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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로서의 학문노동, 교환으로서의 학문노동 - 인문학 대안화폐는 가능한가? / 홍덕구

연구소 쪽지

증여로서의 학문노동, 교환으로서의 학문노동

인문학 대안화폐는 가능한가?

 

 

홍덕구(인문학협동조합)

 

몇 년 전,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모 학회에서 총무간사 직을 맡고 있었다. 당시 내가 받은 임금은 월 단위로 환산하면 10만원이 조금 못되는 금액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된 업무였던 학술대회 준비와 학회지 발송작업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동력을 고려하면 박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슬픈 것은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그나마의 임금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무료봉사에 가까운 학회간사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도 돈을 벌기 위해 간사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간사가 학회의 임원직을 맡고 있는 교수 또는 선배와의 친분관계에 의해 '자발적 타의'로 선발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선발된 뒤에는 내 시간을 쪼개어 학회 업무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보상은 아주 약간의 돈, 불분명한 성취감, 그리고 학문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의 재확인 뿐이다.

대학원생, 예비연구자들을 이러한 무급 노동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논리는 무엇인가? 나는 '학문공동체에 대한 증여와 호혜의 환상'이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는 완전히 무관한 일들, 예컨대 학회지 발송 작업이나 학술대회 명찰 제작 등의 단순작업을 하면서도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학문공동체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만드는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별 관심 없는 주제의 학회에서 잡다한 일들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학문공동체를 위한 기여가 곧 사회적 지위 획득과 경제적 보상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에 대한 기대심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2014년 현재, 그 시스템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강의자리가 점차 줄어가고 있으며, 개정된 강사법에 따라 박사학위 미소지자의 경우 교양강의조차도 맡기 힘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매년 줄어드는 대입희망인구는 대학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다. 이제 대학과 학문노동자는 서로에게 있어서 무조건적 우방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의 몇몇은 끝내 대학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대학이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한 일정 수의 학문노동자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점차 좁아지는 구멍을 어떻게든 통과하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내는 길밖에 없는가?

 ‘인문학협동조합을 비롯한 대학 외부에서의 활동들이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현 단계에서 그것들은 훌륭한 운동임이 분명하지만, 대학 수준의 지식현금환율을 이룩하려면 갈 길이 멀다. 대학이라는 거대한 배의 곳곳이 낡고 구멍나서 물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하더라도 적절히 손을 보면 아직 충분히 항해를 지속할 수 있다. 모두가 보트에 올라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배를 고치는 작업과 상륙지를 탐색하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명백하다. 대학 내에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전임교수라 하더라도 가속화되는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를 거스르기란 쉽지 않으며, 그 흐름을 잠시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다. 전임교수가 그럴진대 강사나 대학원생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대학과 학문노동자는 기본적으로 갑-을 관계일 뿐만 아니라, 대학은 학문노동자가 습득한 숙련노동(학문지식과 그 지식의 전달능력)을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으로 환전하는 유일한 창구이다. 흔히 말하는 독점상태인 것이다. 자신이 소속된 대학을 떠나 다른 대학으로 옮긴다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 현실적으로 영원한 인 학문노동자 개개인이 대학을 변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는 협동의 절실함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학문노동자 사회에서 조직된 기존 모임들이 존재한다. 전임교수들의 단체도 있고, 시간강사들의 단체도 있다. 이러한 단체들이 정치적 결사체의 성격이 강했다면, 내가 제안하는 학문노동자 사이의 협동의 형태는 보다 생활밀착적인 것이다. 직접적으로 협동조합이라는 법인체 형식을 띄지 않더라도 공동소유, 공동운영, 공동소비, 상호부조라는 협동조합운동의 이상을 대학에 소속된 학문노동자 사회에 접목시킬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처음의 학회 얘기로 돌아가 보면, 2014년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수천 개의 학회들 중에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최소한 최저임금 5,210원이라도)를 지불하면서 운영되는 학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악의적으로 대학원생들, 예비연구자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문제는 학회나 학과, 대학을 위한 학문노동이 곧 증여라고 우리 모두가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마르셀 모스에 의하면, 증여는 즉각적인 보답을 바라지 않는 교환행위가 공동체 전체의 을 증대시킨다고 구성원 전체가 믿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이 더 이상 학문노동자들의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는 지금, 증여와 호혜의 환상도 깨어지려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당하게 교환으로서의 학문노동을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과 무엇을 교환할 것인가? 현재 학계와 학문공동체의 구조상 제공되는 모든 노동에 대해 금전으로 보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학회와 학술지들이 한국연구재단의 지원금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단이 경비로 인정하지 않는 노동, 예컨대 학술대회장 세팅이나 학회지 발송 작업 등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이루어지더라도 개인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개선해나가야 할 현실이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지금의 학문사회는 정부 지원금이라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간신히 명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감안되지 않는노동들을 현실화폐로 교환하는 것이 어렵다면, 대안화폐라는 형태로 보상할 수는 없을까? 학문사회 전체에서 통용되는 대안화폐를 만드는 것이다. 그 대안화폐는 학문사회를 위한 노동을 통해 획득하고, 학문사회와 관련된 일에 소비할 수 있는 형태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A학회의 학술대회를 준비하거나 B교수의 리서치를 도움으로써 얻은 대안화폐를 C학회의 학술대회 참가비나 D학술지의 논문게재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학문사회 내부의 인접학문분야에서 출발해야겠지만, 언젠가 이 운동이 지식사회 전체로 확산된다면 도서나 생필품 구입, 문화행사 관람 등의 다양한 사례에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대안화폐 운동에는 화폐의 형태(실물 or 가상) 결정, 발행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의 문제, 화폐의 유효기간 설정, 화폐유통의 관리 등 기술적인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난점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 스스로가 협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느냐의 문제다. 제도는 항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문학협동조합에 참여하면서 격려와 냉소라는, 극과 극으로 나뉜 반응들을 지속적으로 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협동조합이 지금까지 나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지금-여기에 필요한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2014년의 한국사회에서 학문노동자로 살아가기란 지난한 일이다. 인문학 대안화폐는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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