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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는 결정한다 / 오영진

연구소 쪽지

리얼리스트는 결정한다



오영진



*이 글은 계간지 『리얼리스트』2014년 여름호에 실렸습니다.


1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2013)는 중력이 있는 삶과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플롯은 간단하다.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우주인이 작은 파편 하나로 인해 조난을 당하게 되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다. 그녀는 자살에 가까운 고립을 선택한다. 그러다 우연히 지구에서 들려오는 아기와 동물 울음소리를 듣는다. 지구에 귀환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고 천신만고 끝에 지구에 도착한다. 사건의 내용이 별것 없음에도 이 영화가 우리를 감동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인공 라이언 스톤의 삶을 돌이켜보자. 그녀는 사랑하는 아이를 사고로 잃은 트라우마에 지속적으로 시달린다. 지구에서의 삶은 악몽이다. 지구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우주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선사하는 우주의 광막함은 이웃과 단절되어 철저히 고립된 자의 내면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초상은 자궁 속 태아의 모습이다. 히키코모리적인 평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중력이 있는 삶에 다다른다. 무중력 때문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근육을 이용해 땅 위에 선다. 그 순간 그녀는 우주를 유영하는 유령 같은 존재에서 벗어나 뼈와 살이 있는 인간이 된다. 중력이 없는 부유하는 삶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리얼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현대의 우화이다.

  중력이 없는 삶이란 구속이 없는 삶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는 라이언 스톤을 자신의 자리에 있게끔 지탱시켜주는 힘 역시 부재한다. 그래서 때론 우연히 부딪힌 나사조각 하나에도 그녀는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버릴 수 있다. 힘은 그녀의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극단의 자유가 극단의 부자유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고 있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개념을 짚어보자. 가상적 성격을 지닌 ‘게임’과 ‘리얼리즘’은 부유하는 현실감이 일상화된 시대에 성립하는 개념이다. 즉 가상이 현실로서 작동하는 현실이라는 뜻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지표 없는 세계가 안기는 고통을 함유하는 개념이다. 현실이라는 게임에는 퀘스트가 없고, 오로지 무한 리로딩과 멀티 엔딩이라는 공허한 자유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쿠라자카 히로시의 라이트 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의 주인공 키리야 케이지는 어떤 방법을 써도 전투 하루 전으로 돌아오는 악몽을 겪는다. 물론 시간여행이라는 고전 SF적 설정에서 작동한 서사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여행의 논리적 해명이 아니라 바로 그 악몽과도 같은 반복에 있다. 키리야 케이지에게는 전투에서 승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어쨌든 그는 돌아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는 의미 없이 자신의 죽음을 수십 번이나 소비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독자들이 『올 유 니드 이즈 킬』 같은 작품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작품에 대한 내적 설명이 아니라 실은 작품 외적인 독자의 경험과 견주어 이야기적 개연성을 얻는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보드리야르의 전망 즉 시뮬라크르적 현실은 물론이요, 사회가 무수한 분기와 선택의 강요로 이어지는 체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경우의 수를 너무 많이 열어버리고 그 가능성들을 단념시키지 않는 행위가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오히려 불안으로 전유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경우, 컴퓨터 게임이 체험케 하는 무한 리로딩과 멀티 엔딩의 체험이 얼마나 현실과 닮아있는가 생각해보라는 것이고, 그 효과는 자유와 불안의 공존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 사라진 중력은 개인의 신념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자유란 구속보다 더한 형벌이다.

  비단 실존적 차원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의 차원에서도 이 같은 논리는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 점에서는 에바 일루즈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녀의 입장은 한 마디로 우리의 자유연애란 신자유주의적 자유와 동궤를 이룬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껏 자유롭게 연애하라는 명령을 수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유로움이 사랑을 방해한다. 진정한 짝을 찾는 일이 자꾸만 유예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애관계에서 쿨함이 유행하는 이유는 쉽게 진정성을 갖고 상대를 대하면 양자 간에 감정적 불평등이 발생함으로써 형식적 평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공허한 자유와 평등으로 인해 관계의 가벼움이 장려되고 그만큼 관계의 불안이 야기된다. 이러한 불안한 사랑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진정성이 있는 척하기 위해 진정성을 연기하는 일도 발생한다. 즉 직감적으로 상대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 혹은 이 여자밖에 없어”라는 자기 암시의 기술이 진정성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형식적인 자유조차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선택의 아키텍처’ 즉 특정한 시스템에서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를 특정한 틀과 후보군 안에서 고르는 것이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연애상대는 직감적 에로스의 대상이 아니라 정보의 덩어리다. 우리 시대의 사랑에는 무한의 자유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본질은 사랑이 교환거래로 인식되면서 전제되는 시장의 자유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사라진 중력은 진정성이다. 첫눈에 느끼는 끌림이라든지, 불가해한 매혹 등은 합리적 교환을 방해하는 요소들일 뿐이다. 언제든지 연애하라. 대신 사랑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타자를 만나는 데 있어 직면한 현실이다.

  구속되어 있지만 자유로우라는 명령과 자유롭지만 구속되어라는 명령은 다르다. 전자는 오로지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보장받는 내밀한 자유를 선물로 가져가지만 후자는 자유를 강요받으나 결국에는 부자유를 짐으로 안고 간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규칙이 아니다. 규칙 없는 규칙이다.

  우리는 전자파의 교란에 의해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꿀벌들과 같은 처지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어디로? 김수영은 신동엽의 시를 고평하면서 그의 시에는 ‘세계’가 있다고 평가했다.1) 이 세계란 단순히 공간적 확장에 머문 지도적 상상력 따위가 아닐 것이다. 주체가 세계를 감지한다는 것은 ‘함께 있음’이라는 자각이 이웃을 향하는 마음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이 분명한 지향성을 신동엽은 보여주었던 것이다. 김수영이 보기에 참여의식보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적인 참여의식 즉 ‘세계’에 대한 의식이었다. 이 최초의 지향성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개인의 신념도, 타자에 대한 에로스적 충동도 성립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소설 『1Q84』의 주인공 아오메마는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걸어 나와 비상구로 향한다. 직전까지 그녀가 있던 곳은 소음 하나 없는 택시 안이다. 그곳은 권태로우며, 느리다.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녀는 결국 고속도로에서 탈출하기로 한다. 그때 택시기사가 경고한다.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이라는 건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현실은 두 개나 세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다. 이를 단 하나로서의 현실, 가짜 현실과 진짜 현실의 분별에 대한 주의로 읽어야 할까? 속지 말라는 말은 우리를 불안케 한다. 의심으로 가득 찬 세계를 끌고 온다. 하지만 “언제나 단 하나뿐인 현실”이라는 말은 왠지 기쁘다. 그것은 확신으로 가득 찬 세계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택시 기사의 말에는 의심하는 행위와 결정하는 행위가 일으키는 변증법적 운동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눈여겨볼 것은 바로 그녀가 경고에도 불구하고 비상구로 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결정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올 유 니드 이즈 킬』에 대한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를 매회 분기마다 끝없이 선택해야 하는 자의 불안이 담긴 초상, 영원재귀의 악몽에 놓인 현대인의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읽어냈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이나 주인공 키리야 케이지가 160회째 반복에서야 루프의 악순환을 끊어낸다는 점을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내용상으로 살펴보면 시간의 반복루프가 지속되는 한, 주인공 키리야 케이지의 경험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적 괴물 ‘기타이’에 의해 전달받은 경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 반복적인 시간여행이 외부로부터 온 일종의 꿈과 같은 것임을 주인공은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 반복의 횟수를 모를 뿐 꿈은 언젠가 깨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매회 자신의 경험이 기타이로부터 온 것인지, 진짜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순간순간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여 열심히 싸워야 한다. 즉 매사 목숨을 버리는 싸움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했을 때 이 작품은 선택의 무한성이라는 환상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해줄 수 있다.

  매순간 ‘선택’이라는 불안을 맞이하는 우리는 이것이 야기하는 미끄러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선택’을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전유하는 선에서 주체화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거짓된 무한의 힘을 폭로하고, 진정으로 생산적인 무한의 힘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래비티』의 주인공 라이온 스톤의 지구귀환은 중력을 단지 되찾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중력을 발명했고 획득했다.


2


  이 같은 결론 끝에 나는 중력 없는 삶을 끝장내기로 결정한다. 허울뿐인 대학연구자라는 타이틀은 나를 현실의 복잡함으로부터 도피시키고, 오타쿠적인 지식에 파고들게 한다. 학문의 숭고함은 시뮬라크르의 숭고함이다. 매년 수없이 쏟아지는 논문 속 ‘지식’은 아직은 사회적으로 지식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미숙아 상태에 머무른다. 아마도 영원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우리는 자기 공부의 결과가 어떻게 유통되고 소비되는지에 대해 무지하다. 이 무지는 백치를 가장한 무책임의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우리는 진리를 향한 싸움에서 전진하기보다 무의미하게 횡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나를, 아니 우리를 포위한다.

  작년부터 대안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와 ‘인문학협동조합’에서 회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곳에서 친구들과 나는 최근 공부한 내용을 강의로 만들어 개설한다. 수강생이 들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운이 좋으면 외부에서 요청을 받기도 한다. 강의로 인한 수입은 부차적인 문제다. 화폐의 리얼함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의 리얼함이다. 공부하고 가르치고 직접 확인하는 일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중력이다. 중력 때문에 우리가 넘어져 다치는 것처럼 어떤 강의는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기약 없는 학문의 순수함보다 나를 기쁘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디보다 신자유주의적인 공간, 대학으로부터 탈출하여 연대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는 고독하고 고귀하나 개인적이고 경쟁적이다. 주변과 관계를 맺는 일은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아 거추장스럽고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는 무게가 있고, 좀처럼 항로가 변경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지속성에 대한 신뢰가 오로지 개인의 자기신념의 틀에서만 해석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광기와 집착의 문제로 변질되어버린다. 하지만 다자간의 책임이 부여되는 관계맺음의 틀에서는 신뢰와 염려의 문제로 발전한다. 즉 다 같이 결정하고 느리게 같이 나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수유너머’와 ‘인문학협동조합’에서 중력을 발명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환상의 미래」에서 하이네의 시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Den Himmel uberlassen wir Den Engeln und den Spatzen.”(하늘은 천사들과 참새들에게 맡겨라.) 즉 우리가 볼 것은 환상의 ‘미래’가 아니라 현실의 ‘지금’이라는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종교에 대응하며 과학의 힘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과학의 힘을 맹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과학은 오류를 스스로 발견하고 수정하는 체계로 이해된다. 실패하면서 전진하는 힘이 과학에는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결정을 망설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가 결정을 못 내리는 이유 혹은 내리지 않으려는 이유는 실패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중력이 있는 삶이란 책임이 있는 삶이다.

  마키아벨리는 힘을 가진 자가 결정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도 읽힌다. 결정은 힘을 갖게 만든다. 리얼리즘은 모방과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로서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리얼리스트는 결정한다.



필자정보


오영진

문화평론가(2014년 쿨투라 봄호 데뷔), 수유너머N 회원, 인문학협동조합 교육복지위원장



1) 김수영, 「참여시의 정리」,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2006.  p.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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