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573

프린트하기

[18-3] 안중근의 재구성 (3)─번역된 안중근

문자 수선공



 

안중근 의거 22년 만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하얼빈의 10.26 이야기...... 삼중당서점의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라는 희곡.......

제가 손에 넣은 책이 원본은 아니지만 이 책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당국의 출판 허가를 얻었고 정식으로 납본된 합법 출판물이라는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인 5월 13일에 일간지 [신간 소개]란에도 소개되었으니 시중에 풀린 것도 확실하고요.

다만 제가 속표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 저자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인 같기도 하고 일본인 같기도 한 [송원린호宋原麟鎬]라는 정체 불명의 이름​도 그렇고 <하얼빈 역두의 총성>이라는 책 자체가 미스터리......

천만뜻밖에 출현한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 22년 만​에 안중근을 멋지게 되살려 냈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뭐래도 천만뜻밖이니까요. 안중근이 [역사]로 남기 위해서는 해방될 때까지...... 아직도 15년쯤은 더 기다려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냥 기다린다고 될 게 아니라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준생이 의거 30년 만에 아버지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이름을 딴 박문사(博文寺)에서 참배하고 둘째아들 이토 분키치(이등문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는 치욕마저 견뎌야 했습니다. 안중근을 사형시킨 것보다 훨씬 더 몹쓸 짓이 벌어진...... 몹쓸 세상이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929988

 
​자...... 그럼 대체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어느 하늘에서 뚝 떨어졌단 말입니까?

 

1931년 5월 1일 삼중당서점에서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 출판되자마자 신문에 ​뜻밖의 기사 하나가 났습니다. 보름 뒤인 5월 15일에 난 짤막한 기사입니다.

번역을 창작연

 

이태호 저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곡양차(谷讓次) 원작

 

서성보

조선에도 문단이 생긴 이래로 이에 대한 ​절도가 횡행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 중에 나 같은 무산 독자도 그 손해를 입는다.

최근에 신문 광고만 보고 1책을 구래(購來)하였더니 이것은 바로 <중앙공론> 4월호에 실린 곡양차(谷讓次) 작 <안중근>을 고대로 번역하고 이태호의 작이라 한 것이었다.

그 이름은 <합이빈 역두의 총성>.

여러분, 이렇게 남의 작품을 제 것이라 하고 발표하여 이름을 내면은 무얼 하오?

어어랏...?? 이건 대체 뭔 소리랍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창작이 아니라 번역이라는 말씀......

​아항.... !!! 그러니까 살짝 이해는 되네요. 번역이니까 합법적으로 출판될 수 있었던 거죠. 만약 창작이라면 당국에서 조졌을 거 아닙니까? 그래도 번역이니까 버틸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봐라, 내지에서 창작됐다, 우리 일본 신민들이 읽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번역하고 출판해도 되지 않겠니? 내지 일등 국민만 볼 게 아니라 식민지 이등, 삼등 국민도 같이 좀 보자, 뭐, 이런 분위기...... 가 어이없지만.... 먹혔다는 겁니다.

그래도...... 납득은 잘 안 됩니다. 어쨌거나 안중근 이야기 아닙니까? 아무리 번역이라고 우겨도 입센의 희곡마저 쉽게 무대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거든요. 여자가 집 나가는 얘기도 함부로 못하고 사는 시대에 안중근이라.... 하얼빈이라......

좋게 봐줘서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 안중근 같은 흉악범 얘기가 아니라..... 일본 초대 총리이시자 추밀원 의장이시며 초대 한국 통감이옵신 이토 히로부미 공께서 불령선인 암살범의 흉탄에 쓰러지신 이야기라고 하면......

에이...... 그게 그거잖아요? 그런다고 안중근 얘기가 아닌 건 아니니까요......

어쨌거나...... 어떤 우연과 내막이 숨어 있든지 간에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시내 서점에 깔렸고, 글자 좀 본다는 한국인이 50전만 내면 얼마든지 사서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빛을 보았더랬습니다. 미스터리는 미스터리고 눈앞의 책은 책입니다!!

자, 그럼 미스터리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볼까요?​

표절을 하든 절도를 하든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한국어로 된 책입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번역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경우가 아주 흔했습니다. 저런 폭로성 기사를 쓰면서 분개한 서성보(徐成甫)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지만 좀 유별난 게 사실입니다. 1931년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그랬거든요. 그래도 알 만한 사람은 번역이라는 걸 알 테고, 모르는 사람은 또 모르는 대로 그냥 재미있게 읽으면 그만이니까요. 한술 더 떠서 안중근 이야기라는데 그걸 누가 썼는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럼 서성보라는 필자는 왜 그토록 화를 낸 걸까요? 감히 일본인 작품을 도둑질해서??

위의 기사를 가만히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가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 번역이라는 사실...... 이건 이제 알겠고.... 둘째는 원작자가 곡양차(谷讓次)라는 일본인이라는 사실, 셋째는 원작 <안중근>이 일본의 유명 월간지 <중앙공론> 4월호에 실렸다는 사실......

<중앙공론>이라는 월간지는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손꼽히는 종합 잡지입니다. 거기에 곡양차, 즉  ​다니 지요지라는 작가가 <안중근>이라는 희곡을 발표했다는 말씀...... 그런데 1931년 4월호에 일본어로 발표된 작품을 한국에 앉아 있는 서성보라는 프롤레타리아 독자가 방금 읽었건만..... 5월 1일에 한국에서 떡하니 책으로 출판되었다???

아, 이게 당최 말이 안 되잖아요​!! 한국 잡지에 실린 작품도 한 달 만에 책으로 못 내는데 일본 잡지에 실린 게 어떻게 한국에서 책으로 나온단 말입니까? 잡지를 언제 받아 읽고, 언제 번역해서, 언제 검열받고, 언제 인쇄하고 제본해서, 언제 납본까지 마칩니까? 서점엔 또 언제 깔고요? 상식적이라면 보통 2~3년 코스올시다. 진짜로요. 요즘 시대에도 웬만한 날림 아니고는 절대 몇 달 안에 답 안 나옵니다.

그래서 찾아봤어요. 진짠지 아닌지 볼려고 <중앙공론> 1931년 4월호를 뒤졌더니.....

...... 진짜로 있더라고요. ​이럴 수가..... 아놔.....

제목도 번듯하게 <안중근─14의 장면>...... 원작자 다니 지요지(곡양차)라는 작가의 본명은 하세가와 카이타로(장곡천해태랑). 단행본에 <안중근>이 수록된 것은 얼마 뒤인 1933~1935년에 전 16권으로 출판된 <1인 3인 전집>...... 제가 본 것은 1970판 전집(전 6권)인데 심지어 최근에 입력된 원문이 인터넷으로 제공되고 있어요.

무슨 책 제목이 <1인 3인 전집>이냐...... 뭘 3명씩이나 모여서 전집을 내나 싶어서 한참 헤맸더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3명의 이름... 하야시 후보, 다니 지요지, 마키 이쓰마가 전부 하세가와 카이타로의 필명입니다. 그러니까 3개의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들을 필명에 따라 마치 3명이 쓴 것처럼 엮어서 <1인 3인 전집>...... 오홋~

바로 이분올시다. ​하세가와 카이타로......

​1900년생, 1935년 요절.

외항 화물선 ​선원 출신.

그래서 1920년대에 화물선 타고 남미, 호주, 중국, 홍콩을 돌았고, 식민지 한국의 어느 항구에도 들렀더랬습니다.

이분은 3개의 필명을 마구잡이로 쓴 게 아니라 역사물을 쓸 때, 추리소설을 쓸 때, 그 밖의 이야기를 쓸 때마다 구분해서 필명을 내걸었다는군요.

희곡 <안중근>은 역사물이나 시대물에 속하므로 다니 지요지라는 필명으로 발표했죠. 그런데 사후에 책으로 출판될 때에는 하야시 후보 편에 묶였습니다.

​흐음.... 어쨌거나 이 모든 얘기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1931년 식민지 한국인의 가슴속에 22년 만에 되살아난 안중근은...... 번역된 안중근이라는 말씀이올시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79 [18-5] 안중근의 재구성 (5)─되돌아오는 안중근
2015.12.02. 1010
78 [18-4] 안중근의 재구성 (4)─안중근의 번뇌
2015.12.02. 597
[18-3] 안중근의 재구성 (3)─번역된 안중근
2015.12.02. 574
76 [18-2] 안중근의 재구성 (2)─안중근의 1931년
2015.12.01. 679
75 [18-1] 안중근의 재구성 (1)─합이빈의 해주 청년 토…
2015.12.01. 665
74 [17-2] 엘리엇의 <황무지>를 번역한 영문학자 이인수
2015.06.26. 1219
73 [17-1] 엘리엇의 <황무지>를 번역한 영문학자 이인수
2015.06.26. 1004
72 세계 최초의 어린이날과 소파 방정환
2015.05.01. 1272
71 [16-7] 사회주의 체제의 영문학 번역가
2015.04.14. 1003
70 [16-6] 번역가로서 임학수와 해외문학파의 허실
2015.04.14. 942
69 [16-5] 해방기의 부역 시인
2015.04.13. 809
68 [16-4] 서정시가 무너진 시대의 번역가
2015.04.10. 777
67 [16-3] 중일전쟁과 영국의 청년 시인들
2015.04.09. 1100
66 [16-2] 엘리트 시인 임학수의 패착
2015.04.08. 944
65 [16-1] 전선으로 떠난 안경잡이 시인
2015.04.07. 1158


1 /2 / 3 / 4 / 5 /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