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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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그라나다(Granada)

joyman 쪽지





중학교를 다니던 사춘기 시절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 1852~1909)의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처음 들었다. 흐느끼는 듯한 선율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것이 너무 아름다워 기타를 배우기로 작정했지만 그 곡을 칠 정도의 실력은 어림없었고 계명만 치다가 말았던 기억이 있다. 그 뒤 고등학교에 가서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잊지 못해 마침 스페인에서 온 기타 연주자 세고비아의 독주회가 유관순 기념관에서 있기에 그 곡을 들으려고 거금을 들여 표를 구해 간 일이 있다. 아내도 그런 기억이 있어 그 곡을 치려고 기타까지 샀다고 했다. 우리 세대들에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이렇게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뭔가 구슬픈 사연을 말하듯 흐느끼며 이어지는 그 기타곡은 정말 알함브라(Alhambra)를 몰라도 그 처연한 분위기는 그대로 전해준다. 애 끓는 심정으로 절절한 사연을 말하는 것 같다. 내 기억 속의 알함브라는 그렇게 흐느끼는 선율로 형성되었다. 그 뒤 세계사 관련 책을 보니 이슬람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버텼던 곳이 그라나다이고, 그 곳에 있었던 궁전이 알함브라였던 것이었다. 아, 그래서 그 곡이 그렇게 그립지만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구나. 사실 그 알함브라의 처연함을 전하기에는 이 흐느끼는 기타곡 만한 것이 없다. 가보지 않아도 그 곡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의 전부다. 알함브라 궁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그라나다로 가고 시가지에서의 관광은 그 감동을 풀기 위해 휴식으로 필요한 것이다. 알함브라를 보기 위해선 여러 가지로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일찍 나와 줄을 서야 한다. 전날 가이드를 신청하면 쉽게 들어가지만 그만큼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입장하기 위해서 줄을 서서 2시간 정도는 느긋하게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성 안으로 들어가서도 궁전을 보기 위해선 예약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보통 10시 정도에 입장한다면 1시 정도는 돼야 궁전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도 많은 인원을 들여보내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인원만을 들여보내 궁전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차단한다. 덕분에 일단 들어가면 궁전의 아름다움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있어 좋다.

궁전의 규모가 명성에 비해 작아서 처음 가는 사람들은 의아해 하기도 한다. ‘알함브라 궁전이 겨우 이건가?’하며 실망하기도 한다. 알함브라는 화려하고 웅장한 규모가 아니라 그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한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알함브라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섬세한 무늬들과 장식들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 때 알함브라를 제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궁전의 절제되고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섬세한 무늬와 장식들을 보며 가슴을 열고 5~600백 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을 느껴야 한다. 로르카가 노래한 “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불러내어 그 시절을 그릴 수 있어야야 한다. 그리고 나선 시내에 나가 이곳의 와인을 마시면서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줘야 한다. 안 그러면 알함브라의 서글픈 영혼들이 평생 당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비아에서 만난 ‘겁 없는’ 여학생과 같이 알함브라를 보기로 약속을 했었다. 마침 자신이 알함브라 근처의 호스텔에 묵는다고 아침 일찍 나와서 표를 끊어놓겠다고 했다. 우리는 다행이다 싶어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나와 보니 그 여학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줄은 길게 늘어서 있는데 그 여학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선 한 사람이 줄을 서있고 다른 한 사람이 찾아보기로 했지만 허사였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 여학생이 나타났는데 늦잠을 자느라 늦은 것이었다. 그나마 우리가 줄을 서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여학생은 우리가 서있던 자리에 합류해 결국 10시가 넘어서야 같이 입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산을 떨며 알함브라에 들어갔다.

 

이슬람 왕국의 스페인 지배와 국토회복운동

 

711년 4월 30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무슬림 장수인 베르베르족의 타릭 이븐 지야드(Tarik Ibn Ziyad)는 열두 척의 배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왔다. 지브롤터라는 지명도 아랍어로 ‘타리크의 산’ 또는 ‘타리크의 바위’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들이 처음 맞닥뜨린 적은 서고트 왕인 로드리고의 군대였다. 그들은 남부 과달레타 강에서 이들을 물리치고 자신이 점령한 남부 지역을 ‘알 안달루스(Al Andalus)'라 불렀다. 지금의 ’안달루시아‘란 말의 어원이 된 셈인데. 원래는 ’반달(Vandal)족이 건너온 곳‘이라는 ’반달루스(Vandalus)'에서 유래했다.

이들 무슬림이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서고트 왕국의 왕위계승 때문이었다. 710년 위티사가 죽고 로드리고가 왕위에 오르자 위티사의 아들을 추대했던 세력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로드리고를 제거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회교 지도자인 무사(Muza)에게 용병을 요청했고, 무사는 그의 부하인 티리크를 보낸 것이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외부세력을 끌어들였고 이것이 결국은 스페인을 이슬람 세력에게 넘겨주는 꼴이 된 것이다.

오래된 연대기에 의하면 서고트의 로드리고 왕이 똘레도의 타호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처녀를 농락했고, 그녀가 바로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한 세우타의 총독인 훌리안의 딸이었다. 훌리안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생각하여 왕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이슬람 세력에게 이베리아 반도를 쉽게 들어오도록 출입구를 열어주었다 한다. 물론 사실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서고트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로드리고가 주변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지는 못했고 왕위 계승에서 무리하게 자리를 차지하여 화를 불러온 것은 분명하다.

이슬람 세력은 승승장구하여 7년 만에 북서쪽과 피레네 산악지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고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럴 즈음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다마스쿠스를 지배했던 옴미아드 가문을 몰아내고 칼리프의 지위를 빼앗았다. 750년 옴미아드 가문의 아브드 알라흐만은 아바스 왕조의 학살을 피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그는 코르도바에 정착하여 756년 무하메드의 후예라는 점을 이용하여 ‘알 안달루스(Al Andalus)’라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세우고, 자신을 아브드 알라흐만 1세로 칭했다. 그 뒤 아랍 왕국의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50만의 인구를 거느리고 바그다드를 능가하는 이슬람 세계 최대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711년부터 그라나다에서 완전히 물러난 1492년까지 이슬람 지배를 보통 세 시기로 나눈다. 첫 시기는 711~1010년으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전개된 옴미아드 왕조이며, 둘째 시기는 1010~1248년 세비야를 중심으로 전개된 아바스 왕조고, 셋째 시기는 1248~1492년으로 그라나다에서 꽃을 피웠던 나시리 왕조다. 중세기 800년 동안 이슬람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셈이니 스페인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시기를 스페인에서는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기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레콩키스타‘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재정복‘이다. 원래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시 찾았으니 ’회복‘ 혹은 ’수복‘이라고 해야 마땅하겠으나 보다 강한 뜻의 ’재정복‘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함으로써 구겨진 자존심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세 시기에 걸친 이슬람 왕조의 역사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너무 번다한 일이어서 우리가 가는 그라나다의 이야기만 하자. 처음 무어인들이 이곳을 침략했을 때 붉은 황토로 이루어진 이곳에 아름다운 사원과 궁전을 짓고 알바이신(Albaicin) 언덕에 마을을 조성하여 아랍어 ‘석류’를 뜻하는 그라나다(Granada)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마도 붉은 황토와 건물들이 붉은 석류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라나다에 가면 숲과 계곡 사이로 아름다운 건물들이 석류의 붉은 알갱이처럼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라나다에 새왕조를 세우고 알함브라 왕궁의 기틀을 다진 사람은 무하메드 아부 알라흐마르, 곧 무하메드 1세다.(아랍의 이름은 너무 길고 발음도 비슷하여 그냥 무하메드 1세로 칭하겠다.) 그는 1195년 베니 나사르라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자 태수로 임명되었는데 인자함과 정의로운 성품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한다. 마침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렇다 할 이슬람 세력이 없이 군소 왕국만이 존재하고 있었고 무하메드는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았다. 정치적 야망을 가진 그는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드디어 1238년 그들이 처음 발을 내디뎠던 그라나다에 입성하여 자신을 무하메드 1세로 칭하고 나사리 왕조를 열었다. 그 왕조는 250년 동안이나 그라나다에서 존속했으니 상당히 오랜 기간 이슬람의 명맥을 유지한 셈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축복 같은 존재였다. 왕으로서 모든 일에 철저했고 백성들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산업을 장려하여 무역을 발전시키고 공예와 예술 또한 최고 수준에 이르게 하였다. 그의 치세는 오래지 않아 이곳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하고 살기 좋은 국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무렵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이 탄력을 받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의 군대가 안달루시아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하메드 1세는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느라 전쟁을 대비할 겨를이 없어서 자신이 페르난도 왕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결단을 내려 스스로 페르난도 왕을 찾아갔다.

“당신이 보고 있는 나는 그라나다의 왕 무하메드요. 당신의 선량한 신의를 믿고 당신의 보호 아래 나를 맡기겠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나를 당신의 봉신으로 받아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복종의 표시로 페르난도 왕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페르난도는 이런 진지한 태도에 감동을 받고 그를 일으켜 세워 그의 재산은 받지 않겠으며 신하로 약속한 것만 지켜주기를 당부했다. 그리고 전쟁 시에는 기병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을 위해 싸워 줘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고 대신 그라나다의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했다. 말하자면 항복을 한 셈이고 그럼으로써 그라나다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페르난도가 세비야를 공격하면서 무하메드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신하가 되기로 맹세했기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지만 같은 이슬람 형제와 싸워야 하는 진퇴양난의 고민에 빠졌다. 결국 1248년 세비야는 카스티야와 그라나다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무하메드에게는 우울한 승리였다. 그가 그라나다로 돌아왔을 때 백성들은 그가 전쟁터에서 세운 공을 기려 개선문을 세우고, ‘정복자’라는 뜻의 ‘엘 갈리브’라 불렀다. 무하메드는 그 소리를 듣자 “알라 외에는 정복자가 없다!”고 외치며 그 구절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아 가문의 문장에 새겨 넣었다 한다. 그라나다를 살리기 위해 세비야를 내주는 빅딜을 한 셈이다. 그렇게 세비야를 정복하고 나서 그라나다로 돌아와 착수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알함브라 궁전의 건축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왜 무하메드는 세비야를 함락한 우울한 승전 후 알함브라를 짓게 됐을까? 세비야를 공격해 함락시키면서 그 일이 자신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즉 지금은 기독교도들의 지배에 굴복하여 평화를 유지하지만 언제 그들이 태도를 바꿔 공격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국의 수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양성했으며 이와 더불어 산업을 발전시켜 경제를 굳건히 하였다. 알함브라 궁전을 지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언덕 위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어 그 아름다운 곳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했다. 다행히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험준하게 가로막혀 있어 스페인으로서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문제는 식수였다. 무어인들은 북아프리카의 물이 귀한 곳에 살았기에 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궁전을 건축하면서 무려 6Km나 떨어진 강에서 물을 끌어왔다. 물의 낙차를 이용해 산에 터널을 파서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했고, 수로를 이용해 물이 궁전 곳곳을 흐르도록 하였다. 사실 알함브라 궁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이 수로와 터널이다. 아랍어로 수로는 ‘아세키아(Acequia)’라 하고, 터널은 ‘헤네랄리페(Generalife)'라 하여 지금 알함브라에 ’헤네랄리페 정원‘과 ’아세키아 뜰‘이라 이름 붙인 것은 여기서 연유했다. 이 물은 궁전 곳곳을 흐르며 식수와 생활용수는 물론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을 자라게 하고, 분수를 뿜어 더운 공기를 식히며, 양어장의 물고기를 기르고 나중에는 궁전 밖으로 나가 다로 강으로 흘러간다. 물을 원활하게 공급함으로써 알함브라는 진정 생명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무려 5천 명이 그 안에서 생활하였으니 알함브라는 성채가 아니라 작은 도시나 마찬가지였다.

무하메드는 이렇게 광대하고 아름다운 궁전의 건축을 착수했었지만 그래도 국고는 언제나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하메드가 황금을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아마도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이 점이 그가 마술에 정통했고 하찮은 금속을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비밀스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전설을 낳았을 것이다.”라고 워싱턴 어빙은 그의 『알함브라』에서 말한다. 그의 뒤를 이어 알함브라를 완성한 사람은 유세프 아불 하기그다. 물론 여러 왕에 걸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섬으로써 알함브라는 경이로운 궁전들의 집합체를 이루었지만 진정으로 알함브라를 완성하여 전성기를 구가했던 사람은 유세프다.

그는 우선 알함브라의 입구에 해당하는 ‘정의의 문’을 건설하여 1348년에 완성하고 북쪽의 ‘코마레스 탑’을 지어 성의 방어를 든든히 했으며 궁전 곳곳과 궁전의 홀들을 장식하여 찬란한 이름다움으로 빛나게 하였다. 가장 화려한 ‘대사의 방’도 그 시절에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유세프 시절의 그라나다는 에메랄드와 히아신스가 가득한 은 항아리 같다.”고 할 정도로 세련되고 섬세하였다 한다.

자, 이제 알함브라 궁전을 둘러보자. 우선 건물을 보면 외관은 붉은 돌과 흙을 사용한 사각형의 단조로운 형태이다. 이곳에 응집력이 강한 붉은 역암이 많아 이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알함브라(Alhambra)'라는 말은 ’붉은 궁전‘을 의미한다. 이렇게 외관을 단조롭게 한 것은 그 내부의 화려함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아랍식 건축들은 겉은 단조롭게 하고 내부를 다양한 색상의 타일을 통해 지극히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다. 흔히 ’안뜰‘이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입구인 ‘정의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왕궁에 들어가기 전에 왼쪽으로 요새가 나오고 위로 오르면 감시탑인 ‘벨라 탑’이 우뚝하다. 여기에 오르면 무어인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알바이신 지구와 저 멀리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보인다. 이 산맥을 넘어 무어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왔고 또한 물러갔다. 그 산 중턱에는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압딜이 눈물을 흘리며 알함브라를 지켜보았던 바위언덕이 있다. 그 언덕은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 혹은 ‘눈물의 언덕’으로 불린다. 살만 루시디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에 보면 “눈물의 언덕에서 왕은 말을 멈추고 잃어버린 자신의 왕국을 뒤돌아보았다. 궁전, 비옥한 평야, 마침내 종언을 고하게 된 영광스런 안달루스⋯그 모습에 술탄은 한숨을 내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 아익사가 “네가 남자답게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기라도 해야겠지.”라며 따가운 질책을 했다 한다.

스무 번째 왕인 보압딜은 스페인의 포위 작전으로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라나다를 넘겨주었다. 스페인 군사들이 몇 달 동안 그라나다를 포위하는 바람에 주민들은 기아에 허덕여야 했고 사망자가 속출했다. 어차피 도시는 함락될 운명이었다. 보압딜 왕은 희생자를 줄이고 이 아름다운 궁전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출성항복을 택했다. 마치 파리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게 고스란히 파리를 넘겨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드디어 1492년 1월 2일 보압딜 왕은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부부 왕에게 그라나다 궁전의 열쇠를 넘겨주고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그 장면이 기록화로 남아있다.

왕궁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약된 시간에 맞춰서 입구에 줄을 서야 하고 거기서도 정해진 인원만큼 순서에 따라 입장이 허용된다. 나오는 사람만큼 입장이 허용되는 셈이다. 하지만 지나가면 다시 되돌아 볼 수 없으니 미리 볼 곳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도 왕의 방에 못 본 것이 있어 다시 가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각 방마다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어 엄격히 통제한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면 궁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궁전의 산책로와 정원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름다운 화단과 정원이 보여 그냥 편하게 돌아다녀도 좋다.

왕궁은 생각처럼 그리 크지는 않지만 섬세하고도 화려하다. 특히 코마레스 탑 안에 있는 ‘대사의 방’은 왕이 각국 사신들을 접견하던 장소로 내부 장식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각국의 사신들에게 이곳의 화려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온갖 기하학적 아라베스크 문양이 동원되었다. 즉 다른 나라의 사신들에게 이곳의 인상을 강렬하게 심어주기 위해 선전용으로 장식이 동원된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인간이나 동,식물 등 살아있는 것을 그리지 못하게 금지하고 있어 이렇게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문양이 발달했다고 한다. 선만을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방에는 또한 삼면으로 창을 내어 숲이 우거진 계곡과 알바이신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게 하였다. 말하자면 각국의 사신들에게 이곳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궁전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방을 꾸민 셈이다.

대사의 방 못지않게 아름다운 방이 이른바 ‘두 자매의 방’이다. 중앙에 같은 모양의 대리석이 있어서 이런 이름으로 불려졌다. 벌집 모양의 천장 장식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석고를 부조로 떠서 어떻게 저런 장식을 만들었는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지금이라도 그 밑으로 황금색 꿀이 흐를 것 같다.

이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사자의 안뜰’이다. 이슬람에서는 건물 외부보다 내부, 특히 안뜰을 치장하는데 공을 들인다. 더위를 피해 건물의 안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코르도바에서는 ‘파티오’라고 하여 이 안뜰을 가꾸는 경연대회도 있을 정도다. 이곳은 12마리 사자가 분수를 이고 있는 형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주변을 회랑이 감싸고 있다. 이 사자상은 시각을 알리는 것으로 1시에는 1마리 사자 입에서 물이 나오고, 2시에는 2마리 사자 입에서 물이 나오는 식으로 설계되었다 한다. 그런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그 사자들이 모두 병원(?)에 가고 없었다. 그 해가 마침 세계문화유산 보수의 해여서 모두 보수를 위해 병원에 간 것이다. 사자가 없는 안뜰은 정말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 아내가 그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광경을 실감나게 설명해줘서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사자의 안뜰 맞은편에는 한 가문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아벤세라헤의 홀’이 있다. 워싱턴 어빙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아벤세라헤 가문은 15세기 그라나다에서 권세를 누리던 가문이었는데 세그리에스 가문과 원수지간이었다. 아벤세라헤 집안의 한 사람이 왕실의 한 후궁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의 방 창문으로 기어올라가다 붙잡혔다고 한다. 분노한 왕은 아벤세라헤 가문 사람들을 이 방에 가두고 세그리에스 사람들에게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 홀 가운데 하얀 대리석 분수에서 하나 씩 끌려나와 모두 참수를 당했다 한다. 바닥에 남아있는 불그스레하고 넓은 얼룩은 아무리해도 지워지지 않는 그들의 핏자국이라고 한다. 그게 과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설화와 문학작품 속에 기록돼 있으니 알함브라의 이야기 속에 끼워넣어도 무방하리라.

알함브라의 많은 방들 가운데는 워싱턴 어빙이 묵었던 방이 있다.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알함브라는 산적, 도둑, 거지, 유랑인 들이 자리 잡아 살고 있던 황폐한 곳이었다. 그는 널리 알려진 <립 밴 윙클>과 팀 버튼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을 썼던 미국의 낭만주의 작가이다. 그가 스페인 주재 미국 공사로 있을 때 그라나다에 와서 알함브라에 몇 달간 거주하면서 이곳을 답사하였다. 지리적 답사는 물론이고 신비한 무어인들의 전설을 채집하여 1832년『알함브라』라는 책을 펴내 잊혀진 왕국 알함브라를 전 세계에 알렸다. 그런 공적으로 알함브라에서는 그를 기려 그가 묵었던 방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워싱턴 어빙이 무어인들의 스페인 지배와 알함브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거의 8세기 동안 독자적인 종족이었음에도 그들이 가고난 뒤에는 독자적인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고향으로 삼고 점유해왔던 그 땅은 그들을 침략자와 강탈자로서만 인정했다. 이제 그들의 힘과 지배력의 목격자는 부서진 기념비 몇 개가 전부이며, 홍수처럼 몰려온 그들의 격렬한 침범을 증언하는 것은 내륙 깊은 곳에 남겨진 외로운 바위 몇 개뿐이다. 그곳이 바로 알함브라다. 기독교 국가 한가운데 자리 잡은 무슬림의 성채, 서방의 고딕 건축물 사이에 우뚝 선 동방의 궁전, 알함브라는 정복하고 지배하고 사라져간 용감하고 지적이며 품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아한 기념물인 것이다.

 

알함브라에 대한, 그 우아한 기념물에 대한 더할 수 없는 찬가이며 동시에 사라진 그 주인들에 대한 비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알함브라는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화려하면서도 슬프고, 종교적이면서도 일상적이고, 강인하면서도 처절한 모습을 하고 그라나다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늘 그 자리에 있었듯이.

알함브라 궁전을 나오면 아름다운 정원이 이어지는데 그 정원 중에 백미는 분수와 꽃들로 둘러싸인 헤네랄리페 정원이다. 왕들과 후궁들이 여름에 더위를 피해 이곳에 들렸다 해서 ‘여름궁전’으로도 불린다. 우리의 누각 같은 아랍식 건물을 중심으로 온갖 기화요초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대는, 물이 귀한 무어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곳이다. 이 물들은 저 멀리 시에라 산맥의 눈 녹은 물로 강의 상류로부터 산 속의 터널과 수로를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무어인들의 물의 활용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 정원 중에서도 ‘수로’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세키아 뜰은 자그마한 정원이지만 이곳까지 물을 끌어와 저렇게 장식하여 소박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물은 곧 생명이고 이 물의 흐름이 인간은 물론이고 나무와 꽃들을 저렇게 가꾸니 물이 귀한 이곳에서는 바로 천국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안달루시아의 시인, 로르카

 

알함브라 궁전을 완전히 빠져나오면 그 앞에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건물이 하나 우뚝 솟아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카를 5세 궁전이다. 카를 5세는 스페인을 통일했던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부부왕의 외손자로 스페인 왕과 오스트리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고 있는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실력자다. 그가 여기에 왜 이런 생뚱맞은 궁전을 지었을까? 바로 800년 동안이나 이곳을 지배했던 이슬람의 자취를 지우기 위해서다. 마치 우리의 경복궁 앞에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세워 조선의 기운을 제압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뿐이 아니다. 그라나다 중심에는 대성당이 있고 그 옆에 왕실예배당을 지었는데, 여기에도 스페인을 통일했던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부부왕의 유해를 1521년 안치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장녀인 후아나와 사위 펠리페의 유해(이들의 아들이 바로 카를 5세다.)도 가져왔다. 말하자면 영험있는 왕들의 유해를 안치함으로써 800년이나 이곳을 지배했던 이슬람의 기운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알함브라의 섬세하고 지극한 아름다움에 어찌 이런 왕실예배당이나 기독교식 궁전이 대적할까? 아랍의 시인 이븐 잠락은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밤하늘의 별들도 천상을 영원히 떠도는 대신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다” 고 하지 않았던가. 알함브라는 지상의 왕궁이 아니라 천상의 궁전이다.

우리는 호기심이 생겨 그 생뚱맞은 궁전에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곳에서 그라나다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총 맞아 죽은 스페인의 대표시인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1898~1936)의 전시회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수고본 원고와 출판된 책, 그리고 당시 사진과 잡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내는 특히 로르카를 좋아해 이게 웬 일이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스페인어는 몰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필적과 자취를 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전시물을 살펴보던 아내가 “로르카를 남자로 알고 있었는데 여자인가?”라고 의아해하면서 전시물을 보여주었는데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여자처럼 묘사돼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전시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동성애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공식적으로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연인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그의 필체를 보니 여성처럼 섬세했고 사진 또한 핸섬한 모던 보이였다. 그가 관계했던 잡지들도 있었는데 거기에 시나 산문 쓰거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글은 스페인어여서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삽화는 섬세하고 여성적이었다.

로르카는 이곳 그라나다의 근교에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안달루시아의 이미지를 세계에 널리 알린 시인이다. 안달루시아의 풍요로운 문학전통을 이어 받아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안달루시아는 이슬람과 스페인 그리고 집시의 피가 섞여 뭔가 열정적이면서도 슬픔과 고독을 간직한 곳이다. 때로는 ‘두엔데’라고 부르는 신비스러운 광기를 내뿜기도 한다. 이런 토양 위에서 로르카도 시를 창작했으니 당연히 안달루시아의 정서가 스며들었으리라.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보며 내내 드는 생각은 로르카가 <세 강의 발라드>에서 노래한 “심홍색 수염을 갖고 있는/ 과달키비르 강”이다. 처음에는 흙탕물이 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그라나다에 와보니 단순한 황토물이 아니라 거기에는 그라나다에서 최후를 맞은 무어인들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난히 로르카의 시엔 ‘피’가 많이 등장한다. 투우사 친구인 메히아스를 애도하는 노래 <익니시오 산체스 메히아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는 피의 상징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작은 광장의 발라드>에서도 “입 속에서 무슨 느낌이 있어요/ 주홍 아니면 갈증?”이라고 광장의 샘물에서 피의 이미지를 찾는다. 다시 <세 강의 발라드>를 보자. 그 뒤에 이어지는 시구는 “그라나다의 두 강/ 하나는 피, 또 하나는 눈물의 // 아, 사랑/ 허공으로 사라져버린!”이다. 그라나다를 흘러가는 과달키비르 강이 눈물과 피로 흘러간다는 얘기다.

그라나다에는 유난히 붉은 색 건물이 많다. 알함브라를 비롯해서 성채들은 모두 붉은 역암으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누런 황토가 대지를 뒤덮고 있다. 로르카는 여기에 무어인의 눈물과 피를 추가했다. 그래서 그들의 최후를 강물에 빗대어 노래한 것이다.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강이 되어 흘러간다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제는 이곳에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사랑’이 아니겠는가?

저녁에 우리는 그라나다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알바이신 지구를 찾아갔다. 하얀 색 집들이 전형적인 아랍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골목이 구불구불한 것이 정겨웠다. 이 하얀 색의 집들이 마지막 전투에서 모두 피로 물들었다고 하니 그 처참한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라 몸서리가 처진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말울음 소리, 군사들이 휘두르는 칼날의 번득임, 아이들의 겁에 질린 모습⋯지금은 그때의 기억이 아득하리라. 그래서 이들의 천국 알함브라는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사랑’이지만, 그들 무어인들의 가슴 속엔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지금도 무어인 중에는 당시 그라나다에 살던 집의 열쇠를 보관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들이 이루었던 천국, 알함브라로 돌아가기 위해.

알바이신 지구를 돌아보고 밑의 다로 강가(사실은 개울 정도지만)로 내려오니 한 여름 밤의 작은 음악회가 한창이었다. 마침 기타를 치면서 남미의 노래 <베사메 무초>를 부르고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의 밑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치곤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모두 더위를 피해 모여든 것인데 <베사메 무초>의 가락이 흥겹기보다는 애절하게 들리는 것은 알함브라의 추억이 너무 강하게 각인된 것일까? 밤하늘 위 알함브라 궁전을 배경으로 하얀 달이 떠있었다. 아, 알함브라여! 알함브라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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