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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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전선으로 떠난 안경잡이 시인

문자 수선공



 

1939년 4월 15일 토요일 오후 게이조 역(경성역) 플랫폼에서 황군 군복을 입은 어정쩡한 중년 세 사람이 환송을 받으며 열차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비실비실한 40세 아저씨, 39세 아저씨, 그나마 좀 나아 보이는 28세 안경잡이 아저씨 세 사람입니다.

아무리 봐도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멋진 사나이>라나 하는 요상한 프로그램 비슷한 광경 아닌가 싶군요. 보통 입영 열차는 남쪽으로 달리지만 이날 열차는 북쪽으로 내달렸다는 게 좀 다르다면 다를까......

요란한 사전 예능 절차도 있었습니다. 사흘 전에 세 사람 불러 놓고 기념 행사와 술자리도 가졌거든요. 신성한 행사이니 만큼 출발 한 시간 전에는 진구(신궁)에도 참배했습니다. 아무렴...... 일단 군복 입으면 생목숨 오락가락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본래 멀쩡한 청년도 군복만 입으면 어리버리 보이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봅니다. 맨 오른쪽 사진의 주인공처럼 ​원래 준수한 외모의 청년도 군복 입혀 놓으면 저렇게 되고...... 군대 갔다 오고 나면 가운데 사진처럼 복학생 티가......

사정은 이렇습니다.

1939년 4월 12일 오후 4시 30분 게이조(경성) 부민관(관립극장, 훗날 국회의사당,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별관, 지금의 서울시의회 의사당)​에서 3인을 위한 일종의 출정식이랄까 기념식이랄까 하는 것이 열렸습니다. 저녁은 일급 요릿집 명월관에서 군 참모들과 함께했습니다. 4월 15일 오후 3시 30분에 세 사람은 ​남산에 올라 조센진구(조선신궁)에 참배한 뒤 4시 25분 게이조 역을 떠나는 북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16일 일요일 오후 1시에 무사히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소설가 김동인(40세), ​비평가 박영희(39세), 시인 임학수(28세)...... 이른바 <황군위문작가단>에서 뽑힌 명색 <황군위문 조선문단 사절> 3인입니다. 딸랑 셋이어도 속칭 <펜 부대>로 불렸습니다.

뭐,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고작 한 달 전인 3월 ​14일에 <황군위문작가단>이라는 게 급조되었거든요. 임화, 최재서, 이태준이 앞장서서 내로라하는 문인과 출판사 대표 50~60명이 모였습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간신히 풀려나 친일 행보를 막 내딛기 시작한 이광수가 사회를 보고 박영희가 의장으로 뽑혔습니다. 내친김에 바로 그 자리에서 <황군위문 조선문단 사절> 3인도 함께 뽑았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모범을 보이겠답시고 39세 의장님이 몸소 나섰군요. 원래 이런 건 대장님은 잘 안 시키는 법이거늘...... 실은 3월 초에 최재서가 처음 말을 꺼내서 당국과 교섭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소설가 김동인과 시인 임학수만 정해졌고 비평가로 누가 나설지는 나중으로 미루었더랬습니다. 그런데 두 주일 사이에 의장님께서 몸소......

따지자면 1938년 말​부터 조심스레 추진된 전선 위문은 애초에 석 달 예정이었지만 경비가 제대로 모금되지 않아 한 달 일정으로 줄었습니다.

하여간 명색은 이렇습니다.

조선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김​동인, 비평가 박영희, 그리고 시인 임학수..... 으음? 임학수? 김동인이나 박영희야 이름 석 자 대면 다 알 만한 인사들인데...... 28세 시인 ​임학수라...... 어쩌다 두 중년 아저씨 사이에 끼어서 조선 문단의 대표 시인이 된 임학수는 대체 누꼬?

1911년 7월 전남 순천 태생의 임학수는 1926년 게이조(경성)로 상경해서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1931년 4월 경성제대 예과 입학, 1936년 1월 결혼, 3월 경성제대 영문학과 제8회 졸업...... 무조건 당대 최고의 청년 엘리트죠. 군복 입던 그해에는 새로 개교하는 3년제 성신가정여학교(지금의 성신여대) 교무주임...... 아니, 젤 중요한 교무주임이 개교하자마자 군복 입고 어디 중국을 가나 그래......?

​뭔가 예능 같은 상황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막상 열차 타고 나서​는 언론에서도 별로 관심을 안 갖고 싹 잊다시피 했습니다. 이건 천황 폐하께서 무심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전쟁통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떠나기 사흘 전에 명월관에서 군 참모들도 미리 귀뜸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도착하면 다들 우왕좌왕해서 대접이 소홀할지 모르니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아 주오...... 우린 진짜 너네들 신경 안 쓸 거다, 알아서 해라, 뭐 이딴 귀뜸......

진짜 그랬거든요. ​

일단 3인의 문단 대표는 4월 16일 일요일 오후 1시에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터졌습니다. 어차피 일요일이고 하니 하룻밤 쉬고 곧장 전선으로, 총알 퍼붓는 전쟁터로 가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근데 위문품이 안 왔습니다. 명색이 위문단인데 위문품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위문품 오는 데 1주일 걸렸습니다. 군대서 하는 일이 그렇죠, 뭐​. 무슨 위문품이길래 1주일이나 걸리냐고요? 군인한테 생명 같은 담배 1000갑, 기야라메루 1000갑, 초코레토 1000갑이요. 기야라메루가 뭔가 했더니 캐러멜이더군요. 초코레토는 초콜렛. 각각 1000상자씩이 아니라 각각 1000갑이요. 어쨌거나 다 합해 봤댔자 세 상자...... 이게 세관에 걸렸다가 중간에 잃어버리기도 하고 생난리가 난 거죠.

그 정도면 세 명이 들고 가도 되겠구먼...... 그나저나 명색이 식민지 문단 대표가 황군 위문하러 가는 길에 고작 요거? 조선의 작가, 출판사 사장님들 60여 명이 모은 게 요게 다?? 무슨 초딩 위문품도 아니고, 정성하고는...... 쯧쯧......

​하기야 애초에 전선 위문 간다 그럴 때부터 뭐 그리 정성 바칠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봅니다. 일단 면피는 해야 되니까 나섰겠죠. 총독부에서조차 시큰둥했습니다. 그럴 정성으로 친일시나 좀 쓰든가 친일연극이나 좀 만들지 뭘 귀찮게시리 전쟁터에 가냐는 거죠. 중년 아저씨들 나서면 귀찮을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비용도 거의 문인들이랑 출판사 대표가 낸 거고 위문품도 그렇습니다. 신문에서도 조그많게 단신으로만 처리해 줬고요.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가 아니고 진짜 죽을 둥 살 둥 하는 전쟁터인데 걸 그룹도 아니고 누구누구 이름 짜한 분들 시찰 오고 위문 오면 먼저 쏴 죽이고 싶을 거 아닙니까?

​하여간 그래서 김동인, 박영희, 임학수 세 명의 중년은 1주일 동안 베이징에서 푹 쉬었더랬습니다. 그때 전선은 이미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는 총탄이 오락가락하지 않았더랍니다.

이런 뜻밖의 일...... 또는 예견된 사태는 돌아올 때도 똑같았습니다. 전선에 갔다가 5월 3일 수요일에 베이징에 돌아왔지만 귀국 허가가 안 떨어져서 5월 12일 금요일 오전 7시에 다시 게이조 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9일 동안 베이징에서 관광과 견학을.......

원래 5월 15일 월요일​에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그건 또 당겨져서 5월 13일 토요일 오후 2시에 게이조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3인의 중년 대표는 총 31일 일정을 29일로 줄였고, 29일 일정 중에서 기차에서 4일, 베이징에서 16일을 놀았으며, 9일 동안 전선에 위문을 다녀왔다는 말씀...... 그중에서 광활한 대륙에서 이동 시간 빼면 대략 3~4일이나 전선 구경을 한 건지, 원...... 이 정도면 거의 고위 공무원 해외 연수 수준이죠. 갈 만한 거죠. 아니, 하위직이라면 이런 높은 분들한테 붙어서 꼭 가야 되는 코스죠.

​중년으로 퉁 치자면 좀 애석한 28세 신예 시인이자 엘리트 출신 임학수...... 임학수도 문단 중진들 틈에 끼어서 그런 걸 노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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