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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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안중근의 재구성 (4)─안중근의 번뇌

문자 수선공



 

1931년 5월 1일에 삼중당서점에서 첫 번재 책으로 내놓은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 일본 작품의 번역이라는 사실은 책이 나오자마자 폭로된 터입니다. 그렇다고 뭐 어쩌겠어요? 그냥 그런 거지.....

희곡이라고는 했지만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일이야 일어날 리 없습니다. 어디 감히...... 그래도 합법적으로 출판된 책은 남았습니다. 불티나게 팔리지야 않았겠죠. 그래도 시내 서점에 깔렸고, 단돈 50전 주면 살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6~7천 원쯤이나 되려나요?

경찰 당국이 <합이빈 역두의 총성>을 판매 금지시킨 것은 1937년 9월 21일의 일입니다. 그때라면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입니다. 정국이 싹 얼어붙다시피 한 때죠. 그렇다 하더라도 그사이 6년 4개월 20일 동안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 서점에서 쭉 팔리고 있었다는 뜻도 됩니다. 아니면 안 팔리고 쌓여 있었거나...... 양쪽 다 기적 같은 일이죠.

​영화 <암살>에서 세 사람의 테러리스트가 태극기 앞에서 폭탄 들고 기념사진 찍던 장면 기억 나시나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기념사진을 웃으며 찍을 수 있은 분들....... 암살의 주역들은 폭탄이 터져 성공하면 처형되었고, 불발탄으로 실패하면 잡혀서 고문당했고, 그전에 발각되면 밀정에게 쫓겨다녀야 했겠죠. 예컨대 당장 이듬해인 1932년만 해도 1월에 이봉창, 4월에 윤봉길이 그렇게 맹세문을 목에 걸고 웃으며 사진을 박은 다음에 폭탄을 던졌더랬죠.

그런 와중에 한국인들이 <합이빈 역두의 총성>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요 위안이기도 했을 겁니다. 어쨌거나 삼중당서점의 스물여섯 살 창업주 서재수가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건 알아줄 일 아니겠습니까? 종로통 서점가에서 일하면서 배운 눈썰미 치고는 제법인 겁니다. 

자자, 그래도 미스터리는 미스터리입니다.

지난번에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종합 월간지 <중앙공론> 4월호에 발표된 작품이 ​한국에서 5월 1일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노밸상감이라고 작정하고 빛의 속도로 달려들어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쨌든 그렇게 실현됐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그전에 다른 지면에 한번 발표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만 그런 것 같지는 않더군요. 당장 서성보라는 사람이 폭로한 것처럼 원작자와 원작을 대뜸 짚어 낸 한국인이 있으니까요. 서성보 말고도 또 있었습니다.

삼중당서점에서 <합이​빈 역두의 총성>을 출판하기도 전에 일본의 <중앙공론> 4월호를 보면서 평론 <일본문학의 신야(新野)>를 발표한 김성근 같은 사람...... 1931년 4월 12일과 14일 <동아일보>에 실린 글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일본 원작 <안중근>을 길게 언급해 두었더군요.

김성근은 일본 문단에서 식민지 문학이라는 게 ​일어나고 있다면서 3편의 작품을 꼽았는데 그중 하나가 <안중근>입니다. 그런데 썩 맘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다음 다니 지요지 씨의 <안중근>은 말할 것도 없이 1909년의 역사적 장면에 제재한 장편 희곡으로써 작자의 목표한 주제는 개인성과 집단적 행동 관념과의 사이의 피할 수 없는 함정, 부조화객관적인 환경적 압박과 개인주의와의 파탄을 주장하려는 데 있었다.

 

(...중략...)

그러나 일언으로써 이 작품이 우리의 요구하는 작품,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작품인 것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 있는 작가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의 취재에 있어서 사건의 현대적 시각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앙양, 여과를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물론 이것은 이 작품을 일관한 전통 민족주의적 분위기를 문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작자에게 착상된 어떤 말초적 테마를 살리기 위하여 기존한 사적 사실을 이용한다는 것은 진실한 작가의 타기할 ‘악덕’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이런이런..... 가장 길게 언급하면서도 혹평을 내렸습니다. 뭐가 못마땅했던 걸까요? 역사적 사건을 극화했다는 것? 현대적 시각으로 윤색됐다는 것? 말초적 테마로 떨어졌다는 것? 하여간 양심 운운하고 악덕 운운했으나 살짝 묘한 느낌을 줍니다.

​가만가만...... 좀 이상하지 않나요? 특히 앞 부분에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이요. 안중근 이야기 치고는 살짝 어색한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다니 지요지 원작 <안중근>은 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 민족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14개의 장으로 구성된 <안중근>은 뛰어나고 용감한 애국 지사 안중근의 의거가 아니라 인간 안중근..... 머뭇거리고 경계하고 냉소하고 회의하는 안중근​의 면모를 그렸습니다. 치밀하고 완벽하고 장쾌하고 용맹한 안중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체로 잘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희곡이기는 하지만 안중근 주변에 유여옥이라는 가공의 여성을 끼워 넣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결연히 여섯 발의 총탄을 발사하고  까레야 우라(Корея ура)!”를 외치는 장군의 모습도 안 나옵니다.

글쎄요...... 일본인의 작품이라서 그럴까요? 마치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을 때 충격 비슷한데요......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장군의 풍모가 아니라 초장부터 계집종을 품는 이순신을 대할 때의 당혹감 같은 것......

​<합이빈 역두의 총성>에서 안중근은 거사에 머뭇거리고 동지를 멀리하기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온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진 마당이고 곳곳에 밀정이 드나드는 마당에 경솔하게 입을 열 일은 아니지만 실제로 안중근의 심경도 복잡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권총을 움켜쥐는 순간마저 결의와 비장함보다 어설프고 초조한 동요가 앞서거든요.

최근에 <안중근 평전>을 쓴 서울대 황재문 교수도 다니 지로의 희곡 <안중근>이 위인이자 영웅으로서 안중근을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면모와 고뇌에 집중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황재문 교수는 <안중근>의 성격을 <주신구라>에 빗댔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한국과 일본, 안중근와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역사적 문제를 걷어내고 내면을 들여다본 아주 희귀한 경우가 바로 <안중근>입니다.

요컨대 하얼빈 거사와 처형 직후에도 그랬지만 해방 후에 안중근이라는 위인, 영웅의 면모가 부각된 것에 비하면 아주 낯선 문학적 형상화가 바로 <안중근>이고 <합이빈 역두의 총성>인 셈입니다.

사실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원작과 달리 12장으로 짜였습니다. 2개 장이 빠진 거죠. 총 14개 장 가운데 제1장과 제13장이 빠졌습니다. 

제1장은 안중근이 연설하는 장면인데, 역시 멋진 장면이 아니라 안중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한국인 군중의 한심한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안중근도 그다지 멋있지 않습니다. 이 대목이 한국어 번역에서 빠진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입니다. 안중근의 고뇌가 꼭 인간적인 모습에서 온 것만이 아니라 민족과 민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이 나약한 게 아니라 왜 나약할 수밖에 없었나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맘에 안 드는 장면이기는 하겠습니다만......

후반부의 제13장은 유일하게 이토 히로부미가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원작에서도 짧게 처리되었는데, 제가 보기에도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다만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살짝 부자연스러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1931년에 새로운 얼굴의 안중근이 한국인에게 다가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합이빈 역두의 총성>에 등장한 안중근은 민지 시기 한복판에 등장한 얼굴이어서 낯설기도 하지만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도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얼굴이기도 해서 또한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창작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던, 오로지 번역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예외적인 사태가 바로 <합이빈 역두의 총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세가와 카이타로와 그의 형제들 사진입니다. 뒷줄 교복 입은 학생이 <안중근> 원작자인 장남입니다. 35세에 요절해서 젊은 시절의 사진밖에 없지요. 그래도 메이지, 다이쇼, 쇼와 세 시대를 다 살다 갔군요.

둘째는 서양화가​이자 탐정소설 작가, 셋째는 번역가, 넷째는 작가..... 모두 유명한 형제들입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요. 네 형제 이야기는 가와사키 켄코(川崎賢子)의 <그들의 쇼와(彼等昭和)長谷川海太郎, 潾二郎, 濬, 四郎>( 白水社, 1994)라는 책으로 나와 있을 정도입니다. 사진은 이 책에 실린 권두 화보입니다. 

 

* 마지막 사진은 하세가와 카이타로의 <안중근>을 처음 소개한 재일 번역가 고 안우식 선생의 글입니다. 안우식은 일본에서 발행되는 <계간 삼천리> 1977년 봄호에 발표한 <안중근과 하세가와 카이타로>라는 글에서 안중근의 최후를 극화한 하세가와 카이타로의 원작을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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