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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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Roma)

joyman 쪽지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행지가 어디일까? 대부분 사람들은 파리와 로마를 꼽을 것이다. 로마는 파리와 더불어 관광객 순위에서 1,2위를 다투는 곳이다. 하지만 파리가 섬세하고 여성적이라면 로마는 웅장하고 남성적이다. 이 거대한 고대사의 박물관인 로마는 정말 어떤 수식어로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흔히 서양문화의 두 축은 그리스, 로마 문화인 헬레니즘과 기독교 문화인 헤브라이즘을 말한다. 로마야 말로 이 두 축이 만나는 지점이면서 또한 발상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 됐으니 로마야 말로 이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유일한 도시가 되었다. 로마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서양의 중심인 셈이다.

  유럽의 도시를 다니다 보면 중세와 르네상스 문화를 간직한 곳은 많지만 고대문화가 온전히 남아있는 곳은 드물다. 비록 같은 이탈리아라 하더라도 피렌체나 베네치아를 보면 중세와 르네상스 문화는 남아있지만 고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고대사의 호수’라는  로마는 다르다.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는 세계사의 흔적을 지층처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괴테가 ‘세계문화의 수도’라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로마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며 오랜 역사의 자취가 겹겹이 쌓인 곳이다. B.C 272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카르타고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벌인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B.C 264~146)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로마는 화려하게 고대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서로마 제국이 망한 476년까지 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계사의 중심에 있었다. 그 뒤에도 동로마인 비잔틴 제국이 15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문화를 주도했으니 사실상 유럽의 문화는 로마의 문화라 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전성기 때 로마의 영토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영국, 스페인, 프랑스, 동유럽, 발칸반도, 터키, 소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현재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에 이르는 거리의 담장벽면에는 각 시기별 로마의 영토가 부조로 장식되어 행인들의 발길을 잡는다. 그 광활한 땅에 식민지인 속주를 두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당연히 그곳에는 로마의 신전, 원형경기장, 목욕탕, 상하수도 등이 건설되어 로마의 우수한 문화를 전했다.


피 비린내 나는 스포츠 정치학, 콜로세움(Colosseum)


  로마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일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도 빠지지 않고 등재됐으며 로마를 상징하는 랜드 마크로 늘 등장한다. 둘레가 400m나 되고 4층으로 이루어진 57m 높이에 무려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건물 앞에 서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 로마제국의 힘과 위용을 절로 실감하게 된다. 2천 년 전에 지어졌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잠실운동장 보다 큰 그 규모에 압도당하고, 2천년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다. 정말 숨이 탁 막힌다. 그래서 콜로세움은 로마 관광의 일번지가 되었다. 로마의 여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 기념비적 건물이 2천 년 전에 어떻게 기획되고 건축됐을까? 그 시작은 1세기 후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9~79) 황제로부터 비롯됐다. 유대지역의 총독이었던 그는 황제가 되어 이렇다 할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100만 명에 달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무언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제공해주어 자신의 정치적 무능력을 만회하려고 했다. 그래서 기획된 것이 원형경기장이었다. 거대한 규모의 원형경기장을 지어 여기에 로마 시민을 모아 놓고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원형경기장의 완공은 보지 못하고, 그 영광은 아들인 티투스(Titus,79~81)에게 돌아갔다. A.D 72년에 짓기 시작하여 9년이나 걸려 80년에 완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빠른 공사기간이었다. 그 비밀은 위대한 건축공학에 있었다. 거대한 돌들의 하중을 견디게 하기 위하여 하중을 분산시키는 아치를 고안했으며 돌과 돌을 접합시키는데 지금의 시멘트에 해당하는 시멘톰(Cimentom)을 사용했다. 시멘톰은 석회에 모래와 물을 배합하고 거기에 베수비오산의 화산재를 첨가한 것이다. 이런 콘크리트 공법에 의해 그 거대한 4층의 경기장을 단기간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제국 최대의 건축물인 콜로세움이 이런 건축공학적인 경이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스포츠 정치학의 코드가 숨어있다. 우선 4층으로 이루어진 경기장의 좌석은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고 통제되었다. 그래서 로얄석인 1층은 원로원이나 왕족과 같은 로마의 실력자들이 차지하고, 2층은 일반 귀족들의 좌석이었다. 3층은 평범한 로마시민을 위한 자리였고 맨 꼭대기인 4층은 천민들이 차지했다. 로마의 실력자들은 가마에서 내려 바로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지만 신분이 낮을수록 가파른(콜로세움의 계단은 위험할 정도로 가파르다.)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했다. 숨이 턱에 차오르게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실감해야 했다. 게다가 사방에 산재한 입구에서도 신분에 따른 우선권이 있었다. ‘높으신 분’들이 다 통과한 뒤에야 출입이 허용된 것이다. 좌석도 신분에 따라 규모가 달랐다. 1층은 당연히 모든 좌석이 매끈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콜로세움은 4개의 원을 수직으로 배치하여 로마의 신분체계를 가시화 시켰으면서 동시에 그 원 안에다 야만인들을 가두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거대한 제국을 이룬 로마는 실상 국경 밖에서 호시탐탐 로마를 노리는 야만인들에 의해 포위된 셈이었다. 그래서 늘 야만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마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들과 중화를 격리시킨 것처럼 이들에 대한 두려움을 역으로 활용한 것이 콜로세움이다. 그래서 원형경기장에 야만인들을 가두고 그들이 짐승과 싸우는 것을 구경하면서 자신들이 야만을 포위하고 있다고 위로받았던 것이다.

  초기의 경기는 훈련된 노예들과 맹수들을 싸우게 하는 것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검투사들을 서로 싸우게 하여 그 피비린내 나는 경기를 즐겼다.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싸우는 검투사들을 보면서 지금의 축구경기처럼 거기에 매료됐던 것이다. 상처받아 패배한 검투사는 그 자리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인간이 가진 잔학성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심지어 유명한 검투사는 지금의 스포츠 스타처럼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경기에 열광하면서 정치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로마 시민들의 정치적 감각은 마비되었던 것이다. 스포츠와 정치의 불행한 역학관계는 이렇게 콜로세움에서 시작되었다.

  콜로세움에 들어가면 지하 2층의 석벽과 방들의 잔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경기장 밑으로 지하에 검투사들과 맹수들을 가두는 방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래서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에서처럼 승강기를 이용해 운동장에 등장했다. 이곳에 서면 그 옛날 경기장의 함성과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1층의 대리석은 모두 뜯겨나가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이곳이 중세에 교회를 짓기 위해 대리석을 채취하는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어찌 보면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교도의 장소인 이 콜로세움의 파괴를 허용한 것이리라. 18세기 프랑스 화가인 H.로베르가 콜로세움 안에서 발굴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 그야말로 폐허나 다름없다. 그때까지도 유적으로서 발굴되고 보호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에서 유행하는 농담이 있는데, 로마 시내의 집들을 뒤지면 콜로세움을 하나 세울 정도의 기념물이나 건축자재가 나온다 한다. 그만큼 로마의 유적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사라졌다. 로마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제국의 영광,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로마는 시가지가 전부 박물관이지만 그 중에서도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로마의 광장이나 구시가지)는 2천 년 전의 로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지층이다. 지하철 B선(로마는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지하철이 A,B 두 선밖에는 없다.)의 콜로세오(Colosseo)역에서 내리면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 바로 옛 로마의 거리가 나타난다. 그 중심에 ‘성스러운 길’이라는 비아 사크라(Via Sacra)가 티투스의 개선문까지 이어진다. 그 길 양옆으로 신전과 원로원 그리고 많은 바실리카(basilika, 공회당)가 줄지어 있다. 바로 로마제국의 중심부다. 여기서 수많은 장군들이 자신의 부대와 포로들을 이끌고 개선문을 통과했으며, 수많은 정치가들이 목청을 높여 로마시민들에게 연설했고,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기도 했다. 그 역사의 장면들을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 포로 로마노다.

  그런데 포로 로마노의 거리를 걷다보면 로마제국이 어떻게 거대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는가의 체계적인 시스템을 볼 수 있다. 우선 개선문이 시가지의 입구에 버티고 섰고, 그 옆으로는 거대한 원형경기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성스러운 길을 따라 수호신인 베스타의 신전과 정치의 중심인 원로원 그리고 금융과 상업 그리고 회합의 중심인 바실리카가 줄지어 있다. 그리고 이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팔라티노 언덕 위에는 왕궁이 자리하고 있다. 그 맞은편에는 전차경기장인 치르코 마시모(Circo Massimo)와 1600명을 수용했던 종합 레저타운 카리칼라 대욕장이 있다. 이 시설물의 배치는 전쟁에 이겨 개선하고, 제국의 수호신에게 감사드리며, 정치에 종사하고,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며, 여흥을 즐기기 위해 원형경기장을 찾거나 전차경기장에서 박진감 넘치는 전차경기를 관전하고 칼리칼라 대욕장을 찾아 피로를 풀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삶을 즐기는 완벽한 구도로 짜여져 있다. 그 모두가 로마의 시가지에서 가능했다. 말하자면 정치와 경제활동 그리고 사회활동과 여흥까지 한 도시의 시스템 안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어느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윤택한 삶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2천 년 전에 대부분의 부족들이 그저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원초적 생존에 직면해 있을 때,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 같은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로마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같은 위대한 건축물이나 사통팔달의 포장도로는 물론이고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나 수세식 화장실, 목욕탕을 비롯하여 오늘날과 같은 첨단 수술 등의 의료서비스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100만 명이나 되는 로마시민들이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예들의 희생과 노동이 강요됐지만 로마제국의 생활 시스템은 분명 2000년을 앞서고 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망했어도 로마의 문화는 아직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딕 로우리 감독이 만든 <아틸라>라는 영화를 보면 로마제국을 위협했던 훈족의 위대한 지도자 아틸라(Attila)가 로마제국의 왕궁을 방문했을 때 대리석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나서 그 황홀한 기분을 잊지 못해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와 목욕탕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움막 같은 통나무집과 전쟁과 생존에 필요한 도구가 전부인 그곳에서 목욕탕을 만드는 장면은 퍽이나 이질적이지만 신선한 감동을 준다. 누더기를 걸치고 시궁창을 뒹굴며 그저 싸움만이 전부인 것처럼 짐승처럼 살고 있는 야만인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는 깨달았을 것이다. 아, 바로 그런 문화적 혜택을 통해 로마의 문화가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래서 포로 로마노는 로마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를 알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비아 사크라를 거닐며 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는가를 생각하고, 원로원에서는 왜 정치가 필요했는가를 따져보자.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서 이 모든 건물의 배치를 조망하며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도시의 시스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왜 2천년이 지난 돌길이 성스러운 길이 되며, 잔해만 남은 낡은 건물들이 살아있는 ‘역사’가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바티칸


  고대 로마의 중심이 포로 로마노와 그 주변이라면,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세계의 중심은 산 피에트로(San Pietro) 대성당을 비롯한 바티칸이다. 예수의 12사도 중 수석사도인 베드로가 순교한 자리에 세운 성당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로마의 공동묘지였던 곳이다. 베드로가 순교하여 그 곳에 묻히고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 묘위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그 뒤 16세기에 이르러 여러 차례에 걸쳐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된 것이다. 마지막에는 미켈란젤로가 그 일을 맡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그의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완성되었다 한다. 중세에는 절대권위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대리자’ 교황이 거주했으며 지금도 가톨릭의 총본산으로 자리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보다 더 볼만한 곳이 바티칸 미술관이다. 로마에 가면 반드시 하루 온종일 날을 잡아 바티칸을 둘러보아야 한다. 엄청난 미술품을 소장한 바티칸 미술관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우선 아침 일찍 미술관으로 가서 줄을 서야 하는데 적어도 8시 이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그리고서도 1~2시간 기다리는 것은 예사다. 지하철 A선 치프로(Cipro)역에 가면 이른 아침부터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바티칸 미술관에 일찍 줄을 서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따라 같이 뛰면 된다. 안내 가이드를 미리 섭외하면 표를 끊어놓기에 기다리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좋은 것을 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면 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오로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 그 것만이 ‘천국의 입구’인  바티칸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바티칸 미술관을 온종일 보기 위해서는 물과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식당이 붐비고 게다가 마땅하게 먹을 것도 없다. 빵이나 샌드위치를 사가지고 거대한 솔방울이 장식된 피냐 정원의 벤치에 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느긋하게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바티칸 미술관은 역대 교황들이 수집했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즐비한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과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대작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다. <아테네 학당>은 하늘(이상)을 가리키는 플라톤과 땅(현실)을 지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당시의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가 등장한다. 수많은 인물들이 번잡스럽지 않고 웅장한 건물의 구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안정감을 준다.

  그런데 가톨릭의 총본산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당연히 신성을 중시하는 교황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에는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는 르네상스의 정신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그리스 철학자들을 등장시켜 바티칸의 한가운데서 신의 영광이 아닌 인간의 위대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르네상스 정신은 저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벽화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사실 이 그림만 보더라도 로마에 온 보람은 충분히 있다. 게다가 아침 일찍 서둘러 몇 시간씩 기다리며 갖은 고생을 하고 들어왔더라도 이 그림을 보는 순간 그 불만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정말 감동 그 자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오는 순간 이 그림은 사람들을 압도한다. ‘원본의 아우라’가 무엇인지를 진정 느낄 수 있다. 작은 화집의 도판으로는 느낄 수 없는 살아있는 그림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방에 들어서면 빼곡하게 서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쳐들고 천장과 벽면을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적어도 30분 이상은 느긋하게 그림을 감상하면서 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건 그 위대한 그림에 대한 모독이다.

  천장화의 중앙에는 비스듬하게 기대어 막 잠에서 깨어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담과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신의 형상이 그려진 그 유명한 <아담의 창조>가 있다. 1508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무려 12년이나 걸려 완성된 작품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아담에게 배꼽이 선명하다. 배꼽은 생물학적으로 어머니의 태반을 통해 나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이 그림을 처음으로 본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기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림을 보지 못하도록 덮어두었다 한다. 그래서 그 위대한 그림은 상당 기간 유폐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의 반역은 이것뿐이 아니다. <아담의 창조> 주위에는 구약시대의 예언자와 페르시아, 구마, 델포이, 에리트레아 등 이방인 무녀들이 등장하는 ‘신성모독’의 그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적어도 태초에는 정통과 이단, 중심과 주변, 유대와 이방이 나눠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그림을 자세히 보노라면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가 구별되지 않는 코스모폴리탄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장 압권은 중앙 제단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이다. 미켈란젤로가 66세 되던 1541년에야 완성된 그림이다. 그러기에 인생의 말년에 느끼는 신과 인간, 종교와 예술, 성과 속, 천국과 지옥, 죄와 벌 등 인간사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 그 속에 녹아있다. 그림의 중앙에는 회오리를 일으키는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예수가 위치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처럼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고뇌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심판자로서의 당당함과 위엄이 모두를 압도한다. ‘인간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신으로서 이들을 심판하기에 그럴 것이리라. 심지어는 성모조차도 수줍은 여인처럼 예수의 등 뒤에서 다소곳이 죄 많은 인간들을 내려다볼 뿐이다.

  예수와 성모의 주변에 이른바 성인들이 위치하고 있는데 대부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게다가 성인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는 보이지 않고 모두 고뇌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범속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다. 그 이전의 어떤 그림에서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형상이다. 아마도 미켈란젤로는 신 앞에 인간은 죄의 경중은 있을지언정 모두가 죄 많은 인간들임을 보이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성인들도 모두 벌거벗겨 두려움에 떨도록 하지 않았던가. 자기 자신도 로마도 수호성인인 바르톨로메오가 살가죽을 벗겨 들고 있도록 그렸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살갗을 벗김으로써 죄 씻김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에서일 것이다.

  이 <최후의 심판>은 상당히 디스토피아적인데 미켈란젤로는 이를 통해서도 신성이 아닌 인간성, 그 죄 많은 인간들의 고뇌하는 모습들을 솔직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조차도 젊고 건장한 모습으로 그렸으며 성인들은 그대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미켈란젤로가 힘차게 약동하는 젊은 육신을 주로 표현했다면 말년에는 죄 많은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그림으로써 한 없이 나약한 인간성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몰골을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자기비판을 감행하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나서면 산 피에트로 대성당으로 이어진다.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으로 모든 성당의 모델이 됐던 곳이다. 둥근 돔과 긴 회랑은 로마네스크라는 하나의 양식을 만들었다. 그래서 세계의 주요 성당들은 이 성당을 본떠 돔의 형태로 지었고, 중앙 성당을 뜻하는 이름도 돔(Dome) 혹은 둠(Dum)이나 두오모(Duomo)라 불렀다. 그래서 산 피에트로 성당의 바닥에는 전 세계 대선당의 넓이를 나타내는 표지석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그 장엄하고 화려한 분위기는 정말 천국을 방불케 하는데 위대한 조각가 베르니니가 청동으로 만든 닫집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닫집은 말하자면 무덤의 덮개인 셈인데 여기가 바로 베드로가 묻힌 곳이다. 담쟁이 덩굴이 휘감긴 바로크 양식의 청동 기둥이 화려하면서도 힘찬 약동감을 주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성당의 벽면은 마치 천을 씌어놓은 것 같은 섬세한 대리석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중 백미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놀라울 만큼 섬세하게 조각하여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떨까?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가장 슬픈 일이 바로 자식의 죽음이라 한다. 그래서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극한의 고통을 이 <피에타>는 핍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피에타>는 가슴 뭉클함을 넘어서 너무 아름다워 무서운 작품이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지금은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어 이제는 그 생동감을 가까이서 감상하기는 어렵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이 이곳의 아름다운 조각들을 보고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이라면 성당에 다니겠다.”고 하여 웃은 적이 있다. 그렇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신성한 곳으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바티칸 성당이 바로 그런 곳이다.

  성당의 꼭대기 큐폴라에 올라서면 성당과 바티칸 시가지가 한 눈에 시원스레 내려다보인다. 그 모양이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중심으로 하여 베드로의 문장인 열쇠 모양을 하고 있다. 예수가 그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곳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인 셈이다. 그 끝에는 아름다운 천사의 성, 산탄젤로(Sant' Angelo) 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교황의 거처에서 요새로, 감옥으로 그 용도가 다양하게 변했는데, 그곳에서 산 피에트로 대성당까지 지하 비밀통로로 연결된다고 한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그 산탄젤로 성의 지하통로를 무대로 천사와 악마의 대결이 긴박하게 펼쳐져 그 사실을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샘물은 광장을 적신다


  로마는 사실 볼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적어도 일주일 이상을 머물면서 자유롭게 거리를 걸어다니며 이곳저곳을 보아야 한다. 시간이 제한된 패키지 관광으로는 기념사진 밖에 찍지 못한다. 자, 이제 중세의 중심지 바티칸에서 나오자. 산탄젤로 성을 보면서 천사들이 늘어선 다리를 건너면 로마의 시가지로 다시 들어선다. 그 강이 그 유명한 테베레 강이다. 그 강을 건너 조금만 가면 가장 완벽한 고대 로마제국의 건축물, 판테온(Pantheon)을 만날 수 있다.

  판테온은 애초 기원전 25년에 아그리파가 건축한 신전이었지만 그 후 화재를 겪고 12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하여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이 건물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지름이 43.3m에 이르는 돔은 피에트로 성당의 그것보다 더 크다고 한다. 2천 년 전에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위로 올라갈수록 비교적 가벼운 부석을 사용하여 그렇게 크고도 완벽한 돔을 만들었다고 한다. 돔의 중앙은 커다란 구멍으로 남겨두었는데 그곳을 통해 채광을 해결했다. 이른바 ‘하늘로 난 창’인 셈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고나서 609년 이후에는 신전이 아닌 교회로 용도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로마의 신들이 벽면을 차지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기독교의 성인상들로 벽면이 채워져 있다.

  판테온에서 나와 테베레 강 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나보나(Navona) 광장을 만난다. 전차경기장이었던 곳에 생겨난 광장이기에 긴 타원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 개의 유명한 분수가 광장을 차지하고 있다. 베르니니가 제작한 4대강의 분수를 중심으로 무어인의 분수와 넵투누스의 분수가 양쪽에 버티고 있다. 사실 로마의 분수는 우리처럼 전기의 힘으로 물줄기가 위로 솟구치는 것이 아니라 약수터처럼 물이 졸졸 흐르는 곳이다. 게다가 그 물들은 대부분 식수로 사용된다. 그래서 ‘분수’라 부르지 말고 ‘샘’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로마의 유명한 샘들은 대부분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에 집중되어 있어 늘 사람들과 가까이 있다. 그래서 광장은 사람들이 모이고 물이 흐르는 그야말로 ‘소통’의 장이 된다. 아무런 이벤트가 없이도 언제나 로마의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 사람들 간의 소통으로 광장은 늘 북적거린다. 거리의 악사,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람, 재주를 선보이는 사람들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광장은 늘 생기에 넘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스페인 광장도 그렇다. 그저 조그만 광장인데 그 중심에는 물맛 좋기로 유명한 바르카차(테베레 강에서 포도주를 운반하던 배) 샘이 있다. 베르니니의 아버지인 피에트로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 광장의 명물은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에 까지 이어지는 넓은 스페인 계단이다. 언제나 젊은 연인들로 만원을 이룬다. 바로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앤 공주(오드리 헵번 분)와 신문기자인 조(그레고리 펙 분)가 우연을 가장해 재회하여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그래서 언제나 많은 연인들이 사랑의 성지를 찾아 그 스페인 계단에 앉아 영화에서 그랬듯이 본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달콤한 대화를 나눈다.

   스페인 광장은 17세기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서 그렇게 불려졌는데 137개의 스페인 계단은 사실 1725년 프랑스 대사의 원조로 만들어졌다. 주변에 그레코 카페를 비롯한 유명한 찻집이 많아 스탕달, 발자크, 바이런, 리스트, 바그너 등 유명 작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특히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인 셸리(P.B,Shelley, 1792~1822)와 키츠(J.Keats, 1795~1821)는 이곳을 좋아해 결핵으로 요양차 이곳에 온 키츠는 아예 이 계단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계단의 오른 쪽 26번지에 키츠의 집이 아직도 남아 셸리와 키츠의 기념관 역할을 한다.

  키츠는 이곳에서 4개월 가량을 살았다. “행여 죽어지면 어쩌나 두려움을 가졌지만” 가혹한 운명은 이 위대한 낭만파 시인을 가만 두지 않았다.  폐결핵이 심해져 2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도시, 로마의 신교도 묘지인 데스타치오에 묻힌다. 묘하게도 그의 단짝인 셸리도 이듬해 스페차 만에서 요트가 뒤집혀 익사하고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키츠의 곁에 묻힌다. 영국 문학사를 장식했던 두 낭만파 시인의 유해는 그들의 정신적 고향, 로마에 머물게 된 것이다. 키츠의 시 <행여 죽어지면 어쩌나 두려움을 가질 때면>은 그 절박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행여 죽어지면 어쩌나 하고 생각할 때면,

          또 짦은 한 때의 아름다운 그대여,

          어쩌면 다시는 그대를 못 보리라고,

          뒷생각 없는 사랑의 마술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때면, 나는 광활한 세계에

          외로이 서서 생각에 잠기고 그런 때

          사랑과 명예도 허무 속으로 잠겨져 간다.


  죽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을까? 아니면 낭만파 시인에게 세상은 너무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시에서는 ‘사랑의 마술’을 얘기했지만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하고 키츠는 세상과 작별하고 ‘허무’ 속으로 사라졌다. 살아있을 때 키츠는 죽음을 예감하고 자작 비명을 남겼는데 그 구절은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쓴 자가 누웠노라.”이다. 젊은 나이에 죽게 되어 아무 것도 이루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지만, 어찌 그러랴. 물이야 말로 노자(老子)가 ‘상선약수(上善若水)’라 말하듯 ‘최고의 경지’가 아닌가? 바로 젊은 영원을 불태웠던 낭만파 시인의 자취가 이 로마의 스페인 광장을 적시고 있는 것이다. 그의 찬란한 이름은 스페인 광장의 물 위에 영원히 남아 젊은 연인들의 사이를 흐르리라.

  자, 이제 로마에서 가장 물맛이 좋고 아름다운 샘을 찾아가자. 스페인 광장에서 명품가게가 즐비한 콘도티(Condotti) 거리를 지나 남쪽 방향으로 7~8분만 걸으면 트레비 샘(Fontana di Trevi)을 만나게 된다.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 로마에 오기를 기원하면서 동전을 뒤로 던지는 곳이다. 매일 이 동전을 수거해 아동단체에 기부하는데 하루에 수천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들의 소망이 간절했음이다. 176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의뢰로 니콜라 살비가 설계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한다. 가운데 바다의 신 넵투누스가 물살을 박차고 힘차게 올라오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자연스러운 바위와 조각 그리고 물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뤄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 같지가 않다. 그대로 신화의 한 장면이 재현되는 것 같다. 정말 이 트레비 샘을 보면 삶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콘크리트 덩어리나 철조와는 달리 무감각의 광물질이 아닌 살아있는 생물체를 대하는 기분이다. 그러기에 생명을 지니고 흐르는 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예술은 이렇게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각의 콘크리트나 화강암으로 조성된 우리의 식수대나 약수터를 보면서 느꼈던 ‘미학적 분노’는 이 트레비 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거의 절망감으로 바뀐다. 그래서 로마에서 제일 물맛이 좋고 아름답다는 트레비 샘에 오면 반드시 빈병을 준비해 그 물맛을 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예술 속에서 물이 얼마나 살아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물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스스로 길을 찾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 물이 바로 로마의 생명이고 기운이다. (끝)



許弛 2010.08.10. 8:05 pm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를 아직 못 가봤으니 전 결국 어떤 길도 나서지 못한 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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