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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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사회주의 체제의 영문학 번역가

문자 수선공



 

임학수가 중일전쟁 때 《전선 시집》을 낸 사건을 두고 제가 치명적인 패착이라고 일컬은 것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치달은 비운의 1940년대를 영문학으로 견뎌 낸 번역가가 바로 임학수라는 점에서요.

동시대의 영국 시인에서 출발해 트로이의 전장터​로...... 다시 혁명기의 시정 한복판으로...... 시인이 들여다보고 싶은 것, 번역가가 읽고 싶은 것은 어쩌면 전쟁, 혁명, 역사를 헤치며 살아가는 저잣거리의 필부필부이며 그들의 시대감각일지 모릅니다. 목청 높여 부르짖지 않았으나 임학수는 영문학이라는 것을 통해 시대와 마주하고 독자와 대면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한 번역가를 《전선 시집》 탓에 묻어 둘 수밖에 없는 것이 첫 번째 안타까움이라면 내전과 분단의 비극 속에서 끝내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이 두 번째 아쉬움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임학수는 1951년의 어느 봄날 서울에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임학수가 다시 나타난 것은 전쟁 끝물에 평양에서 출판된 《소련 시인 선집》을 통해서입니다. 1953년 9월에 출판된 《소련 시인 시집》 가운데 몇 편이 임학수의 번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판 시점이 생각보다 이른 점으로 보면 임학수가 자발적으로 월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확인한 바로는 임학수가 북한에서 번역한 책은 최소한 12권 이상입니다.

1950년대에 《월트 휘트먼 시선》​(휘트먼)을 시작으로 《올리버 트위스트의 모험》(디킨스),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기》(바이런), 1960년대에 《일리아드》(호메로스), 《바이런 시집》(바이런), 《허영의 시장》(새커리)......

처음 임학수의 이름이 등장​한 《소련 시인 선집》을 제외하면 임학수는 북한에서도 줄곧 영문학을 번역했습니다. 게다가 식민지 시기에 내놓은 호메로스와 디킨스가 포함되어 있죠? 1950~1960년대 북한의 번역문학이 식민지 시기의 번역문학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대목입니다. 임학수가 번역한 책들은 1990년대에도 다시 출판되어 읽혔습니다.

이를테면 임학수는 1941년에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번역해서 《이도 애화》로 내놓았습니다. 1949년에는 《파리 애화》라고 제목만 고쳐서 다시 출판되었고요. 1941년판 머리말에서 임학수는 새커리와 디킨스에 주목하면서 양자의 차이를 들었습니다. 새커리가 중산 계급을 풍자한 반면 디킨스는 하층 계급에 대한 동정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 디킨스의 대표작으로 《데이비드 코퍼필》와 《올리버 트위스트》를 꼽았습니다. 그런데 1949년판 머리말에서는 몇몇 대목을 고치면서 디킨스를 일컬어 인류는 반드시 자유를 획득한다는 민주주의자로 언제나 빈한한 사람의 편인 작가라 강조했습니다. 또 디킨스의 대표작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하나 더 보태기도 했고요. http://bookgram.pe.kr/120168743298

 

임학수의 머리말이 중요한 까닭은 1950~1960년대 북한에서 출판된 임학수의 번역에 호메로스, 디킨스, 새커리가 모두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임학수는 북한 학계의 영문학 연구 및 대학 교육의 성과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에서 영어문학과 강좌장(학과 책임자)를 맡은 것이 바로 임학수이기 때문입니다. 또 1960년대에 출판된 <세계문학선집> 제1권이 바로 임학수가 번역한  《일리아드》로 출발했습니다. 1970년대에 편찬된 외국문학론, 세계문학론의 저술에도 임학수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북한의 외국문학 연구 현황이나 세계문학전집 편성의 규모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만 대체로 영문학 연구와 번역을 주도한 것이 임학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통 러시아 문학 백석, 영문학 임학수라는 식으로 흔히 이야기하곤 합니다. 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번역은 상업성에 지배된 남한의 번역보다 뛰어난 경우도 보입니다. (여전히 추정입니다...... 당최 뭘 볼 수가 있어야 말이죠.)

어쨌거나 번역가 임학수가 북한에서도 내내 영문학에 열중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제국주의의 최고 엘리트 과정을 밟고 중일전쟁에 휘말렸다가 영미 귀축을 상태로 한판 벌인 ​태평양전쟁을 코앞에 두고 《일리아드》와 《두 도시 이야기》를 번역한 임학수...... 임학수는 사회주의 체제의 북한에서도 여전히 제국주의 문학의 본령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7월에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임학수는 1982년 6월 만 71세의 나이로 북한의 영문학 번역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습니다. 오늘날 북한의 영문학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임학수가 길러 낸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침)​

■​ 1941년판 《이도 애화》와 1949년판 《파리 애화》, 북한에서 출판된 2종의 번역은 해고 노동자로 오랫동안 복직 투쟁을 해 오신 장서가께서 제공해 주신 자료입니다. 국내 몇몇 공공 도서관에 소장된 북한 자료는 열람과 복사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표지를 직접 본 것은 처음입니다. 거듭 감사 말씀 드립니다.

1종의 북한 서적은 해외 사이트에서 따왔습니다. 해외에서는 북한 서적이라고 해서 특별히 제한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뭐 그리 무시무시한 책도 아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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