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928

프린트하기

[18-5] 안중근의 재구성 (5)─되돌아오는 안중근

문자 수선공



 

삼중당서점의 첫 번째 책...... 식민지 시기에 느닷없이 되살아난 안중근의 목소리...... 누군지 알 수 없는 번역가가 한달음에 번역해서 시장에 떡하니 내놓은 작은 책......

삼중당서점의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번역이라는 것이 빚어낼 수 있는 우연한 명장면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냥 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하고 거벼이 넘기지 못하는 까닭은 일본에서 착안되어 한국어로 상상된 안중근의 면면이 전혀 계몽적이지 않아서입니다. 민족 영웅으로서 안중근, 애국 위인으로서 안중근이 아니라 고뇌하고 흔들리는 인간 안중근을 엿볼 수 있어서입니다. 망한 나라 대한제국의 최후를 바라보는 의로운 개인의 쓸쓸한 초상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럼 해방되고 나서 안중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해방됐다고 해서 ​엄청난 숭배 열기가 일어난다든지 국가적인 추모 사업이 거행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안된 말이지만....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아니죠. 영화 <암살>의 배후 세력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을 떠올리면 되겠네요. 살아서 해방을 맞이한 분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옥살이로 신음하다 죽어간 도산 안창호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창호 뒤에는 흥사단이라는 조직, 이광수라는 존재가 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삼일운동이라는 신화를 빛내 줄 유관순은 아직 역사적 기억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못했습니다. 요즘 말 같지도 않은 국정 교과서 문제로 시비가 붙었습니다만 유관순이 겨레의 여성으로 부각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입니다.

그나마 가장 나은 대접을 받은 것은 분명 안중근입니다.

한 번도 식민지인이었던 적이 없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심장에 총탄을 박아 넣은 안중근이 영웅이 되고 위인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안중근이 안중근인 이유는 이름없는 자객들, 암살자들, 테러리스트들의 이름을 대변한 것이 바로 안중근이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 <암살>에서 영감이 안윤옥에게 웃으면서 말하죠. ​“삼천 불, 우리 잊으면 안 돼.” 하지만 김원봉은 알고 있었죠. “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그들이 잊히지 않고 영화 속에서 살아남은 건 어쩌면 안중근 덕일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1946년에 <안중근 선생 공판기> 같은 책이 나왔습니다. 왕년의 모더니스트 박태원은 ​<조선 독립 순국 열사전>이라는 얇은 책을 펴내면서 그중에 안중근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안중근 항목의 마지막 장 제목을 바로 <합이빈 역두의 총성>으로 붙였죠. 고작 10페이지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존재를 뚜렷이 만든 것도 박태원입니다. 박태원은 1947년에 <약산과 의열단>을 펴내면서 <조선 독립 순국 열사전>을 부록처럼 뒤에 붙였습니다. 두 권 모두 재판까지 낼 정도로 잘 팔렸습니다.

​자, 그럼 저 맨 위의 책 <안중근 사기>는 대체 뭘까요?

​책 제목이 <안중근 사기>라고 되어 있고 전편과 후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진에서는 네 권입니다만 나중에 찍은 재판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두 권짜리 책입니다. 최후편이라고 되어 있는 것도 후편 그대로입니다. 재판을 정식으로 펴낸 것도 바로 삼중당서점입니다. 어쨌거나 제목 때문에 대개의 위인전 비슷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포스팅하면서 다시 찾아보니 위인전이 아니더군요.

노올~랍게도...... 희곡입니다. 김춘광이 1946년 1월과 3월에 각각 전편과 후편으로 펴낸 희곡.... 그러니까 <합이빈 역두의 총성>처럼요. 다른 점이 있다면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무대 위에 오를 수 없었지만 김춘광의 <안중근 사기>는 곧바로 무대에 올랐다는 것...... 게다가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역시 1946년에 이구영 감독이 영화로 제작해서 극장에서 개봉되었습니다.

김춘광...... 본명은 김조광입니다. 낯익은 이름은 아니지만 왕년에 우미관 변사로 활약했고, 무엇보다 <검사와 여 선생>을 쓴 극작가입니다. 그런 김춘광이 해방되자마자 제일 먼저 내놓은 책이 바로 <안중근 사기>올시다.

<안중근 사기> 전편은 망국의 시절부터 하얼빈 역의 10.26 의거까지 4막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후편은 안중근의 심문, 재판, 처형에 이르기까지 3막​으로 짜였고요. 그러니까 안중근의 일대기가 거의 완전하게 극화된 셈입니다.

김춘광의 <안중근 사기>는 대작의 희곡이고, 대작의 연극이며, 또한 대작의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안중근의 면모가 거의 완전히 문학적으로 녹아들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조금 다른 식으로...... 삐딱하게 말하자면 김춘광의 <안중근 사기>를 계기로 1931년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완전히 잊혔습니다. 번뇌하고 흔들리는 안중근, 머뭇거리고 회의하는 안중근은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죠. 그래서 민족 영웅이자 애국 위인 안중근이 비로소 역사가 된 것입니다.

​1946년 연극이나 영화 <안중근 사기>는 지금 볼 길이 없고 광고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김춘광의 원작은 최근에 <희곡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도요. 이 책이 띠지까지 둘러서 팔릴 줄은 또 몰랐네요.

​그 뒤의 이야기는 굳이 늘어놓지 않아도 알 만한 이야기일 겁니다. 안중근은 남한에서도 살아남았고 북한에서도 조금 어려웠지만 살아남았습니다.

남한에서야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위인전에서 읽는 이야기죠. 영화만 쳐도 1946년 <안중근 사기> 말고도 1959년 <고종 황제와 안중근>, 1972년 <의사 안중근>, 2004년 <도마 안중근>이 이어졌습니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도 있었고요. 북한에서는 1979년에 만들어진  영화 제목이 바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입니다. 아마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때문에 안중근을 영화화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요컨대...... 일본 원작 <안중근>이 일찍부터 잘 알려졌고, 꾸준히 관심을 받은 편입니다. 정작 한국에서는 <안중근>은 물론이려니와 <합이빈 역두의 총성>에 대해서도 너무 무관심했습니다. 지나치리만치...... 

 

합이빈역...... 1899년 쑹화장역(송화강역)으로 세워졌다가 1903년에 이름이 합이빈역(하얼빈역)으로 바뀌었습니다. 작년에 역사 안에 있던 귀빈실을 개조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설립해서 뜨거운 찬사를 받았더랬죠. 기념관 정면에는 9시 30분에 멈춰 있는 시계가 걸려 있고, 플랫폼에는 10.26 의거 현장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뭔가 좀 어설프지만 안중근 이야기를 여기서 맺겠습니다.

[안중근의 재구성] 마지막 제목을 [해방된 안중근]으로 삼으려다가 [되돌아오는 안중근]이라 붙였습니다. 사실 저는 안중근이 되돌아오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합이빈 역두의 총성>을 통해 안중근이라는 인간이 되돌아올 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학으로 말입니다. 역사나 전기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을 다룬 문학으로 안중근이 되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식민지였기 때문에 안중근은 <합이빈 역두의 총성>과 같은 식으로밖에 되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해방 후의 영웅이나 위인과는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번역이 하는 일, 출판이 하려는 일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다음글
목록 글쓰기


[18-5] 안중근의 재구성 (5)─되돌아오는 안중근
2015.12.02. 928
78 [18-4] 안중근의 재구성 (4)─안중근의 번뇌
2015.12.02. 533
77 [18-3] 안중근의 재구성 (3)─번역된 안중근
2015.12.02. 510
76 [18-2] 안중근의 재구성 (2)─안중근의 1931년
2015.12.01. 612
75 [18-1] 안중근의 재구성 (1)─합이빈의 해주 청년 토…
2015.12.01. 599
74 [17-2] 엘리엇의 <황무지>를 번역한 영문학자 이인수
2015.06.26. 1133
73 [17-1] 엘리엇의 <황무지>를 번역한 영문학자 이인수
2015.06.26. 926
72 세계 최초의 어린이날과 소파 방정환
2015.05.01. 1175
71 [16-7] 사회주의 체제의 영문학 번역가
2015.04.14. 964
70 [16-6] 번역가로서 임학수와 해외문학파의 허실
2015.04.14. 895
69 [16-5] 해방기의 부역 시인
2015.04.13. 761
68 [16-4] 서정시가 무너진 시대의 번역가
2015.04.10. 735
67 [16-3] 중일전쟁과 영국의 청년 시인들
2015.04.09. 1051
66 [16-2] 엘리트 시인 임학수의 패착
2015.04.08. 892
65 [16-1] 전선으로 떠난 안경잡이 시인
2015.04.07. 1090


1 /2 / 3 / 4 / 5 /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