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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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번역가로서 임학수와 해외문학파의 허실

문자 수선공



 

임학수라는 번역가가 그렇게 대단할까요? 시인으로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처지에......? 식민지 시기에 문고본 시집 《현대 영시선》을 비롯해서 3종 4권...... 해방되고 나서 5권...... 조금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할 루이스 캐럴 동화 1권 포함해서 다 합해 봐야 8종 9권인데요?

네, 대단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요. 첫째는 1940년대에 ​이토록 번역에 집중한 번역가가 없습니다. 전쟁에서 시작해서 전쟁으로 작살난 연대가 1940년대 아닙니까?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둘째는 이만큼 19세기 영문학에 집중한 번역가도 없습니다. 타고르야 좀 예외적으로 보이지만 영어로 시를 쓴 시인임이 틀림없으니 어쨌거나 모조리 영문학 아닙니까?

​아니, 명색이 경성제대 영문과 출신이고 고려대 영문과 교수라면 10년 동안 고작 9권 번역한 것도 당연하고 영문학만 번역한 것도 당연하다고요? 문제는 실상이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뭐, 굳이 1920~1930년대의 번역가들을 뒤져 볼 것도 없죠. 최재서만 하더라도 식민지 시기나 해방기에는 변변한 번역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 번역에 손을 댔죠. 게다가 《햄릿》만 자꾸 얘기하다 보니 그렇지만 미국문학에 더 관심을 두었고요. 어쨌거나 영문학과 미국문학은 좀 다른 거 아닙니까?

자, 이 문제는 조금 재미없는 말씀입니다만 임학수를 위해 변명해 둘 가치가 있겠군요. ​

식민지 시기의 작가든 전문 번역가든 특정한 언어권의 문학을 섭렵하면서 번역 일선에 ​나선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임학수보다 더 많이 번역한 번역가가 많지도 않거니와 대개 영국문학, 아일랜드 문학, 프랑스 문학, 러시아 문학, 독일문학, 북유럽 문학, 때때로 중국문학이나 한문학까지 자유롭게 오고갔습니다. 물론 일본어 중역을 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흔히 해외문학파라 일컬어지는 외국문학 전공자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 외국문학을 직역하겠노라며 떨쳐 일어난 소위 해외문학파의 주요 구성원은 ​실상 각자의 전공에 거의 얽매이지 않은 채 몇 차례의 문단 논쟁에 뛰어들거나 주요 일간지의 학예부 기자로 취직해서 평단을 장악했을 따름입니다. 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의 대학에서 러시아, 프랑스, 아일랜드,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왔다는 해외문학파의 대부분은 몇 편의 시와 단편소설을 번역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앤솔러지를 엮는다거나 단행본을 낸다거나 장편 규모로 번역한다거나...... 도무지 엄두를 내지 못했더랬죠. 하기야 외국 나가서 대학 겨우 마치고 돌아온 처지에 무슨 번역을......

식민지 시기에는 굳이 전공 언어에 따라 분업화되듯이 번역이 배분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본어 중역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해외문학파가 중역은 이제 그만! 외쳤을 때의 파장이란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중역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게다가 해방 이후에 해외문학파의 핵심 멤버가 대학의 외국어문학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해외문학파의 직역 신화가 소급되고 더 부풀려졌습니다.

실상을 따지고 보자면 ​해외문학파는 임학수보다 네댓 살 위 연배입니다. 정인섭, 이하윤, 이헌구, 손우성, 이선근, 장기제, 서항석, 유치진, 함대훈....... 해외문학파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최재서, 정내동...... 어느 누구도 식민지 시기와 해방기에는 번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랬습니다. 다만 번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거품만 물었더랬죠.

그중에서 비교적 사정이 나은 경우라면 이하윤 정도입니다만 1933년에  펴낸 앤솔러지 《실향의 화원》은 자신의 전공 언어를 무색하게 했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도 이 시집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하는 데에서 머물렀습니다. 속된 말로 계속 우려먹은 셈이죠. 이하윤은 영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주로 번역했는데 두 언어를 모두 직역했노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정인섭이나 최재서가 상당한 번역량과 솜씨를 보인 것은 1950년대 이후고요. 함대훈은 고리키 희곡을 멋지게 번역했습니다만 경찰로 순직했습니다. 김진섭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단행본을 한 권 찾아냈는데, 너무 얄팍한 문고본이더군요. 그나마 곧바로 납북되고 말았습니다. 그 밖에는 거의 번역에 손대지 않고 대학에서 교수로만 먹고산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결국 해외문학파가 주장한 것처럼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 해외문학파에 이르러 비롯되었으며 그 후로 한국의 번역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허구입니다. 물론 해외문학파가 번역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이끌어 냈고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한 사실은 틀림이 없으나 대개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이론이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런 논의조차 해외문학파가 처음 제기한 것도 아니었고요. 이를테면 그전에 이미 김억이 몇 차례 중요한 논의를 펼쳤거든요.

자, 다시 임학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어쩌면 임학수조차 일본어 중역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을지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는 처음으로 영어에서 직역했노라는 김억도 ​그렇고 영문학자인 임학수도 그렇고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다만 러시아어나 독일어에서 번역하는 경우보다 더 쉽게 은폐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왜냐고요? 중요한 것은 어떤 언어에서 번역했느냐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걸 어떻게 번역하겠다고 맘먹었을까요? 일본어 번역을 보았기 때문이고 일본 문단의 사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번역할까? 무엇을 먼저 번역할까? 어떤 것을 고르고 어떤 것을 뺄까? 이 모든 것을 선택하는 과정에 이미 일본어 번역과 독서 체험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김억이 타고르의 영시를 직접 번역한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일본에서 타고르 시집이 번역되거나 읽히는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임학수가 영어에서 직접 번역했다손 치더라도 앤솔러지에 등장하는 시인들이나 그런 앤솔러지 형식 자체는 이미 일본에서, 그리고 서울 시내 서점에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조선총독부 도서관의 후신인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 경성제대 후신인 지금의 서울대 도서관에 꽂혀 있죠.

해외문학파는요? 그들이 러시아어나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배운 곳은 일본의 대학입니다. 얼마 전에 살펴본 설정식의 경우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서도 영어본 1권과 주석서 4권 옆에 일본어판 5권을 놓고 번역했더랬죠. 하물며 해외문학파야......

​자, 그럼 임학수가 줄곧 영문학에 매달린 것도 다시 볼 가치가 있죠?

임학수가 설사 일본어에서 중역했다 하더라도 고집스럽게 19세기 영문학에 집중한 대목은 해외문학파에 비해 높이 평가해야 마땅합니다. 게다가 암흑기라 불리는 1940년대, 중일전쟁에서 시작해 태평양전쟁을 지나 잠깐의 해방 뒤에 곧장 한국전쟁으로 마감된 1940년대에 이만한 규모로 번역을 실​천한 번역가를 달리 찾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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