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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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황금시대’ - 똘레도(Toledo)

joyman 쪽지





우리는 애초 하루 잡아서 마드리드에서 스페인의 옛 수도였던 똘레도(영어식 외래어 표기로는 ‘톨레도’가 맞지만 그렇게 발음하면 그곳의 독특한 느낌이 살아나지 않아 맞춤법을 무시하고 ‘똘레도’로 표기한다.)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수도인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어 대개는 그렇게 똘레도를 여행한다. 그런데 똘레도에는 스페인의 3대 화가 중 한 사람인 엘 그레코(El Greco, 1548~1614)가 37년 동안이나 살았을 뿐더러 그의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는 아내가 아예 하루를 묵자고 하여 1박 2일 코스로 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게다가 스페인의 국민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64~1616)의 저 유명한 『돈키호테』의 무대인 라만차 지역이 아닌가.

어쨌든 하루를 묵을 심산으로 느긋하게 똘레도를 향했다. 식물원이 구내에 들어서 있는 마드리드의 아토차 역에서 2시간이면 똘레도에 도착한다. 돈키호테가 지나다녔을 황량한 벌판을 지나 똘레도에 도착한 우리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호 강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 똘레도는 완연한 중세의 모습 그대로 언덕 위에 우둑 올라서 있었다. 엘 그레코가 17세기에 그린 ‘똘레도 전경’과 별로 다른 바가 없었다. 현대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마드리드에 있다가 똘레도를 오니 500~600백년을 거슬러 시간여행을 한 것 같았다. 역사(驛舍)부터 심상치 않았다. 아랍과 스페인 양식인 혼합된 무데하르 양식으로 황량한 벌판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돈키호테가 돌진했던 거대한 풍차와 같았다.

우리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라만차의 황량한 들판을 로시난테를 타고 달리는 돈키호테처럼 빨리 똘레도를 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택시를 집어타고 똘레도의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똘레도의 성문은 모두 4개가 있는데 가장 왕래가 빈번한 곳이 평지로 연결된 비사그라(Bisagra) 문이다. 붉은 색 탑 사이로 문 위에 왕관을 쓴 쌍두 독수리의 왕실문양이 선명하게 조각돼 있어 드디어 다른 시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에는 이 외에도 알폰소 6세문, 태양의 문, 깜브론의 문이 더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모험심 가득한 편력기사였다. 그렇게 똘레도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게다가 우리가 아토차 역에서 친절한 인포메이션 할머니에게 예약한 숙소는 ‘역사호텔’이라고 옛 건물을 그대로 개조한 호텔이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한옥 호텔인 셈이다. 역사적인 고도에 역사 호텔이라. 호기심 많은 이방인 편력기사가 피곤한 몸을 쉬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는 편력기사 돈키호테처럼 똘레도를 다니며 우리의 호기심을 채워줄 모험을 벌이는 일만 남았다. 자, 기다려라 똘레도여 ! 우리가 간다. (이 지역에 동화되려고『돈키호테』를 너무 많이 읽어서 그렇게 됐으니 다소 어법이 이상해도 이해하시길 바란다.)

 

‘돈키호테’의 고향, 라만차

 

스페인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대표적 캐릭터인 우리의 위대한 ‘돈키호테(Don Quixote)'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 사람 몇 명이 모이면 그 중에 반드시 돈키호테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국민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다소 무모하지만 이상과 열정이 있는 저돌적인 그 모습이 정열적인 스페인 문화와 국민성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수도 마드리드의 중심에 위치한 에스파냐 광장에는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비쩍 마른 돈키호테와 배불뚝이 산초 판사의 동상이 시내를 굽어보고 있고 그 위로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스페인의 1유로 동전에도 국민작가 세르반테스를 새겨 국민들의 변함없는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가 있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은 묘하게도 1616년 4월 23일,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으니 세계적인 대문호가 같이 천국의 동행자가 된 셈이다.

이곳 똘레도에도 중심인 소코도베르 광장에서 성문 밖으로 나가 알칸다라 다리로 이어지는 곳에 세르반테스 길이 있고 길 가운데 그의 동상이 우뚝하게 서있다. 그것보다도 기념품 가게에 가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나무나 청동으로 제작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동상이다. 거의 예외 없이 비쩍 마른 돈키호테와 땅딸보에 배불뚝이 산초 판사가 상품 진열장에 형형색색으로 늘어서 있다. 이곳이 돈키호테의 고향, 라만차에 속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말하면 라만차는 경기도 정도 되겠고, 똘레도가 서울인 셈이다.

그래서『돈키호테』(원제목은『재치있는 시골 귀족 라만차의 돈키호테』이나 여기서는 줄여서 그냥『돈키호테』로 부르겠다.)의 2부가 시작하는 곳에 똘레도가 등장한다. 자, 이제부터는 좀 장황하게 『돈키호테』이야기를 하겠다. 혹시 재미가 없다면 읽기를 멈춰도 무방하니 양해하기 바란다. 이렇게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돈키호테는 ‘착한 알론소 키하노’라 부르는 시골의 몰락 귀족으로(우리로 치면 몰락 양반인 셈이다.) 중세의 기사도 소설을 읽는 것이 취미이나 너무 거기에 열중한 나머지 스스로 기사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붙인 뒤 창고에서 녹슬은 기사의 복장과 무기를 꺼내 손질하여 갖추어 입고는 불의를 무찌르는 편력기사의 모험을 실현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편력기사에게는 구원의 여인이 있어야겠기에 상상으로 둘시네아를 만들어내고 편력기사가 되는 의식도 성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허름한 여관에서 거행한다. 드디어 편력기사가 됐다고 생각한 돈키호테는 길에서 만난 똘레도 상인에게 둘시네아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말하도록 강요했다가 오히려 심하게 매를 맞고 길에 나동그라져 있는 것을 동네 농부가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온다.

한편 집에서는 돈키호테가 이렇게 된 것이 기사도 소설 때문이라 여기고 신부와 이발사, 조카딸은 서재에 있는 책을 ‘종교재판’하여 모조리 불태워 버린다. 하지만 정신이 든 돈키호테는 동네의 농부 산초 판사에게 섬의 총독 자리를 약속하고 자신과 같이 모험을 떠나자고 설득하여 그를 데리고 다시 두 번째 모험을 떠난다. 길을 가다가 풍차를 발견하고 거인이라고 생각해 달려들다가 상처만 입고 나둥그러지는 지경을 당하고 수도사들과 같이 길을 가는 비스카야 인들에게 덤벼들어 공주(사실은 비스카야인 부인)를 구한다고 그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돈키호테가 칼을 빼들고 상대방을 향해 내리치는 절정의 장면에서 아쉽게 끝난다. 작가인 세르반테스는 한 발 뒤로 물러나와 누구인지 모르는 원작자가 이즈음에서 중단해버려 아쉽다고 딴청을 부리며 자신은 이 이야기와 전혀 관련 없음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이 이야기 1부의 마지막에서 드디어 『돈키호테』의 뒷부분을 똘레도의 알카나 거리에서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떤다. 어떤 소년이 잡기장과 종이 뭉치를 팔려고 내놓았는데 그 속에서 아랍어로 씌어진 『돈키호테』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무어인에게 무슨 말인지 몰라 해석해달라고 했는데 거기에 ‘아라비아 역사가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이야기’가 나와 얼른 돈을 주고 사와서는 그 무어인에게 부탁하여 한 달 반을 집에 머물게 하면서 『돈키호테』의 뒷부분을 번역했다고 한다.

이건 사실 작가의 위장이다. 당시 스페인 사회의 부조리와 귀족들의 부패를 풍자하기 위해 그들의 형상이 잘 드러난 기사도 소설을 가져와 이를 비튼 것이다. 그러니 작가로서는 드러내놓고 자신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을 뒤로 감추고 ‘아라비아 역사가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이 이름은 무어인이 흔히 사용하던 이름)’가 아라비아어로 썼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 교묘한 위장전술인 셈이다.

우리의 위대한 풍자작가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도 당시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세태와 사대부들의 위선을 풍자하기 위해 『열하일기(熱河日記)』의 <허생전(許生傳)>과 <호질(虎叱)>에서 이런 방법을 써야만 했다. <허생전>은 옥갑이라는 곳에서 비장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나도 윤영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라며 허생의 이야기를 꺼냈고, <호질>은 아예 북경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마을의 주막에 걸린 글을 베꼈다고 했다. 그대로 세르반테스가 했던 위장전술이 아닌가? 게다가 연암이 그 글을 베끼자 상점 주인이 그 까닭을 물었는데 대답이 걸작이다. 연암이 말하기를 “돌아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히면 모두 포복절도하여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갓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것이다.” 마무리까지 잊지 않는 이 완벽한 페인트 모션! 그렇게 위대한 풍자가들은 한 시대를 조롱했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런 풍자가 필요했을까? 이른바 우리의 돈키호테가 푹 빠졌던 ‘기사도 소설’은 15세기 말경 이탈리아, 플랑드르에서 나타나 16세기에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었던 양식이다. 중세 기사들의 무용담이 펼쳐지는 이 소설은 유럽 문화의 점진적인 궁정화를 반영한 것으로 낮은 계급에서 신분상승을 이룬 새로운 귀족계급과 절대주의로 기울어가는 군주들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위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양식이 스페인에서 특히 유행했던 것은 1492년 700년 동안 시달리던 아랍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711~1492)'을 종결시켰으며,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고 이탈리아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식민지를 확대하면서 그들의 금은보화를 가져와 막강한 부를 이루게 된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즉 막강한 스페인을 만든 군인정신 혹은 기사도 정신이 추앙되고 영웅시 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를 이상화한 기사도 소설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돈키호테』에서도 『아마디스 데 가울라』라는 당시 유행했던 소설이 등장한다. 돈키호테는 스스로 기사도 소설 속의 주인공인 아마디스로 착각할 정도로 당시의 기사도 소설은 스페인을 열광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세르반테스도 돈키호테를 가리켜 “스페인의 유명한 기사이며, 라만차 지방 기사도의 빛이자 거울인 이 시대 최고의 기사”이며 “우리 시대에, 이 너무나 타락한 시대에 모든 것을 다 바쳐 명예를 되살리고, 과부를 돕고, 처녀들을 비호하면서, 산에서 산으로 계곡에서 계곡으로,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달리는 편력기사의 무훈을 펼친 최초의 기사”로 기사도 소설의 문맥으로 가져와 치켜세웠다(사실은 비아냥거린 것이다.).

하지만 영광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대항해 시대를 열고 대서양을 누볐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1588년 영국의 해적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패배를 당했고, 1598년에는 식민지로 있던 네덜란드가 완전한 독립을 이룸으로써 막강한 스페인은 16세기말에는 역사의 주역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스페인은 그들의 터전인 대서양을 영국의 해적과 네덜란드의 소상인에게 내주고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자 전쟁터를 누볐던 숱한 하급 귀족과 군인들이 몰락하여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심지어는 부랑자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기사도의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당시의 현실이 너무 처참해진 것이다.

세르반테스도 당시 잘 나가는 군인이 되고자 펠리페 2세의 군대에 입대하여 1571년 터키와 싸운 레판토 해전에 참여하여 왼쪽 팔을 못 쓰게 되는 영광의 부상을 입었으며, 그래도 군에서 계속 근무하던 중 마르세유 해안에서 알제리의 해적들에게 잡혀 5년간의 포로생활도 한다. 무적함대의 군인으로 바다를 누비며 다녔지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무적함대 스페인이 몰락하면서 “혁혁한 무훈의 용사이고 레판토의 영웅이며 이교도에 5년간 억류되었던” 위대한 군인 세르반테스는 적합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마드리드, 똘레도, 세비아를 전전하면서 세금징수원으로 살아야 했다. 늘 가난에 쪼들려 빈번하게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다. 한 작가의 개인사가 국가의 운명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기사도 소설을 풍자적으로 개작하여 당시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몰락하는 시대를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는데 스페인은 옛 영광만 노래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몰락한 시골 귀족인 돈키호테를 내세워 중세의 지배적 장르였던 기사도 소설을 패러디하여 당대를 풍자한 것이다. 스페인 황금시대의 문학적 상징인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고 조롱함으로써 그 화려한 시대가 지나갔음을, 그래서 풍차를 향해 돌진한 돈키호테처럼 냉혹한 현실에 내동댕이쳐졌음을 일깨워주려고 한 것이다.

 

스페인의 영광, 똘레도

 

똘레도에 가보면 돈키호테가 달렸을 황량한 벌판의 언덕에 옛 도시가 우뚝 솟아 있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언덕 아래로는 타호 강이 삼면을 휘돌아 흐르고 있어 천연적인 요새도시의 모습이다. 아랍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을 때 이들과 스페인간의 빈번한 전투가 있었고 적을 방어하기 좋은 요새도시인 똘레도는 도읍으로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실상 똘레도는 그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여러 나라의 도읍으로 이름을 떨쳤다. B.C 192년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변방으로 합병되면서 똘레툼(Toletum)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오늘날 똘레도의 어원이 된 것이다. 로마제국이 힘을 잃어갈 무렵 서고트족이 들어와 정착하고 579년에 그들의 왕조를 똘레도에 세웠다. 똘레도가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됨으로써 정치와 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400년에 개최된 1차 종교회의 이후 계속 여러 차례의 종교회의가 개최되면서 똘레도는 스페인에서 가톨릭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특히 589년 제 3차 종교회의 때는 서고트 왕국의 레까레토 왕이 공식적으로 가톨릭을 국교로 정함으로써 똘레도의 위상은 더 높아지게 되었다.

8세기에 접어들면서 스페인은 아랍 세력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711년 아랍왕 타릭에 의해 똘레도가 점령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700년간 소위 ‘국토회복운동’이 일어나면서 스페인과 아랍 세력 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진다. 아랍의 침공으로 피레네 산맥과 시에라 산맥으로 몸을 피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우선 서쪽 시에라 산맥에서는 아스트리아 왕국을 세우고 레온까지 진출해 레온(Leon) 왕국을 세웠다. 반도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Castilla) 왕국의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통합하여 1085년 드디어 똘레도를 되찾고 2년 뒤인 1087년에는 그곳을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정함으로써 스페인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만들었다.

한편 동쪽에서는 아라곤(Aragon) 왕국(카탈로니아와 발렌시아 포함)이 성립되어 1118년에 사라고사를, 1236년에 코르도바를, 1248년에 세비아를, 1343년에 알테시라스를 점령함으로써 국토회복의 염원을 구체화 시킨다. 당시 스페인은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등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카스티야가 반도의 중부에 위치하여 가장 큰 비중을 지니고 있었다. 드디어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결혼을 하여 스페인은 통일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가톨릭 부처왕의 분투로 1492년 그라나다에서 아랍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국토회복의 염원을 달성하게 된다. 마침 그 해는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로서 스페인으로서는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이 국토회복의 염원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한 ‘짓거리’가 남미의 식민지를 개척해 그들로부터 금은보화를 뺏어오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아랍세력에 의해 지배를 당했던 그 아픔을 다른 나라에게 그대로 전가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정복자란 이름의 ‘콘키스타도르(Conquistadores)'라 불리는 스페인 약탈자들은 가는 곳마다 무자비하리만큼 금은을 약탈하였다. 국토회복운동 기간에 연마한 전투기술을 발휘하여 코르테스 일행이 1519년 멕시코 원정에 착수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즈텍, 마야인들을 정복했으며,1533년 피사로는 페루의 잉카제국에 들어가 잉카 문명을 파괴하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했던 것이다. 그렇게 남미의 식민지 지배와 약탈을 통해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스페인의 부와 영광은 남미의 희생 위에 쌓아올린 피의 재물이었다.

똘레도는 아랍세력이 그라나다로 물러가고 국토회복운동이 불붙었던 13세기부터 펠리페 2세에 의해 수도가 마드리드로 옮겨간 1561년까지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특히 아랍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1492년 이후에는 통일된 스페인의 수도로 그 명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남미의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거둬들인 황금과 은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오게 되고 그 때문에 똘레도는 금과 은이 넘치는 ‘엘도라도’가 된 것이다. 똘레도가 금은 세공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국토회복 이후 가톨릭 국왕 부처는 반도 내에서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추방령을 내려 상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추방됨으로써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똘레도의 경제도 급속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스페인의 수석 성당, 똘레도 대성당

 

하지만 종교적 위상은 변함없어 가톨릭의 수호자인 스페인의 수석 성당으로 똘레도 성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페인에는 대성당을 ‘카테드랄(Catedral)’이라 부르는데 대성당은 이곳 똘레도를 비롯하여 산티아고, 세비아 등 세 군데만 있다. 규모는 세비아 대성당이 더 크지만 지위는 똘레도가 높다.

대성당은 똘레도 시가지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어 어디에서도 눈에 잘 뜨인다. 그런데 문제는 성당은 잘 보이나 골목이 워낙 미로처럼 얽혀있어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도 대성당을 올려다보며 나아갔는데 도저히 어느 길로 가야할지를 몰라 마침 그 동네 사는 스페인 아줌마가 있길래 우리가 아는 스페인어를 총동원하여(그래야 2~3 문장밖에 안되지만) 물어보았다.

우리말의 대성당이 어디에 있냐는 의미의 “돈데 에스타 카테드랄?”이라 물어보니 이 아줌마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났다고 반가운 내색을 하며 따발총 쏘듯이 따다다다 해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스페인어로 물어본 것이 후회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참을 그리고 나서 알겠냐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어오는 것이었다. 모른다고 시늉을 했다간 다시 따발총을 쏘아댈 것 같아서 우리가 아는 또 다른 스페인어인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며 얼른 자리를 떴다. 그래도 그 아줌마의 제스처가 워낙 커서 대충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동작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이래서 중요하다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손으로 가리켜준 골목을 돌자 정말 광장이 나오며 고딕식 대성당의 장엄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이 성당은 프랑스식 고딕사원으로 페르난도 3세 때인 1227년 착공하여 무려 266년이 걸려 국토회복운동을 종결한 1493년에 완공되었다 한다. 애초에 이 성당은 1212년 아랍군을 크게 물리친 나바스 데 똘로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알폰소 8세와 히메네스 대주교에 의해 건립이 결정되었다. 이슬람 왕국 시절에 회교사원이 있었던 곳을 개조한 것이다. 그래서 성당 내부는 이슬람과 스페인 양식이 혼합된 무데하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1221년에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이 공사를 승인하는 교서를 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가톨릭 권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성당인 셈이다. 당연히 스페인의 대주교가 이곳에 거주한다.

우뚝한 탑 사이로 성당 정면에 3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이 문을 통과하면 면죄를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면죄의 문’으로 불려진다. 오른 쪽에는 ‘심판의 문’이 있고, 왼 편에는 ‘지옥의 문’이 있다. 입장료를 그곳에서만 받아 대개는 면죄의 문을 통해 들어간다. 모두들 세상을 살면서 죄를 많이 지어서 그리로 들여보내나 보다. 그래서 용서받길 바라는 것이리라. 성당 옆과 뒤편에도 문이 있는데 성체 현시대를 실은 마차나 가마가 드나들기 편하게 만든 ‘야나(평탄이라는 뜻)문’과, 사자상 기둥을 세운 ‘사자 문’이 있다. 입구와 출구가 다르기에 성당을 다 보고 나갈 때는 대개 이곳을 이용한다.

성당 내부는 그야말로 보물 천지다. 남미에서 가져온 풍부한 금과 은으로 만든 수많은 보물과 조각품 등이 내부를 장식했다. 특히 성체 축일에 가마를 메고 시내를 도는 성체 현시대와 안치대는 무려 180kg의 금과 2톤의 은으로 만들어졌다니 남미의 보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 희생된 것이다. 역사는 정복자들에 의해 기술되기에 그들의 약탈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거룩한 사업으로 미화된다. 남미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들이 왕실이나 교회로 들어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약탈에 면죄부를 준 것이다. 무자비한 약탈과 살인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행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남미 스페인 정복자들의 광기를 다룬 베르네 헤어조크 감독의 <아끼레, 신의 분노>란 영화가 있다. 월남전을 다룬 <지옥의 묵시록>의 중세판 버전인데 광기에 사로잡힌 주인공 아끼레가 살인과 약탈을 무단으로 자행하며 스스로를 ‘신의 분노’라 자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오만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 스페인 정복자들은 군대와 같이 늘 사제를 동행했다.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사제는 군인들에게 승리를 위한 기원을 드린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지만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은보화로 장식한 화려한 스페인의 성당을 다니다 보면 남미에서 저지른 그들의 만행이 자꾸 어른거려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 성당의 또 다른 걸작은 바로크 양식으로 1732년에 나르시소 또메가 만든 ‘트란스파렌테(Transparente)'다. 위층에 있는 제단인 셈인데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고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었으며 주변에 가브리엘, 라파엘, 미구엘, 우리엘 등 4명의 천사를 조각하였고 대리석 기둥에도 수많은 조각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천정에서 빛이 들어오면 대리석 조각들이 빛은 받아 천상의 모습을 재현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성당의 가장 위대한 보물은 성물실에 전시된 그림들이다. 이곳 똘레도에 살았던 엘 그레코를 비롯하여 고야, 벨라스케스, 루벤스, 반 다이크의 그림들이 줄줄이 걸려있어 유명한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대부분 예수와 사도들의 모습으로 이 성당의 재정이나 위상을 짐작케 한다. 특히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성당을 가보면 이렇게 엄청난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건 교회의 세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성당은 당시 세계를 주름잡았던 스페인의 수석 성당이니 그 교세가 오죽했겠는가?

가장 눈길을 끄는 그림은 정면에 바로 마주치는 엘 그레코의 <엘 엑스폴리오>다. 번역하자면 <옷을 벗기우는 그리스도>정도 되겠다.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 붉은 성의를 벗기는 로마 병정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하늘을 향해 원망하는 듯이 처연한 눈빛을 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옆으로는 고야의 그림 <유다의 입맞춤>이 있어 뭔가 이 그림들을 통해 예수의 처형 당시를 증언하는 것 같다. 풍속화 같은 당시 생활상을 주로 그린 고야도 이런 그림을 그렸나 놀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순한 눈과 긴 얼굴 그래서 처연한 모습을 특징으로 하는 엘 그레코의 사도상이 죽 걸려있어 엘 그레코의 미술관인 것 같은 착각도 든다.

 

똘레도의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이제 진정한 똘레도의 화가, 엘 그레코를 얘기해야겠다. ‘그리스 사람’이란 뜻의 엘 그레코는 1548년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베네치아의 거장 티치아노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 티치아노는 최초의 근대적 화가라고 할 정도로 독특한 구도와 색채를 보여준 사람이다. 특히 만년의 걸작 <피에타>를 보면 독창적인 붓놀림을 통해 윤곽의 선이 뭉개지고 색채도 어두워 비통해하는 인물들의 내면을 기막히게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점을 엘 그레코가 이어받지 않았나 싶다. 스승인 티치아노가 카를 5세의 기마상을 그리는 등 30년 동안이나 스페인 궁정과 깊은 관계를 맺었기에 그레코도 스페인 왕실로 갔으나 그의 그림이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초상화에서 그의 그림은 너무 강렬하고 주관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코는 1577년 똘레도에 정착해서 그곳에서 37년 동안을 살다 그곳에 묻힌다.

생전의 그레코는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지 못해 늘 빚에 쪼들리고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도 성당 측으로부터 그림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채권자들의 독촉에 의해 소송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 똘레도의 남서쪽 산마르틴 다리 부근에 엘 그레코의 박물관이 있다. 애초 엘 그레코는 비예나 후작과 에스칼로나 공작의 버려진 저택에서 살았다 한다. 이곳은 지금 성모승천 거리와 인근 집들이 있는 곳에 해당한다. 지금의 엘 그레코의 집은 1906년 스페인의 관광국장이던 베가 인클란 후작이 그레코가 살던 부근의 폐가를 사들여 그의 기념관으로 1911년에 개관한 곳이다. 어쨌든 그리스 사람이지만 진정 똘레도를 사랑했던 그레코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박물관은 만든 것이다.

마침 우리가 묵었던 역사호텔은 바로 엘 그레코 뒷집이어서 영혼의 대화를 나누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우리는 신이 나서 아침 일찍 그레코의 집을 찾아가 그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예전 16세기에 살림을 했던 집기가 조금 남아있을 뿐이고 엘 그레코가 그린 그림은 한 장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이 집에서 가장 유명한 <똘레도 전경, 지도>다. 그림에는 엘 그레코 자신이 똘레도의 지도를 손에 들고 뒤로 똘레도의 전경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똘레도의 시가지가 그 지도에 그려진 모양처럼 위로 볼록하고 약간 휘어져 있다. 지도에는 평면으로 길과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이 지도 밖으로 튀어나와 시가지를 형성한 것처럼 보인다. 즉 서로 다른 공간인 지도와 시가지와 엘 그레코의 모습이 한 장면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매너리즘 시대’의 특징이다. 즉 원근법과 정확한 비례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화법이 주관적으로 변모되면서 공간이 분해되게 된다. 이런 경향은 후기 르네상스의 틴토레토, 그레코, 브뤼겔 등에 와서 두드러지는데 한 장의 그림 속에 서로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자의적으로 공간이 분할되면서 어떤 부분은 공간이 절약되어 부족해 보이고, 어떤 부분은 공간이 낭비되기도 한다. <똘레도 전경, 지도>도 그렇다. 시가지의 전경은 왼쪽으로 몰려있고 오른 쪽에는 황량한 벌판만이 존재한다. 그레코 자신과 지도는 똘레도의 전경에 비해 턱 없이 크게 그려져 있다. 똘레도의 지도와 시가지라는 두 개의 공간이 한 화면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매너리즘의 경향은 산토 토메 교회에 있는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산토 토메 교회는 이 한 장의 그림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상에서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맞아 엄숙하면서도 침통한 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매장을 직접 거행하고 있는 사람은 어거스틴 성인과 스테판 성인이다. 전설에 의하면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적선을 많이 했던 오르가스 백작이 죽었을 때 하늘에서 어거스틴 성인과 스테판 성인이 내려와 시신을 친히 매장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매장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당시 실존인물이다. 그 속에는 엘 그레코의 모습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레코가 자신의 아들 마누엘을 그림 속에 넣어 왼 손으로 매장의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연극이나 영화의 인물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관객에게 말을 걸듯이 “여기 보세요. 지금 막 입관하고 있습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마누엘의 시선은 그림 밖 그림을 보는 사람을 향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마누엘의 시선까지 고려한다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서있는 제3의 공간도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아주 복잡한 텍스트가 된다.

사람들 머리 위로 천상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구름 사이로 금발의 천사가 오르가스 백작의 영혼을 아기를 안듯이 팔로 감싸면서 하늘로 올려준다. 죽은 이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천상의 중앙에 예수가, 그 아래 왼쪽에 성모가, 오른 쪽에 세례 요한이 삼각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천상계 역시도 수많은 영혼들이 모여 오르가스 백작의 영혼을 영접하고 있다.

이 그림은 공간을 두 곳으로 나누어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드라마임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오르가스 백작의 영혼이 지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영접을 받으면서 하늘나라에 편안히 안착했음을 말한다. 깊고 섬세하며 신비로운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지상과 천상의 공간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리라. 하지만 이 때문에 인간들이 사는 현실세계는 변형되고 과장되어 불균형을 드러낸다. 현실이 천상의 세계와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인물들은 빛 속에 해체되어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공간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처럼 보인다. 엘 그레코의 인물이 창백하고 처연하여 질량감이 없는 영혼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점으로 인해 엘 그레코는 당시에는 인정을 못 받았지만 19세기에 들어와 피카소나 미로를 비롯한 바르셀로나의 모더니스트들에게 재평가되기에 이른다. 현실적 공간을 해체하여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렸다는 이유에서다. 정말 엘 그레코의 그림을 보면 그 인물들의 내면이 처연한 표정과 투명한 눈동자를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엘 그레코는 너무 시대를 앞서간 ‘근대적’ 화가인 셈이다. 똘레도는 엘 그레코를 가짐으로써 훨씬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보유한 셈이 되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작가나 화가 혹은 음악가가 얼마나 그 도시에 풍요롭게 문화적 세례를 주는가! <똘레도 전경, 지도>를 보라. 도시는 예술가로 인해 영혼을 얻고, 예술가는 자신이 사는 도시로 인해 육신을 얻는 것이다.

 

정겨운 똘레도의 뒷골목

 

아랍이 지배했던 도시가 다 그렇듯이 똘레도도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곳이다. 그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우리의 고향 골목길, 그 정겨운 고샅 같다. 엘 그레코 집 옆의 전통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우리는 똘레도의 골목을 편력기사가 되어 누비기로 했다. 더욱이 저녁이 되니 날씨도 선선하여 거리를 산책하기에는 그만이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거리나 골목을 산책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이다. 대개는 많은 여행객이 한나절에 서둘러 똘레도를 구경하고 저녁에는 마드리드로 돌아간다. 그래서는 그 지역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어느 곳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밤을 지내야 한다. 그래야만 도시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항상 여행하면서 최소한 1박2일을 기준으로 정했다. 도시의 밤을 보기 위해서다.

똘레도의 저녁거리는 의외로 한산했다. 사진 찍기를 즐겨하는 아내는 특히 해질 무렵에 야경이 아름답다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데 우리와 거의 같은 코스로 일가족인 사람들이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와 비슷한 연배의 부부와 딸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우리가 이쪽 골목으로 가면 그 사람들도 그리로 오고 저쪽 골목으로 가도 또 따라 오는 것이었다.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닌데다 나중에 호기심도 생겨 그들과 인사를 나누기로 작정하고 반갑다며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사내는 말이 없고 대학생 정도 되는 딸이 대답하기를 와인의 고장인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왔다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여름 휴가철을 맞아 이곳으로 왔나 보다. 그 날은 그렇게 가볍게 인사만 하고 헤어졌는데 이틀 후 코르도바에 갔을 때 메스키토에서 이어지는 골목에서 그 사람들을 또 만났다. 이럴 수가, 우리와 여행경로도 같을뿐더러 구경하는 패턴도 비슷했던가 보다. 정말 그때는 오랜 친구처럼 반가워 사진도 같이 찍고 애기도 한참을 나누었다.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끼리 지구의 어느 한 모퉁이 스페인의 뒷골목에서 서로 이렇게 두 번을 만났으니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저녁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소코도베르 광장인데 길다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지역이나 역으로 가는 버스와 택시들이 몰려있어 늘 분주하고 활기찬 곳이다. 광장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어 여행객들에게는 아주 좋은 휴식을 제공한다. 우리도 광장의 카페에 들어가 스페인산 와인으로 스페인의 영광을 안고 있는 고도 똘레도의 밤을 자축했다.

이 광장에서 세르반테스 언덕을 오르면 우람한 성채, 알카사르(Alcazar)를 만난다. 스페인에서 성채를 알카사르라고 하는데 똘레도의 알카사르는 참 사연이 많은 곳이다. 로마제국 시절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성채로 존재했었으며 11시기에 알폰소 6세가 똘레도를 수복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하게 되었다. 이 성의 첫 주인이 바로 스페인의 무훈서사시 <엘 시드(El Cid)>의 주인공인 로드리고다. 그는 많은 제후들 앞에서 알폰소 왕의 결백선언을 이끌어내어 괘씸죄로 추방됐지만 수많은 기사들을 모아 발렌시아를 구하고 모든 영광을 카스티야 왕인 알폰소에게 바침으로써 국토회복운동의 기반을 다진 스페인의 영웅이다. 그가 똘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성주로 부임한 것이다.

이 알카사르를 왕이 거주하는 왕성으로 변모시킨 사람은 스페인을 통일시킨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외손자인 카를로스 5세다. 그는 유명한 건축가들을 동원하여 알카사르를 왕성으로 단장했지만 1561년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 의해 수도가 넓은 평야 지역인 마드리드로 옮겨가면서 그곳은 왕실 가족의 숙소로 전락한다. 그 뒤 알카사르는 나폴레옹에 의해 폐허가 되고, 스페인 내전(1936~1939)중에 공화파들의 폭탄공격으로 잿더미로 변했다. 내전 뒤 건축도면에 의해 다시 건축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니 정말 스페인과 더불어 영욕의 세월을 같이 한 셈이다.

1936년 프랑코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지 3년 동안 스페인 전역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파시스트인 프랑코는 독재자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아 중화기들로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켰다. 프랑코의 부탁을 받은 독일공군의 폭격기들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파리로 망명한 피카소가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게르니카>를 그렸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파시스트에 의해 스페인이 점령당하는 것을 보고 자유를 신봉하는 각국의 지원병들이 공화주의의 편에 서서 싸웠는데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나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은 바로 그 시대의 처절한 사연을 전하고 있다. 내전으로 무려 50만명이 희생됐는데 그 중 1/3은 전투 중에 죽었다 하니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알카사르에서 언덕을 내려와 세르반테스 길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타호 강에서 가장 오래된 ‘알칸타라 다리’를 만난다. 알칸다라가 아랍어로 ‘다리’를 뜻하기에 아랍 왕국 시절에 만들어 졌으리라 짐작되지만 연원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리의 기초공사에 쓰이던 재료들이 로마시대의 건축자재이기 때문이다. 아랍 왕 압달라만 3세는 이 다리를 보수하여 다리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기여했고, 알폰소 10세는 다리를 다시 보수하고 교각에 보호장치를 함으로써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만들었다. 1721년 마차가 쉽게 다닐 수 있도록 탑으로 된 문을 헐고 아치문을 만들었으며 현재 안쪽에 남아있는 탑으로 된 문은 1484년 만리케라는 건축가에 의해 재건됐는데 탑 위에 국토회복운동을 지휘한 가톨릭 국왕 부처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알칸타라 다리를 거쳐 똘레도 밖으로 나가면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 있다. 아내가 그렇게 봐야한다고 하여 택시를 타고 부탁하니 그 장소로 데려다줬다. 정말 그레코의 그림처럼 타호 강에 둘러싸인 똘레도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똘레도에서 본 풍경 중에 가장 장관이었다. 똘레도를 오면 반드시 이 장면을 봐야만 진정으로 똘레도를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레코의 그림처럼 도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도시가 되는 그런 환상을 체험할 수 있다. 그 황량한 벌판에 중세도시 똘레도는 마치 마법의 도시처럼 우뚝 솟아 있어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을 정도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알칸다라 다리로 다시 오니 하늘이 벌써 어두워져 밤하늘 위로 달이 떠올랐다. 알칸타라 다리에서 보는 똘레도의 야경은 정말 절경이었다. 뒤로 조명을 받아 알카사르와 대성당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앞으로는 언덕 위에 작은 성채가 빛난다. 낮에 보니 타호 강이 누런 물이었는데 밤에는 그 위에 밤하늘과 조명을 받은 건물들이 어리어 환상적이었다. 저 멀리 황량한 들판으로 길이 어디론가 뻗어있었다. 우리도 내일이면 저 길로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처럼 미지의 세계를 찾아 달려갈 것이다. 그래, 여행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고단한 여정이지만 그렇게 길을 찾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생이 아닌가? 황량한 벌판에 난 길로 차 한 대가 전조등을 켜고 달리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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