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꼼과 어소시에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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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안의 불만] 영화가 없는 아망토의 영화

mazzang 쪽지  

영화가 없는 아망토의 영화

 

 

엄준석(래인커머)

 

 

 

아망토 까페 입구


 연극과 달리 영화는 ‘노동의 영역’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연극이 실연(實演)으로써 노동의 과정 속으로 관객을 동참시키는 것이라면, 영화는 제작과정이라는 노동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영화적 현실로 관객을 유인하는”[각주:1] 것이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배우의 몸짓과 눈빛, 말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침묵에 이르기까지. 연극을 볼 때 우리는 결말-텍스트의 완결에 이르는 노동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노동량과 질까지 말이다. 극이 끝나고 난 뒤 이는 더 분명해진다. 배우와 스텝이 인사를 한다. 극에 빠져있던 우리의 감각은 그 순간 살며시 깨어나게 되고 이것이 누군가의 구체적인 노력과 의지로 만들어진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반면 영화는, 1960년대 유럽에서 부흥했던 누벨바그식의 자의식적 영화가 아니라면, 노동의 영역을 은폐한다. 아니, 그렇게 은폐하는 것을 매체적 특질로 갖고 있다. 재현된 이미지는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렌즈, 필름, 영사 등과 같이 제2의, 제3의 공간을 거치면서 가공되고 변형된다. 결과적으로, 연극에서와 같이, 극에 매몰된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차원이 없기에 ‘강한 동일시’[각주:2]가 작동되는 것이다.
 노동의 영역을 은폐한 영화는 매혹적이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관객은 새로운 세계 또는 꿈꾸었던 세계에 무리 없이 들어설 수 있게 되고, 그 끝이 아쉬워진다. 이음새 없이 만들어진 옷 또는 기계가 주는 감동처럼, 그 속에 어떤 노동력이 투여됐든, 매끄럽게 마름질된 표면 위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이 꿈결 같은 놀이가 이전 같지 않아진다. 배우와 스텝이 화면에서 툭하고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너는 영화를 보고 있어”라고 하는 순간이 종종 등장하는 것이다. 다양한 예를 들 수 있겠지만 가깝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줌렌즈’가 등장할 때를 들 수 있다. <극장전>(2006)에서였던가. 영화의 첫 번째 장면부터 줌인과 아웃은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내가 극장에서 <극장전>이란 영화를 보고 있구나”하게끔 한다. 즉 영화에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순간이 나오고 그때마다 화면 너머, 카메라 뒤의 어떤 인물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인식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영화가 객관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영화는 강력한 동일시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영화의 신비주의가 깨지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고 외부적 조건, 그러니까 텍스트 외부에 있는 영화제작 방식, 기기의 대중화에 의해 영화는 더 이상 숭고의 대상이 아니게 되어있다. 2010년 칸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한 바 있는, 우리사회의 가장 우수한 영화 <시>(2010)에서도 관객을 응시하는 소녀의 노동이 마지막 장면에서 목격됐다. 2014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포함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노예12년>(2013)과 같은 근작에서도 관객을 응시하는, 과거 불합리한 노동과 착취의 역사를 영화적 노동으로 알리는 영화도 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 노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데 있다. 1965년 소니SONY가 만든 비디오카메라 포타백에서부터 현재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영화적 노동과 더 이상 거리를 두지 않는 상황에 있고 이미 언제 어디서 영화를 만드는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야말로 이제 가장 만만한 매체이지 않을까. 여기 초등학생이 만든 <자작 FPS!!>(2011년 예상)에서 우리는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읽을 수 있다. 아파트 계단에서 FPS(First-person shooter) 즉 ‘일인칭 슈팅 케임’을 영상(화)한 이들의 작품은 어린 나이에도 영화적 감각을 체화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현장의 긴박함을 보여주는 핸드헬드Hand held 촬영은 물론이고, 조르주 멜리어스의 <달나라 여행>에서 마술로 사람을 사라지게 했던 것처럼 시체를 사라지게 하는 편집, 그리고 총격 직후 “헤드샷‘ 사운드가 나온 것처럼 적재적소에 활용된 사운드까지. 이제 우리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 영화적 주체로 승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발화할 수 있는 ’친숙한‘ 창구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노동을 수행할 것인가, 우리 또한 텍스트를 만드는 또는 예술을 만드는 노동에 참여할 수 있다 한다면 그 경험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가 숙제로 남겨질 것이다. 흥미롭지만 폭력적인 서사 및 이미지 재현에 자기의 노동력을 투여하고 있는 <자작 FPS!!> 속 노동이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지 않을까. 비폭력 또는 반폭력적인 텍스트를 생산하는데 노동력을 함께 투여했던 경험을 했었더라면 그들은 더 지속적이고 확장적인 의미를 갖는 텍스트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다양한 사례를 언급할 수 있겠지만 일본 오사카에 있는 대안공동체마을 ‘아망토’에서 영화적 노동을 생산적인 형태로 활용하는 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견 노동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혹독함을 은폐하고 회수되지 않는 잉여가치를 감춘 자본주의 체제의 그 신비주의와 영화의 신비주의는 닮아 보인다. 우리는 화폐를 지불하고 영화를 볼 때, 모순 없이 돌아가는 신비로운 그 세계에 제 몸을 맡기는 것에 다름없는 행위를 하게 된다. 아망토는, 앞서 언급했던 영화처럼, 그런 신비를 파쇄하는 노동을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적 노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영화 또는 자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텍스트 또는 경험을 만든다. 아망토는 어느 샌가 우리가 영화적 노동을 수행하고 있고, 영화적 삶이 마을에 펼쳐져 있음을 안다. “연극에서는 막 뒤에 그림도 있고, 건축도 있고, 시도 있고, 테이블도 있고, 패션을 갖추고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영화가 되었지요(과거에는 연극이었지만). 그러니까 그 마을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영화라는 것입니다.”[각주:3] 이는 즉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떤 의미를 지녔든, 다름 아닌 ‘우리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아망토 준 상과 아프꼼의 권명아 선생님 인터뷰 모습

 

 

 다른 영화를 찾아갈 것도 없이, 다른 노동을 수행할 필요도 없이 지금 있는 삶을 충실히 살고 그를 ‘영화적’으로 잘 모았을 때 ‘충분히’ 영화가 될 수 있음을 안다. “모두 영화를 만들지는 않아도 다들 조금씩 영화에서 하나의 참여를 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찍었던 영화들이 상영이 되었습니다.” 영화가 더 이상 신비롭거나 무섭지 않다는 것. 이는 곧 자본의 세계가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자, 그 외부의 삶을 이미 경험해본 사람들이 편안하게 전개할 수 있는 노동이자 실험이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외려 영화를 갖고 노는 그들의 모습이 흥미롭게 보이며, 딱히 세속적이지도 않아 보이는데서 어떤 긍정적인 지점도 읽을 수 있게 된다. “아마추어로 노래하는 친구가 영화로 상영되면서, 기획사에서 연락이 와서 프로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영화는 서로의 생존이 되는 좋은 기반이 됩니다. 세계적인 거나, 프로는 꼭 못되더라도, 지역에서의 스타가 될 수는 있고, 또 마음에 남는 경험을 만들 수 있는 거니까요. 영화를 촬영하면 유명한 로케이션이 되어서 사람들이 보러 오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를 알리는 거죠. 그래서 그 영화를 만듦으로써 각자가 하는 사업들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의미입니다.”
 아망토는 우리의 노동이 은폐된 것과 함께 우리‘들’의 노동력 또한 은폐된 채 영화가 만들어지고 또는 이 세계가 만들어진 것임을 안다. 즉 각각의 노동이 모종의 ‘관계’를 맺어, 그것이 무엇이었든, 이 결과를 만들어냈음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금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영화를 만든다는 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인데, 각자의 비지니스가 바쁘더라도 함께 하는 일에 힘을 합치게 되는 경험을 쌓게 됩니다. 촬영하는 작품이나 페스티발은 끝나면 종료지만, 그걸 만들기 위한 노력은 경험으로써 남기 때문에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완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영화를 완성하기 전까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아마도 아망토는 영화의 존재론적 특질을 따로 공부하는 그런 이론적 경로는 밟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설명하는 그의 말 속에서 영화 언어 또는 개념은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일상적인 말을 통해 영화를 설명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속에서 아망토가 영화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그를 삶과 관계 속에 이렇게 녹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궁극적인 앎 또는 깨달음은 이런 ‘영화 없음’을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아망토 까페 안, 카운터에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에게 영화는 부차적인 것이거나 없음의 무엇이 된 듯하며, 더 나은 관계, 삶의 영화를 전유-실험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나의 영화를 만듦으로써 돈 주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만드는 과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 “공동체를 만들 때, 다양한 프로젝트가 있을 수 있지만, 영화가 가장 이해하기 쉬워요. 영화는 끝나도 영화가 남기 때문에, 작업은 끝나도 다시 보면서 그 기억을 다시 되새길 수 있기도 해요.” ‘영화는 끝나도 영화가 남’는다. 즉, 노동은 끝나도 노동의 흔적은 남는다. 아니, 그 흔적을 남겨 ‘다시 보면서 그 기억을 다시 되새길 수 있’게 그렇게 읽고 공유해야 한다. 아망토는 노동의 양과 질이 각기 다른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것임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조금씩 영화에서 하나의 참여를 할 수 있는 것’). 그렇기에 매번 누가했든지, 어디서 했든지 그를 수평적으로 놓고 오래 존중하려 한다. 삶과 관계에 대한 성숙한 문제의식이 영화를 없애는 즉 영화를 압도하고 있다. 공동체에의 경험과 실험 그리고 지속은 그 견고해 보이던 세계를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이 힘이야말로 우리가 이 신비로운 세계를 타파할 수 있는 새로운 신비-비밀로 인식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 본고가 참고한 아망토와의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엄준석: 엄준석입니다. 같은 ‘준’입니다. 이전의 인터뷰에서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것에 대해서 중요시한다는 것을 보았었어요. 그것이 공통의 감수성을 만드는 의미를 갖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과정에 대한 것들을 알고 싶습니다.

 

아망토, 준 상: 영화의 첫 번째 중요한 점은, 상호참가입니다. 1990년대 처음 시작할 때는 연극이 공동체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이건 유럽의 경우인 것 같습니다. 연극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유럽의 방식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극에서는 막 뒤에 그림도 있고, 건축도 있고, 시도 있고, 테이블 입고, 패션을 갖추고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영화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그 마을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영화라는 것입니다. 모두 영화를 만들지는 않아도 다들 조금씩 영화에서 하나의 참여를 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찍었던 영화들이 상영이 되었습니다. 아마추어로 노래하는 친구가 영화로 상영되면서, 기획사에서 연락이 와서 프로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영화는 서로의 생존이 되는 좋은 기반이 됩니다. 세계적인 거나, 프로는 꼭 못되더라도, 지역에서의 스타가 될 수는 있고, 또 마음에 남는 경험을 만들 수 있는 거니까요. 영화를 촬영하면 유명한 로케이션이 되어서 사람들이 보러 오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를 알리는 거죠. 그래서 그 영화를 만듦으로써 각자가 하는 사업들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교육의 의미가 있습니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인데, 각자의 비지니스가 바쁘더라도 함께 하는 일에 힘을 합치게 되는 경험을 쌓게 됩니다. 촬영하는 작품이나 페스티발은 끝나면 종료지만, 그걸 만들기 위한 노력은 경험으로써 남기 때문에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완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영화를 완성하기 전까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나카자키쵸는 서일본에서 가장 영화촬영에 협력을 잘하기로 유명합니다. 방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도와주시는 것처럼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데 우리가 도와줘야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관광객이 오면 그 사람들이 묵는 곳을 제공해주거나 하는 것이 또 비지니스가 되는 것이지요. 보통 일반 사람들이 사업을 해도 홈페이지를 만든다든가 돈을 내고 만들어야하는데, 하지만 홈페이지 만드는 건 돈은 나가지만 인간관계는 안 만들어져요. 그래서 그런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영화를 만듦으로써 돈 주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만드는 과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보통은 여자가 비지니스를 하면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여기는 또 아이를 봐줄 사람이 있고 여성이 비지니스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아이를 돈 주고 맡기지 않고 옆 사람과 공동체를 만들면 그 안에서 해결이 되고 비용도 줄일 수 있어요. 그래서 공동체를 만들 때, 다양한 프로젝트가 있을 수 있지만, 영화가 가장 이해하기 쉬워요. 영화는 끝나도 영화가 남기 때문에, 작업은 끝나도 다시 보면서 그 기억을 다시 되새길 수 있기도 해요.

 

 

 

 

  1. 박훈하, 「새로운 인터페이스, ‘광안대로’에서 바라보기」, 오늘의 문예비평 48호, 2003년, 101~2. [본문으로]
  2. 박훈하, 위의 글. [본문으로]
  3. 이하 아망토의 진술은 아망토의 대표 준상과 아프꼼과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이다. [본문으로]

http://www.aff-com.net/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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