 로마제국의 그것과 상당히 닮았다. 히틀러도 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의 뒤를 이어 자신의 제국을 제3제국이라 했으니 로마제국의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충성서약’이 이어진다. “우리는 당신의 명령만을 듣고, 당신을 위해서만 싸운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집단발언들이 검은 색 군복의 친위대, 돌격대들의 입을 통해서 외쳐진다. 이 집단의 광기! 루카치가 말한 ‘이성의 몰락’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가장 끔찍한 장면은 이 아름다운 도시의 중앙광장에서 친위대와 나치 돌격대등 핵심부대의 사열식을 거행하는 장면이다. 주변의 아름다운 건물에서는 나치의 휘장이 걸려있고 검은 제복의 군인들이 성모교회와 아름다운 샘을 지나 시가지를 행진하는 장면은 이 신성한 도시가 제3제국의 군인들에게 유린당하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우리가 뉘른베르크 구 시청사를 방문했을 때도 마침 2차 대전 당시의 사진을 전시했는데 히틀러와 그의 군인들이 이 도시에서 시가행진을 하는 장면이 많이 있었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도시가 무슨 죄가 있냐마는 나치의 망령이 이 도시를 지배하면서 뉘른베르크는 그 죄악의 이미지들로 유린당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를 씻기 위해 1945년 이곳에서 저 유명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여기서 진행되지 않았겠는가.

우리도 체펠린 광장과 게르만 스타디움에 가보자 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둘이 교외선을 탔다. 두첸트 역에서 내리라는 말을 듣고 가고 있는데 독일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계속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날이 독일과 벨기에의 국가 대항전이 있는 날이었다. 뉘른베르크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하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러 가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다니며 본 독일인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날따라 유난히 거칠고 시끄러웠다. 워낙 많은 사람이 타다 보니 기차가 아예 스타디움까지만 운행하는데 마침 그곳이 두첸트 역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상냥하고 친절했던 독일 사람들이 독일기를 흔들며 집단의 광기에 편승해 거칠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나치의 망령이 부활한 것 같아 섬쩍지근했다. 은근히 두려웠지만 나이 먹은 우리를 어쩌랴 싶어 태연한 척 행동했다. 나치의 전당대회 장소를 둘러보는데 나치의 망령이 어른거려 효과는 그만이었지만 마음은 조마조마 했다.

지금 그곳은 잡초에 덮인 콘크리트 구조만 남아있어 폐허를 방불케 하는데 기록영상을 생각하면 머리털이 곤두선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롤라 스케이트도 타고 공도 차며 자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제3제국의 상처가 너무 아득한 것이기 때문일까? 왜 그곳을 철거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유린당한 상처를 그대로 두어 교훈을 삼고자 한 것일까? 하지만 독일인의 친절함과 철저함 속에 감춰진 나치의 망령이 언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다른 나라보다도 독일은 유난히 민족주의가 강하다. 독일 축구팀을 보면 네덜란드나 프랑스와 달리 흑인이 한명도 없을 정도로 모두 게르만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리를 다녀도 유색인종은 눈에 별로 띄지 않는다. 그만큼 파시즘이 대두할 수 있는 토양이 조성돼 있기도 하다. 독일은 2차 대전의 패전으로 파시즘의 망령을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히 제거했다지만 정치적 결단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서 정말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광적으로 열광하는 저들을 보면서 일본이 걸핏하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식민지 지배를 침략전쟁이 아니라고 하듯이 그들 게르만 민족의 핏속에도 파시즘으로 갈 수 있는 유전자가 들어있지 않은가 걱정이 앞선다. 이브시모노 감독이 2000년에 만든 <뉘른베르크>에서 공군원수였던 헤르만 괴링이 한 말, “독일인은 둘이면 협상을 하고, 셋이면 전쟁을 한다.”는 궤변이 귓가를 맴돌았다.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를 뒤로 하고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맛있는 뉘른베르크 소시지

 

체펠린 광장에서 돌아온 우리는 요기를 위해 독일에서 가장 맛있다는 뉘른베르크의 소시지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곳에는 소시지로 유명한 식당이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1419년에 창업했다는 ‘춤 골든 슈테른(우리말로 번역하면 황금별 식당)’이고 다른 하나는 석탄불에 소시지를 직접 구어 준다는 ‘브라트부르스트호이슬레’로 중세풍의 굴뚝에서는 소시지를 훈제하는 연기가 쉴 새 없이 오르고 있는 곳이다. 우리는 게르만 박물관 근처에 있는 ‘춤 골든 스테른’을 찾았다. 낡은 집 벽면에는 창업연도와 금색별을 장식했으며, 내부도 600년 정도가 됐으니 고색창연하여 정말 중세의 독일식당에 온 것 같았다. 중세의 갑옷 입은 기사들과 장인들이 여기서 소시지와 맥주를 먹었을 것이다. 거기서 뉘른베르크 소시지와 이곳에서 만든 맥주를 시켰는데 소시지의 아삭아삭한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했다.

비록 아픈 몸을 이끌고 왔지만 그 아름다움에 반해서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이 도시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보석 같은 도시로, 예쁜 장난감의 도시로, 뒤러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인해 독일 예술의 고장으로 뉘른베르크는 각인돼 왔지만 히틀러에 의해 제3제국의 망령이 떠도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뉘른베르크는 철저히 유린되어 깊은 상처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처럼 상처 없는 도시가 어디 있으랴마는 뉘른베르크는 세계사의 지각변동과 맞물려 그 상처가 더 깊으리라. 그래서 뉘른베르크는 더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제3제국의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나 다시 옛날의 아름다움을 회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뉘른베르크를 만나서 우리는 행복했다. 이제 떠나할 시간이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뮌헨 행 기차에 아픈 몸을 실었다. 저무는 역사(驛舍)는 누군가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배웅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우리를 배웅하는 것이리라. 뉘른베르크는 말없이 저물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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