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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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안중근의 재구성 (2)─안중근의 1931년

문자 수선공



하얼빈에서 까레야 우라(Корея ура)!”를 외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지 다섯 달 만에 저격범은 처형되었고 다시  다섯 달 뒤에 대한제국이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1931년......

​지금도 그렇지만 20년 전 일이 기억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만 따져도 1995년 아닙니까? IMF도 터지기 전이네요. YS 정부 시절...... 강남 한복판에서 삼풍백화점 무너지던 때...... 누군가 응답하라고 외칠 것처럼 까마아득한......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이라면 1909년의 하얼빈은 이미 한 시대의 저편으로 저물고 있었을 겁니다. 아예 일본 땅에서 일본 국민으로 태어나 일본어를 쓰며 자라난 세대가 벌써 스무 살이 넘었으니까요. 예컨대 이상, 박태원, 피천득이 바로 1910년생이거든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어지간한 작가들은 (이광수, 최남선 아래로) 거의 다 1910~1920년대에 태어난 세대죠. 법적으로는 일본 작가...... ㅜㅜ

1909년과 1931년...... 그사이에 삼일운동이 일어났고, 안중근 사진을 품에 숨긴 청년들이 망명길에 올랐고, 열혈 지사들이 육혈포와 폭탄에 목숨을 내맡기기도 했더랬습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은 아주 가끔식, 아주 조심스럽게 떠올려졌다가 슬그머니 잊히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안중근 동생 일가가 곤궁한 살림에 고생한다더라는 이야기, 사촌동생 안명근이 15년 만에 감옥에서 나왔더라는 말 정도...... 식민지 시기 35년 중에서 20년이 넘어가 버린 마당에 안중근이 과연 [사건]이 아니라 [역사]로 기억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1931년 5월 1일에 뜻밖의 책이 한 권 등장했습니다. 책 이름이 <합이빈 역두의 총성> 그러니까 <하얼빈 역 앞의 총소리>라는 뜻입니다.

​어라...?? 이거 뭐죠...???

놀랍게도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안중근의 1909년 10월 26일을 그린 책입니다. 게다가 기록물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희곡이랍니다. 주인공은 긴말할 것도 없이 서른 살 안중근....... 조연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오호라.....!!

1931년에 이런 제목의 책이 출판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죠. 물론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검열을 통과해 출판 허가를 받은 책이 매일 신문에 공개되곤 했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허가된 책이 산더미처럼 많은 게 아니기 때문에 하루에 고작 몇 권의 월간지와 책이 신문을 통해 알려질 수 있었던 거죠. 

<합이빈 역두의 총성>은 1931년 4월 30일에 납본 절차까지 마무리되고, 그렇다는 소식 겸 통보가 5월 5일 신문에 실렸습니다. 모든 검열을 통과했고, 책을 당국에 제출까지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가까스로 생명을 얻은 책들이 모여 있는 곳이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이죠. 책 표지나 속지에 파란색 도장 찍혀 있는 게 바로 정상적으로 검열받아 납본했다는 증명 도장이고요.

때가 때이니만큼 <합이빈 역두의 총성>에는 간간이 ○​○당, 조선○○, ××주의 같은 글자들이 보입니다만..... 숨겨진 글자를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정도고 그마나 몇 군데 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책이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쨌거나 존재한 거 맞습니다.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라는 책의 존재 자체​가 경이롭기도 하거니와 그 밖에도 몇 가지 점에서 놀랄 만한 일이 더 있습니다.

첫째는 희곡이라는 것...... 식민지 시기 35년 동안 ​책으로 출판된 희곡은 깡그리 합해야 15권도 채 못 됩니다. 제가 확인한 건 정확히 14권...... 14권 전부 1921~1924년 사이에만 나왔고, 그중에서 창작은 3권뿐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1931년에 또 하나의 희곡이 나왔고, 안중근 이야기라는 겁니다.

둘째는 출판사가 [삼중당서점]이라는 것...... 위의 표지는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긴 합니다만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삼중당서점 발행]이라고 쓰여 있죠? 1970~1980년대를 풍미한 [삼중당문고]..... 맞습니다. 바로 그 출판사올시다.  손바닥만 한 작은 책으로 무려 500권인가를 돌파했다죠. 삼중당에서 맨 처음에 낸 책이 바로 <합이빈 역두의 총성>인 겁니다.

그러니까 삼중당서점이라는 출판사를 창업하자마자 첫 번째 책으로 들이민 것이 바로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라는 말씀 되겠습니다. 식민지 시기의 삼중당서점, 해방 후의 삼증당을 설립한 창업주는 1907년생 서재수...... 1978년에 타계한 분입니다. 삼중당은 창립 60년 만인 1991년에 문을 닫았고요.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올습니다.

셋째, ​출판사는 분명히 삼중당서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작 겸 발행인은 [서재수]가 아니라 [이태호]로 되어 있습니다.

이태호는 광화문 근처에서 [자성당서점]이라는 한의학 방면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사주입니다. 해방 후에 [행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지금까지 [행림출판]으로 맥을 이어 오고 있는 몇 안 되는 출판사죠.

뭐... 창업 초창기다 보니까 서재수 본인 이름을 내걸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재수는 아직 20대​ 초짜 출판인이었으니까요. 처음 출판하는 책이다 보니 삼중당서점의 단독 출판이 아니라 3개 출판사 동업 형식을 띠었습니다.

게다가 서재수의 삼중당서점​이 <합이빈 역두의 총성>부터 쭉 기개 높은 출판 활동을 펼쳤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거든요. 삼중당서점은 이 책 말고는 1939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출판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어쨌거나 이 책의 실제 저자는 창업주 서재수도 아니고 출판업자 이태호도 ​아닌 다른 누군가입니다. 그럼 그게 누구냐......?

​넷째 문제입니다.

이 책이 처음 공개된 건 1988년이고, 제가 갖고 있는 책은 1991년에 삼중당이 폐업하면서 추모비 삼아 낸 사본입니다. 원본은 지금 딱 1권이 남아 있는데, 저도 어디에 있는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988년에 이 책의 내용을 처음 공개한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이 저자를 [송원린호宋原麟鎬]라고 표시하면서 주소까지 [경성부 성북정 176번지 7호]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성북동 176-7]...... 한성대입구역(삼선교) 부근 성북동사무소(주민센터) 맞은편 자리입니다.

그런데...... 제가 갖고 있는 사본에는 이런 이름과 주소가 없습니다. ​이를 어쩔......

그래서 결론..... 식민지 시기에 출현한 미스터리한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합이빈 역두의 총성>이라는 희곡입니다.

그럼 그게 다냐......? 그럴 리가요......!!

안중근이 1931년에 맞이한 천만뜻밖의 사태는 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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