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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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속을 걷다- 아를(Arles)

joyman 쪽지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 속으로 걸어 다닌다면 어떤 기분일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또한 현실에서 살아나오는 그런, 마치 꿈속을 걷는 것 같으리라.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아름다운 도시 아를(Arles)은 우리에게 그런 도시였다. 프랑스를 간다고 계획하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도시가 바로 아를이었다. 해서 프랑스 여행계획을 아예 남프랑스의 예술도시를 중심으로 잡았던 터였다.

샤갈과 마티스의 니스(Nice)를 시작으로 세잔의 엑상 프로방스(Aix-en-province)를 거쳐 교황이 유폐됐던 연극의 도시 아비뇽(Avignon)과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Arles)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정말 아내의 말처럼 ‘미술사 기행’이 된 것이었다. 그 여정의 느낌표가 바로 아를이다. 우리 식으로 읽으면 ‘아를’이 되지만 불어는 ‘r'을 '흐’라고 발음하니 그곳에서는 ‘아흘’이라 부른다. ‘아흘’하면 정말 목이 메인다.

 

아비뇽의 유폐, 아비뇽의 거리를 헤메다

 

애초의 의도는 교황이 유폐됐던, 비교적 큰 도시인 아비뇽에서 2박을 하면서 그 옆에 있는 아를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사실 우리에게는 아비뇽이나 아를에 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었다. 여행안내 책자에도 남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Aix-en-province), 아비뇽(Avignon), 아를르(Arles)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정말 맨 땅에 머리 박는 심정으로 지도를 보고 계획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엑상에서 기차를 타고 아비뇽에 내리는 순간 뭔가 어긋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TGV 역이라는 것이 허허벌판에 있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다시 아비뇽 시내를 들어가야 하는데 무려 30~40분이 소요될 정도였다. 게다가 시내에 들어가니 그 좁은 구시가지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알고 보니 7월 한 달 동안 ‘세계연극축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구시가지의 벽이란 벽은 온통 연극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비뇽 세계연극축제'를 들은 기억은 있는데 언제 하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 방을 잡으려고 인포메이션에 갔더니 모든 호텔이 다 찼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정말 노숙이라도 해야 할 참이었다. 예전 8명의 교황이 그랬던 것처럼 잘못하다간 아비뇽에 유폐되겠다 싶었다. 혹시라도 방이 있을까 하여 아비뇽 구시가지의 호텔을 다 돌아다니며 방이 있는가를 물었지만 대답은 ‘노’였다. 심지어는 아예 문 앞에 “다 찼음(Complete)”이라는 팻말을 걸어놓은 곳도 있었다. 그러기를 2시간쯤 됐을까 구시가지 입구에 위치한 Ibis 호텔에서 "오늘은 방이 없지만 내일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귀가 번쩍 띄어 일단 다음 날 방을 잡았다. 여기다 짐을 맡기고 우선 가까운 아를에 가서 그곳을 먼저 구경하고 오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를의 사정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은 ‘어떻게 되겠지 설마 잘 데가 없을라구’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아를에 갈 수가 있었다. 아를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비뇽에서 기차를 타고 첫 번째 정거장에 내리란 얘기를 듣고 15분을 갔을까, 앉아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금새 기차는 아를에 도착하는 것이 아닌가. 지도를 보니 론강을 따라 아비뇽에서 마르세유까지 기찻길이 나 있었다. 말하자면 아를은 아비뇽의 위성도시였던 셈이다.

하지만 실상 아를은 로마시대 때부터 조성된 오래된 도시였다. 갈리아 총독이었던 시저는 이곳을 ‘갈리아의 로마’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원형경기장, 야외극장, 목욕탕, 궁전 등을 지었다. 그 때문에 이곳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무려 7군데나 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로마 유적지인 셈이다.

역에서 내려 구시가지를 들어서면 로마시대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어 마치 고대 로마제국의 입구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게다가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그 아름다운 론강이 도시를 휘감고 있다. 로마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의 방죽에서 해지는 론강을 바라보노라면 정말 고흐가 왜 이곳에 매료되어 평생을 여기서 보내려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도시의 어디에다 캔버스를 들이대도 다 그림이 되는 곳이었다.

 

<아를의 여인>, 그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

 

고흐뿐이 아니라 아를은 비제(Bizet Georges, 1838~1875)의 모음곡 <아를의 여인>으로도 유명하다. 원작은 이쪽 프로방스 지역 님므 출신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희곡이다. 부잣집 도련님인 프레데릭(단편소설에서는 장)이 아를의 여인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이 여인은 동네의 매혹적인 과부로 많은 애인을 거느리고 있는 팜므 파탈(femme fatale; 치명적 여인)이다. 프레데릭은 춤추는 그 여인에 반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과 결혼하기를 갈구한다. 결국 집안에서도 승복을 하고 아들에 뜻에 따르기로 하지만 그녀의 정부가 등장하여 자신과의 관계를 폭로하는 바람에 상처받은 프레데릭은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그것도 자신의 결혼식 전날에...“나는 그녀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남자들을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리고 그 위험한 사랑은 얼마나 황홀한가. 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비록 파멸을 향해 질주한다 할지라도 그녀를 향한 사랑은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이런 위험하고도 비극적인 사랑에 매료된 비제는 1872년 알퐁스 도데의 희곡을 바탕으로 <아를의 여인>이라는 27곡의 모음곡을 만든다. 그 뒤 비제는 이 주제에 집착해 말년에 저 유명한 <카르멘>을 작곡하게 되지만, <아를의 여인> 때문에 아를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도시로 각인되게 된다.

그렇다 <아를의 여인>만큼이나 강렬한 도시가 바로 아를이다. 아를은 프로방스의 따가운 햇살이 종일 내리쬐고 라벤다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곳이다. 빛을 중시하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인상적인 남프랑스의 아를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강렬한 인상이 고흐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우리가 보통 ‘프로방스’풍이라 하면 태양의 노란색과 라벤다의 보라색이 어울려진 원색의 강렬한 색감을 말하는데 그것이 이곳의 색조이자 이미지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파주의 헤이리에 프로방스란 식당과 빵집이 있다. 가게의 외관을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등의 원색으로 프로방스 분위기를 한껏 살리려했지만 사실 우리의 산천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 프로방스는 완만한 구릉과 야생화 핀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다. 우리도 아를의 시내를 돌아다니다 원형경기장 옆의 가게에서 노란색 바탕에 보라색 라벤다 무늬가 촘촘히 그려진 프로방스풍의 식탁보를 하나 샀다. 이 아름다운 도시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의 계획은 이곳에 묵으면서 고흐의 그림 속을 걸어 다니는 거였다. 역 앞의 인포메이션에 가서 지도를 얻어 보니 마침 세계문화유산과 같이 고흐의 그림 장소가 표시되어있어 다니기에 좋았다. 론 강가에 잡은 숙소도 깨끗하고 정갈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예상보다 방값이 싸서 더욱 좋았다. 여기 저기 고흐의 그림이 걸려있고 우리가 묵은 방은 정말 그림에 등장하는 고흐의 침실, ‘노란 방’과 같았다. 그림에 등장하는 등나무 의자가 그 방에도 놓여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아를에서 고흐와 만나기 시작했다.

아, 빈센트,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

 

여장을 풀고 우리는 곧바로 아를의 밤거리로 나갔다. 고흐의 그림들과 만나기 위해서다. 저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 시리즈, <밤의 카페, 테라스>, <별이 빛나는 론 강>을 만나기 위해서다. 위대한 그림들을 접하는 것도 감동이지만 그 그림의 장소를 찾아가 화가가 대상을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가장 먼저 우리와 마주친 것은 ‘별이 빛나는 론 강’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흐의 그림처럼 론 강위에는 그렇게 별이 쏟아지지 않았다. 그냥 캄캄한 밤하늘 아래 유장한 론 강이 도시를 휘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밤의 론 강은 고흐의 그림으로 인해 아름답게 보였다. 아마도 문명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아름다운 별빛을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닐까?

시내의 중심에 있는 저 유명한 ‘밤의 카페’에 갔을 때도 그랬다. 시내가 조용해서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나 했는데 ‘밤의 카페’가 있는 광장에만 사람들이 바글대는 것이 아닌가. 모든 관광객과 주민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그 광장은 도시의 중심에 있으며 비교적 넓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그 기념비적인 카페에 가서 저녁을 먹고 와인 한잔을 곁들이려고 했지만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너무 비쌌다.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가 우리 돈으로 무려 3~4만원이나 되어 옆의 가게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카페는 고흐가 그림을 그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다가 카페 이름도 고흐의 그림 제목처럼 ‘밤의 카페(Cafe de Nuit)’였는데 다만 가격이 좀 비싸 사람들은 그 옆의 카페에서 식사를 하고 술이나 차를 마시면서 이 유명한 카페를 사진으로 담았다. 사진을 찍어 보니 고흐의 그림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지붕의 선이며 테라스의 노란 색까지 그대로 고흐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하지만 창공에 빛나는 별은 여기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고흐 마음속에 있는 무수한 별을 화폭에 담은 것이리라.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도시와 마을을 상징하는 지도의 검은 점들이 나를 꿈꾸게 만들듯이 별은 나를 꿈꾸게 한다.”고 했다. 정말 고흐는 별을 지독히도 사랑했던 화가였다. 밤을 그린 그의 모든 그림에는 거의 예외 없이 무수한 별들이 등장한다. 맥클레인의 유명한 팝송 <빈센트>의 첫 소절도 바로 “Starry starry night~"이 아니었던가. 그가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1년 6개월 동안 파리에 머물던 고흐는 온갖 인간들이 들끓는 파리를 혐오해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남프랑스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1886년 2월 훌쩍 파리를 떠나 이곳 아를에 오게 된다. 그리고 여기 아를에서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풍광과 온화한 기후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흐는 무려 187점의 유화와 십 여점의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게 된다. 따뜻한 기후와 편안한 마음 때문인지 아를 시절 고흐의 그림은 노란 색과 붉은 색, 초록색 계통의 따뜻하고 온화한 빛깔들로 채워져 있다.

1888년 고흐는 라 마르틴 광장에 있는 일명 ‘노란 집’을 빌려 ‘남프랑스 화가공동체’를 세울 생각을 하고 그의 친구 고갱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10월 고갱은 아를에 왔지만 고흐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데다가 작품에 대한 토론이 과열되어 아를을 떠나려하자 급기야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가장 가까운 벗이 자신을 버린다는 생각에 고독과 소외를 느껴 정신착란이 온 것이다.

고흐야말로 정말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실상 고흐만큼 고독을 싫어한 사람도 드물다. 고흐는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며 살기를 바랐으리라. 그 꿈이 무산되고 친구로부터 버림을 받자 심한 정신착란이 온 것이다. 그해 12월 고흐는 시립 생 레미 정신요양원에 스스로 찾아가 입원한다. <빈센트>의 가사처럼 “온전한 당신을 지키려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신요양원에 들어가서도 그림에 대한 고흐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입원한 생 레미 정신요양원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우리도 고흐의 자취를 좇아 그 다음날 생 레미 정신요양원에 들렀다. 시내 외곽에 있는 그곳은 지금은 호텔로 말끔히 단장 되어있었다. 미음자 모양의 특별한 장식 없는 사각형 건물이 예전 그곳이 병원이었음을 알려주지만 가운데 위치한 정원을 보는 순간 똑 같은 고흐의 그림이 떠올라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이런, 정말 똑 같았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서도 의사들은 고흐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그 요양원의 정원을 즐겨 그렸다.

다음 우리는 저 유명한 아를의 도개교를 찾아갔다. 그 유명한 다리는 지금 ‘고흐의 다리’로 명명돼 있었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안 와서 물어보니 걸어가도 3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우린 고흐의 그림 속을 걷기로 했다. 가는 길에 우리는 고흐의 그림에 무수히 등장하는 실편백 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 고흐의 그림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실편백 나무를 보고 고흐의 고향인 네덜란드, 그 추운 북유럽에 있는 침엽수로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 따뜻한 남프랑스에 지천으로 널린 게 실편백 나무였다. 고흐의 그림에 보면 불꽃처럼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며 오르는 것이 바로 실편백 나무다. 마치 요동치는 영혼처럼.

고흐는 실편백 나무에 대해 이렇게 편지에 썼다. “실편백 나무는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해바라기를 그리기 위해서 그랬던 것처럼 실편백 나무를 그리기 위해서 캔버스를 만들어야했다. 그 이유는 실편백 나무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놀랄 만한 균형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품위있는 푸르름이란.....” 그렇다, 많은 그림에 등장하는 실편백 나무는 이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야했던 위대한 영혼의 투쟁 혹은 승리의 자취다. 하지만 그 승리는 천상의 것이다. 이 고달픈 지상에서의 싸움은 늘 고통과 패배로 점철되었다.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고 이정표도 없는 아를르의 들판을 걷길 1시간이나 됐을까 저 멀리 고흐의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규모의 공장지대를 지나 비포장도로의 외진 곳에 그 다리가 있었다. 제법 멋있는 곳에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썰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교통이 불편해 직접 차를 몰고 오지 않으면 오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도착해 보니 우리 외에는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시골 외진 곳에 있는 오래된 다리 같았다. 덕분에 우리는 그 기념비적인 다리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런데 그림과 비교해 보니 그림에 등장하는 빨래터는 고흐의 창작이었다. 빨래터가 있을 만한 공간이 없고 다리 옆은 급경사였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무수하게 많은 별을 그렸던 것처럼 여기 도개교를 그릴 때에도 빨래터를 그려 사람들을 모았던 것이다. 고흐의 그림에는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는 서너 명의 아낙들이 등장한다. 고흐는 이 다리를 좋아해 유화로 수채화로 스케치로 무수하게 많은 그림을 남겼다. 지금은 그 다리로 사람과 차량은 통행 하지 않고 보존만 하고 있는 상태다. 다리의 앞에는 고흐의 그림을 세워 그 다리가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다리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 그림판이 없다면 고흐가 그린 도개교인줄 알 수 없을 정도로 외지고 한산했다.

1시간이나 걸리는 그 길을 우리는 다시 되짚어 왔다. 몸은 피곤하고 다리는 아팠지만 고흐의 그림 속으로 걸어 다니니 마음은 풍요로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고흐는 아를에 살면서 그 유명한 로마의 유적들을 화폭에 옮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나 실편백 나무, 론 강과 도개교 그리고 자연풍광을 주로 그렸고 우체부 조셉 롤랑같은 소박한 사람들을 그렸다. 그가 그린 건물들도 노란 집이나 밤의 카페와 같은 소박한 삶이 묻어 있는 곳이다.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로마의 유적은 그의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흐는 농민화가 밀레를 닮고자 했고 그의 그림을 습작처럼 모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풍광과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던 것이다.

그 뒤 고흐는 어떻게 됐을까? 생 레미 요양원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고흐는 고통과 권태를 견디지 못해 그곳을 떠날 결심을 하고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이곳의 분위기가 나를 더할 나위 없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나는 1년 이상 참고 견뎌 왔다. 공기가 필요하다. 권태와 슬픔 때문에 질식할 정도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내 병은 한계에 다다랐다. 지금보다 더한 절망에 빠진다 하더라도 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1890년 5월 17일, 아를르를 떠나 테오가 있는 파리로 온다. 지상에서의 마지막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두 달 뒤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권총자살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고흐, 그 이후

 

아를의 시내를 돌아다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 옆에 고흐재단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 고흐가 살았던 것을 기념하여 그와 관련된 사업을 벌이는 곳이다. 마침 꽁바스란 현대 프랑스 화가의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고흐의 그림들을 재해석한 것이 많아 흥미로웠다. 고흐의 선들을 더 단순화시켜 그래픽처럼 처리한 것이 특이했다. 그렇게 고흐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살아있었다. 비록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고흐의 그림은 좋아한다. 우리가 만난 한국인 배낭여행객은 고흐의 그림을 보면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강렬한 그의 그림에서 발산되는 영혼의 울림 때문이리라.

그런데 고흐가 살았을 당시 900점이 넘는 그림 중에서 돈을 받고 팔린 것은 <붉은 포도밭> 단 한 점뿐이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다. 혹은 평자들의 말처럼 지상에 유배된 천재이기에 그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도 절도 없이, 가족도 친구도 없이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다. 그림은 그에게 일종의 구원이었던 셈이다. 고흐는 “그림그리기는 내게 일종의 구원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비참했을 것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유난히 별이 많이 빛난다. 우리가 본 아를의 밤하늘에는 그렇게 별이 보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면 아를의 밤하늘에 별이 보인다. 그의 순수한 영혼으로 밤하늘을 수놓았던 것이다. 그의 현실적 삶은 비참했지만 맑은 영혼과 그림들은 저 창공에 빛나는 별처럼 찬란할 것이리라. 그래서 아를과 고흐는 동격이 된다.


마당 2010.09.13. 1:58 pm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화가 고흐, 우리나라에서는 2위와의 인기격차가 더욱 크다고 들었습니다.
오년쯤 후엔 저도 선생님이 걸으신 사이프러스나무 길을 걷고 싶네요.

joyman 2010.09.13. 2:27 pm 

예, 정말 좋습니다. 특히 5~6월에 가시면 이곳 프로방스 지방의 특산물이자 상징인 라벤다가 지천으로 피어 들녁을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입니다. 고흐가 왜 이곳을 졸아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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