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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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를 연 해양제국의 수도- 세비야(Sevilla)

joyman 쪽지





각 나라별로 그 나라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를 하나만 든다면 이탈리아는 로마이고, 프랑스는 파리지만 스페인은 마드리드나 똘레도가 아니라 바로 세비야다. 세비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의 가장 큰 도시로 아랍문화와 스페인 문화가 뒤섞여 ‘열정’이 꿈틀대는 곳이다. 그래서 투우와 플라멩코(Flamenco)가 성행하기도 한다. 세비야란 이름을 가장 먼저 듣게 되는 것도 정치나 역사가 아니라 오페라를 통해서다. 저 유명한 비제의 <카르멘>이나 롯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혹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서 세비야는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게다가 과달키비르 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스페인이 남미의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그곳에서 뺏어온 금과 은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세비야는 대서양 시대의 중심도시로 부각되었다. 스페인의 황금시기인 16~17세기 세비야는 신대륙 무역과 아시아 상품의 주거래 시장으로 유럽에서 가장 활기차고도 부유한 도시로 탄생한 것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항해 시대에 혜성처럼 떠오른 상징적인 도시인 셈이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와 작곡가들을 매료시켰고 그들 작품의 주무대로 제공된 것이다.

우리는 호사를 부려 마드리드에서 특급열차인 아베(AVE)를 타고 세비아로 왔다. 이동거리가 길기에 빠른 열차를 이용해 시간을 절약하고 싶어서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황량한 벌판을 2시간 30분정도 달려 열차는 우리를 세비아의 산타 후스타 역에 내려놓았다. 밖으로 나오니 훅 하고 더운 바람이 몰려오는 것이 아, 이제 드디어 ‘열정’의 안달루시아에 왔구나를 실감했다.

같은 안달루시아라 하더라도 꼬르도바나 그라나다는 아랍왕국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어 그런지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드는데 비해 세비야는 비제의 <카르멘>이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처럼 아주 열정적이고 경쾌하다. 그게 세비야의 모습이고 표정이다. 세비야는 카르멘과 돈 후안이 욕망을 불살랐던 곳이며, 피가로가 주인을 제압하고 당당하게 약혼자를 구해낸 곳이고, 고야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곳이자 스페인의 국민화가 벨라스케스와 그의 제자 무리요가 태어난 곳이 아니던가.

 

황금과 은이 넘치는 해양제국의 수도

 

이베리아 반도의 남서부 과달키비르 강 하구에 위치한 세비야는 1248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3세가 아랍 세력을 몰아내면서 본격적으로 스페인의 주요 도시로 발전되었다. 그 전에도 세비야는 아바스 아랍왕조의 수도였다. 이베리아 반도 최대의 아랍왕조가 있었던 꼬르도바가 망한 후 세비야는 1010년에서 1248년까지는 이슬람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 역할을 맡았었다. 지금 그 흔적이 히랄다 탑이나 알카사르에 남아있다. 하지만 스페인에 의해 재정복된 이후에는 완전히 스페인식 도시로 재정비되어 대서양 시대 해양제국의 수도로 바뀌었다.

세비야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남미 식민지를 개척하고 아즈텍과 마야와 잉카의 황금과 은이 과달키비르 강을 통하여 들어오면서부터다. 식민지 개척을 위한 배들이 바로 이곳 세비야의 과달키비르 강 하구에서 떠났고, 돌아올 때도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이사벨 여왕의 환송을 받으며 콜럼버스가 떠났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돌아온 곳도 바로 이곳 과달키비르 강이다. 말하자면 이곳 세비야는 남미 식민지 개척의 전초기지이자 아메리카 교역의 중심 도시인 셈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 세력을 몰아낸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유럽의 다른 나라, 특히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북부 이탈리아 같은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스페인을 경제적으로 부흥시킬 방법을 찾았고 그것이 지리상 신대륙 발견을 지원하여 식민지화 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도록 후원한 것이다. 그건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탐험에 필요한 경비를 대주고 왕실이 후원한다는 증서와 명분을 주어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그 다음에는 군인들이 들어가 금과 은을 약탈하기만 하면 됐다. 지리상으로도 스페인은 남미와 가장 가까이 있어 유리한 점이 많았다. 스페인이 내부의 경제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 스페인이 황금시대를 열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하여 신대륙에서 금은과 보석들을 거둬들인 결과다. 당연히 남미의 아즈텍이나 마야, 잉카 문명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약탈에 모든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남미를 제물로 얻어진 착취와 약탈의 결과였던 것이다.

당시 얼마나 많은 양의 금과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왔는가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1500년~1650년에 유입된 금은 모두 181톤이었고, 은은 16,000톤이었다 한다. 4톤 트럭 4,045대분의 분량이다. 처음에는 금이 많이 들어왔지만 16세기 중반부터는 은이 대량 유입되었다. 이 은으로 중국과 인도의 호사품인 실크, 도자기, 향신료 같은 것을 대대적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연 스페인은 금과 은이 넘쳐나 주체를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그 전에 비해 물가가 3~4배가량 올랐으며 상인과 제조업자들은 전에 없던 호황을 누렸다.

신대륙의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오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는 바로 과달키비르 강에 위치한 세비야였다. 이제 세비야는 새로 개척한 식민지와 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부상함으로서 유럽에서 가장 활기차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베네치아나 제노바가 주도했던 지중해의 시대가 가고 드디어 세비야가 주도하는 대서양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세비야가 숱한 소설과 오페라의 무대로 등장한 것은 새로이 등장한 유럽의 부유한 도시로서 이런 경제적인 번영과 깊은 관계가 있다.

<카르멘>에 등장하는 담배 공장을 보면 허름한 작업장이 아니라 왕궁과 같은 건물이다. 세비야를 여행할 때 돈 호세와 카르멘이 만났던 곳을 가보자 하여 지금 세비야 대학으로 쓰고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놀랐다. ‘무슨 놈의 담배 공장이 이렇게 화려한가?’ 라고 의문을 가졌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담배는 남미의 식민지에서 들여온 스페인 독점상품이 아닌가? 요즘으로 말하면 온 세계에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다국적 기업인 셈이니 그렇게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이 당연하다. 남미에서 원료가 들어와 그곳에서 가공하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17세기에 일본을 통해 담배가 들어와 <담바고타령>이라는 노래가 불려질 정도로 인기있는 상품이었으니 유럽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금과 은이 넘치다 보니 사람들이 땀흘려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신대륙으로 가 일확천금을 얻을 생각만 하였다. 한 번만 잘 하면 일생이 보장되는데 누가 힘들여 옷감을 짜고 물건을 만들겠는가? 현재 스페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느긋하게 사는 것은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좋게 보면 여유가 있지만 그만큼 편하게 살려는 근성이 있다. 2010년 유럽에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국가 신용도가 하락하여 위기를 맞은 것은 이런 근성과 무관하지 않게 보인다.

우리도 스페인에서 시간이 촉박할 때 택시를 많이 이용했는데 어김없이 팁을 달라고 한다. 왜 팁을 줘야만 하냐고 물으면 다 준다고 대답을 얼버무린다. 한번은 역에서 숙소까지 길을 잘 몰라 택시를 탄 적이 있다. 짐도 적었는데 요금도 다 받고 팁을 무려 3유로(우리 돈으로 5,000원)나 요구했다. 화가 나서 안 주려고 하니 성질을 막 내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2유로를 주고 말았다. 돈을 주니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며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형편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서 스페인보다는 오히려 상품생산에 집중했던 영국이 더 많은 이윤을 남겼다. 모직이나 면직 공업이 발달한 영국은 이를 스페인에게 가져다 팔면 3~4배나 더 받을 수 있었으니 이런 호황이 없었다. 결국 스페인으로 들어온 신대륙의 은은 영국으로 흘러가 영국 경제를 부흥시켰다. 재주는 스페인이 부리고, 돈은 영국이 챙긴 셈이다. 스페인이 이렇게 수공업 생산에 취약한 것은 국토수복 후 가톨릭의 순수성을 수호하기 위해 무어인과 유대인들을 추방했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인 유대인과 숙련공인 무어인들을 추방하여 국가의 자본과 기술을 유기함으로써 상업적, 수공업적 기반을 상실했기에 상당한 양의 금과 은이 유입됐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경제를 이룩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날에도 제조업을 무시하고 금융에만 의존할 경우 그 경제는 취약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세비야의 상징, 히랄다 탑과 대성당

 

이렇게 세비야가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부유한 도시로 부각되자 여기에 걸맞는 대규모의 대성당을 짓기로 하였다.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이 건물이 너무나 커서 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큰 규모의 성당을 짓자.”고 했다 한다. 1401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무려 111년이 걸려 1511년에 완공했는데 예상대로 스페인에서 가장 큰 성당이 탄생하였다. 유럽에서도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원래 그 자리에 12세기 아바스 왕조 시절 이슬람 사원이 있었는데 이를 부수고 성당을 건축한 것이다. 하지만 4각형의 첨탑인 히랄다 탑(La Giralda)은 너무 아름다워 부수지 못하고 대신 그 위에 예배 시간을 알리는 28개의 종을 달았고, 탑의 꼭대기에 기독교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다. 탑의 명칭도 풍향계를 뜻하는 ‘히랄다’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98m의 아름다운 탑이 1565~68년에 완성되어 세비야의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히랄다 탑을 보면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것이 안달루시아 지방의 화사한 미녀를 닮았다. 그래서 열정적이고 다소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히랄다 탑은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너무도 정교해서 돌로 건축했으리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대성당과 세비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독특한 양식의 아름다운 집들이 눈 아래 펼쳐지는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히랄다라는 이름을 얻게 된 4m 높이의 여성상이 있는 풍향계를 다시 만들어 대성당의 입구에도 세워 놓았다. 여성이 공위에 위태롭게 올라가 풍향판을 잡고 있는 형상이다. 하지만 아랍식 탑의 정교함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친다. 아마도 이렇게라도 해서 이슬람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으리라.

세비아 대성당은 특별히 이 도시의 수호신인 성모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산타 마리아 카테드랄’로 불린다. 그래서 이 성당의 왕실예배당에 가면 황금 성모상이 있는데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극치를 이룬다. 황금을 입혀 정교하게 다듬은 그야말로 이 성당의 가장 큰 보물이다. 회의실에는 이곳 출신의 화가 무리요가 그린 <성모수태>가 있고, 산 안토니오 예배당에는 무리요의 <산 안토니오 환상>이 걸려있다. 게다가 성물과 내부 장식들은 대부분 금으로 만들어져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심지어는 쇠문과 쇠창살을 모두 은으로 만들었는데 적에게 빼앗길까봐 은을 감추기 위해 겉에 청동을 입혔을 정도다. 모두 남미에서 약탈한 것이라 생각하니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 회의가 든다. 똘레도 대성당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그 호사스러움 때문에 불편함을 떨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지배와 약탈, 그래서 중남미의 아즈텍, 마야, 잉카 문명을 멸망시키고 거기에 기독교 문화를 이식시켰다. 그래서 남미의 신전들을 부수고 그 위에 교회를 지어 원주민을 개종시켰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뒤 역설적이게도 이 기독교 문화가 그들에게 싸움의 도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남미의 ‘해방신학’이 바로 그것이다. 신부들이 총을 들고 남미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서 미국이나 독재정권과 맞섰던 것이니 어찌 보면 제국의 논리로 제국을 치는 셈이 아닌가.

대성당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오른 쪽 문을 들어서면 마주치게 되는 콜럼버스의 무덤이다. 그 무덤 위로 스페인을 대표하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의 네 왕이 콜럼버스의 관을 메고 있는 실물 크기의 형상이 조각돼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신대륙을 발견하고 남미의 식민지를 개척해 스페인에게 부를 가져다준 공로로 이렇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콜럼버스의 무덤이 이곳이 아닌 산토 도밍고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세비야는 이렇게 콜럼버스 관을 이렇게 폼 나게(!) 장식함으로써 그것을 진짜로 여기게 하여 남미 식민지 개척과 지배에 상징적인 도시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진정한 세비야의 상징은 히랄다 탑이라기보다 네 명의 왕들이 메고 있는 이 콜럼버스 관이 되어야 옳다.

대성당 앞에는 14세기 페드로 3세가 건설했다는 알카사르가 있다. 그는 무어인들의 건축 양식과 정원 디자인을 좋아하여 세바야 중심의 이곳에 성채를 건축했다. 원래 1181년 아부 야콥 왕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을 여러 번 개축하여 무데하르 양식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양식의 아치와 총을 솔 수 있는 흉벽, 금실과 은실로 장식한 회벽, 아름다운 중정 등을 지니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곳은 각국의 사신들을 접견하는 ‘대사의 방’으로 왕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해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아라베스크 문양의 벽이 특히 아름답다.

알카사르 앞의 산타크루스 거리는 흰 벽의 아름다운 집들과 지천으로 핀 꽃들로 화사한데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아 안달루시아의 정취를 즐기며 쉬기에도 적당한 곳이다. 풍경이 아름다워 알카사르를 배경으로 둘이 사진을 찍는데 웬 한국인인 듯한 여학생이 우리에게 오더니 사진을 같이 찍어주겠다고 “메이 아이 헬프 유?”하는 것이 아니가? 우리는 직감적으로 일본인이라 여기고 “저패니즈?”라고 되물었더니 “아임 코리안.”이라고 한다. 이런,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모르고 서로 엄한 소리를 한 것이다. 우리는 웃으며 그 여학생에게 사진을 부탁했고 같이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여학생은 대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으로 여름방학을 맞아 유럽에 혼자 배낭여행을 온 것이다. 그런데 무모하리만치 용감하여 오히려 우리가 불안했다. 더군다나 30일간의 배낭여행을 마치고 발트 3국 쪽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간다고 하기에 우리는 기특해서 점심을 사주었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나고 그들은 하나 같이 세계가 좁다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견문을 넓히는 것이야말로 바로 살아있는 공부가 아니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소위 세계화를 제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직접 세계를 보고, 또 밖에 나가 우리를 타자화하여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겁 없이 단신으로 이 이국땅에 온 그 여학생이 기특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여 그라나다에서 다시 만나 알함브라를 같이 보기도 했다. 비록 부모는 아니지만 같은 핏줄이라 그렇게 서로 정이 가나보다.

 

돈 후안, 카르멘 그리고 피가로

 

세비야는 이처럼 새로운 대서양 시대를 맞이하여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로 부각됐기에 많은 작가와 음악가들로부터 작품의 무대로 각광을 받았다. 게다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돈 후안, 카르멘, 피가로, 알마비바 등 문학과 오페라의 주인공들이 이 도시를 장식하는데 그 첫 장을 여는 인물이 호색한으로 유명한 ‘돈 후안’이다.

돈 후안은 17세기 대표적 극작가인 티르소 데 몰리나(본명은 가브리엘 테예스, 1580~1648)의 작품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에의 초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희극으로 원래 민간에 내려오는 전설을 소재로 만든 것이다. 하나는 신앙심이 없고 방탕한 귀족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석상이 방탕아를 초대한다는 이야기다. 세비아의 귀족 자제인 돈 후안은 신앙심이 없고 여자들만 쫓아다니는 남자로 여러 지역을 다니며 수많은 여자들을 농락했다. 그러던 중 고향 세비야에서 친구 라모타 후작의 사촌인 도냐 아나를 유혹하다가 그녀의 아버지와 결투를 하고 그를 죽이게 되어 도망한다. 세비야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숨은 성당이 공교롭게도 그가 죽인 도냐 아나의 아버지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돈 후안은 아나의 아버지 돈 곤살로가 복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묘비명을 보고 자만심에 사로잡혀 석상을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저녁 식사에 초대된 석상은 같이 저녁을 먹고 다시 돈 후안을 자신의 식사에 초대한다. 다음 날 저녁에 석상의 초대로 간 돈 후안은 돈 곤잘로와 악수를 하게 되고 불길에 휩싸여 죽게 된다.

비교적 단순한 이 이야기는 당시 사치스럽고 방탕한 귀족들의 세태를 풍자한 작품으로 작가 몰리나의 귀족들에 대한 경멸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다. 작품에서도 “스페인의 염치없고 뻔뻔스러움이 기사들을 만들었다.”고 할 정도다. 남미 식민지 개척을 통해 부를 이룬 세비야의 귀족들은 이 번영을 생산적인 것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사치와 향락적인 것으로 소모시켰고 이런 방탕한 귀족들의 형상이 돈 후안으로 대표된 것이다. 묘하게도 세비야 이전에 번영을 구가하던 해상 무역의 중심지 베네치아도 그러했고 거기에도 호색한 카사노바가 있었다. 다만 베네치아의 카사노바가 수많은 여인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주었다면 세비야의 돈 후안은 사랑이 아닌 정복욕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여인들에 의해서 구출되었지만 돈 후안은 여인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음을 맞게 된다. 돈 후안은 난봉꾼의 대명사로 바이런의 풍자시 <돈 주안>을 비롯하여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 요한 스트라우스의 <돈 후안> 등 수많은 작품으로 재해석되고 창작되어 스페인 문학사에서 돈키호테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바로 번영을 구가하던 세비야의 부정적 모습이 돈 후안을 통해 드러난 셈이다.

돈 후안과 짝을 이루는 여자가 바로 프로스뻬르 메리메(Prosper Merimee,1803~1870)의 소설 <카르멘>의 여주인공 카르멘이다. <카르멘>은 치명적 여주인공 카르멘과 돈 호세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로 소설보다도 비제의 오페라로 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고고학자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산적 호세를 우연히 만났고 자기를 안내하던 사람이 포상금을 탐내어 산적을 밀고하려 하자 호세에게 그 사실을 알려 무사히 탈출하도록 도와준다. 다음 주에 그 고고학자는 꼬르도바에서 그의 돈을 노린 아름다운 집시 여인을 만나 그녀의 거처로 가지만 이번에는 호세가 나타나 그를 구해준다. 몇 개월 동안 안달루시아를 여행하고 다시 꼬르도바로 돌아왔는데 그곳 사제들로부터 산적 호세가 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처형 전날 감옥을 방문한 고고학자는 그로부터 고향 나바라를 떠나 기병대 하사관이 되고, 카르멘과의 사랑으로 인하여 상관을 죽이고 탈영하게 되었으며, 그녀에 대한 애착으로 살인, 밀수, 강도짓을 하다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녀를 죽이고 자수하여 사형을 언도받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곳이 바로 세비야다. 작품에서도 “저는 세비야의 담배 공장 경비대에 배속되었습니다. 혹시 세비야에 가신 적이 있으시면 성 밖 과달키비르 강 근처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보셨을 것입니다.”라고 돈 호세가 회상을 한다. ‘팜므 파탈’의 전형인 카르멘의 형상과 잘 어울리는 도시가 바로 세비야다. 고색창연한 고도 똘레도에서 카르멘이 등장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세비야야말로 남미의 금과 음이 들어와 흥청망청 거리고 호황을 누리던 곳이었으니 돈을 벌기위해 온갖 종류의 인간 군상들이 모여들였고 여기에 집시와 사기꾼, 도둑들이 설치지 않겠는가. 세비야 번영의 이면에 이런 이익만을 쫓는 부정적인 인물들이 들끓었다. 이들에 의해 부정적인 세태가 조성됐었고 거기에 치명적 여인 카르멘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옮겨간 것이리라. 어쩌면 세비야는 그 내면에 이런 들끓는 욕망을 간직했던 오만한 도시이기도 하다.

돈 후안과 카르멘이 세비야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냈다면 피가로야말로 세비야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낸 인물이다. 피가로는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세(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1732~1799)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1775)와 <피가로의 결혼>(1781)에 등장하는 알마비바(칠레산 최고급 와인의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그 와인은 보마르세의 필체를 그대로 가져와 라벨로 만들었다.) 백작의 하인이다. 이 작품은 연극으로도 공연됐지만 롯시니와 모차르트에 의해 각각 오페라로 상연되어 유명해졌다. 롯시니는 이곳이 좋아 오래 머물렀는데 알카사르에서 공원 쪽으로 가다 보면 롯시니가 머물렀던 멋있는 집이 나온다.

<세비야의 이발사>에서는 피가로가 주인인 알마비바 백작을 도와 온갖 기지를 발휘하여 후견인인 바르톨로에게서 아름다운 로진느를 빼내서 알마비바와 결혼시킨다. 우리의 <춘향전>에서 방자가 이몽룡과 춘향을 연결하듯이 그런 역할을 피가로가 맡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알마비바 백작이 피가로의 은혜도 모르고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피가로의 결혼 상대인 하녀 수잔느를 차지하려고 하여 문제가 생긴다. 내용은 이렇다.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 피가로는 하녀 수잔느와 약혼한 사이다. 그런데 부인에게 싫증난 알마비바 백작은 성안의 여자들을 건드리다가 하녀 수잔느에게 눈독을 들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종인 피가로와의 결혼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한다. 피가로는 자신의 약혼자를 빼내기 위해 백작부인의 도움을 받아 일을 꾸미기에 이른다. 즉 백작부인 로진느와 하녀 수잔느가 옷을 바꿔 입고 백작을 속이는 것이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백작은 수잔느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몰래 나가보니 바로 자신의 아내 로진느가 아닌가. 결국 백작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피가로와 수잔느는 결혼에 성공한다.

피가로는 우리로 치면 하인이고 방자인 셈이다. 그런데 주인을 기지로 속이고 자신의 권리를 찾는데서 당당한 민중의 전형성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묘하게도 프랑스 혁명 전야인 1784년 4월에 파리에서 공연되어 프랑스 시민의 전형으로서 급부상하였다. 쥘르빌르는 “이 날부터 대혁명이 시작되었다.”고 했고, 나폴레옹도 “<피가로의 결혼>, 그것은 이미 대혁명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피가로의 결혼>은 특히 중세의 특권에 대한 정치적 풍자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피가로가 그의 주인 알마비바 백작에게 “백작나리, 나리는 사람들이 나리를 받들어 준다고 해서 정말 자기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귀족, 재산, 훈장, 지위, 이러한 것들로 의기양양해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그만한 보배를 얻기 위해서 나리는 대체 무슨 일을 했습니까? 단지 태어날 때 들인 수고뿐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인간으로서도 지극히 평범하고요.(5막 3장)”라고 말할 정도로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친다. 이에 반해 백작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여자나 탐내는 형편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피가로는 혁명전야 프랑스 시민계급의 전형으로 떠오르고 단번에 민중들의 상징으로 부각된 것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일간지도 바로『르 피가로』지가 아닌가.

여기에 비해 우리의 방자는 조선후기의 물적 토대가 빈약하여 양반에 당당히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의 풍자를 통해 양반을 조롱하고 비판한다. <춘향전>에서는 하인의 지위에 머무르지만 특히 <배비장전>에 등장하는 방자는 애랑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배비장에게 이렇게 대꾸할 정도로 풍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옳다! 보았단 말이냐? 쌍놈의 눈이라 양반의 눈보다 대단히 무디구나.”

“예, 눈은 양반 쌍놈이 다르니까 소인의 눈이 나리의 눈보다 무디어 저런 예의가 아닌 것은 아니 뵈옵니다마는 마음도 양반과 쌍놈이 달라 나리 마음은 소인보담 컴컴하고 음탐하여 남녀유별 체면도 모르고 규중처녀 은근히 목욕하는 것을 욕심내어 눈을 쏘아 구경한단 말씀이오니까? 근래 서울 양반들 양반세력 빙자하여 계집이라면 체면 없이, 욕심 낼 데 아니 낼 데 분간없이 함부로 덤벙이다 봉변도 많이 당합니다.”

 

목욕하는 여자를 훔쳐보는 양반의 눈은 상놈과 달라 그렇게 음탕하냐고 쏘아붙이는 데서 민중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렇게 성장한 우리 방자와 모습은 피가로의 형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

세비야 사람 피가로는 이처럼 중세의 권위에 당당히 도전하는 발랄함과 기지,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반항성까지 두루 갖춘 인물인 것이다. 대항해 시대 근대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면 그 경쾌하고 발랄한 근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세비야다. 세비야는 피가로처럼 그렇게 적극적이고 쾌활하며 기지로 가득찬 도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비야의 상징적 인물은 바로 피가로다.

 

안달루시아의 몸짓, 투우와 플라멩코

 

우리는 하루를 잡아 세비야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플라멩코를 보기로 했다. 이곳의 명물인 투우도 보고 싶었으나 일요일에만 한다 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투우를 보는 것은 끔찍하여 그리 내키지는 않는 일이었다. 그저 호기심이 많아 어떨까 했는데 안 한다니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대신 스페인에서 가장 크다는 투우장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투우장은 과달키비르 강가에 있었다. 노란색 경기장에 부엉이 눈 같이 창문을 낸 것이 특이 했다. 이 경기장이 스페인에서 가장 큰 투우장 ‘플라자 데 토로스 데 라 마에스트란사(Plaza de Toros de la Maestranza)’로 12,000명이나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줄여서 그냥 ‘토로스’라고 하면 투우장을 뜻한다. 경기장 앞에는 역대 유명한 투우사들의 동상이 늘어서 있었는데 이곳 세비야에서는 투우사의 인기가 축구선수나 영화배우들을 능가한다고 한다. 투우는 이곳 세비야에서 해마다 열리는 4월 축제 중에도 행해진다. 그 기간에는 로스 레미도스 거리를 따라 450개의 천막이 설치된다고 한다.

투우가 세비야의 소개된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상당히 인기를 끌었고 1750년 경에는 황금색 옷을 입은 안달루시아 투우사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곳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기질인 열정과 투우는 여러 가지로 유사한 점이 많다. 로마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동물과 싸우듯이 그렇게 피를 보며 경기를 하는 것이 투우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투우는 정교하고 화려하여 신비감마저 든다는 것이다.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경기는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카르멘>에서 카르멘도 투우사에 반해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안달루시아의 시인 로르카도 세비야에서 투우사이자 시인인 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쓴 시,<흩뿌려진 피>가 있다.

 

세비야에는 그와 견줄 수 있는

왕자가 없었다.

그의 칼에 견줄 칼도

그토록 용감한 심장도

그의 놀라운 힘은

사자의 강과 같고

그의 자로 잰듯한 신중함은

대리석의 동체 같았다.

안달루시아의 로마 기운이

그의 머리를 장식했고

얼굴의 미소는

우아하고도 지적인 수선화였다.

투우장에서는 얼마나 위대한 투우사인가!

……

나는 보고 싶지 않아.

그 피를 머금을 석회가 없고

그 피를 마실 제비가 없고

그 피를 식힐 빛으로 된 서리가 없고

노래도 수많은 백합도

그 피를 은으로 덮을 유리도 없으니

난 그 피를 보고 싶지 않아!!

 

이 시는 세비야에서 최후를 맞은 투우사 친구에 대한 비가이면서 동시에 찬가다. 로르카는 투우를 비극적이지만 살아있는 아름다운 드라마로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함으로 둘러싸인 죽음의 드라마가 바로 투우가 아닌가. 화려하고 격정적인 몸짓과 죽음을 마주한 싸움, 그리고 피를 뿌리고 죽어가는 소, 관중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이 화려하고도 부조리한 죽음의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다. 안달루시아 사람인 피카소도 투우를 즐겨 그렸고 그 자신이 소가 된 모습을 수많은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핏속엔 이런 화려한 광기가 내재됐는가 보다.

투우장에서 도로를 건너면 바로 과달키비르 강변이다. 아랍어로 ‘큰 강’이라는 뜻을 가져서 그런지 코르도바에서 이 강을 보았을 때는 강물도 뿌옇고 강폭도 좁았는데 여기는 하구라 물도 맑고 강폭도 꽤 넓으며 정박한 배들도 많이 보인다. 로르카가 <세 강의 발라드>에서 “오렌지와 오리브 숲 사이를 흐르고,” “심홍색 수염을 가졌다”고 노래했던 바로 그 강이다. 과달키비르 강을 보니 로르카가 말한 ‘심홍색 수염’이 과연 뭘까 의문이 든다. 아마도 우리가 코르도바에서 본 것처럼 붉은 흙탕물이 흘러서 그렇게 묘사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하나는 울고 있고 하나는 피”라고 노래했으니 뭔가 실연의 아픔을 달래거나, 아니면 이슬람과의 싸움에서 죽어간 넋들을 위한 ‘진혼곡’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 과달키비르 강은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남미 스페인 정복자들의 글과 편지에 무수히 등장한다. 여기서 남미 식민지로 가는 배가 떠나고 돌아왔으니 그들에게는 상징적인 장소리라. 그렇다. 여기서 콜럼버스와 마젤란이 떠났고 숱한 스페인 정복자들과 상인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배를 탔던 것이다. 이 과달키비르 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남미 정복과 식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황금과 피로 얼룩진 거대한 상징인 것이다.

강 위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산 텔모 다리가 있고 그 앞에 12각형으로 된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 있다. 이 탑은 건너편에 있었던 은색 탑과 같이 항구를 방어하고 지나가는 배를 검문하기 위해 세워졌다 한다. 대항해 시대의 중심 도시답게 탑의 외벽을 금색 타일로 입혔기 때문에 그런 화려한 이름이 붙여졌다. 도시를 수호하는 하안 검문소인 셈이다. 탑 밑으로 쇠사슬을 늘어트려 지나가는 배를 통제하기도 했다.

산 텔모 다리와 황금탑을 지나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돈 호세가 경비를 서다가 카르멘을 만났던 그 유명한 담배공장이 나온다. 1750년에 세워졌는데 지금은 세비야 대학 문학부로 쓰고 있어 젊은 학생들이 무시로 드나든다. 모두가 세비야의 분위기처럼 밝고 활기차다.

그 앞에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나온다. 1893년 남편을 잃은 공작부인이 산 텔모 궁전 정원의 반을 세비야 시에 기부해서 조성된 공원으로 세비야에서 배출한 유명한 인물이나 기념될만한 것을 구역으로 나누어 공원을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 그럼으로써 시민들에게 자기의 고향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리라. 그러지 않아도 대서양 시대 해양제국의 수도로서 자긍심이 대단한데 이런 공원까지 조성해서 애향심을 더욱 부추기니 세비야 사람들이야말로 이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 리가의 3강팀이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세비야’인 것이 이해가 간다.

마리아 루이자 공원을 나오면 바로 옆의 스페인 광장으로 이어진다. 이 스페인 광장은 1929년 이베로 아메리카(스페인과 남미) 박람회 때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는 카탈로냐 지구 사령관인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군사독재 기간이어서 자신의 경제발전 노력을 홍보하기 위해 같은 해에 자신의 지역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세계 만국박람회를, 남미를 주물렀던 세비야에서는 이베로 아메리카 박람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기 위해 건축가 아니발 곤잘레스가 거대한 반원형 건물을 세우고 그 밑으로 구획을 나누어 그 벽면에 화려한 타일로 스페인 각 지방의 특징을 벽화로 제작하였다. 그 지역의 유래나 왕조에 얽힌 설화를 재현하여 벽화를 장식하고 그 밑으로 디귿자 모양으로 푸른 색 타일로 장식한 턱을 두어 쉴 수도 있게 했다. 이것만 모두 보더라도 스페인의 전 지역을 여행하는 느낌이 든다. 그 옆에는 인공호수를 파고 물을 넣어 뱃놀이를 할 수 있게 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물이 없어 다리만 허공에 떠 있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놀다 저녁을 먹고 플라멩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시간이 여유가 있길래 스페인 광장에서 숙소까지 걷기로 하였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세비야의 활기찬 거리를 걷고 싶었다. 세비야는 차분한 고도 똘레도와는 달리 정말 활기차고 쾌활한 도시였다. 거리는 분주하고 어수선했으며 사람들로 넘쳐났다. 정말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선율이 분주한 거리와 밝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특색 있는 도시를 다니다 보면 그 도시의 색깔과 향기, 그리고 음(音)이 느껴져 그 이미지가 오감으로 전해진다. 세비야가 그런 도시다. 로르까가 노래한 ‘짙은 붉은’ 색깔에다 ‘오렌지 향기’, 그리고 비제의 <카르멘>의 열정적인 선율이나 모차르트의 경쾌한 선율이 바로 세비야의 느낌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세비야에 와서 <카르멘>이나 <피가로의 결혼>을 들어보라. 그 음악의 선율과 기막히게 일치하는 도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호텔 프론트에서 볼만한 플라멩코 공연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저녁을 먹고 찾아간 곳은 제대로 플라멩코를 공연하는 극장이었다. 대개는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플라멩코를 많이 공연한다.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에서 유랑하는 집시들의 춤이다. 그들의 한과 슬픔이 짙게 배어있는 춤인데 오히려 화려하고도 경쾌하다. 뭐라고 할까? 화려하고도 경쾌한 슬픔! 어감으로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단어가 플라멩코에서는 어울린다. 플라멩코는 집시들의 말로 ‘멋지다’는 뜻이니, 멋진 춤 속에 그들의 한 많은 세상살이를 녹여냈으리라.

음악은 ‘깐테’라 하고 춤은 ‘바일레’라 부르는데, 극장 공연이라 그런지 <카르멘>의 주요한 부분들을 플라멩코로 공연하는 것이 아닌가. <카르멘>의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이 나와 춤을 추며 연기를 하는 것이 일품이었다. 중국의 경극처럼 얼마나 몸을 현란하게 움직이는지 그 경쾌한 음악이 제대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탭 댄스처럼 발을 구르고, 몸을 돌리고, 손뼉을 쳐 박자를 맞추고, 정말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현란하면서도 절도가 있어 뭔가 강렬한 에너지를 모았다가 발산하는 것 같았다. 춤을 잘 출 때는 관객들이 우리의 판소리 공연처럼 ‘올레!’ 하면서 추임새를 넣기도 한다. 2시간 정도의 공연이었는데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정말 세비야에서 보는 플라멩코는 이 도시의 분위기와 일치하는 것 같다. 바로 플라멩코야말로 세비야의 몸짓이 아니던가.

밖으로 나오니 세비야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계속 <카르멘>의 애절하면서도 열정적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세비야는 카르멘과 피가로가 있어 행복하지 않은가. 어느 도시가 이렇게 풍부한 문화적 이미지와 기호들을 가질 수 있었던가. 세비야야말로 대서양 시대 해양제국의 수도로서 분명한 자기의 색깔을 지니고 있는 ‘열정’의 도시다. 올레! 세비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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