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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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서정시가 무너진 시대의 번역가

문자 수선공



 

임학수가 전선을 다녀오자마자 《현대 영시선》을 펴낸 것은 1939년 5월...... 전선으로 내몰린 시인, 서정시가 무너진 시대의 번역가는 뱃머리를 돌려야 했습니다.

따가운 눈총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시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며 엘리엇 따위를 읊을 수 있는 마당도 못 되었습니다. 중일전쟁이 광란으로 치닫고 머잖아 진주만이 불길에 휩싸일 터입니다. 이른바 국가총동원 체제의 막이 올랐습니다.

이듬해인 1940년과 1941년에 임학수는 시를 버리고 산문의 세계에 들어섰습니다.

​임학수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영문학의 가장 오랜 고전과 19세기 영문학의 고전입니다. 흥미롭게도 전쟁과 혁명의 이야기입니다. 글쎄요, 꼭 시대 분위기 탓은 아닐 겁니다.

임학수가 먼저 선택한 것은 늘 세계문학의 첫자리를 도맡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입니다. 머리말에 의하면 임학수는 학예사를 이끌고 있는 임화의 권유에 따라 꼬박 1년 동안 매달려 전 2권의 《일리아드》를 번역해 냈습니다. 임화는 정현웅에게 장정을 맡기면서 잔뜩 공을 들여 출판했고요. (색깔이 굉장히 예쁜데 책 상태가 좋지 않은 데에다가 찍사까지 부실해서 그만 이 모양...... 앞뒤 책날개를 안쪽으로 접어 넣은 독특한 형태입니다.)

가만 보면 최재서보다 임화가 임학수를 더 아꼈다는 느낌도 듭니다. 임학수를 전쟁터로 내보낸 건 최재서지만 《현대 영시선》을 내준 것도, 《일리아드》를 권한 것도 임화니 말입니다. 1940년 무렵에 임화가 고전의 뿌리이자 이야기 문학의 원형질을 권했다는 것은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죠. 무엇보다 임화는 근대소설의 운명을 들여다보면서 한국 근대문학사를 쓰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어쨌거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가 임학수에 의해 처음 번역된 것은 아닙니다. 1925년에 오천석이 펴낸 《세계문학 걸작집》에 요약 소개된 적이 있고, 단행본으로는 이미 1923년에 노자영이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탁월한 출판 감각의 소유자 노자영은 연애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일리아드 이야기》라는 얇은 책으로 만들어 버렸더랬죠.

​오천석이나 노자영과 마찬가지로 임학수 역시 《일리아드》를 운문으로 번역할 역량은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거야 지금도 어렵죠. 그 대신 임학수는 상하권 총 636면에 달하는 분량으로 24장 체재를 갖추어 번역해 냈습니다.

또 한 권의 중요한 번역은 1941년에 조선일보사 계열사인 조광사에서 나온 ​《이도 애화》입니다. 19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된 겁니다. 핏빛 대혁명의 시대에 런던과 파리를 오가면서 혁명, 역사, 민중, 사랑을 이야기한 《두 도시 이야기》 말입니다.

디킨스의 작품은 1926년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성탄의 환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종교적 색채가 강해서 디킨스 소설의 진수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디킨스가 한국인의 가슴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아마 임학수의 번역이 처음일 듯합니다.

임학수의 《이도 애화》​는 전에도 소개한 바 있듯이 조광사의 ‘세계 명작 장편소설 전집’ 제2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제1권은 백석이 번역한 토머스 하디의 《테스》였고요. 조광사의 전집은 둘 다 19세기 영국소설의 걸작을 완역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아쉽게도 단 두 권으로 중단되고 만 것은 곧이어 불어닥칠 태평양전쟁의 전조였을 테지요. (http://bookgram.pe.kr/120168658412 참조)

 

1940년의 임학수......

 

​전쟁과 광기의 시대에 뱃머리를 트로이​로 잡고 고대 서사시의 세계로 건너갔다가 다시 혁명기의 저잣거리로 돌아온 시인 임학수가 《일리아드》와 《이도 애화》를 통해 읽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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