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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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동북아시아 공동문명의 교류

조현설

 

1

 

신화는 동북아 문명교류에 관한 사실을 증언하는 자료는 아니다. 신화의 모티프들 안에, 신화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 안에 문명교류와 관련된 요소들이 스며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화의 상징 언어를 통해 문명 교류를 사실로 증명할 수는 없다. 신화는 현실을 굴절시키기 때문에 교류에 관한 한 추론의 실마리 정도를 제공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신화를 통해 동북아 문명 교류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가? 나아가 왜 그런 문명 교류를 근거로 삼아 21세기 문화공동체 건설을 운운하는가? ‘한국 신화와 동북아 공동문명의 교류’라는 테마는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신화는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화의 담론적 성격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화는 왜 곰과 사냥꾼의 결합을 통해 한 종족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가, 신화는 왜 전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한갓 변신술 대결로 변형시키는가, 신화는 왜 이승의 문제를 저승을 통해 해결하는가, 신화는 왜 천지의 결합을 통해 영웅이 탄생한다고 말하는가, 왜 국가의 역사는 신화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통해 마련될 신화의 담론적 성격을 검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국신화를 통해서 한국 문화가 동북아 문화 혹은 문명과 무관치 않으리라는 추론을 거듭하는 동어반복에 머물게 될 것이다. 신화를 통해 동북아 문화공동체 건설의 상상력과 그 오래된 근거를 얻으려고 한다면 신화의 담론적 특성을 살펴야 한다.

이런 전제하에서 그간 동북아 지역 문화와 연속선상에 있다고 인정되어온 주몽신화를 먼저 읽어보기로 한다.

 

2

 

<삼국사기><삼국유사><동명왕편> 등에 실려 전하는 주몽 신화는 고구려를 세운 영웅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건국신화이자 영웅신화다. 이 건국영웅의 일생에 보이는 여러 모티프들, 이를테면 난생(卵生), 채찍과 주문(呪文), 고각(鼓角) 빼앗기, 흰 사슴과 기우(祈雨) 등등이 주몽이 지닌 샤먼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고, 이를 통해 주몽과 고구려의 문화가 동북아의 샤머니즘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고구려 신화를 동북아 지역 문화와의 연속선상에서 보려는 이런 시도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주몽의 형상이 샤먼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주몽 신화는 무당 주몽이 아니라 고구려 건국자 주몽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적하는 대로 주몽이 무왕(巫王, shaman king)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몽의 신화는 무(巫)보다는 왕(王) 쪽에 초점을 두고 있는 신화임에 틀림없다. 동부여 금와 왕의 후궁의 아들로 보이는 주몽이 북부여의 해모수, 혹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의 아들이 되고, 청하(압록강)의 신 하백의 외손이 되는 신화적 분식을 거친 것도 왕 주몽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채찍과 주문으로 막힌 물길을 열고, 흰 사슴을 들어 비를 내리게 하는 사제적 능력도 같은 목적에 귀속된다.

수렵문화의 산물이자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화살의 문제를 잠시 검토해 보자. 주몽은 이름대로 명사수였다. 이는 동북지역 퉁구스계 여러 민족이 명사수를 메르겡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용법이다. 그런데 메르겡의 화살은 자연의 이변을 향해 있다. 해가 한꺼번에 여러 개가 떠올라 조성된 재변을 해결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여행 끝에 메르겡은 하나의 해만 남기고 쏘아 떨어뜨린다. 한꺼번에 떠오른 여러 개의 해는 1차적으로는 자연의 이변을 상징하는데 이 이변의 해결은 수렵민들의 사회에서 샤먼의 소임이다. 이는 기우제의 형식 가운데 하늘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후대 민속문화의 자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웅신화의 형식으로 전승되고 있는 메르겡의 서사는 샤먼 메르겡의 기억을 담고 있다.

제주도 무속신화 가운데 <천지왕본풀이>의 소별왕, 대별왕 형제도 명사수다. 이들 역시 해 둘, 달 둘 이라는 자연계의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 화살을 쏜다. 달 하나, 해 하나로 별을 만든다. 이들 형제신의 행위는 창세 과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이들의 활쏘기는 창조행위가 된다. 메르겡의 활쏘기도 같은 맥락에 있다. 메르겡의 활쏘기는 형식적으로는 자연의 이변을 해결하는 행위이지만 자연의 이변이 창조된 자연계의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무질서를 질서로 복원하는 행위는 최초의 창조를 반복하는 창조행위가 되는 것이다. 수렵문화의 상상력 속에서 활쏘기는 단지 짐승을 잡는 물리적 행위만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조절하는 샤먼의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행위였다.

이런 화살의 상징적이 주몽 신화에도 드러나 있다. 주몽은 걷지도 못하는 영아기에 이미 작은 활로 파리를 적중시키는 타고난 명사수였고, 날아가는 비둘기 쏘아 어머니 유화 부인이 보낸 오곡의 종자를 얻는 샤먼이었다. 그러나 주몽의 화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몽의 신화에는 전혀 피의 냄새가 나지 않지만 상징 언어의 배후에 전쟁과 피의 기억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신화는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주몽의 활쏘기에는 샤먼의 기억이 스며 있지만 샤먼의 기억 이상의 의미가 있다. 주몽의 활쏘기는 국가를 건립하는 전사적 능력의 표현이고, 새로운 사회체제의 건립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그 역시 창조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같은 활쏘기라도 그것이 어떤 유형의 신화 서사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창조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메르겡의 태양을 쏘는 행위는 집단을 위한 영웅의 숭고한 희생적 창조행위지만 주몽이 화살을 날리는 행위는 건국영웅을 위해 타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파괴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국가와 건국 영웅은 창조되지만 비국가적 사회의 문화와 세계관, 그 세계를 살아갔던 타자들은 파괴되는 행위.

같은 문제를 주몽신화에서 확인되는 샤먼의 또 다른 모티프인 타계(우주)여행을 통해서도 재음미할 수 있다. 김열규 교수의 지적대로 해모수, 주몽, 유리의 삼대에 걸친 신화에는 우주 내왕의 양상이 보인다. 오룡거(五龍車)를 탄 해모수, 아침에 내려왔다가 저녁에 천궁(天宮)으로 돌아가는 해모수, 인마(麟馬)를 타고 강물 속 굴을 거쳐 조천석(朝天石)에 올라 천상에 오르는 주몽, 몸을 날려 창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유리의 형상이 그렇다. 그러나 주몽신화의 타계여행 모티프는 대단히 미약하다. 이는 주몽신화가 샤먼 주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건국영웅 주몽을 이야기하는 신화이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신화에 조부손 삼대에 걸친 타계여행의 모티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천손(天孫)인 고구려 왕가의 권위를 현시하는 장치일 뿐,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통과의례의 과정을 거쳐 치병의 능력을 획득한 샤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샤먼의 그런 능력을 제대로 보려면 무당의 조상으로 불리는 바리데기와 만나야 한다. 한국 무속신화 가운데 <바리데기>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바리데기>에 특히 타계여행 모티프가 두드러진다. <바리데기>는 저승여행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바리데기가 오구신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이 무당의 접신 체험이나 무당이 되는 과정과 동일시되어 무조신이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주지하듯이 전적인 자기희생의 과정이다. 바리데기는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유기된다. 이는 당금애기가 부모 없는 사이 중과 사통했다는 이유로, 가문장애기가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것과 유사하다. 모두 남성 지배의 결과다. 이런 바리데기의 축출은 원하지 않았던 존재였다는 점에서 알 속의 주몽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런 점에서 주몽과 바리데기는 모두 샤먼의 자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주인공의 행로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몽은 자신을 버렸던 금와왕과 동부여를 버리지만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렸던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에게로 돌아간다. <바리데기>의 신화적 비밀이 여기에 있고, 무당의 존재론적 본질이 여기에 있다. 무당은 왕과 달리 자신이 소속된 사회로 돌아가 개인과 사회의 해원을 위해 몸을 던져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오구대왕의 불치병을 치유하기 위해 샤먼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저승여행을 감행하여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수난을 거친 후 약물을 가지고 이승으로, 불라국으로 귀환한다. 이 바리데기의 구약여행 모티프에는 신화 특유의 대칭성의 사유가 흐르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이승과 저승, 남성과 여성, 부모와 자식, 국가와 비국가 등의 대칭성이다. 이 대칭성은 주몽과 송양의 대결처럼 결국은 깨어질 팽팽한 대결상태의 균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의 문제로 인해 깨어진 균형이 후자로 인해 복원되어 이룩된 대칭성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재음미해봐야 할 것이 <바리데기>에서 주목되는 국가와 비국가의 대칭성이라는 주제다. <바리데기>는 가부장제 형식의 남성 지배를 특히 겨냥하고 있지만 남성지배는 국가의 문제와 결부되어 나타난다. 불라국(혹은 조선국) 오구대왕의 고민거리는 왕권을 승계해야할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장자 상속이라는 가부장적 체제가 설립된 이후 국가와 가문이 겪는 공통의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오구대왕의 발병과 죽음은 권력 승계의 불안이라는 질병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서사 내적 맥락에서는 ‘바리데기의 유기’라는 동전의 이면이 존재하지만. 이 국가적 위기는 국가의 바깥, 아니 그보다는 국가라는 이승의 이면이라는 점에서 ‘안에 있는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저승을 통해, 동시에 가부장적 국가에서 쫓겨난 타자라는 점에서 ‘국가 내부에 있는 외부’라고 할 수 있는 바리데기를 통해 해결된다. 물론 이 해결은 죽은 국왕을 되살리는 형식으로, 오구대왕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셋이나 저승에서 낳아오는 방식으로 가부장적 국가체제를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미해결로 오해될 여지가 있지만 국왕의 친손봉사에 대한 집착이 외손봉사도 가하다는 쪽으로 조절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대단한 공덕을 세운 바리데기가 불라국 내부에서 왕모(王母)로서의 영광을 누리지 않고 다시 저승 행이라는 국가의 외부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미해결이 아니다. 미해결이 아니라 해결의 지속적 시도이자 지속적 문제제기로 읽는 것이 정당하다. <바리데기>는 국가적 사유 내부에서 비국가적 사유가 어떤 식으로 존재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는가를 적절히 보여주는 신화이다.

이 같은 바리데기 신화의 맥락에서 만주 궈하러 족 족장의 이야기인 <타라이한마마>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타라이한마마>는 비양구의 외동딸로 태어난 타라이가 한(족장)이 되는 영웅신화이면서 마마라는 이름이 덧붙은 씨족의 조상신이 되는 과정을 그린 조상신본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타라이가 어떤 원리에 의해 족장으로, 조상신으로 재탄생하는가 하는 점이다. <타라이한마마>는 그치지 않는 마을 간의 분쟁을 문제적 상황으로 제시하는데 그 해결은 비양구의 외동딸 타라이의 출생과 실종, 그리고 귀환을 통해 시도된다. 이 귀환의 과정은 통과의례의 과정이고, 그런 점에서 바리데기의 유기와 귀환과 유사하다. 타라이는 바람에 의한 실종된 뒤 10여 년이 흐른 후 쌍칼 여장수라는 이름으로의 귀환한다.

그런데 이 귀환이 흥미로운 것은 쌍칼을 들고 말을 탄 여장수의 형상으로 돌아온 타라이가 정작 문제해결의 과정에서는 쌍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타라이는 내기를 통한 대결과 대신 매를 맞는 자기희생을 통해 족장이 되고 문제 해결자가 된다. 희생을 통해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을 화해시키는 평화중재자가 된 것이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폭력을 억제하고, 폭력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다른 종류의 힘을 통해 지도자가 된다. 말하자면 타라이는 부족을 위해 자신을 ‘선물’로 줌으로써 타라이한이 된다. 그러나 타라이가 타라이한마마가 되는 데는 또 하나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신화는 말하는데 그것은 인간과 신의 화해, 인간과 신 사이의 평화중재자가 되는 과정이다. 남쪽 마을의 세 젊은 적대자가 신통력이 대단한 늙은 이리(이리떼의 왕)와 연합하여 타라이한과 대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리의 침이 담긴 독(毒) 단지를 선물로 받게 된다. 타라이는 이미 가짜 아가위 즙이 독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호의를 거절하기 어렵다면서’ 단번에 마셔버린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비록 죽음에 이르더라도 피통치자들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원시사화의 족장이다. 말하자면 타라이는 불가피해서 죽고, 자청해서 죽는다. 죽어 유언대로 자작나무껍질에 싸여 동산 어구 큰 소나무에 매달린다. 이런 장례 형식은 퉁구스 족 곰 의례에서 알 수 있듯이 재생의 과정이다. 이는 타라이한이 타라이한마마가 되는 재생의 과정, 달리 말하면 신성을 획득하는 통과의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타라이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신체를 부족을 위해 선물로 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선물되기’는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선물(선물의 순환)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증여’라고 할 수 있다. 이 순수증여를 통해 타라이한은 늙은 이리로 표상되는 악신을 제거함으로써 타라이한마마라는 신격이 된다. 비록 부활하여 노년까지 족장 노릇을 하다가 백두산 신령의 부름을 받는 형식으로 화신(化神)이 유예되기는 하지만, 순수증여를 통해 악신을 제거하여 신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뤄냄으로써 씨족의 신(조상신)이 된 것이다. 족장이 되려면, 나아가 조상신이 되려면 명령하지 말고 선물이 되어야 한다.

<타라이한마마>는 비국가적 사회가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 혹은 족장되기의 원리를 담론화하고 있는 신화다. <바리데기>의 바리데기는 철저한 자기희생, 선물되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타라이한마마와 닮은꼴이다. 이는 두 신화가 동북아 샤머니즘이라는 문화적 토양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바리데기> 신화라는 국가적 사회에서 지속되고 있는 무속신화 내부에 어떻게 비국가적 사회의 신화적 원리에 내속(內續)되고 있는가를 증명해 준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자연의 불균형을 조절하기 위한 영웅 메르겡의 활쏘기에도 스며 있는 원리, 그렇지만 주몽의 활쏘기에는 부재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3

 

우리의 의제로 제기되어 있는 ‘동북아 문화공동체’에 대한 신화의 지혜를 얻으려면 신화의 담론적 성격을 살펴야 한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동북아 지역 신화에서 확인한 바는 이 지역 샤머니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원시신화에, <타라이한마마>에서 읽어낼 수 있는, ‘희생을 통한 선물되기’의 담론이 내재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타라이한마마>만이 아니라 이 지역 수렵문화의 특징인 곰 사냥의례나 의례의 표현인 곰 시조신화에도, 죽은 오빠를 찾아가는 처녀 쿠바이코 이야기와 같은 무속 신화에도 두루 드러나는 특성이다. 동시에 이 담론은 문화적 원리로써 국가적 사회가 형성된 이후에도 어떤 형식으로든 지속되면서 문화적 균형을 회복하려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바리데기>를 통해 확인했다. 그렇다면 동북아 신화 속에 두루 나타나는 이런 원리의 확인은 지금 여기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동북아 지역에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역사 갈등이 표출되어 왔다. 그 가운데 신화와 특히 연관성이 있는 지점이 고조선, 고구려(와의 연관 속에 있는 부여, 읍루, 숙신, 남북옥저) 등의 고대사 문제다. 그것이 최근에는 동북공정 문제로 구체화되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국내에서는 ‘고구려연구재단’이 설립된 바 있고, 연개소문․대조영 등 민족 영웅을 내세운 드라마들이 붐을 이룬 바 있다. 고대사의 진실 여부는 역사학 등 다방면에서 지속적으로 토론되어야할 문제겠지만 앞에서 검토한 한국신화를 포함한 동북아 신화들은 다른 방식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독점적 소유권 이전에 여러 민족 집단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신화적 기억, 특히 국가의 신화(건국신화) 이전의 신화가 가지고 있던 공동의 문화적 기억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족장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선물로 내놓아야 한다는 신화의 담론이 그것이다. 이는 타자를 배제하려는 사고가 아니라 타자와 더불어 상생하려는 사고이다. 이를 타자에 대한 배제와 억압의 대지 위에 구축된 민족주의, 제국주의에 요구하는 것은 일견 ‘낭만적’인 것으로 비췰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바리데기>에서 실현된 선물되기에서 읽을 수 있듯이 조절불가능한 길은 아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이미 증언하고 있다.

동북아 문화공동체에 대해 신화가 권유하는 또 다른 생태주의적 공통체이다. 이는 동북아의 문제이면서 전(全)지구적인 화두이기도 하다. 신화는 주몽의 활쏘기, 전쟁국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나타난 무사들의 활쏘기를 말하기도 하지만 메르겡, 소별왕․대별왕의 활쏘기처럼 자연을 조절(재창조)하는 샤먼의 활쏘기를 동시에 말한다. 샤먼의 활쏘기는 에벤키나 나나이 등의 곰사냥 의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냥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곰과 인간이 화해하는,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상징적 증여의 행위이다. 이런 행위 속에는 자연을 타자화하는 사유가 없다. 활쏘기(칼)는 기술(技術)을 표상하지만 이 기술은 신화의 조절 작용을 넘어서지 않는다. 이런 신화의 지혜야말로 자연을 타자화한, 기술을 신화화한, 혹은 ‘녹색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고 있는 현대적 문제 상황에 대한 신화의 처방이 아닐 수 없다.

생태적 갈등, 역사의 갈등을 넘어 평화에 이르는 길은 둘이 아니다. 국가의 신화, 국가적 사유로는 불가능하다. 인류의 유동적 지성이 발명한 문화조절의 원리가 이미 실현되어 있던 국가 이전 사회(비국가적 사회)의 사유를 담고 있는 신화에 길을 물어야 한다. 문제는 신화가 이미 가르쳐준 도(道)를 국가적 사회 안에 어떻게 실현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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