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의 고전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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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얻어 독서하다

민들레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당신 전공이 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독서라고 답하지 않을까? 독서를 통해 덕행과 학식을 쌓다가 기회가 닿으면 정계로 나아가 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박지원(朴趾源)은 <양반전>에서 사대부(士大夫)를 “독서를 하면 사(士)요,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이다.”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독서는 선비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이는 우리의 유교문화가 독서문화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문화 속에서 피어난 독서 제도 중 하나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라는 것이 있었다.

  ‘사가독서제’란 말 그대로 ‘여가를 하사하시어 독서를 하다’라는 뜻의 제도로 세종 대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취지는 조정에서 총명하고 젊은 문신을 가려 뽑은 뒤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 준다는 것이었다. 1446년(세종 28)에 집현전 학자였던 권채(權採)·신석견(辛碩堅)·남수문(南秀文) 이 세 학자를 세종이 친히 불러 “내가 너희를 집현전관으로 임명한 것은 젊고 장래성이 있어 학문함에 있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 업무에 얽매여 독서할 겨를이 없으니 이제부터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독서에 전력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라.”고 하며 휴가를 주어 집에서 공부에 매진하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국비장학생을 선발해 학문 수양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제도나 마찬가지다. 소위 ‘거침없이 독서’하도록 만들어 놓은 후원제도인 셈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신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휴가를 주어 마음껏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해 뒷날에 크게 쓸 기초를 다진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교육대계를 위한 중요한 제도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가독서제는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대에 이르러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어 버렸다.

  사가독서제가 큰 호응을 얻을 수 없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선발된 인재들은 집에서 독서를 한다거나[在家讀書] 서울에 빈 집[城內空家]에 모여 독서만을 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는데, 제 아무리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공부하는 일밖에 모르는 선비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집이나 비어 있는 집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제쳐놓고 독서에만 몰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둘째, 세속의 일을 다 끊고 오직 독서만을 하기 위해 찾은 또 다른 장소가 산사(山寺)였는데, 산에 들어가 절에서 독서하는 것은 당시 억불숭유 정책에 비춰 볼 때 대단히 부정적인 일로 비쳐졌다. 그래 이래저래 몇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자, 시행된 지 얼마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성종 대에 다시 도성 밖 조용한 곳에다 상설 국가 기구를 세워 문관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독서당을 마련해 놓고, 그 원 취지를 살리고자 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독서당이었다. 독서당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러한 사가독서제는 세종 8년(1426)에 권채(權採) 등 3명의 문신을 선발, 사가(賜暇)한 것을 시작으로 영조 49년(1773)에 박상갑(朴相甲) 등 6인을 마지막으로 선발할 때까지 340여 년간 지속되었는데, 그 기간에 약 50회에 걸쳐 삼백여 명이 독서당에 들어가 공부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 때 선발 대상자들은 주로 중하위직 문신들이었는데, 때로는 당상관의 문신들 중에, 그것도 나이 든 이들이 선발되기도 했다. 대상자를 선발하는 시기는 정기적이라 할 수 없었지만 대체로 2~3년 간격으로 뽑았다. 그리고 한 번 뽑을 때 선발된 사가독서원(賜暇讀書員)은 평균적으로 5~7명이었다. 그러나 적은 경우 한 명이 뽑히기도 했지만, 많을 때에는 12명이 선발되기도 했다. 이들의 선발은 대제학(大提學)이 주로 담당했지만, 때로는 이조(吏曹)나 예조(禮曹)와 상의하여 뽑기도 했다.

  야담에는 독서만 하던 독서당 선비를 주인공으로 한 재미있는 일화들도 여러 편 전해온다. 그 중에서도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등장하는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 1456~1497)와 기생 옥매향에 얽힌 이야기는 걸작 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신종호는 과거제도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세 번에 걸쳐 장원을 차지했던 인재였다. 그래서 그의 자호를 ‘삼괴당’이라 했는데, 그는 능력도 뛰어났을 뿐더러 강직한 인품과 아름다운 용모까지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성종이 그를 무척이나 아낀 나머지, 독서당의 일원으로 선발했다. 그런데 임금과 신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마찰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여색에 관한 것이었다. 성종은 음풍(淫風)에 무척 관대했던 임금이었는데, 신종호는 그 반대로 기생들을 멀리하라는 상소를 올려 강경하게 군주의 도리를 호소하던 대표적 신하였다. 그러니 성종으로서는 신종호의 그러한 고집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여색을 싫어하는 신하를 길들이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정공법이었다. 여색으로 신종호의 입을 막아야 마음껏 풍류를 즐길 수 있다고 판단한 성종은 그를 암행어사에 임명해 평안도로 보냈다. 평안도에 당도한 신종호는 수령들이 마련한 술자리도 마다하고 공무에 전념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종과 선천부사가 나서서 신종호에게 덫을 놓고자 하는데, 아무리 천하의 신종호라고 해도 함정에 걸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신종호의 처소 옆집에 아리따운 기생 옥매향을 살게 한 것이다. 소복을 곱게 차려입은 옥매향이 달빛을 받아 더욱 요염해진 자태로 낮은 담장 앞을 거닐며 그를 유혹하는 작전을 편 것이다. 결국 신종호는 옥매향과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비도 안 온 골짜기 축축도 하네.… 새콤하기가 덜 익은 살구 맛이로구나.’ 라며 탄성을 내뱉었다나. 운우지락을 나눈 신종호는 옥매향의 새콤한 살 송곳 맛을 부채에 일필휘지하여 신표로 건네며, 때가 되면 반드시 그를 부를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후 한양으로 돌아온 신종호는 성종에게 어사의 임무를 마치고 왔음을 고했다. 그러자 성종이 노고가 많았음을 치하하며, ‘평안도 선천은 천하절색의 기생이 많이 배출되는 색향인데 별 일이 없었느냐?’고 하문했다. 신종호가 옥매향과 나눈 사랑 때문에 우물쭈물하자, 성종이 품에서 부채를 꺼내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그가 선천에서 지은 시를 읊었다. 그러면서 당대의 문장가가 이처럼 음탕한 시를 쓴 연유가 무엇이냐며 놀리더니, 옥매향을 첩으로 삼아 평생토록 살구 맛을 즐기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신종호를 비롯한 신하들은 더 이상 성종의 풍류를 논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풍류에 일가견이 있던 성종은 성군다운 면모를 학문을 진작시키는 데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용산 한강변에 있던 폐사를 고쳐 ‘독서당(讀書堂)’이라 이름 짓고 유명무실해지던 사가독서제를 재정비한 것이다. 그 때가 성종 23년(1495)의 일이었다. 이 때 용산 앞의 강을 남호(南湖)라 했기 때문에 용산에 위치한 독서당을 남호독서당이라고 불렀다. <<설공찬전>>의 저자로 유명한 채수(蔡壽)도 성종으로부터 독서를 위한 휴가를 받았다. 그 밖에 김일손(金馹孫)·조위(曺偉)·최부(崔浮)·유호인(兪好仁) 등 쟁쟁한 문인들도 사가독서자로서 성종의 은혜를 입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학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인 ‘대제학’이나 ‘문형‘이 되려면 원칙적으로 독서당 출신이라야 가능했다.

  물론 그 후 연산군 대에 폐지되기도 했지만, 중종 12년(1517년)에 지금의 옥수동에 다시 독서당을 신축하면서 호당(湖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동호당(東湖堂)이라 불리는 ‘동호독서당’이다. 지금도 동호당이 있던 옥수동 일대를 독서당 마을이란 뜻으로 부르던 ‘한림말’이라는 명칭이 남아 있고,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 그 길을 ‘독서당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서는 유가교양을 쌓으면서 관직으로 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었다. 입신양명과 국가적 이익 추구라는 실리적인 측면에서라도 독서가 장려되었다. 그리고 도(道)에 뜻을 두고, 성현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자연과 사물을 이해하고 사회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판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독서에 전념케 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당대의 독서경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자주 개진되었다. 독서를 부지런히 해도 글의 뜻과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음을 한탄하며 그 원인을 과거시험에서 찾는가 하면, 현실성이 결여된 이(理)나 기(氣) 논쟁의 소모적 상황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질타하기도 했다. 실학자들이 말하던 독서란 자신의 입신양명 같은 욕망 충족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공리적인 측면에서 그 혜택이 세상에 두루 미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했다. 다산 정약용은 훌륭한 독서를 위해서는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자신의 문제의식 내지 주견을 확실히 정해야 하며 실용지학에 뜻을 두어 만물을 윤택하게 하고 만물을 번성하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올바른 독서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독서를 잘하는 사람이란 실천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쓴 사람의 고민의 흔적을 읽을 줄 알고 거기서 얻은 지혜로써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응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본 것이다.

  여하간 선비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변함없이 독서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 읽는 소리가 끊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것도 같은 책을 수백 번, 아니 수천, 수만 번씩 읽고 또 읽기도 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독서를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기 위해 조선의 선비들은 읽고 또 읽기를 쉬지 않았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이 모두 독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보니 책 읽는 선비들 중에 소위 독서왕이라 할 만큼 책 읽는 데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독서광들도 있었다.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독서왕을 뽑는다면 단연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사마천의 󰡔사기󰡕에 실려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을 1억 1천 1백번이나 읽어 호를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었다고 한다. 아무리 과장을 섞었다고 하고, 당시 1억이란 숫자가 10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1권의 책을 적어도 10만 번 이상 읽었다는 것은 가히 괴물이라 할 법하다. 그런데 김득신이 이렇게 엄청나게 반복해 읽은 책이 이것뿐만이 아니라 36편이나 된다고 하니 어디서 어디까지를 믿어야 할 지 모를 지경이다. 김득신 스스로가 쓴 <<고문 36수 독수기(古文三十六首讀數記)>>에는 평소 자신이 즐겨 1만 번 이상 읽은 서른여섯 편의 글을 읽은 횟수를 적어 놓았다.

 

<획린해(獲麟解)>․<사설(師說)>․<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송궁문(送窮文)>․<연희정기(燕喜亭記)>․<지등주북기상양양우상공서(至鄧州北寄上襄陽于相公書)>․<응과목시여인서(應科目時與人書)>․<송구책서(送區冊序)>․<장군묘지명(將軍墓誌銘)>·<마설(馬說)>․<후자왕승복전(朽者王承福傳)>은 1만 3천 번을 읽었다. <악어문(鰐魚文)>은 1만 4천 번 읽었으며,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와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는 1만 3천 번을 읽었다. <십구일부상서(十九日復上書)>나 <상병부이시랑서(上兵部李侍郞書)>․<송료도사서(送廖道士序)>는 1만 3천 번을 읽었다. <휘변(諱辨)>․<장군묘갈명(張君墓碣銘)>은 1만 3천 번을 읽었다. <용설(龍說)>은 2만 번 읽었고, <백이전(伯夷傳)>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 <노자전(老子傳)>․<분왕(分王)>․<벽력금(霹靂琴)>은 2만 번을 읽었으며, <제책(齊策)>은 1만 6천 번을, <능허대기(凌虛臺記)>는 2만 5백 번을, <귀신장(鬼神章)>은 1만 8천 번을, <의금장(衣錦章)>과 <보망장(補亡章)>, 그리고 <목가산기(木假山記)>는 2만 번을 읽었다. <제구양문(祭歐陽文)>은 1만 8천 번을 읽었고, <설존의송원수재(薛存義送元秀才)>와 <주책(周策)>」은 1만 5천 번을 읽었고, <중용서(中庸序)>는 2만 번을 읽었으며, <백리해장(百里奚章)>은 1만 5천 번을 읽었다. 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와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대학>>과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는 싣지 않았다. 만약 후대의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 내가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경술년 여름, 백곡 노인이 괴산 취묵당(醉黙堂)에서 쓴다.

 

  이쯤 되면 김득신의 독서력과 그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기억력이 얼마나 떨어졌기에 읽고 외우기를 거듭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김득신의 글을 읽은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이 호기심이 발동해 김득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읽었는지를 찾아보고는 <김득신의 독수기 뒤에 쓰다(書金伯谷得臣讀數記後)>라는 글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선배들을 살펴보니, 김일손(金馹孫)은 한유의 문장을 1천 번 읽었고, 윤결(尹潔)은 <<맹자>>를 1천 번 읽었으며, 노수신(盧守愼)은 <<논어>>와 두시(杜詩)를 2천 번 읽었고, 최립(崔笠)은 <<한서>>를 5천 번 읽었는데, 그 중에서 <항적전(項籍傳)>은 두 배를 읽었다. 차운로(車雲輅)는 <<주역>>을 5천 번 읽었고, 유몽인(柳夢寅)은 <<장자>>와 유종원의 문장을 1천 번 일었고, 정두경(鄭斗卿)은 <<사기>>를 수천 번 읽었고, 권유(權愈)은 <<강목(綱目)>> 전체를 1천 번 읽었다. 지금까지 동방에서 대가의 문장을 논할 때면 반드시 이분들을 지목하는데, 그 시를 읽고 글을 읽어보면 그 글이 어디서 힘을 얻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수천, 수만 번씩 낭독하며 읽는 독서법으로 세상을 읽고 바라보는 안목과 통찰력을 배우고, 세상을 구하는 도구로 삼고자 했다. 성군 세종이 사가독서제를 시작한 이유나 성종이 독서당을 짓고 학문수양을 도모한 것이나 선비들이 한평생 독서를 일상으로 삼아 살고자 했던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하늘과 땅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며 인간답게 살기 위함이었다.

  청명한 가을이다. 바쁜 삶 속에서 오늘만큼은, 이번 추석 명절만큼은 스스로에게 사가독서를 명하는 것이 어떨는지. 그리고 작심하고 책 한 권을 읽어보자. ‘너 안에 나 있다[汝內存知己]’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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