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이야기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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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읽기와 영화

조현설

 아바타와 신화 읽기


  미국의 한 극장에서 열풍을 몰고 온 3D 영화 <아바타>를 보았습니다. 덩치 큰 미국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상상력이 주조한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내 그들의 상상 세계 너머의 상상력을 되새겼습니다. 신화의 상상력 말입니다. <아바타>는 신화적 상상세계를 3D 이미지를 통해 구축해내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신화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아바타>에 대해 관객들이나 비평가들이나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현란한데 이야기는 형편없다는 것이 이구동성입니다. 나 역시 보는 내내 감독의 다른 영화인 <에이리언> 시리즈, <늑대와 함께 춤을>의 인디언 이미지, 사무라이가 된 <라스트 사무라이>의 미군, 또는 일본 애니 <천공의 성 라퓨타> 등의 이미지나 이야기들이 겹쳐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3D기술은 앞으로 10년간 영화사를 장식할 수작인데 이야기는 졸작이라는 평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평자들의 글을 읽노라니 슬그머니 반문이 일어났습니다. <아바타>처럼 모성적 시공 혹은 원시적 신화의 세계를 대대적으로 재현한 영화가 있었던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현대의 신화라고 했던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는 신화적 남성영웅의 길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반지제왕>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이미 <에일리언>에서 모성성을 영화의 주요 모티프로 사용한 적이 있군요. 그래서 같은 여배우(시고니 위버)에게 나비족을 이해하는 긍정적인 과학자 역할을 맡겼겠지요. 하지만 <아바타>는 판도라는 우주의 행성을 배경으로 하는 SF영화지만 그 판도라 자체가, 어떤 평자가 에덴동산의 재현이라고 했듯이 원시적 신화의 세계를 재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화가 중반부로 접어들면 지구인들과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지구상에는 없는 언옵티늄이라는 고가의 광물질을 나비족이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지구의 약탈자들은 경고로 나비족들이 살고 있던 집이자 우주인 영혼의 나무를 파괴합니다. 신화학에서 우주수(cosmic tree), 세계수(world tree)라고 부르는 신화적 나무입니다. 그 거대한 영혼의 나무가 쓰러지자 나비족들이 경악하는 영상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레 한 민족의 신화를 떠올렸습니다. 바로 중국 윈난(雲南)성에 사는 라후족이라는 민족이 전하고 있는 홍수신화였습니다.

  옛날에는 빛이 없었습니다. 밤낮의 구분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빛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쉼 없이 나무를 찍어 마침내 쓰러뜨렸습니다. 그러자 빛이 되돌아왔고 밤낮의 구분이 생겼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뻐꾸기가 날아와 홍수가 날 것이라고 울어댔지만 아무도 그 말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시끄럽다고 쫓아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쓰러진 나무의 뿌리를 흰개미가 갉아내자 그 속에서 엄청난 물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모두 휩쓸어버렸습니다. 이 대홍수 속에서 모두 죽고 딱 오누이 두 사람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대홍수가 일어나 인류가 전멸하고 오누이만 살아남았는데 이들이 결혼하여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갖춘 홍수신화는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두루 구전되고 있지요. 그런데 라후족의 홍수신화는 거목의 벌목과 홍수가 연결되어 있는, 남매혼 홍수신화 가운데서도 좀 특이한 신화입니다. 많은 신화들이 그러하듯이 이 신화도 하나의 딜레마를 이야기 속에 던져 놓고 있습니다. 암흑의 세계를 벗어나려고 시도한 벌목이 오히려 인류의 멸절을 야기했다는 신화적 딜레마가 그것입니다. 나무를 베지 않으면 어둠 속의 삶을 이어가야 하고 베면 더 큰 어둠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딜레마지요. 사실 이런 딜레마는 신화 속의 상황만이 아니라 인류 문명이 처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더 많은 빛을 얻기 위해 지구의 자연을 고갈시키는 것이 현재의 문명이니까요. 그래서 북극도 아마존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까요.

  라후족의 신화가 딜레마를 벗어나는 경로는 물론 대홍수입니다. 인류의 멸절이 오히려 새로운 창조의 기회라는 역설을 신화는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신화에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울어대는 뻐꾸기, 그러다가 쫓겨나는 뻐꾸기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신화에서 뻐꾸기는 자연이 보낸 예언자입니다. 홍수를 경고하는 자연의 전령이지요. 그러나 뒤돌아보지 말라는 터부를 위반하는 이야기들 속의 인간들처럼 신화 속 사람들은 뻐꾸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욕망, 빛을 얻으려는 욕망이 사람들을 귀머거리로 만듭니다. 신화는 이 욕망이 홍수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런 가정을 해보지요. 만약 사람들이 뻐꾸기의 말을 알아듣고 흰개미를 막거나 홍수를 피했더라면, 아니 벌목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홍수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이야기는 다른 형식으로 전개되었을 겁니다. 굳이 이런 가정을 하는 것은 <아바타>나 현실의 이 같은 딜레마 사이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는 그런 역할을 나비족과 소통하기 위해 아바타를 만들고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는 일단의 과학자와 부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퇴역한 미 해병대원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비족 형상의 아바타를 만든 목적 자체가 판도라 행성의 자원 채취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 설정 자체에 한계가 있습니다. 마치 착한 의도로, 신세계를 찾아가는 서구 제국의 배에 올라탔던 선교사들처럼. <아바타>가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런 문제 설정 때문이지요. 그래도 이들은 신화의 뻐꾸기처럼 나비족의 세계를 파괴하면 안 된다고 지저귑니다. 그러나 이들의 지저귐은 묵살되고 기계들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지요.

  대개 이런 공격에서 미국 영화들은 원주민의 세계가 파괴되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바타>는 좀 다른 선택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나비족의 반격과 판도라의 최종적 승리를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승리가 나비족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동조한 주인공 제이크와 소수 지구인들의 치열한 전투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돋보이고, 그 결과 ‘선한 미국인도 있다’는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승리는 근본적으로 ‘이와’라는 나비족의 대모신(Great Mother)에게서 옵니다. 영혼의 나무가 파괴된 뒤 나비족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궁처럼 형상화된 대모신의 공간으로 이동하여 여신의 자비를 간절히 기원하지요. 이 기원에 응답하여 이와가 움직입니다. 물론 이런 선택은 판타지이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더 긴요한 것은 이런 선택이 ‘신화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신화를 조금만 깊이 읽어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홍수신화에서 인류를 정리하는 홍수는 어떤 임계점에서 발생합니다. 라후족의 신화처럼 우주수를 벤다거나 신들의 싸움이 과하거나 인간의 욕망이 과도한 지점에서 홍수는 일어납니다. 이와라는 나비족의 대모신은 바로 그런 임계적 상황에서 움직여 모든 상황을 처음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홍수신화의 홍수가 자연 자체에 내재한 폭력적인 힘, 모든 것을 카오스로 되돌리려는 힘의 표현이듯이 <아바타>의 대모신 이와 또한 자연 자체의 본성을 재현한 것입니다. <아바타>는, 상상의 행성 판도라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이름이듯이 상상력과 이야기를 신화에 두고 있습니다. <아바타>를 신화적 영화라고 생각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화적 맥락에서 읽을 때 <아바타>의 의미가 더 잘 포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이 파괴되는 현실과 북극의 빙하가 눈물을 흘리는 현실을 목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문명의 결과지요. 그런데 그런 현실을 보면서도 우리는 더 나은 문명이라는 허명을 향해 강을 뒤집는 삽질을 계속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뻐꾸기들을 쫓아내면서 말이지요. 그 결과는 라후족의 신화에 따르면 필경 대홍수의 발발이고, <아바타>에 따르면 여신 이와의 반격입니다.

  <아바타>가 보여주듯이 신화는 원시적 상징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담론입니다. 우리들이 상징적 인간(homo symbolicus)이자 신화적 인간(homo mythicus)이기 때문이겠지요. 아무쪼록 지금 여기서 읽는 신화 읽기가 과거와 현재를, 상상과 현실을 함께 읽는 장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래야 신화 읽기가 소비적 일회용품이 아닌 지속가능한 사유가 될 테니까요.


許弛 2010.08.18. 6:08 am 

언젠가 아바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봐야 하겠다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그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 끝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자~알 읽었습니다.

시냇물 2010.08.18. 10:27 am 

역시 다르네. [아바타]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이 글 읽고나니 어디 기어들고 싶네. 이크!
요 부분이 아름다워:
"우리는 더 나은 문명이라는 허명을 향해 강을 뒤집는 삽질을 계속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뻐꾸기들을 쫓아내면서 말이지요. 그 결과는 라후족의 신화에 따르면 필경 대홍수의 발발이고, <아바타>에 따르면 여신 이와의 반격입니다.
<아바타>가 보여주듯이 신화는 원시적 상징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담론입니다. 우리들이 상징적 인간(homo symbolicus)이자 신화적 인간(homo mythicus)이기 때문이겠지요. 아무쪼록 지금 여기서 읽는 신화 읽기가 과거와 현재를, 상상과 현실을 함께 읽는 장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조현설 2010.08.22. 5:09 pm 

공부하는 처지에 따라 조금씩 가는 길에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같은 지점을 향하지만^^ 두 분의 글도 읽고 싶은데요...

마당 2010.08.31. 1:35 pm 

홈페이지에 들어 오고 싶은 이유가 또 생겼어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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