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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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해방기의 부역 시인

문자 수선공



 

임학수가 《전선 시집》 이후에 보인 행보를 덮을 필요야 없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부풀릴 일일도 아닙니다. 《전선 시집》이 아무리 서정적으로 에둘러 갔더라도 흠을 가릴 수야 없죠. 그 뒤로도 임학수는 몇 편의 친일적인 글을 발표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번역에 더 힘을 기울였습니다.

문제는 해방되고 나서...... 짙은 낙인이 되어 버린 《전선 시집》을 ​눈앞에 놓고 달리 핑곗거리를 찾기는 힘들죠.

해방되고 나서 임학수는 먼저 《세계 단편 선집》을 펴냈습니다. 1946년 7월에 이호근과 공역한 《세계 단편 선집》에는 영미 작가의 단편소설 12편이 수록되었습니다. 머리말을 쓴 임학수는 바야흐로 번역을 통해 당당히 세계 무대에서 외국의 현대문학과 고전을 해석하고 비판하게 되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실상 《세계 단편 선집》은 영미 작가로만 편성되었으나 이제 외국이나 세계의 범위가 그렇게 달라진 셈이죠.

《세계 단편 선집》을 함께 번역한 이호근은 임학수보다 두 살 위로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대 영문과 선후배 사이입니다.​ 얼마 뒤인 1949년에는 임학수와 이호근이 함께 고려대 영문과 교수로 부임했고요. 

이태 뒤인 1948년 7월에 임학수는 무려 5권의 책을 한꺼번에 내놓았습니다. ​그중에서 창작은 시집 1권이고 나머지 4권은 모두 번역입니다.

임학수는 《세계 단편 선집》을 번역하면서 새 시집 《새날》을 엮고 있었는데, 광고만 남아 있어서 실제로 출판되었는지 불확실합니다. 제목으로 짐작해 보자면 해방 이후의 감격을 노래한 시집이겠죠. 1946년 8월에 단 한 차례 출간 광고가 보이지만 그 뒤로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면 임학수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창작시집은 1948년 7월에 나온 ​《필부의 노래》일 겁니다. 

​임학수의 ​《필부의 노래》가 출판될 무렵에 토머스 하디의 단편집 ​《슬픈 기병》, 타고르 시집 ​《초승달》, 블레이크 시집 ​《블레이크 시초》, 영한 대역으로 된 앤솔러지 ​《19세기 초기 영시집》이 한꺼번에 나왔습니다. 임학수는 여전히 시인이며 시 번역가요 무엇보다 영문학 번역가임이 분명하죠. 

​타고르 시집을 번역한 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만 임학수는 대체로 19세기 영문학을 집중적으로 번역했습니다. 해방 이전에 번역한 앤솔러지 ​《현대 영시선》이 동시대의 영국 시인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요. 특히 ​《블레이크 시초》는 시인 장만영이 차린 출판사 산호장에서 기획한 ‘산호문고’의 하나로 나왔는데 아주 작고 예쁜 책입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도 ‘을유문고’로 나온 문고본이고요.

이듬해인 1949년 ​3월에 임학수는 고려대 영문과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학교에서 강의하다가 이제 본격적인 영문학자로 자리 잡은 셈이죠. 하지만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봄에 임학수는 북으로 넘어갑니다.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1951년에 서울 자택에서 사라진 것을 보면 월북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한국전쟁 직전에 임학수가 남한에 남긴 마지막 흔적은 ​《앨리스의 모험》입니다. 영국 작가이자 수학자 루이스 캐럴의 ​《원더랜드의 앨리스》​ 즉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번역한 거죠. 시나 소설이 아니라 동화를 번역하기로는 임학수로서도 처음인데 존 테니얼의 유명한 초판본 삽화 19컷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희귀본인데, 사실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최초 한국어 번역입니다.

사실상......이라고 단​서를 붙인 것은...... 이미 1937년에 동요시인 윤복진이 처음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어린이 잡지에 첫 부분만 번역된 채 연재가 곧바로 중단되었습니다. 또 주요섭이 원작의 모티프를 따서 재창작하다시피 큰 폭으로 번안한 ​《웅철이의 모험》도 1937~1938년에 잡지에 연재되었다가 해방 직후인 1946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번역과 번안이 시작된 거죠. 주요섭은 앨리스에 해당하는 주인공 웅철이를 소년으로 바꾸었거든요. 그러니 원작 전체를 번역하기로는 임학수가 단연 처음입니다.

그런데 최초라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말장난, 언어유희로 이어지기 때문에 번역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는 게 문제죠. 영문학자로서 임학수가 ​판타지 동화의 대명사 《앨리스의 모험》을 처음 번역한 것은 그런 뜻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식민지 시기의 흉터를 꽁꽁 싸매고 ​영문학 번역가로 나선 해방기의 임학수...... 이제 고려대 영문과를 이끌면서 본격적인 영문학자의 길을 걸을 참이었던 시인 임학수......

1951년의 실종이 임학수가 선택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뒤에 벌어진 모든 일은 한국 현대사와 문학사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끔직한 참상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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