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의 고전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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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천사를 보았는가? - ‘선(善)’의 형상성(形象性)에 관한 이야기 / 장화홍련전

민들레

얼마 전 일명 ‘XX녀’로 불리는 사건들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주요 포털과 커뮤니티 사이트는 그야말로 폭주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이들 논란의 발단은 모종의 사건 관계자가 일방적인 피해자의 입장으로서 사건을 노골적으로 폭로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네티즌은 일제히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슬로건으로 내건 심판자가 된 듯 XX녀를 규탄하고 나섰다. 하지만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대되자 당사자들이 진상 규명에 나섰고 결국 폭로자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과장되고 왜곡되었음이 드러났다. 이 일로 해당 인물은 여론의 희생양이 되어 쉽게 잊어지지 않을 오명과 상처를 입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중은 사회가 분열되고 불안정할 때마다 희생양을 통해 불만과 저항을 드러내곤 하였다. 희생양은 대체로 여성이 되었고, 이러한 마녀(魔女) 사냥은 극적이고 교훈적인 효과 덕에 대중의 마음을 쉽게 현혹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권선(勸善)을 목적으로 한 징악(또는 징치)행위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개인을 억울한 희생양으로 만드는 또 다른 악행으로 변질되기 쉽다.

그렇다면 과연 선(善)은 무엇인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조건을 근거로 선악을 판단하게 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깊은 고민을 했던 철학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니체였다. 니체는 선악의 관념은 각각의 사회집단이 지닌 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고 보았다. 원래 야만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기 보존이라는, 순수하고도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각자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고자 한다면 모든 인간은 결국 자멸하고 말 것이다. 즉, 자연의 법칙이 허용된 사회라면 일부 절대 강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적인 욕구를 단념하고, 사회계약에 의해 자기들의 사유재산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것을 힘으로 빼앗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되었다. ‘해야만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바로 사회가 규정한 선악의 규범이 된 것이다. 그래서 존 로크 역시 아예 “인간들이 공동체를 구성하고 하나의 정부에 복종할 때 자신들의 사유재산을 보전 받을 수 있다”며 제도적 공리(公利)를 선으로 파악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본다면 도덕률이란 그 자체로 어떤 고상하고 보편적인 의미나 인간적 가치가 있는 거룩한 그 무엇이 아니다. 도덕은, 선악은 곧 사회의 균질화를 지향하면서 타인과 동일하면 ‘선’이고, 다르면 ‘악’이라는 논리로 무장된 잠재적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선악의 개념과 기준은 특정 사회에 따라 달리 적용되고, 역사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따라서 선(善) 자체가 형상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악(惡)으로 규정한 대상에 대립되는 존재라면 무조건 선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이분법적 논리는 선과 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양산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관념은 악을 징벌하는 행위가 곧 선을 획득하는 방법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쉽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 고소설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조선 후기 국문 소설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소설에서 주된 관심사는 주인공인 선인(善人)이기보다 주인공에게 해를 입힌 악인과 그에 대한 징벌에 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또한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피해자로서 무조건 선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대방의 폭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선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고소설 작품 중에서도 특히 악의 개념이 고정적이고 강한 유형성을 지닌 계모형 소설을 통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작품상의 ‘선’의 모호성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장화홍련전>이 그 좋은 예다. 대중성, 통속성, 상업성이 강한 경성서적조합 간행 구활자본(1915)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계모형 소설과 <장화홍련전>

 

소위 계모형 소설은 가정소설에 해당하는 하위 유형으로 흔히 계모(繼母), 또는 서모(庶母)가 전처 자식과의 갈등, 즉 가정불화를 일으키는 내용을 소재로 한 작품을 일컫는다. 그런데 계모형 소설은 특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몇 가지 기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계모는 대체로 흉악한 모습이나 비도덕성을 지닌 악인으로 고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결말은 계모의 죄가 드러나 징벌을 받거나 계모가 개과천선하여 용서받는 것으로 처리된다. 그리하여 사건은 대부분 사필귀정으로 종결됨으로써 권선징악적 교훈성을 짙게 풍기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계모형 소설의 유형화를 가능하게 한 원인에는 사회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17세기 중반에 일어나고 있었던 계모와 전처 자식 사이의 갈등과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유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士林)이 16세기부터 정치에 등장하였고, 그들은 유교적인 통치 이념을 조선 사회에 적극적으로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더욱이 양란으로 인해 사회변동이 더욱 심화되어 사회체계의 정립을 위한 가부장제가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더욱이 17세기 독자층의 확대로 말미암아 소설(국문소설 포함)은 양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18~19세기 영리를 목적으로 대량 간행이 이루어지면서 소설의 유통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어 세책점이 출현하고 방각본 소설이 출간되면서 소설의 상품화가 본격화되었으며 이러한 소설의 상품화는 작품의 개작이나 속편의 출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때 독자 유치 경쟁이 치열해 질 수 밖에 없었고, 상업적 이유에서 소설의 내용은 독자의 취향과 관심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확대된 독자층은 공히 가정 내 처첩 간 갈등이나 시기, 살인, 불륜 등의 사건을 다룬 작품을 선호하게 되었다. 계모와 전처 자식 간의 갈등 역시 현실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서 갈등 관계를 그려내기에 용이한 소재였던 것이다. 가정 문제라는 보편적 관심사는 소재로서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어 유형화의 바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화홍련전> 다시 읽기

 

잘 알다시피 <장화홍련전>의 주된 갈등은 장화홍련 자매와 계모 간의 갈등으로 수직적 대립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전처의 자식들인 장화와 홍련은 태어날 때부터 수려한 용모와 착한 성품을 지닌 선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반면 계모는 그 외양묘사에서부터 흉하고 악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는데, 이는 계모의 흉악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계모는 진정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할 정도의 악한 사람이었을까. 그랬다면 왜 그렇게 됐을까? 반면 장화와 홍련은 무엇을 근거로 착한 성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계모의 악행에 비해 장화와 홍련의 선행에 관한 묘사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주된 갈등 구조를 선악의 대립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의 주제에서 벗어나 당시의 사회상에 빗대어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정하고 <장화홍련전>의 이면을 중심으로 재해석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계모가 왜 그토록 장화와 홍련을 박대했는가? 지금까지 작품 감상의 기본 태도는 비판적 이해보다는 공감대 형성에 치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작품의 해석과 향유가 지금까지도 ‘계모=나쁜 새어머니’라는 편견을 갖게 만들었으며, 아울러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 재혼 가정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새 엄마가 악녀라는 고정된 편견은 교육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부정적 인식의 한 원인이 <장화홍련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는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히 요구된다. 의식을 바꾸는 힘은 교육에서 나온다.

원래 <장화홍련전>은 1656년 평안도 철산 지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전동홀이라는 인물의 실력담과 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이야기이다. 17세기는 본격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시행되던 시기로 양난 이후에 새로운 사회체계의 정립이 시급했다. 그 결과 선조는 유교적 가치 체계를 규범으로 내세워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이를 민중에게까지 파급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줄곧 이어오던 혼인 및 가족생활의 관습을 쉽게 고치기는 어려웠다. 다시 말해 <장화홍련전>처럼 아버지와 전처 자식이 함께 사는 가정에 계모가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모를 가족으로 인식할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잘 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크고 작은 갈등을 야기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작품에서는 갈등의 모든 책임을 바로 계모에게 집중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계모만이 가정불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시대의 특성상 계모에 대한 당대의 부정적인 인식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모의 입장에서 본다면 낯선 환경에서 기존 구성원의 결속된 내부로 참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배 좌수 또한 허 씨에게 호의적이기는 커녕 이질감과 소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좌수는 매번 두 딸과 함께 장부인을 생각하며 일시라도 그 딸을 보지 못하면 그리워하는 생각이 삼 주나 지난 듯하여 들어오면 먼저 여아의 처소에 가서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뿌려 가로되, “너의 형제는 깊은 도장에 들어 앉아 어미 그리워하는 일을 생각하면 가장(家長)이 슬퍼지는 것 같다” 하며 사랑하고 불쌍히 여김을 그치지 아니하더니 허 씨 매양 그 일을 보고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주야로 장화홍련을 없앨 꾀를 생각하나

 

계모는 좌수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들을 출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계모가 전처 자식에게 호의적일 가능성은 드문 일이 될 것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계모는 약자로서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같은 혈육이지만 계모 소생의 삼형제와 배좌수의 관계에 관한 서술이 작품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은 배좌수가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주지 못하고 서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음을 짐작케 한다.

삼형제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처로서, 가족으로서 대해 주지 않고 오히려 친모를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 장화홍련 자매와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배좌수의 모습에 계모 허씨가 ‘낙태사건’을 강행하게 된 것이라면, 아예 무시하고 말 순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장남의 경우, 자신은 친모인 허씨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비록 의붓 남매이나 장화홍련과 혈육 관계인 그가 단순히 친모의 요구에 따랐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만일 평소 그가 이 가정의 가족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사랑받아 왔다면 제 아무리 친모라 할지라도 허 씨의 계략에 순순히 동조하여 사람을 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정컨대 계모가 이 가정에 들어온 이래로, 배 좌수와 장화홍련은 계모와 그의 아들들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자식이자 형제로서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로 인해 평소 이들에 대한 반감의 표출로 박대 행위 등을 일삼다가 급기야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의붓딸들을 죽이는 비윤리적 행위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가정 내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계모를 극단으로 몰고 갔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편,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장화와 홍련이 지닌 착한 심성이다. 장화와 홍련은 어찌해서 선한 사람인가? 악한 계모에 대비되는 착한 장화와 홍련이 선하다는 근거는 작품 초반부에 출생 후부터 생모의 죽음 전까지 효심이 지극했다는 짤막한 서술이 전부다. 원래 ‘계모’라는 글자는 이을 계(繼), 어미 모(母) 자가 결합된 것으로, 어머니의 자격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만일 장화와 홍련이 진정 심성이 곱고 효심이 지극했다면 생모뿐만 아니라 계모에게 역시 딸로서 효(孝)의 예를 다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장화와 홍련 자매는 계모를 어머니로 대접하지 않았다. 다음은 장화가 한 말이다.

 

우리 형제 모친도 없이 서로 의지하여 일각도 떠남이 없이 지내더니 천만 뜻밖에 일을 당하여 너를 적적한 빈 방에 혼자 두고 가는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고 간장이 녹는 심사는 동해를 다하여 먹을 갈아도 다 기록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장화와 홍련은 새로운 가족구성원에 대해 적대감과 이질감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장화의 말에는 생모가 죽은 후 계모가 모친의 역할을 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천지에 둘 이외에는 혈육이 없는 것처럼 애초에 어머니로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외삼촌댁에 가는 것을 마치 사별하는 상황처럼 받아들이며, 홍련을 혼자 남겨두는 것을 남의 손에 남겨두는 것처럼 서러워하는 모습은 두 자매가 평소 서로만을 의지하며 폐쇄적인 성향을 보여 왔음을 짐작케 한다.

장화홍련 자매가 생모를 잃은 후로부터 계모의 학대가 본격화할 때까지의 시간은 생모 삼년상 3년, 계모의 출산(삼남 출산 기준) 3년으로, 최소 6년 이상이 지났다고 볼 수 있다. 즉, 계모가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된 지 6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장화와 홍련이 매일 밤 생모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바꿔 말해, 계모를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배 좌수에게 계모의 사람됨을 염려하거나 죽은 후 부사 앞에서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 모습 등은 그들에게도 역시 계모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던 것이라 할 것이다.

장화와 홍련이 ‘선(善)’의 표상이라는 것에 대한 의구심은 결말에 가서 더욱 강해진다. 앞서 서두에 언급한 ‘XX녀’ 사건처럼 결말부에서 장화홍련 자매는 모든 잘못을 계모에게만 덮어씌우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결말부에 배 좌수를 용서하는 반면, 계모와 계모 소실을 처절하게 응징하는 부분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용서하려면 둘 모두를 용서하든지, 징벌하려면 둘 모두를 징벌함이 합당하지만, 혈족이라는 이유로 배좌수를 방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장화 홍련이 이방인으로서 계모를 생전에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개인적인 복수심을 드러내기 위해 계모와 계모 소실을 응징하는 것으로 처리한 것일 수도 있다.

17세기 장편소설에는 유교적 이념과 가부장제 사회의 현실 구조가 내면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규훈류(閨訓類) 서적이나 계녀서의 내용이 소설에 그대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여성들의 윤리성을 강조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계모는 어쩌면 그의 비윤리성을 처절하게 징벌 당함으로써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악의 형상성을 극대화함으로써 그 반대 급부의 선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악을 징벌하는 심판자로서의 당위성을 확보하기엔 소설 속 선의 존재는 설득력이 많이 부족하다. 따라서 <장화홍련전>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교훈적 작품으로서 선을 권(勸)하기에는 그 형상성이 많이 부족하다 하겠다.

선을 표방하는 것은 인류 보편적인 이념이자 행동 양식이다. 하지만 선과 악 둘 모두 형체 없는 관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이 보이지 않는 관념을 형상화하여 인간이 내면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주요한 장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 고정되면 인간은 그것을 마치 정해진 공식으로 착각하기 쉽다. 예컨대 ‘선은 예쁘고, 악은 추하다’, 혹은, 앞서 말했듯이, 계모에 관하여 ‘계모는 나쁜 새어머니’라는 고정관념이 그것이다. 고소설의 경우, 이는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일관된 해석을 강요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하겠다. 인간의 본성 문제라든지 사회적 제도 문제라든지 여러 방면에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정된 주제 의식으로 계속해서 가로막는다면 작품의 올바른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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