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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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신화학은 어디에 있는가?

조현설

제3의 신화학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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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정재서 교수가 내놓은 『앙띠 오이디푸스의 신화학 ․ 중국신화학의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창비, 2010)은 그가 이전에 출간한 『동양적인 것의 슬픔』(1996),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2007)의 연장선상에 있는 저작이다. 그동안 『산해경』에 대한 역주 작업과 한국 도교에 대한 저작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 일련의 3부작이야말로 어쩌면 정 교수가 지난 20여 년 동안 매진해온 비판적 중국신화학의 골수를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앙띠 오이디푸스의 신화학』(이하 ‘앙띠’로 약칭)에 대한 서평이 필요하다면 이런 흐름 속에서 공과를 살펴야 한다.

『앙띠』는 모두 4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앞뒤로 서언과 결론이 제시되어 있다. 또 뒤에 일본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중국 신화학자 엽서헌과 대담과 몇 책에 썼던 서문 등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그런데 대담이나 부록 등은 본문에서 논급하고 있는 시각과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어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또 1부인 ‘차이의 신화학을 위한 예비논의’나 2부인 ‘대안의 신화학을 위한 예비논의’에 배치되어 있는 글들은 3, 4부의 본론을 위한 총론 내지 예비 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3, 4부에 소속되어 있는 일곱 개의 장을 중심으로 읽으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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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전작인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에 이어 연속해서 저자의 서평자가 되는 행복한 처지에 빠졌다. 지난 서평을 뒤져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정 교수는 『산해경』 역주서를 낸 이래 『동양적인 것의 슬픔』을 거쳐 이번 저작에 이르기까지 줄곧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고 비평해왔지만 오리엔탈리즘의 동아시아적 변종, 또는 동아시아 내부의 오리엔탈리즘일 수 있는 화이론(華夷論)이라는 악당에게는 비평의 검광을 쏘지 않는 듯하다. 크게 보아, 신화나 도교와 같은 주변부적 사유를 통한 동양학의 재인식이라는 시각 속에 이미 화이론에 대한 성찰이 내장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비평이 텍스트를 향해 직진하는 작업이라면 ‘중국신화’라는 이미지의 구성에 관여한 중화(中華)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거나 한편에서는 거대한 염황(炎黃)의 석상 제작을 통해 새로운 신화를 만들면서 한편에서는 티베트 비롯한 소수민족문화를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정치’에 대한 비평 작업도 신화 비평의 끽긴한 소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주문을 낸 필자에게 이번 저작은 더 없이 반가운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었겠지만, 중국의 중국신화학을 씨노센트리즘의 소산이라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앙띠』는 씨노센트리즘만이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을 여전히 문제 삼고 있다.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된 중국신화학의 과오를 점검하고, 그리스 신화를 예로 들어 그것이 중국신화를 포함한 동양신화와 얼마나 다른 인식론적 기반 위에 건축되어 있는가를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앙띠』의 초점이 씨노센트리즘에 대한 해체적 실천과 대안의 고안이 한국 중국신화학의 길이라는 데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론에 해당하는 3, 4부에 포괄되어 있는 글들은 그 예증이다.

3부에는 <비교학적 관점에서의 중국신화 읽기>라는 제목 하에 네 편의 글을 실려 있고, 4부에는 <탈중원의 시각으로 중국신화 읽기>라는 제목 하에 3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곤우(鯀禹)와 저인(氐人) 신화를 다룬 8장에서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다시 언급하겠지만 오이디푸스 문제는 곤과 우의 관계를 설명하게 위해 프로이트-라깡의 관점을 ‘원용’한 것이지 비판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반고신화, 요순선양신화, 신이경의 환상을 다루고, 동이계 신화, 산해경의 변형 등을 추적하고 있는 3, 4부는 온전히 씨노센트리즘에 대한 문제제기의 성격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신화학은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유래한 창조신화부재론, 체계신화부재론, 설화삼분법 등의 문제를 안고 있고, 쎄노센트리즘으로부터 연유한 중원문명론과 문화지속주의 등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는 모두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구중심주의, 중화주의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중국신화학의 기존 연구 성과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연구자의 시각에 투여된 중화주의를 지적하고, 나아가 대안적 시각을 확보하려는 줄기찬 시도를 하고 있다. 예컨대 반고신화에 관한 문헌자료의 꼼꼼한 비교신화학적 분석을 통해 반고신화가 본래 지니고 있던 ‘최초의 살해’ 모티프가 한족 지식인에 의해 은폐되었을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은폐의 과정이 중원문명론이 형성되는 과정이고, 이 문명론에 의해 살해 모티프가 자연사 모티프로 변환되었다는 것이다. 또 중원문명의 선진성을 상징하는 요순(堯舜)의 선양(禪讓) 전설도 사실은 폭력적 현실을 은폐한 이데올로기적 언술이라고 분석한다. 이 점은 중국 상고의 성군이자 방벌(放伐)의 영웅으로 간주되는 성탕(成湯)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헌의 기록은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물로 바친 애민의 상징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유가 이데올로기의 결과이고, 사실은 가뭄의 책임을 지고 살해된 것이라는 추정이다. 유가, 혹은 중원문명의 이데올로기가 텍스트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씨노센트리즘에 대한 이런 비판에서 나아가 탈중원의 시각으로 동아시아 신화를 읽으려는 시도를 4부에서 보여 준다. 주로 저자의 학문적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산해경』을 바탕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는데 예컨대 『산해경』 속의 동이계 신화를 분석하여 한국신화의 원형(원한국신화)을 찾으려고 한다. 「해내경」에 기록되어 있는 동이계 문명신들이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명신들과 유사함을 지적하면서 잃어버린 한국신화의 원형에 다가가려는 것이다. 또 『산해경』의 치우(蚩尤)․형천(形天)․여왜(女蛙) 등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분석하여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죽음에 대한 보상기제로 형성된 것이며 그 안에는 해원(解寃)과 같은 무속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중원이 아니라 오히려 변방문화를 집적하고 있는 『산해경』을 통해 중국신화 및 중원문명을 해체적으로 읽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시도들이 이뤄낸 학문적 기여가 있다면 일차적으로는 방법 자체의 문제성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문제 제기는 『산해경 역주』 이래 저자가 견지해온 일관된 중국신화학의 방법론으로 국내의 중국신화학계뿐만 아니라 한국신화 연구자들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앙띠』의 학술적 진면목은 저자의 씨노센트리즘(오리엔탈리즘을 포함하여)에 대한 문제제기가 구체적 연구 결과로 현시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중국신화를 객관주의적 시각에서 냉철하게 검토하여 기간의 중국신화학이 놓치고 있던 그 중국 신화 담론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독해해 낸 점은 크게 평가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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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자의 문제제기나 문제를 풀어가는 경로에 대해 저자의 향후 작업을 위해서나 국내의 중국신화학, 혹은 동아시아신화학을 위해 한번쯤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책의 서언에서 책의 제목으로 ‘앙띠 오이디푸스’를 패러디한 것이 “단순한 반서구를 넘어 신화나 문화를 거대준칙에 의해 단원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지양하고자 하는, 다시 말해 신화학상의 오리엔탈리즘과 씨노센트리즘 양자 모두를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로 확대 활용하였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또 같은 취지에서 결론에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신화학은 전략적 차원에서는 앙띠 오이디푸스의 신화학이 될 것이지만 재통합의 차원에서는 제3의 신화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라고 정리한 바 있다. 신화든 무엇이든 오리엔탈리즘이나 중화주의와 같은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해석하는 경향을 지양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주변부의 위치에 있는 비평가나 학자의 경우 제3의 시각, 혹은 대안적 시각은 마땅히 추구하고 견지해야할 ‘준칙’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시각과 실천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는 재음미가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앙띠 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에서 공동으로 추구했던 것은 오이디푸스 담론에 갇혀 있는 ‘욕망의 능동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복권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친상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따라서 ‘앙띠 오이디푸스의 신화학’이 되려면 단순히 중화문명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쟁과 살해의 흔적이 은폐되었으리라는 추정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중국 신화 안에 갇혀 있는 ‘욕망의 어떤 흐름’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통해 기존의 중국신화학이 쌓아 놓은 중화주의의 성채를 전복시키는 작업, 다시 말하면 ‘중화주의는 없다’는 도전적 발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폭력적 현실의 은폐에 대한 지적만을 반복함으로써 ‘중화주의는 있다’는 점을 본의 아니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8장에서 곤우신화를 분석하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끌어들인 점도 재고할 만하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시각을 빌려와 원시사회의 친부살해를 일반화하고, 그런 일반화에 기초한 프로이트-라깡의 상징계의 형성에 대한 이론을 바탕으로 곤을 살해한 우가 가부장 왕권을 확립했다고 유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추의 논리적 정합성을 떠나서 저자가 비판해마지 않았던 서구발 ‘거대준칙’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준거로 중국신화를 분석하는 태도에 모순이 보인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보편성은 이미 의문에 부쳐진지 오래고, 나카자와 신이치도 일본 정신분석학자들이 제기한 ‘아자세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통해 그 부당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도가 ‘앙띠 오이디푸스의 신화학’의 문제제기와 충돌하지는 않는지?

저자는 중국신화에 내재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주로 지적하고 있는데 중국신화학계에 존재하는 중화주의적 시각과 반중화주의 혹은 비중화주의적 시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인용을 통해 다양한 시각이 있다는 것을 슬쩍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제3의 신화학이 되려면 텍스트에 덮여있는 중화주의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중화주의가 중국학자들에게 어떻게 오이디푸스적 코드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밝혀내야 하고, 또 동시에 저들 내부에 존재하는 비판적 태도와의 연대도 긴요할 것이다. 저자가 부록으로 첨부한 ‘대담자’의 한 사람인 중국 신화학자 엽서헌이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그런 작업을 위해서는 앞으로 또 다른 저술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은 것은 글쓰기의 문제이다. 저자는 ‘신화학’을 표방했지만 글쓰기에는 시종 ‘비평적 언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 점은 전작들과 이어지는 저자 특유의 간결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독자로서는 불만이 없지 않다. 아마도 필자가 ‘신화비평’이 아닌 ‘신화연구’를 이번 저작에서 열렬히 기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좀 더 깊이 이는 논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저자의 글쓰기는 멈춰 있다. 예컨대 대표적 중국신화학자 원가의 저작이 지닌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최종 평가는 유보적’이라고 마무리하는 식이다. 이런 자의식 때문에 이 저작을 ‘첫걸음’ 혹은 ‘모험적인 시도’라고 스스로 규정했으리라 판단되지만 저자의 조심스러운 ‘첫걸음’이 내심 답답한 것도 사실이다.

 

4

향후 동아시아신화학은 중국신화학의 흥기와 더불어 ‘논전’의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이미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라는 역사 만들기 사업에 신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기왕의 중화주의를 더욱 강고히 하려는 작업을 국가사업으로 벌이고 있다. 이런 차제에 정 교수가 제안한 제3의 신화학 혹은 범동아시아신화학은 대단히 시의적절한 문제제기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저자가 대담을 벌인 일본의 나카자와 신이치나, 중국의 엽서헌 등이 모두 공감하고 있듯이 국가나 민족적 편견으로부터 독립된 동아시아 지역의 신화학자들이 추구해야할 공동의 목표일 것이다.

문제는 ‘제3의 신화학에 어떻게 도달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전작에 이은 『앙띠』에서 그 경로의 일단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의 몇 마디 췌사는 그 길에 동승한 한 학구의 입장에서 저 ‘논전’을 위해 저자와 우리 모두에게 던진 물음일 따름이다. 저자의 제3의 신화학, 그리고 한국의 중국신화학의 길이 더 깊어지고 풍부해지기를 바란다.


조현설 2011.02.01. 12:24 pm 

<황해문화>에 2010년 겨울 호 실었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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