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1051

프린트하기

[16-3] 중일전쟁과 영국의 청년 시인들

문자 수선공



 

중일전쟁이 터진 건 1937년 7월 7일 이른바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 난징 대학살을 거쳐 전쟁 이태째로 접어든 1939년 초봄은 말 그대로 광기의 한복판이었을 터입니다. 거기서 다시 이태쯤 더 지나면 진주만 습격을 기화로 태평양전쟁으로 불길이 걷잡을 수 없게 타오르게 되죠. 난징에서는 6주 동안 40만 명이 학살당했고, 나치는 유럽의 유대인 인구를 1100만명에서 500만 명으로 줄였습니다.

임학수 일행이 황군을 위문한답시고 북지나(북중국) 전선으로 떠난 때는 바로 그런 광기가 이글거리는 와중이었습니다. 대일본제국에서 보자면 성전이 개막되었고 중국 입장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화를 잠시 덮어 두고라도 고통스러운 항전에 돌입해야 했습니다. 사실상 지구의 절반을 놓고 다투는 싸움이다 보니 양쪽 다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대일본제국의 식민지에서는 사정이 좀 묘합니다. 지나사변이라 부르든 중일전쟁이라 부르든 어쨌거나 명칭상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라 전쟁 당사자로서 틈바구니에서 쩔쩔매야 했고 2600년 역사의 황국 신민으로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죠. (1940년은 황기 26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얼마나 난리법석을 피웠을지 짐작되죠.)

이를테면 왕년의 청일전쟁(1894~1895)도 분명 남의 나라 전쟁이었지만 쑥대밭이 되고 불바다가 된 건 조선이었습니다. 인천 앞바다에서 대포알이 오락가락하고 평양 시내가 전장 한복판이었으니까요. 따지고 보자면 1890년생 최남선과 1892년생 이광수의 유년 시절이 바로 청일전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천명의 나이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참화를 목도해야 하는 최남선과 이광수 또래에게 중일전쟁은 말 그대로 생지옥 같았을 겁니다. (하기야 환갑에 겪게 될 한국전쟁을 생각하면 별거 아닐지도...... 이 또래의 인생이란 청일전쟁에서 시작해서 1차 대전, 중일전쟁, 2차 대전 다 겪고 한국전쟁으로 결딴단 셈이죠.)

​그런 와중에 최남선과 이광수가 어떤 고뇌에 휩싸였는지는 쉽사리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스무 살 아래로 한일병합 직후에 태어난 임학수 같은 젊은 시인이라면 남의 나라 전쟁이었을지 모르지만요.

다시 임학수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전남 순천 태생의 임학수...... 경성제일고보를 나와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마친 엘리트 시인, 입학할 때 시인으로 등단했고, 졸업 무렵에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으며, 당대 최고의 평​론가 최재서를 학교 선배 겸 문단 선배로 둔 임학수 말입니다.

얼결에 <황군위문 조선문단 사절>로 뽑혀 전선에 나갔다손 치더라도...... 등 떠밀려 다녀온 길이라 쳐도...... 진심 어린 전쟁 미화 시집을 낸 건 아니라 해도...... 훗날 두고두고 욕을 먹을 짓을 벌이고 만 건 틀림없습니다. 박영희의 《전선 기행》 옆에 임학수의  《전선 시집》이 나란히 놓이고, 니시무라 신타로의  《보리와 병정》과 더불어 나발을 분 것이 분명하니까요.

​임학수의 한 걸음이 치명적인 패착이 된 것은 그 뒤에 보인 행보 때문이 아닙니다. 임학수는 전선 위문 경험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친일의 길에 들어섰지만 악질은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까지 쌓아 온 젊은 시인의 모습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이듬해, 중일전쟁이 터질 무렵인 1937년 여름에 임학수는 첫 시집 《석류​》를 냈고, 1938년 가을에는 《팔도 풍물 시집》을 펴냈습니다. 두 번째 시집은 풍물시라는 독특한 색깔을 드러냈습니다. 전선으로 떠나기 직전인 1939년 1월에는 세 번째 시집 《후조》를 냈고요. 후조는 철새를 뜻하는데 특이하게 산문시, 서정시, 기행시로 편성된 시집입니다.

​임학수가 주목을 받은 것이 꼭 화려한 학벌 때문만은 아닙니다. 1년에 한 권씩 시집을 내놓으면서 풍물시라든가 산문시를 실험하는 시인은 흔치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황군위문 조선문단 사절>에 감히 김동인, 박영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도 풍물시나 기행시를 눈여겨본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임학수의 전선행과 《전선 시집》은 앞선 세 권의 시집이 거둔 성취까지 일거에 날려 버렸습니다. 임학수의 시를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 한들 《전선 시집​》이 남긴 그늘이 너무 짙기 때문입니다. 설사 《전선 시집​》이 노골적인 친일 매국의 노래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중일전쟁 전선에 다녀오자마자 임학수는 번역시집 《현대 영시선​》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임화의 학예사에서 문고본 <조선문고>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온 게 1939년 5월의 일이니까 아마 번역 원고를 진작 임화에게 넘겨 두고 전선에 다녀왔을 겁니다.

임학수의《현대 영시선​》은 영국 시인 24명의 시 47편을 번역했으니 규모가 방대하지는 않고 별로 체계적이지도 않습니다. 임학수는 1926년부터 머리말을 쓴 1939년 2월까지 읽어 온 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엘리엇 이후의 모더니즘 시를 번역했습니다.

1926년이라면 임학수가 순천에서 상경해서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한 열다섯 살 때입니다. 짧은 다이쇼 시대가 끝나고 전범 쇼와 천황 시대가 개막된 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1939년 2월이라면 군장 메고 지나 전선으로 떠나기 직전이죠. 그러니까 《현대 영시선​》은 임학수의 청춘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번역시집인 셈입니다.

쇼와 시대 임학수의 청춘을 불사른 번역시집 《현대 영시선​》​...... 영문학 전공자인 임학수가 동시대의 모더니즘 영시를 번역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지만 막상 번역 수준이 빼어난 것은 아닙니다. 또 이런 정도의 시집이라면 일본에서 얼마든지 넘쳐났습니다.

다만 임학수의 《현대 영시선​》은 식민지 시기에 동시대의 영시 또는 서양시를 번역한 마지막 앤솔러지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따지고 보자면 ​식민지 시기에 번역된 서양시 앤솔러지는 손꼽을 정도로 희귀합니다. 아니, 손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딸랑 4권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는 1921년에 나온 한국 최초의 시집이자 번역시집인 김억의 《오뇌의 무도》, 두 번째는 1933년에 이하윤이 펴낸 《실향의 화원》, 세 번째는 1938년에 최재서가 엮은 《해외 서정시집》...... 맨 마지막이 임학수의 《현대 영시선​》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더 이상 서양시집이 나오기 어려워졌습니다. 전쟁판이었으니까​요. 다들 미쳐 돌아갔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임학수는 손바닥만 한 문고본 앤솔러지가 식민지 시기의 마지막 서양시집이 되리라는 걸 짐작도 못 했을 ​겁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79 [18-5] 안중근의 재구성 (5)─되돌아오는 안중근
2015.12.02. 928
78 [18-4] 안중근의 재구성 (4)─안중근의 번뇌
2015.12.02. 533
77 [18-3] 안중근의 재구성 (3)─번역된 안중근
2015.12.02. 510
76 [18-2] 안중근의 재구성 (2)─안중근의 1931년
2015.12.01. 612
75 [18-1] 안중근의 재구성 (1)─합이빈의 해주 청년 토…
2015.12.01. 599
74 [17-2] 엘리엇의 <황무지>를 번역한 영문학자 이인수
2015.06.26. 1133
73 [17-1] 엘리엇의 <황무지>를 번역한 영문학자 이인수
2015.06.26. 927
72 세계 최초의 어린이날과 소파 방정환
2015.05.01. 1175
71 [16-7] 사회주의 체제의 영문학 번역가
2015.04.14. 964
70 [16-6] 번역가로서 임학수와 해외문학파의 허실
2015.04.14. 895
69 [16-5] 해방기의 부역 시인
2015.04.13. 761
68 [16-4] 서정시가 무너진 시대의 번역가
2015.04.10. 735
[16-3] 중일전쟁과 영국의 청년 시인들
2015.04.09. 1052
66 [16-2] 엘리트 시인 임학수의 패착
2015.04.08. 893
65 [16-1] 전선으로 떠난 안경잡이 시인
2015.04.07. 1091


1 /2 / 3 / 4 / 5 /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