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의 고전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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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신용

민들레

전문가와 신용

 

 

  필자가 개인적으로 고서(古書)의 생산(작가, 출판업자)과 유통(서적중개상), 소비(독자)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내공이라면 내공이랄까, 책의 역사, 아니 우리의 옛 독서사를 조명하다 보니 그 안에서 장서가와 출판업자, 서점과 책 대여점, 필사자와 작가, 낭독자와 서적중개상 등의 생활상까지 목도하게 되고, 그것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잉복(剩馥, 남아 있는 향기)임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스마트폰과 각종 최신 전자 매체를 일상으로 향유하는 요즘 세상에서, 고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고서점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는 것만도 어찌 보면 무척이나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통은 새로움의 반면(反面)이고, 과거는 현재에 드리워진 그림자요 실루엣이 아니던가? 고서가 존재하는 한 그것을 찾는 이들과 수요는 여전히 현재형의 의미를 갖는다. 비록 고서점이 아닌 박물관으로 장소가 바뀌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말이다.

  오늘날에도 고서 거래는 여전히 예전의 특별한 거래방식이 통용된다. 그러나 고서의 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은 현대의 상거래와는 적잖은 차이를 보인다. 고서의 가격은 세월의 무게와 소장자의 사회적 명성, 책의 내용과 책 자체가 갖는 희소성, 그리고 거래자에 대한 인상과 기분 등에 의해 종합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다보니 부르는 게 정가(定價)다. 상품으로서 고서는 거래되는 순간의 가격으로 그 가치가 결정되는 법이다. 그러니 값을 흥정하고 결정짓는 일에 명백한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의 가격 결정이 고서의 가치를 결정짓는 불문율이자 규칙이다. 팔려는 이는 가능한 한 값을 높게 부르려 하고, 사려는 이는 어떻게 해서든 깎고 또 깎으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이런 거래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비논리적이고 불편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거래 방식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삶이, 그 누군가의 관점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고서 거래 방식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거래 당사자 간 특별한 덕목이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상대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다. 책을 사려는 이는 판매자가 제시하는 평가 가격을 믿고 사는 것이고, 책을 파는 이는 자신의 신용을 파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요즘처럼 신용과 신뢰, 상대를 고려한 존중의 마음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랜 세상에서 고서를 사고파는 일이란 가히 도박을 하는 심정이다. 오히려 고서에 대해 무관심해진 세태가 쿨한 느낌마저 든다. 고서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을뿐더러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고서거래 방식을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고서의 가치를 몰라주는 일반인보다 명색이 관련 분야의 전문가라는 이들의 안목과 태도에 있다. 고서 관련 연구자나 전문가들조차 고서를 자신의 안목과 지식 내에서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풍조 탓에 새로운 물건의 진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고서점 주인이 자신의 안목과 소신에 의해 10만원의 가격을 매겨 내놓은 고서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전문가가 그 책은 5만원의 가치밖에 안 되는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그 고서의 가치는 여하 간에 전문가가 매긴 5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결정되고 만다. 전문가의 견해에 기댄 나머지 고서점 주인이 매긴 가격은 이윤에 눈이 멀어 과다하게 책정해 놓은 것으로 매도당하기 쉽다. 심지어 동일 고서를 다른 고서점에서는 더 싼 값에 내놓았다고 한다면, 이 고서점 주인은 폭리를 취하려는 상인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고서점 주인이 특정 고서를 1만원에 구입해 10만원에 팔았다고 치자. 그러면 아마도 십중팔구 대다수는 그 고서점 주인을 도둑놈이라고 몰아세울 뿐, 1만원 가치의 고서를 10만원의 가치가 있는 고서로 만들어 놓은(평가받게 한) 그의 감식안과 안목을 높게 평가할 줄 모른다.

  고서는 소장자(전문가)가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했다. 구매자는 판매자(고서 소장자)가 평가한 가치를 인정하면(받아들일 수 있으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사면 그만이다. 고서의 진정한 가격은 판매자 단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매자의 동의와 인정 하에 비로소 결정되는, 신용과 상호 존중에 기초한 가치판단의 결과인 셈이다. 이는 고서뿐 아니라 다른 골동품이나 문화재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혹여 이러한 신용 대신, 전문가의 말 한 마디가 물건의 가치를 좌지우지하는, 참으로 편리하면서도 위험한, 전문가 신봉주의에 살고 있지 않은가? 전문가를 싸잡아 매도할 일도 분명 아니다. 문제는 A 전문가의 말이 맞든, B 전문가의 말이 맞든, 우리 사회는 A, B 두 전문가 중 한 사람의 말이 옳다면, 다른 한 사람은 틀리다는 식의 흑백논리 사고에 젖은 나머지, A와 B 전문가 모두 틀리거나, 모두 맞을 수도 있고, 제 3의 전문가의 주장이 맞을 수 있음을 인정하거나 고려하려는 의식이 익숙하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의 전문가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전문가가 단순히 관련 분야의 지식을 일반인보다 좀 더 많이 안다는 외적 조건만으로 인정받는 사회는 분명 건강하지 못하다. 여기에 더해 전문가와 일반인으로 단순 구획하려는 사고 또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미 어느 전문가가 정해 놓은 기준과 범위에 부합하면 옳은 것이고 진리이며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맹신하기에 앞서, 견해를 달리 하는 다른 전문가의 평가와 기준까지 다시 고려하고 존중하는 풍토가 필요하다. 신용과 타자를 향한 존중의 마음이야말로 다원주의 문화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정의(正義, Justice)’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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