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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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꽃 - 피렌체(Firenze)

joyman 쪽지







 유럽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개 파리나 로마를 말하지만,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가장 살아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북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한 피렌체(Firenze)라고 대답한다. 정말 피렌체는 ‘꽃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름다운 도시다. 애초 이 도시는 B.C 59년 시저에 의해 로마의 식민시로 건설되었다. 아르노 강 주변에 온갖 꽃이 만발하여 꽃을 뜻하는 라틴어 ‘프로렌티아(Florentia)’로 도시의 이름을 정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르네상스의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꽃만이 아니라 단테의 아름다운 시와 보티첼리의 화려한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빛나는 조각들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탈리아의 대표적 캐릭터인 피노키오가 카를로 클로디에 의해 이곳에서 탄생했다. 예술의 충만한 향기가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생각해 보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예술과 어울려 향기 가득한 삶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르네상스를 주도한 피렌체


  오직 신이 지배했던 중세에서 개성과 이성을 중시한 근대를 향한 여정에 “인간과 세계의 발견”을 내세운 새로운 시대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르네상스(Renaissance)’다. ‘재생’이란 어의를 가진 이 말은 무겁고 어두운 중세의 휘장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자유로운 정감을 발산하는 새로운 시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문학, 철학 등 인문주의 학문을 비롯하여 미술, 조각, 건축, 음악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고대문화의 복권을 통하여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려는 휴머니즘을 표방한 문화예술운동이다.

  이 새로운 시대의 대안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어찌 보면 중세의 연장 같지만 그건 아니었다. 중세를 부정하면서 가져온 것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였다. 종교의 휘장 속에 갇힌 중세의 왜소한 인간이 아니라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고대 신화와 서사시의 영웅들을 다시 살려낸 것이다. 중세의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화와 서사시 속에 들어있는 고대의 휴머니즘 문화를 새로운 시대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그림과 조각들은 고대문화의 이상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보라. 구약의 인물이지만 그 형상은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을 닮고 있지 않은가.

  이 르네상스 운동은 유럽의 문화예술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는데 그 진원지는 상대적으로 도시와 상업이 가장 먼저 발달한 북부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꽃의 도시’ 피렌체였다. 왜 롬바르디아나 토스카나 등 북부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됐을까? 말할 것도 없이 경제적 부흥 때문이었다. 이 르네상스의 발흥은 돈이 문화예술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곳에서 재정과 운수, 기술상의 유리함 때문에 십자군 원정대가 편성됐으며, 중세의 길드 조직과 다른 새로운 자유경쟁 경제가 발달되었고, 유럽 최초의 은행제도가 생겨나기도 했다. 게다가 르네상스의 구호였던 고대 로마의 문화적 유산이 여기 저기 남아있지 않은가. 이런 여러 이유로 해서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미 14세기부터 르네상스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활짝 꽃을 피운 것은 15세기, ‘꽈뜨로첸토(Quattrocento; 1400년대)’의 ‘빛나는 시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리고 16세기 전성기인 ‘친꿰첸토(Cinquecento; 1500년대)’를 거쳐 약 200여년 동안 르네상스는 이어지게 된다.

  피렌체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가 고대의 상징이라면,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느 도시보다도 먼저 경제적 발전을 통하여 시민계급의 사회적, 정치적 독립을 이룬 피렌체는 15세기 전반인 1434년 금융가인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Cosimo de' Medicci, 1389~1464)를 도시장관으로 받아들여 도시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는 계몽군주로서 30년간이나 피렌체 다스리면서 ‘국부’의 칭호를 받았다. 지금 피렌체의 베끼오 궁전 앞에 가면 피렌체를 번영시킨 그의 동상이 시뇨리아 광장을 굽어보고 있다.

  그 뒤 그의 손자인 대 로렌초(Lorenzo de' Medici, il Magnifico, 1469~1492)에 오면 피렌체의 경제적, 문화적 번영은 절정을 맞는다. 면직공업과 무역 그리고 금융업을 통한 경제적 발전을 말할 것도 없고 그 스스로가 시인이며 철학자, 미술수집가이기도 하여 예술에 아낌없는 후원을 하였고 최초로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문화예술의 발전도 최고조에 이른다. 그래서 로렌초의 시대를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시대나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처럼 ‘위대한 세기’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 피렌체는 르네상스 운동의 진원지가 되어 그 새로운 사조를 유럽 전역으로 퍼트리게 된다.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otti,1475~1564)의 고향이며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자신의 전성기를 바쳤던 곳이고, <신곡>을 썼던 피렌체의 위대한 시인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와 <군주론>을 저술한 역사가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의 고향이며, 르네상스 철학자 피치노와 피코가 르네상스의 이념인 ‘신플라톤주의’를 주창한 곳이 바로 피렌체다. 그러니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진원지를 넘어서 르네상스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피렌체는 곧 르네상스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두오모(Duomo)


  ‘꽃의 도시’ 피렌체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두오모(Duomo)가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중심에 있는 중앙 성당이기 때문에 돔의 이탈리아식 이름인 두오모(Duomo)로 불리지만, 정확한 이름은 ‘꽃의 성모 교회(Basilica di Santa Maria del Flore)'다. 애초 프로렌티아라는 도시의 이름을 염두에 두고 꽃의 느낌을 갖도록 건축된 것이다. 정말 흰 대리석을 주조로 칼라, 마렘마, 트라트의 세 지역을 의미하는 분홍, 초록 대리석을 장식하여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백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 아닌가 싶다. 그 화사함은 최고의 성당인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초라해 보일 정도다. 건축물이라기보다 도시의 한 가운데 피어난, 영원한 구원의 꽃이리라.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질리지가 않는다.

  피렌체 여행은 바로 이 두오모에서부터 시작된다. 두오모는 피렌체 문화의 상징이자 총체이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중앙역)에 내려서 10분만 걸으면 바로 두오모 성당이 나타난다. 하긴 도시의 어디에서 보아도 두오모는 눈에 잘 띈다. 백색 대리석 건물 위에 올려진 붉은 돔은 마치 화려한 꽃봉오리처럼 도시의 어디에서 보아도 우뚝하게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성당은 1296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무려 140년이 걸려 1436년에 완성되었다 한다. 길이가 150m나 되어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성당이다. 이 성당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105m의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커다란 지붕 큐폴라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20년에 착수하여 1434년에서야 완성됐다고 한다.

  그 무렵 15세기 전반기에 피렌체는 경제번영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피렌체의 주산업인 면직물이 매년 16,000필씩 베네치아로 수출되었고, 이 일을 위해서 피렌체는 그들이 정복한 피사 항구 외에도 1421년 10만 굴덴을 주고 리보르노 항구를 사들이기도 하였다. 피렌체는 경제번영의 최정점에서 승리감에 도취되었고, 사업에서 돈을 벌어들인 상류층은 그들의 부와 권세를 과시하려고 하였다. 브루넬레스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오모 성당의 지붕을 만들기 시작하여 성당의 건축을 완결지으려 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브루넬레스키와 지붕을 건설하는 경쟁에서 패한 기베르티(Ghiberti, )가 1425년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문을 만드는 일을 착수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세심한 기베르티가 무려 27년이나 걸려 1452년에야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다. 틀이 없는 10장의 동판에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창조>를 비롯한 10가지 이야기를 부조로 새겼다. 정교하게 다듬고 금박을 입혔을 분만 아니라 원근법적 구성은 물론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묘사하여 50년 후에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이름 붙였을 정도로 탁월하다. 바로 당시 최상의 번영을 구가했던 피렌체의 얼굴인 셈이다.


망명지를 떠돌았던 피렌체의 위대한 시인, 단테

  

  그런데 이 세례당은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세례 요한을 위해 헌납된 것으로, 피렌체로 들어오지 못하고 망명지를 떠돌던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가 1321년 라벤나에서 『신곡』의 <천국편> 25곡의 첫머리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노래한 곳에도 등장한다.


          하늘과 당의 모든 이야기를 담기 위해 오랜 세월

          내 몸이 야위었지만 이 거룩한 시가,

          어린 양이었던 내가 아름다운 우리에 덤벼들어 나를 몰아낸

          이리들의 그 잔혹함을 이겨낼 수 있다면

          지금은 목소리 바뀌고 몸의 털도 달라졌지만

          시인이 되어 나 그곳으로 돌아가리.

          그곳 세례당 우물가에서 월계관을 쓰리.

  

   하지만 피렌체 당국은 이 위대한 시인의 귀환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테가 꿈꾸던 산 조반니 세례당 우물가에서의 월계관 대관식은 끝내 이뤄지지 못하고 단테는 그해 9월 14일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하고 그곳에 묻힌다. 피렌체의 위대한 시인 단테가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마침 단테가 살았던 생가는 산 조반니 세례당에서 골목을 끼고 조금만 가면 나온다. 정말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그래서 두오모를 보고 나서는 세례당 골목을 따라 단테의 생가에 들러야 한다. 게다가 단테는 그 세례당을 “나의 아름다운 산 조반니”라고 불렀다. 그만큼 단테는 피렌체의 정신과 가까이 있길 원했던 것이리라.

  단테는 1265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피렌체를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아홉 살 때에 베아트리체를 처음으로 만나 평생 구원의 여인으로 사랑하지만 25세 무렵에 생사를 달리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1280년대에 토스카나의 기벨린당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고향에 봉사하였고, 1295년 이후에는 공직에 나가 도시 발전에 기여했다. 그리고 1300년에는 단테가 속한 백색당이 집권하면서 제1행정장관으로 선출되어 시의 행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1302년 단테가 교황청에 파견 사신으로 로마에 가있는 동안 흑색당이 집권하여 그에게 국외추방을 명하고 “피렌체 귀환시 화형”을 선고했다. 그때부터 19년 동안 돌아올 기약 없는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정치 상황을 보자면 백색당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당이었고, 흑색당은 교황을 지지하는 당이었는데, 조선 후기 우리의 당쟁처럼 정치적 노선에 의해 패가 나뉘고 서로 싸웠던 것이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피렌체 명문 가문의 일원이었던 단테가 망명자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 기나긴 망명의 과정에서 1304년 단테는 저 유명한 <속어론>을 집필하여 “시를 쓰는데 라틴어보다는 지방 토속어가 훨씬 낫다”는 내용의 ‘모국어선언’을 하였다. 그래서 『신곡(神曲)』을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어로 쓰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단테는 교황 중심의 라틴어가 아닌 각 지역어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의 전주곡을 울린 셈이었다. 『신곡』을 고향의 언어로 쓰면서 몸은 비록 피렌체를 떠났지만 자신의 영혼은 고향에 머물기를 바랐음이다. 그래서 <속어론>에서 “동정을 받아야 할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슬픈 사람은, 꿈에서나 볼까? 다시는 고향을 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비참하게 떠도는 유랑자러니.”라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단테는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여러 모로 17세기 우리의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1692)과 닮았다. 서인(西人) 벌열(閥閱)의 일원으로 숙종과 장희빈을 둘러싼 당쟁의 와중에서 선천으로, 남해로 유배지를 떠돌아야 했고 저 유명한 ‘국문선언’을 통해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그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우니 설령 십분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우리말과 글의 우수성을 알렸던 것이다. 또한 단테가 <속어론>의 토대 위에서 『신곡』을 집필한 것처럼 서포 김만중도 국문으로 <구운몽>을 쓰지 않았던가. 그 내용 역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원받거나 가문을 창달하는 자신의 소망을 작품 속에 투사한 것이다.

  단테의『신곡』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의 망향가이며,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가는, 사랑하는 여인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기이다. 거기에 피렌체는 “옛날의 성벽으로부터 지금도 세 시와 아홉 시를/ 가늠하는 피렌체는 그 안에서/ 평화와 절제와 정숙 속에 있었다.”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낙원의 상징으로 노래된다.

  단테의 뒤를 이어 그를 흠모하면서 등장한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도 이 위대한 르네상스의 도시를 <데카메론>의 배경으로 기꺼이 제공했다. 1348년 피렌체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10만 명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재앙을 피해 교외의 별장에 10명의 남녀가 모여 10일 동안 이야기를 나눈 것이 바로 <데카메론>이다. 10일 동안 매일 10편의 이야기를 나눴으니 모두 100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모두 인간의 세속적인 삶을 유쾌하고 때로는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어 단테의 『신곡』에 비견하여 『인곡(人曲)』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의 개성, 정감의 자유로운 발산을 긍정하여 르네상스 정신을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숨결, 우피치(Uffizi)


  두오모에서 단테의 집을 거쳐 아르노 강 쪽으로 조금만 가면 베키오 궁전이 있는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이 나온다. 피렌체 정치의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수많은 조각품들이 광장을 메우고 있어 옥외 조각전시관을 방불케 한다. 피렌체 공화국의 정부 청사였던 베키오 궁전 앞에 <넵투누스 분수>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으며, 그 옆으로 피렌체의 상징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복제품)이 그 빛나는 육신을 뽐내고, 광장 북쪽으로는 피렌체를 번영시켜 국부로 추앙받는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 동상이 광장을 굽어보고 있다. 그  외에도 광장에는 크고 작은 조각들이 널려 있어 정말 이곳이 르네상스를 주도한 예술의 도시임을 실감하게 한다. 어찌 보면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위대한 예술품이 시민들의 곁에 널려있으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이 광장은 사실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무대이자 증인이었다. 1300년대 시민폭동이 일어난 곳이며, 1478년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피습한 쿠데타의 주동자들을 궁전 창문에 메달아 처형한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타락한 교회와 전제 군주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었던 도미니크회 수도사이자 종교 개혁가였던  사보나놀라가 1498년 5월 23일 두 동료 수도사와 함께 교수형 당한 후 다시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던 곳이다. 그 역사적 장소가 넵투누스 분수 옆 바닥의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사보나놀라의 자취를 찾으려면 산 마르코 미술관이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원에 가면 된다. 거기에 수도원장이었던 사보나놀라가 기도하고 묵었던 방이 남아 보존되고 있으며 부원장이었던 프라 바르톨로메오(Fra Bartolomeo, 1472~1517)가 그가 처형되던 해에 그린 초상화가 있다. 거기에는 강인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사보나놀라의 모습이 있다.

  베키오 궁전을 끼고 돌면 르네상스의 명작들을 볼 수 있는 우피치 미술관을 만난다. 원래 메디치 가문의 사무소(‘우피치’는 영어의 ‘오피스’)였던 곳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45개의 전시실이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난 세계적인 미술관이다. 무엇보다도 메디치가가 수집한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피렌체에 오면 꼭 보아야할 것이 이 우피치 미술관이다. 르네상스의 정신과 소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장하려면 2~3시간은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가서 줄을 서거나 미리 미술관 가이드를 신청하면 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게도 30분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날이 무더워서 그랬는지 그날따라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날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정말 억세게 운이 좋았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유럽에 여행을 다니면서 좋았던 것 중에 하나는 미술관에서 책으로만 보았던 원작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본의 감동’ 혹은 ‘원본의 아우라’라 할까? 미술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색감과 감동을 유럽의 미술관을 다닐 때마다 느끼곤 했다. 게다가 입장료도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무더운 한 낮에 훌륭하게 피서도 되고 눈이 즐거우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배만 고프지 않다면 하루 온종일 예술의 향기에 젖어있어도 좋은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우피치도 그랬다. 르네상스를 소개할 때면 흔히 등장하는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저 유명한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그리고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본 것만으로도 더 없이 행복했다.

  우피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은 역시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보티첼리의 그림들이다. 10-14번 방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림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그림이 제법 큰 대작이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도 감상이 가능하다. 우선 ‘봄’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프리마베라>를 좀 자세히 살펴보자.

  여신과 요정들이 온갖 꽃이 만발한 동산 위를 하늘거리는 얇은 옷을 입고 걷는 이 그림은 단순히 보기에도 약동하는 봄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림 가운데 미의 여신 비너스가 관목 숲을 배경으로 조용히 서 있으며 그 위로 큐피드가 사랑의 화살을 쏘려고 한다. 비너스의 배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것처럼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풍요의 상징으로 보인다. 오른 편에는 조급한 제피루스(봄바람)가 그의 연인 클로리스를 뒤쫓고 있지만 봄바람에 안긴 클로리스는 이미 꽃으로 가득한 드레스를 입은 꽃의 여신 플로라로 변신하여 세상을 온통 꽃동산으로 만들었다. 이 그림은 말하자면 봄바람에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봄의 아름다운 정경을 봄바람과 꽃의 여신 플로라의 결혼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왼 편으로는 조화와 평화의 상징인 삼미신이 약동하는 봄을 표현하듯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으며 그 옆에 지식을 상징하는 머큐리가 지팡이로 구름을 걷어낸다. 지성에 의해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암시이다. 이 그림은 약동하는 봄의 기운, 즉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통해 이성과 미의 승리를 찬양하고 있는 복잡한 알레고리로 읽힌다.

  애초 이 그림은 1482년 당시 피렌체의 통치자이자 보티첼리에게는 확실한 후원자였던 로렌초의 사촌인 로렌초 디 피에르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메디치가와 가까웠던 시인 폴리치아노는 삼미신과 플로라를 쫓는 서풍 제피로스가 있는 정원을 묘사한 바가 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을 것인데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로렌초 시대의 이상인 ‘신플라톤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즉 정신과 육체, 지성과 미의 완전한 조화를 이 그림은 보여주고 있다. 어찌 보면 대담할 정도로 성경이 아닌 신화의 내용을 소재로 하여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개성을 강조한 르네상스의 정신이다.

  이런 경향은 그 뒤 1485년경에 그려진 <비너스의 탄생>에 오면 더 노골적으로 변한다. 수줍은 듯이 얇은 옷으로 육신을 가렸던 여신들이 이제는 과감하게 옷을 벗어던지고 그 빛나는 육신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신화에 의하면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남근이 잘려져 그 정액이 바다의 하얀 거품과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미의 여신 비너스다. 그림의 중앙에는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조개껍질 위에 비너스가 그 아름다운 육신을 드러내며 위대한 탄생을 알린다. 왼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그의 연인 플로라가 그녀의 탄생을 축복하여 꽃을 뿌리고 있으며 오른 쪽에는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몸을 가릴 천을 들고 나와 비너스를 영접하고 있다. 하지만 그 천은 제피로스가 불어대는 봄바람에 날려 오히려 비너스의 육신이 더 잘 드러난다. 아름다운 여신의 탄생을 위하여 더 할 수 없이 완벽한 무대장치와 소품들이다.

  보티첼리의 이 두 작품은 성화를 위주로 그리던 전 시대의 그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신화에서 소재를 따온 것도 그렇고, 그림 속에서 여체의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그렇다. 어떻게 이런 과감한 시도가 가능했을까?


‘장인’의 시대에서 ‘예술가’의 시대로


  바로 메디치가의 후원 덕분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림을 사주었기 때문이었다. 로렌초 시대인 15세기 후반기에 오면 돈은 많이 번 ‘대시민(Popolo Grasso)’들이 미술품의 수집가로 등장하여 미술품 시장을 형성한다. 그래서 교회의 주문에 따라 생산하는 방식을 벗어나 미술품이 자유로이 거래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경향에 따라 비종교적인 미술품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화가들은 수집가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그것이 돈이 되고 자신의 생계를 이어주기 때문이다. 실상 화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이다. 그 전에는 화가가 아니라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그림도 대부분 성당에서 부탁한 성화이거나 귀족들의 초상화였다. 그러니 보티첼리가 그린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은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가!

  15세기 피렌체 길드의 명부를 보면 목공이 84명이고, 푸주한이 70명인데 비해 화가도 무려 41명에 이를 정도로 이미 화가도 하나의 잘 나가는 직업으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그 41명의 화가 중에 자신의 기량을 연마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예술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보티첼리도 1472년 피렌체 화가들의 길드에 가입하고 메디치 가문에서 일하게 된다. 처음에는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 뒤에 <프리마베라>나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과감한 그림을 그렸고 그것이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1482년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 로마로 떠났지만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서는 피렌체 화단의 지도자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미술의 발전과 더불어 보티첼리 정도에 이르면 길드에 소속된 장인이 아니라 독립적인 예술가로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 소시민적 수공업자가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노동자로 바뀌게 된다. 어느 면에서 보티첼리는 15세기 르네상스, 꽈뜨로첸토의 가장 충실한 대변자인 것이다. 그 앞 시기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1400~1455)가 고딕적 궁정예술에서 벗어나 시민예술적 경향을 보여줌으로써 르네상스를 열었다면, 로렌초 시대에 보티첼리는 예술가로서 그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어 르네상스 예술을 활짝 꽃피운 것이다.


르네상스의 찬란한 별, 미켈란젤로를 찾아서


  자, 이제 우피치에서 나와 전성기 르네상스의 빛나는 별, 미켈란젤로를 만나러 가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베키오 다리로 가서 아르노 강을 굽어보며 숨을 돌리자. 이 다리는 처음엔 나무로 지어졌다가 홍수에 떠내려가고 1345년 지금의 형태인 돌다리로 완성되었다. 다리 위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처음엔 푸줏간이 많아 비위생적이라고 철거시키자 금은 세공점이 모여들었다. 지금도 그 다리 위의 점포엔 보석상이 늘어서 있다.

  단테가 그토록 감동했던 달빛 비치는 아르노 강은 지금은 오히려 혼탁하게 보이지만 이 위대한 도시의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건물 사이를 흐르기에 아름다워 보인다. 그렇다, 강물이 맑고 아름다워 강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구정물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도시를 흐르기에 강이 아름다운 것이다.

  베키오 다리에서 아르노 강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롯시니의 묘가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이 나온다. 역시 흰 대리석을 주조로 하여 녹색 대리석으로 장식을 한 단아한 성당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이 이 성당의 아름다움에 반해 울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가 갔을 때는 문을 닫은 이후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교회 앞의 광장에 앉아 이 성당에 묻힌 그 위대한 인물들을 생각했다.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사람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다. 정말 미켈란젤로는 미술사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다.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천재성을 미술뿐만 아니라 과학, 의학, 수학, 공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발휘하여 실제로 그림은 그리 많지 않은 반면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능력을 미술에만 투여해서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천장화, 벽화를 비롯하여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와 산 피에트로 성당의 <피에타> 만으로도 그는 미술사에서 불멸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미켈란젤로의 고향인 피렌체에 있는 것이 이 도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비드>다. 사실 <다비드>는 피렌체의 어떤 건물보다도 이 도시의 상징이 되어야 마땅한 작품이다. 원본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고 복사본이 시뇨리아 광장과 미켈란젤로 언덕에 있다. 4m가 넘는 대작 <다비드>는 1873년까지는 시뇨리아 광장에 있었지만 파손을 우려해 지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그의 미완성 작품인 4점의 <노예>와 같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 이 빛나는 원본을 보기 위해서는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가야만 한다.

  우리도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 두오모의 북쪽에 있는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가 우선 산 마르코 미술관에 들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보았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그 감동을 천천히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태고지>는 수도원 계단을 오르자 그 벽면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색조를 잔잔하게 하여 엄숙한 숭고미가 느껴진다. <수태고지>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했으니 두려워 말라고 알리는 내용의 그림인데 미술사에서 하나의 하위 장르를 형성할 정도로 수많은 <수태고지>가 있다. 그런데 마리아의 모습에는 처녀로서 임신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천사에게 들은 놀라운 사실에 대한 의구심이 교차하여 수많은 화가들이 그 그림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크라나우, 보티첼리, 마르티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안젤리코의 작품은 그 수많은 <수태고지>의 맨 앞에 위치하고 있어 하나의 전형을 제시했다.

  <다비드>가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그 입구를 제대로 찾기 어려운데 사람들이 늘 줄을 서있어 그냥 뒤에 서면 된다. 우리가 간 날은 마침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어 들어가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먼저 오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어쩌랴!) 하지만 미술관에 들어선 순간 중앙 홀에 전시된 <다비드>의 그 찬란한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정말 감히 최고의 걸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다비드>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워낙 대작이라 감상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시뇨리아 광장이나 미켈란젤로 언덕에 있는 복사본과는 달리 부릅뜬 눈동자나 미간의 주름 등 얼굴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몸의 근육이 훨씬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정말 ‘원본의 아우라’를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다비드> 앞에 늘어선 4점의 미완성작인 <아틀란테>, <젊은 노예>, <수염난 노예>, <잠깬 노예>도 충격적인 작품이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노예들의 형상이 육중한 돌덩이 속에서 꿈틀거리며 나오려는 느낌을 준다. 아니 그 반대로 노예들이 돌덩이 속에 갇혀 팔을 비틀며 고통스러운 몸짓을 하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에게 당신은 스케치도 없이 어떻게 조각을 그렇게 잘 하냐고 묻자, 미켈란젤로는 “나는 대리석 속에서 형상들이 꺼내달라고 하는 외침을 듣는다.”고 했다 한다. 정말 천재만이 할 수 있는 기막힌 답변이다.

  찰흙을 빚어서 틀을 만드는 주물 작업은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대리석 조각은 그렇지 못하다. 조금만 끌을 잘못 놀려도 코가 찌그러지고, 귀가 달아나고, 입이 삐뚤어진다. 그 고도의 숙련된 작업을 스케치도 없이 했으니 경이에 가까운 천재성이라고 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미켈란젤로의 조각들을 보면 정말 숨이 탁, 막힌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도 그냥 보더라도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의 걸작 <다비드>는 1501년 새로 출범한 피렌체 공화국의 의뢰로 3년에 걸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때 미켈란젤로의 나이 26세였다. 도대체 어떤 계기로 만들어진 것일까? 1492년 르네상스 운동의 적극적 후원자이자 피렌체의 통치자였던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사망하자 피렌체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도덕적 혼란에 빠졌다. 그 기회를 틈타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점령하여 새 공화국을 세우고 메디치가는 도시에서 추방했다. 그 무렵 등장한 사람이 도미니크회 수도원장이었던 사보나놀라다. 그는 르네상스의 분위기로 한 것 들떠있는 피렌체의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면서 정치와 교회의 개혁을 이끌었다.

  하지만 ‘피아그노니’라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은 회개와 엄격한 규율을 실제 생활에도 적용하여 수시로 불신검문을 행하고 불온하다고 여겨진 서적과 미술품을 불에 태우기도 하였다. 성경의 내용이 아닌 신화를 주제로 그린 보티첼리의 그림들도 이 시기에 희생을 당해야 했다. 마치 중국의 1960~70년대 ‘문화혁명’처럼 강요된 속죄와 회개의 시대였다. 1498년 사보나놀라가 화형을 당하자 피렌체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지만 혼란기에 입었던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힘들었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피렌체 공화국은 심기일전하여 ‘공화국의 자유정신’을 선양하고자 미켈란젤로에게 그 상징적 조각을 의뢰했다. 미켈란젤로가 생각한 것은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린 다비드였다. 피렌체를 둘러싼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강대국들에 대해 마치 다비드처럼 젊은 패기와 지혜로 맞서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에 <다비드>는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피렌체  공화국의 자유와 이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강렬한 의지를 대변하고 있다. <다비드>를 보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당연히 이기리라는 굳은 결의로 적을 응시하는 눈매가 매섭다. 투석기를 거머쥔 손과 목의 근육이 잔뜩 긴장되어 언제라도 돌을 날릴 기세다. 이 거대한 조각상은 그들의 적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 올 테면 와라. 우리 피렌체는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너희들을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이 조각은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념인 육체와 정신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즉 공화국을 지키려는 고귀한 정신의 아름다움이 젊은 다비드의 육체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다비드의 육체는 더 없이 아름다운 이상미의 표상인 것이다. 이런 육체와 정신의 이상적 모습은 미켈란젤로가 만년에 작업했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나 벽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천지창조>에서 아담의 모습이나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다비드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게 충만한 힘과 완숙한 성년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의 정신인 것이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다비드>를 통해서 ‘피렌체 공화국의 자유정신’을 수호했던 것처럼 그 역시 공화국의 수호자로서 스페인의 군대를 앞세운 메디치가와 맞섰다. 피렌체에서 물러났던 메디치가는 16세기에 2명의 교황을 배출했는데 로렌초의 아들 레오네 10세와 로렌초의 동생인 쥴리아노의 아들 클레멘테 7세다. 클레멘테 7세는 스페인 황제인 카를로스 5세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어 1530년 피렌체로 권토중래했다. 1493년 피렌체에서 추방된 이래 38년 만의 귀환이었다. 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미켈란젤로는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공병으로 참여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켈란젤로의 재주를 익히 알고 있는 교황은 비록 적대적 위치에 있었더라도 그를 다시 불러 메디치 예배당의 장식작업을 맡겼다. 그렇다고  미켈란젤로의 마음이 흔쾌할 리 없었다. 무너진 공화국에 대한 꿈처럼 미켈란젤로의 마음은 이미 고향을 떠나있었다. 1534년 메디치가의 교황이 죽자 미켈란젤로는 미련 없이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거기서 죽을 때까지 시스티나 천장화와 벽화에 매달렸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만년에 그린 시스티나 벽화에서 분노하며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는 예수의 모습은 바로 이런 미켈란젤로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곤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것은 죽어서였다. 미켈란젤로야말로 진정 피렌체를 사랑했던, 공화국의 위대한 시민이었던 셈이다.


“피렌체는 어떤 도시와도 비교될 수 없다”


  피렌체 여행의 마무리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가 이 위대한 도시를 조망하는 것이다. 일본 영화 <열정과 냉정 사이>의 장면으로 널리 알려져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지만 그곳에서 두오모를 비롯한 도시의 풍경을 조망하면서 왜 이 도시가 진정 아름다운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분명 르네상스를 빛낸 찬란한 예술품들이 있어 그것이 이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고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피렌체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지루한 삶이 한 편의 시가 되고, 한 장의 그림으로 장식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지만 그 찬란한 예술품들이 나타나 도시를 장식하기 전에도 피렌체는 아름다웠다. 15세기 전반 피렌체의 대표적인 휴머니스트이자 역사가인 브루니는 그의 『피렌체 찬가』에서 이 도시를 이렇게 정의했다.

“피렌체는 최고의 지정학적 탁월함, 도시의 장엄함, 도시를 수놓은 장식물, 청결함에서 다른 도시를 능가해 왔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예찬되어야 마땅한 자질을 갖춘 도시로서, 피렌체는 세상 어떤 도시와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許弛 2010.08.16. 2:33 pm 

그림이 볼수록 좋습니다. 가벼운 수채면서도 색들이 무척 조화롭습니다.

joyman 2010.08.16. 8:20 pm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집사람이 좋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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