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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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 죽다”- 베네치아(Venezia)

joyman 쪽지





 

  뮌헨에 살고 있는 작가 아센바흐는 글쓰기에 지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베네치아로 간다. 그곳 리도 섬에 묵으면서 한가로운 휴식을 즐기던 중 그리스 조각 같이 아름다운 폴란드 소년 타치오를 만나 지나칠 정도로 그에게 집착을 보인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동성애에 빠졌던 것처럼 아센바흐도 타치오에게 반해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늘 그를 뒤따르며 지켜볼 뿐이다. 아센바흐는 그 미소년을 ‘꼬마 페아케’라고 불렀다. 페아케족은   셰리아 섬에서 근심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자를 실어 나르는 사공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더운 날씨 때문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외국인들은 대부분 베네치아를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아센바흐는 사랑스러운 타치오를 더 보기 위해 그곳에 머무른다. 이제 내일이면 모두 이곳을 떠나기로 한 마지막 날, 아센바흐는 모래톱 위를 걸어가는 타치오를 발견하고 그가 ‘영혼의 인도자’가 되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넘어져 죽음을 맞는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이 1912년에 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다. 여기서 베네치아는 ‘몽상적이고도 치명적인’ 도시로 그려진다. 그렇다. 베네치아는 정말 묘한 곳이다. 토마스 만의 말처럼 “수상쩍은 미녀 같은 이 도시는 어떻게 보면 동화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나그네를 옭아매는 덫 같기도” 한 곳이다. 그래서 베네치아를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그곳이 얼마나 “저항하기 어려운 매력을 주는 도시”인지를 알게 된다.


몽상적이고 치명적인 도시, 베네치아


  해상 강국 베네치아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섬과 갯벌 위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대리석을 깔아 만든, 말하자면 바다 위에 떠있는 도시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 전체를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었고, 뒤집어 놓은 S자 모양의 대운하와 무려 150개에 이르는 소운하, 그리고 400여개의 다리로 도시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바퀴 달린 차가 한 대도 없다. 바퀴 달린 차는 베네치아 입구의 로마 광장이나 산타루치아 역에서 멈춘다. 거기서부터는 걷거나 배를 이용해 도시를 다닐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물의 도시’다.

  기차를 타고 와서 산타루치아 역에 내려 밖으로 나오면, ‘아, 이제 정말 베네치아에 왔구나.’하고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바다물결이 넘실거리는 대운하 위를 분주히 오가는 배들, 아치형의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운하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베네치아 풍의 교회와 건물들, 노상 카페에 앉아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거나 차를 마시는 사람들, 게다가 관광객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까지 보태지면 우리는 이 몽상적이고 치명적인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알게 된다. 이 유혹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이 도시가 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를 다녔건만 이 도시만큼 ‘특이한 매력’을 지닌 도시는 없다. 뭐랄까? 정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주는 곳이다. 도시가 깨끗하거나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숙소나 식당 같은 편의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다. 숙소는 비좁고 지저분하며 가격도 비싸다. 게다가 식당도 다른 곳에 비해 왜 그리 맛이 없고 비싼지. 보이는 거라곤 한없이 이어지는 운하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좁은 골목과 이따금씩 나타나는 작은 광장이 전부다. 그런데도 무언가 강렬한 자석처럼 베네치아는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건 아마도 이 지상에서 보기 힘든 몽환적 분위기를 발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운하에 바싹 붙어 물결이 담벼락에서 일렁이는 집들과 물위를 하염없이 떠다니는 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과연 사람들이 사는 곳인가 의아스럽다. 거기다 석양이라도 지면 도시는 마법에 빠진다. 그래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도시가 꿈을 꾸는 것이리라. 사람이나 더 양보하더라도 생물이 꿈을 꾸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무생물인 도시가 꿈을 꾸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같지만 베네치아에 오면 그것이 이해가 된다. 베네치아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린다.

  그렇다.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곳, 그곳이 베네치아다. 그래서 베네치아의 여행은 굳이 무엇을 보겠다는 목적을 가지지 않고 소운하의 다리와 좁은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다녀도 좋다. 그 소운하와 좁은 골목과 작은 광장과 거기에 늘어서 있는 흥미로운 가게들로 우리가 일상에서 도저히 보기 어렵고 느낄 수 없는 마법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베네치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드리아 해의 여왕’, 그 영광과 좌절의 연대기


  로마제국이 멸망할 무렵 로마의 식민 10주의 하나였던 베네치아는 가장 혼란스러운 지역이었지만 그 뒤에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비잔틴 문화를 받아들였다. 697년경에 이르러서는 동로마 황제에 의해 초대총독이 선출됨으로서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서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한 1797년까지 무려 1100년 동안 ‘아드리아 해의 여왕’으로서 실질적으로 아드리아 해를 지배하면서 해상강국으로 지위를 누리게 된다.

  베네치아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것은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전쟁(1202~1204) 때문이었다. 이노첸시오 3세의 요청으로 1202년 베네치아에 결집한 제4차 십자군은 그들의 목표인 팔레스티나로 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병력 수송을 맡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요구로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달마티아 지역의 자라(Zara)시를 공격하여 점령한 것이었다. 기독교 도시를 십자군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유럽사회는 충격에 휩싸였지만 베네치아 상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교황의 파문에도 불구하고 계속 십자군을 유도하여 비잔틴 제국의 심장부인 콘스탄티노플까지 함락시켰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십자군은 즉각 라틴제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저지대 출신 귀족을 황제로 추대하고 베네치아 출신 성직자를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인 이노첸시오 3세는 현실에 굴복해 결국 이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라틴제국은 소아시아 지방으로 후퇴한 비잔틴 제국이 다시 그들의 도시를 탈환한 1261년까지 무려 60년간이나 존속되었다. 그 결과 베네치아는 크레타와 키프러스 섬을 포함한 비잔틴 제국 영토의 3/4을 차지하고 실크로드를 통한 동방무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4차 십자군 전쟁은 돈이 전쟁의 명분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군산복합체 거대자본이 정치인들을 부추켜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도발하듯이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도 그들의 이익를 위해 십자군의 방향을 돌린 것이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부를 이룩하기 위해서 엄청난 도박을 감행했고 그 도박에서 성공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사를 건 도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슬람, 인도, 중국 등 이른바 ‘동방’과의 교역에서 얻는 막대한 이익 때문이었다. 그 동방무역 교역로의 중심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었던 것이다. 인도의 후추와 향신료,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이 그들을 매료시켰다. 빵과 고기를 주로 하는 그들의 식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후추와 같은 향신료다. 고기의 노린내를 없애주고 소화를 돕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한때는 후추의 가격이 황금보다 비싸기도 했을까?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도 서양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녹슬은 은이나 철제 식기에 음식을 담아 먹다가 깨끗하고 매끈한 도자기로 그것을 대체하니 식사의 질은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유럽의 귀족 저택에 가보면 도자기나 그 파편으로 벽면을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 보드라운 비단 역시 유럽인들의 삶의 질을 한층 높였다. 이런 교역 물품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갔고 거기서 베네치아 항구로 간 다음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그 엄청난 물품의 해운과 교역을 베네치아에서 독점했으니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찍부터 바다로 진출한 베네치아 상인은 세계교역의 중심에 있었고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안가는 곳이 없었다. 베네치아 사람 마르코 폴로가 아라비아, 인도를 거쳐 중국 원나라의 대도(大都;지금의 북경)에까지 가서 황제 쿠빌라이 칸을 만나고 온 것은 그런 베네치아 상인들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베네치아 상인의 아들이었던 마르코 폴로는 1271년 베네치아를 떠나 무려 25년간 ‘동방’을 누비고 다니다 1295년에 돌아왔는데 그의 모험을 그린 『세계에 관한 이야기(동방견문록)』가 여러 나라의 언어로 출판되어 이국취향의 붐을 일으켰고 서양에 동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어찌 보면 이른 시기에 이미 세계로 눈을 돌려 ‘세계화’의 물꼬를 튼 것이지만 그 뒤 ‘대항해 시대’에 이어지는 식민지 개척의 단초를 제공하여 지배와 약탈이라는 불행한 세계사의 서막을 올린 셈이기도 했다.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도시의 운명을 건 도박에서 승리하면서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그 정점은 지중해 패권을 놓고 100년간이나 벌인 서지중해의 중심도시 제노바와의 싸움에서 이긴 다음이었다. 1381년 드디어 숙적 제노바를 격파하고 지중해 교역의 패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명실상부하게 지중해의 패자로서 고속질주의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번영은 15세기까지 이어졌다. 당시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집과 곤돌라를 얼마나 화려하게 치장했는지 ‘사치 단속법’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 대상은 주택과 곤돌라와 여인의 드레스였다. 지금 베네치아의 곤돌라가 관(棺)처럼 모두 검은 색으로 칠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치 단속법’에 의해 화려한 색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자 베네치아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오』에 보면 당시의 정황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베네치아의 해군이 오지 않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베네치아의 해군은 지중해의 패자답게 최강이었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이 함락될 때는 판단을 잘못해 늦게 대처한 것이다. 견고한 성채를 쌓아 바다 쪽만 경계했는데 투르크의 지도자 슐레이만이 배를 산으로 옮겨 방비가 허술한 뒤편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것이다.

  게다가 16세기부터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프랑스 등의 강국이 베네치아를 견제하면서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는다. 결국 1797년 ‘아드리아 해의 여왕’인 베네치아는 나폴레옹에게 함락되어 그 영토가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짐으로써 그 화려한 영광을 마감하게 된다.

  그 화려한 영광과 좌절을 워즈워쓰(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베니스 공화국의 멸망에 즈음하여>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한때 그녀는 호화로운 동방을 봉토로 삼았었고

서방의 호위였다. 베니스의 진가는

그녀의 출생을 더럽히지 않았었다.

자유의 장자였던 베니스.

그녀는 처녀도시였다. 밝고 자유로운

어떠한 술책도 유혹할 수 없었고, 어떠한 힘도 범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신랑을 취했을 때,

그녀는 영원한 바다를 남편으로 삼아야만 했다.

무슨 상관있으랴 저 영광들이 희미해지고,

저 칭호들이 사라지고, 저 힘이 쇠한다한들,

그러나 약간의 석별의 공물을 바쳐야 하리라.

그녀의 오랜 생명이 그 최후의 날에 도달했을 적엔

우리는 인간이어서, 애석해야만 하리.

한때 위대했던 것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을 땐.


산 마르코 광장의 ‘날개 달린 사자’


  베네치아 여행은 늘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에서 시작된다. 그곳이 베네치아의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동쪽에는 복음의 저자였던 마르코의 유해를 보관한 산 마르코 대성당과 도제(Doge,총독)의 관저이자 정부청사이기도 했던 두칼레 궁전이 있으며 그 앞의 삼면으로는 아름다운 주랑이 광장을 감싸고 있다. 광장의 가운데는 96m 높이의 우뚝한 종탑이 광장을 굽어보며, 바다 쪽에는 오벨리스크 같은 기둥주두의 날개 달린 사자상이 베네치아를 지키고 있다.

  이 날개 달린 사자상은 바로 <베네치아 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사자상’의 모습으로 익숙한 것인데, 곧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자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르코의 문장이며 베네치아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마르코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됐을까? 사실 12사도의 한 사람인 마르코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죽었다. 그런데 그의 유해는 800년경 베네치아 상인에 의해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로 위장하여 몰래 반출되어 베네치아로 오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국교화되어 정치와 문화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막강한 위력을 떨치던 시대에 유럽의 도시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수호성인을 지정하였고 그것으로 도시의 상징을 삼았다. 로마는 이미 그곳에서 순교한 예수의 제1제자 피에트로의 유해를 안치하고 그 위에 대성당을 지었으며, 피렌체는 세례 요한으로 도시의 수호성인을 삼아 ‘산 죠반니 세례당’을 지었다. 베네치아는 바로 마르코로 도시의 수호성인을 삼기 위해 그의 유해를 이집트에서 비밀리에 빼돌린 것이다. 어쨌든 마르코의 유해가 베네치아에 도착하자 곧 그것을 안치할 성당의 건립에 착수하게 되었고 832년 마르코에게 성당이 봉헌된 것이다. 성당 안에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의 유해를 옮기는 모습이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목자와 함께 하고 있는 두 명의 고위 성직자가 중앙 정문 앞으로 어깨에 진 관을 운구하고 있으며 정부의 집정관 도제와 고관들은 오른 쪽 문들 가까이에 모여 있다. 왼쪽의 문들로부터는 다른 고관들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영접하러 나오고 있다.

  유교가 정치 이데올로기로 힘을 발휘한 조선시대에 우리의 서원도 공자나 주자 같은 유교의 성인들을 받들어 그 서원에 배향하고 제사를 지냈지만 그렇게 야단스럽게 유해를 훔쳐오는 일은 없었다. 그냥 그 인물의 상징으로 초상화나 위패만 모시고 배향했으니 얼마나 젊잖은가! 이를테면 최초의 사액서원인 풍기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安珦,1243~1306) 형제들을,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을 모셨으니 유해를 훔쳐오는 패륜적인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의 서원에서는 지방의 사림(士林)들을 동질적인 이데올로기로 결집시켜줄 어떤 인물의 상징성이 중요했던 것이다.

  마르코를 위해 봉헌된 성당이니 성당의 정면에 황금으로 장식된 날개 달린 사자가 복음서를 앞발로 받치고 있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밑으로 아치형 입구의 위쪽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네 마리 말이 두렷하게 드러나 있다. 바로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전승의 기념으로 가져온 것이다. 그 전례를 따라 이곳을 점령한 나폴레옹도 네 마리 말을 프랑스로 가져갔고 나중에는 오스트리아로 넘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반환된 것이다. 이래저래 콘스탄티노플의 청동 말은 수난을 당해 베네치아와 그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셈이다. 원본은 박물관에 있고 복사본이 성당을 끄는 모습으로 입구의 기둥에 올려져 있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동방의 양식인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기에 이탈리아가 아니라 마치 동방의 어느 나라 성당 같은 느낌을 준다. 유럽의 대부분 성당처럼 고딕식으로 우뚝한 것이 아니라 목이 몸통에 붙은 모양이나 주저앉아 있는 짤막한 형상을 하고 있다. 성당의 곳곳을 황금색 모자이크를 많이 사용하여 장식을 했는데 특히 정면의 상층에 있는 4개의 대채광천창은 저녁 석양이 질 때 붉은 노을빛이 황금색 모자이크에 반사되어 기막힌 광경을 연출한다. 정말 천국의 빛을 반사하는 것 같다.

  성당의 내부도 황금색 모자이크 천지다. 이곳에 들어오면 서구의 성당이 아니라 동방의 어느 궁궐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동방박사>나 <살로메의 춤>을 묘사한 세례당의 모자이크화는 아주 이국적이며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성당 안을 걸어다니면 마치 페르샤의 황금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 든다. 왜 베네치아가 ‘동방의 관문’으로 역할을 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대성당의 옆에 있는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총독인 도제의 관저와 공화국의 정부청사로 쓰던 곳인데 고딕 양식을 주조로 하여 흰색과 분홍색의 대리석으로 외관을 장식해 화려하기 짝이 없다. 내부는 당시 청사의 공간으로 사용했던 회의실, 집무실, 문서보관소, 재판소 등 다양한 방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베네치아파 화가인 틴토레토(TintorettoJacopo Robusti,1519~1594)와 베로네세(Veronese Paolo Cariari,1528~1588)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이탈리아는 유명한 그림이 많아서 그런지 미술관이 아닌 교회나 궁전에 걸려있는 그림 중에서도 엄청난 대작이 많은데 오히려 그림이 장소와 어울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중에서 최고의 작품은 단연 대회의실의 벽면을 장식한 틴토레토의 대작 <천국>이다. 무려 70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 중심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천사들에 둘러싸여 하늘을 오르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빛의 효과를 이용하여 극적 장면을 기막히게 표현하여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게 한다.

  이곳 대회의실은 국가 최고 사법기관으로 재판을 행하던 곳이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등장했던 법정이 이곳이 아니던가. 2005년 개봉한 영화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이곳을 무대로 법정공방이 벌어진다. 사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일찍부터 세계화 되어서 장사에 밝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그래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지독한 상술을 미워했는데 <베니스의 상인>도 그런 점을 반영한 것이리라.

  대의회실 뒤로는 감옥으로 이어지는 ‘탄식의 다리’가 놓여있다. 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가면 평생 나올 수 없다 하여 그렇게 불러진 것이다.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다. 그런데 이 탄식의 다리를 다시 건너 나온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저 유명한 카사노바다. 베네치아는 배를 타고 나가는 상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집에 혼자 있는 외로운 여자들이 많았는데 그는 모든 여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잘 해주어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카사노바가 감옥에 들어가자 수많은 여자들이 탄원서를 내서 결국 카사노바를 풀어주게 되었다 한다. 많은 문학작품에 호색한으로 등장하는 카사노바의 진실은 이러한 것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구역, 리알토 다리


  외국에 나가 교역을 하고 돌아온 베네치아 상인들은 우선 그들의 수호성인이 모셔진 산 마르코 대성당을 찾아 무사귀환을 감사드리고 그들의 구역인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로 향했다. 친구들을 만나 무사귀환을 자축하고 살았음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렇다, 리알토 다리는 시장의 소란스러움과 삶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다. 대운하의 가운데 놓여있어 베네치아의 중심에 위치한다. 말하자면 베네치아의 심장 같이 살아 펄떡펄떡 뛰는 곳이다. 베네치아를 다니다 보면 인간사는 곳의 냄새를 가장 잘 맡을 수 있는 곳이 여기 리알토 다리다. 여기서는 딱히 무엇을 봐야한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발길 닫는 대로 걸어다니면서 베네치아의 생기 속으로 빠져들면 된다. 가게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도 좋다. 혹은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도 무방하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곳이니 꼭 들려야 한다. 석양에 물든 산 마르코 광장의 모습이 좀처럼 보기 힘든 환상이라면 여기 리알토 다리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우리가 여행을 왔다는 현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 유명한 다리는 원래 13세기에 나무로 지어졌지만 물에 쓸려나가 1591년 건축가 안토니오 디 폰테가 대리석으로 재건했다고 한다. 다리 위에는 피렌체의 베끼오 다리처럼 건물들이 늘어서 귀금속, 가죽, 유리 제품 등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다. 다리 밑에는 수산시장이 있어 비린내가 진동하지만 여기가 바로 바다가 아닌가. 그 옆에는 야채 시장도 있어 늘 시끌벅적하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 있는 베네치아에서 의외로 생선요리가 비싸다. 처음 베네치아에 와서 이제는 생선을 많이 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메뉴판을 보니 엄청 비싼 것이 아닌가. 아니, 사방에 바다가 널려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바다는 널려 있지만 고기 잡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예전에는 교역이나 상업에 주로 종사했고 지금은 모두 관광수입에 의존하니 힘들여 고기 잡을 사람이 없어 생선이 그렇게 비싼 것이다.

  그저 베네치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익숙해 모두 유쾌하고 즐거워 보인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말을 걸고 농담도 예사로 한다. 리알토 다리의 선착장에서 사진을 찍는데 그것을 구경하던 베네치아 사람이 웃으며 나보고 더 뒤로 물러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더 물러나면 바다에 빠지는데, 내가 놀라서 어깨를 으쓱했더니 호탕하게 한바탕 웃는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그렇게 농담을 건네며 즐거워한다. 이들의 핏속엔 세상을 즐기는 유전자가 내장돼 있나 보다.

  저 유명한 베네치아의 가면도 그렇다. 처음엔 사육제에 쓰던 것이었는데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동서 교역로가 상실되고 그 뒤 이어지는 숱한 전쟁으로 인해 베네치아의 경제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자 향락과 도박에 빠지면서 일상화되었다 한다. 즉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도박과 향락에 탐닉하기 위해 베네치아 사람들은 가면을 일상화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세의 엄숙함이 주는 속박으로부터 해방감을 만끽하기도 했던 것이다.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즐기며 살아가길 원했다. 매년 2월이면 열흘 동안 화려한 카니발 가면은 쓴 사람들이 베네치아를 점령한다. 베네치아 카니발이 시작된 것이다. 온통 자기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카니발의 광기에 휩싸인다.

  베네치아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많은 영화에서 살인을 하거나 죄를 저지르고 소운하의 다리 위로 도망가는 가면 쓴 사람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만큼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가면을 쓴 사람의 모습은 베네치아의 풍경으로 익숙해져 버렸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향락에 탐닉하든 중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든 이제는 베네치아의 가면은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도처에 가면을 만들어 파는 상점이 있다. 이 가면을 보면 화려한 외피 속에 자신을 숨기고 향락에 탐닉하며 해방감을 느꼈던 베네치아의 또 다른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치명적’인 도시인가 보다.


밝은 빛과 화려한 색채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베네치아에서 꼭 보아야할 것을 든다면 산 마르코 광장과 대성당이 먼저고 다음은 유쾌하고 편안한 리알토 다리다. 리알토 다리 주변에서 베네치아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고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면 이제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주도한 베네치아파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가보자.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대운하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대운하를 운행하는 1번 수상버스를 타고 가면 미술관의 선착장에 내릴 수 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걸어도 올 수 있는 거리지만 찾기가 쉽지 않다. 베네치아에선 지도보다는 건물에 붙어있는 이정표를 보거나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상책이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그 지명도에 비해선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다. 베네치아의 마법에 빠져 운하와 골목을 다니다 보니 여기에 볼만한 그림들이 있다는 것을 잊기 쉬운가 보다. 그래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는 선명한 빛과 화려한 색상을 특징으로 하여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베네치아파 화가들의 그림이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피렌체와 마찬가지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베네치아도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선도한 사람은 벨리니 부자다. 특히 아들인 조반니 벨리니(Bellini giovanni, 1430~1516경)는 아버지 야코보 밑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새로운 색조를 도입하여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피렌체의 화가들이 신화를 주제로 이상미를 선호했던 반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목가적이고 일상적인 아름다움을 주로 그려 차분한 느낌을 준다. 미술관의 앞부분 전시실은 그의 이런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산조베 제단화>는 그런 차분하고 밝은 느낌을 잘 전해주는 그림이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개척한 공로로 그는 1483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식화가가 되어 1516년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 숨을 거두고 그 자리는 제자인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90~1576)에게 돌아갔다.

  티치아노야 말로 베네치아파의 진정한 거장이다. 특히 독창성이 뛰어난 색채사용으로 베네치아 화단을 지배했었다. 1516년 이후에는 스승인 벨리니의 뒤를 이어 공화국의 공식화가로서 명성을 떨치면서 유럽 각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초상화 화가로 입지를 굳혔다. 스페인의 카를 5세는 그를 수석 궁정화가로 지목하여 30년이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였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는 그가 그린 기마 초상의 전형적인 작품 <뮐베르크 전투의 카를 5세>가 있다. 그의 최고의 작품은 단연코 베네치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교회의 제단화인 <성모 마리아의 승천>이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밝고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를 올려다보는 사도들도 거친 어부의 모습 그대로 생동감이 있다. 처음에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했지만 뒤에 진정으로 그 그림의 가치를 알고 “미켈란젤로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이 있고, 라파엘로의 즐거움과 우아함이 있으며 자연의 진정한 색채가 있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구도나 성모 마리아의 역동적인 모습이 루벤스의 <성모승천>과 유사하다. 루벤스가 이 그림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최고의 작품은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로 보인다. 아름다운 여자의 눈부신 나신이 침대에 관능적인 자태로 누워있다. 그 뒤로는 하녀인 듯한 여자들이 무슨 준비를 하고 있다. 외출 준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시오노 나나미의 『주홍빛 베네치아』에 보면 그녀의 이름은 올림피아고 베네치아의 고급 창부로 묘사된다. 프랑스 화단에 물의를 일으켰던 인상파 화가 마네의 <올랭피아>도 이 그림을 패러디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나 비너스와 같은 여신이 아닌 세속적인 여자를 이렇게 대담하게 그렸고, 더구나 그것을 칙칙하고 어둡게 그리지 않고 밝고 화사하게 부각시켜 그렸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사회적,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어 근대 회화의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보인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티치아노야말로 최초의 근대적 화가인 셈이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미완의 유작 <피에타>는 윤곽선이 뭉개지고 희미한 빛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 정말 이것이 16세기의 그림인가 의심이 갈 정도다. 자유로운 붓놀림과 독특한 색채로 비통해 하는 인물들의 처연한 모습을 기막히게 묘사하여 근대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피렌체에 미켈란젤로가 있다면 베네치아엔 티치아노가 있어 르네상스를 주도한 것이다.

  그런데 베네치아 화가들이 이렇게 화려한 색채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좋은 물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는 ‘벤데콜로리(Vendecolori)’라 불리는 물감 판매업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양한 색상의 염료, 착색제, 물감 등을 직접 제작하고 판매하는 도매상을 운영하였다. 지금의 화방과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물감을 약방에서 구해다 사용했기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다양한 물감을 구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모여들었다.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16세기 베네치아는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에서 다양한 물감 재료들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고 벤데콜로리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다양한 색상의 물감을 제조하여 판매했던 것이다. 르네상스기의 베네치아는 지금의 파리나 뉴욕처럼 미술의 메카였던 셈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5강국


  르네상스시기에 오면 자잘한 나라들로 나누어졌던 이탈리아 반도가 다섯 나라의 강국으로 정리된다. 그 나라들이 로마 교황령,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화국, 나폴리 왕국이다. 마치 중국의 춘추시대에 다섯 나라인 제(齊),진(秦),초(楚),오(吳),월(越)처럼 이탈리아 반도도 5개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각 나라들은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그들의 문화를 가꾸어나갔다. 이탈리아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밀라노 등이 완전히 다른 나라처럼 보인다. 도시의 건축양식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사람들의 기질도 딴판이다. 오랫동안 서로 다른 나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각 도시를 연고로 한 이탈리아 프로 축구 ‘세리에 아(Serie A)'를 보면 그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각 구단 간의 시합인데도 국가 대항전을 방불케 한다. 유럽에서 축구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고 특히 도시를 연고로 한 프로축구는 대리전쟁의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예전 각 도시 간에 전쟁을 했던 것이 지금은 축구로 대체된 것이다. 밀라노를 연고로 한 ’AC 밀란‘과 로마를 연고로 한 ’AS 로마‘의 경기는 로마와 밀라노 간의 전쟁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경기를 하고 응원전 또한 이에 못지않다. 이탈리아 프로 축구의 생리와 선수들의 애환을 다룬 무라까미 하루끼의 소설 『악마의 패스』를 보면 정말 프로 축구 선수들이 골을 넣기 위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거나 수 만명이 열광하는 경기장에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러 나라로 분할되었던 곳인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나 스페인의 ‘프리메라 리가(Primera Liga)’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도시가 예전에는 다른 나라였고 서로 생사를 걸고 싸웠기 때문에 축구가 그렇게 열광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아예 다른 나라로 월드컵에 출전하고, 스페인의 동서 지역을 대표하는 두 팀인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로셀로나’의 경기는 온 스페인이 열광한다. 그러니 우리의 지역감정은 아예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축구는 각 도시를 대변한다.

  이탈리아가 도시국가에서 벗어나 근대적 개념의 ‘네이션(Nation)’으로 탄생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이다. 5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던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 빈체제 이후에 ‘통일운동(il Risorgimento)'을 벌이기 시작하여 1861년 사르데냐 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로마를 수도로 공표했다.(이탈리아의 각 도시에 가면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나 기념물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이탈리아가 된 것이다.

  우리도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 됐던 ‘애국계몽기(1905~1910)’인 1908년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주역이었던 가리발디, 마치니, 카보우르를 다룬 『이태리건국삼걸전』을 펴냈다. 이들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맞서 독립과 통일을 쟁취한 것처럼 우리도 일제의 침탈에 맞서 조국의 독립과 자강을 쟁취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책을 펴낸 것이다.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리도 섬의 기억


  이제 베네치아에서 수상버스를 타고 좀 멀리 나가 섬들을 둘러보자. 가장 유명한 섬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를 개최하는 리도(Lido) 섬이다. 그곳은 해변이 아름답고 레저 시설이 잘 갖추어 있어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붐빈다.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 죽음>의 무대가 되기도 했고 그것을 영화화한 동명영화의 배경이 됐던 곳이다.

  우리도 이 유명한 리도 섬의 아름다운 해변에 갔는데 수영하며 노는 조카들을 기다리다가 그늘로 옮겨 낮잠을 자는 바람에 그 낯선 베네치아에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 찾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사연은 이렇다. 수영을 좋아하는 조카들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사이 해변의 햇살이 따가워서 건물의 그늘에서 쉬다가 마침 뒤편에 나무그늘을 발견하고 피곤하여  낮잠을 즐겼는데 조카와 이모가 나무그늘에서 자고 있는 우리들을 못보고 베네치아로 간줄 알고 먼저 돌아갔다. 우리는 조카들이 없어져서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나 하고 리도 섬을 샅샅이 다니면서 조카들을 찾았던 것이다. 결국 저녁에 민박집에서 만났는데 서로 연락을 할 수도 없어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덕분에 부두에서 해변까지 리도 섬의 도심을 샅샅이 볼 수 있었다.

  이 리도 섬의 중심가에서 바로 8월말이나 9월초에 ‘베네치아 국제영화제’가 개최된다. 1932년에 시작해서 2009년에 66회를 맞았으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로 기록된다. 베네치아 영화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특히 예술영화나 제 3세계 영화에 관심을 보였는데 아시아 영화와도 인연이 있어서 1951년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이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래 1989년엔 대만 감독인 후 샤오시엔의 <비정성시(非情城市)>, 1995년엔 베트남 감독인 트란 안홍의 <씨클로>, 1997년엔 일본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의<하나비>, 1999년에 중국 감독인 장이에모의 <책상 서랍 속의 동화>가 각각 대상을 수상했다. 우리의 임권택 감독도 <씨받이>에서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아 베네치아 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리도 섬과 비슷하게 15분가량 수상버스를 타고 나가면 유리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을 갈 수 있다. 아직도 재래방식으로 유리공예품을 만들고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가면 시연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특히 유리 속에 다양한 색을 넣어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이 유리 공예의 비법은 베네치아가 강성하기 시작한 13세기부터 전해온 것으로 그 비법이 절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다 한다. 유리공예의 비밀을 밖으로 유출시키면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화려한 유리공예품 역시 베네치아의 주 수입원으로 유럽 각지로 수출되었던 물품이었다. 무라노 섬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곳곳에서 이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을 만날 수 있어 선물로 사가기 그만이다. 체코의 보헤미안 크리스탈은 푸른 색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곳 베네치아는 밝고 다양한 원색을 사용하여 화려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섬 곳곳에 유리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자그마한 섬에 화려한 유리공예품 가게가 줄지어 있어 섬을 돌아다니는 것이 지루하지 않다. 소운하를 따라 무라노 섬을 다니노라면 번잡한 베네치아와는 달리 한적하고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우리도 한나절을 섬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유리공예품을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부라노 섬은 무라도 섬보다 30분 이상은 더 가야 한다. 바로 가는 직행수상버스가 있어 그것을 이용하면 쉽게 갈 수 있다. 여기는 레이스가 유명한 곳인데 레이스보다도 원색으로 외부를 칠한 자그만 집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어부들이 많이 사는데 겨울철에는 바다에 안개가 심해 어부들이 쉽게 자기 집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화려하게 원색으로 칠했다 한다. 원색의 집들은 참으로 독특한 느낌을 준다. 집이라기보다 영화의 세트장 같아 집들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가 그만이다.

  우리는 베네치아에 두 번을 갔다. 한 번은 여름이고 한 번은 겨울이었다. 겨울에는 바닷물이 베네치아 광장까지 들어온다고 하는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물이 어느 정도 빠진 뒤여서 거리에 나무다리만 남아 있었다. 거리의 가게에도 물이 들어올 때를 대비해 밑에 물을 막을 수 있는 방수턱이 갖추어져 있을 정도다. 물이 한참 들어올 때 뉴스를 보니 사람들이 장화를 신고 노천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지만 그들은 한술 더 떴다. 카메라에 대고 하는 말이, “베네치아에 물이 빠지기 전에 어서 구경오세요.”라는 것이 아닌가. 재난조차도 즐길 수 있는 저 낙천성! 이것이 베네치아다. 그래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사람들을 붙잡는가 보다.



許弛 2010.08.24. 11:04 am 

꼭 베네치아가 아니더라도 아센바흐처럼 삶조차도 부질없어질 정도로 매혹적인 장소에서 치명적인 사건을 만나게 되기를 기대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지요.

joyman 2010.08.24. 11:00 pm 

에, 맞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치명적인 것에서 꿈을 꾸지요. 비록 그것이 헛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의 80년대가 그러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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