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훈의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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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밤에 깨어난 괴물

양재훈

인식의 밤에 깨어난 괴물
- 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
 
박솔뫼의 소설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낱낱의 문장들이 어떻게 모여 맥락을 이루는지 파악되지 않아 한 번에 읽기가 어렵고, 책갈피를 꽂아두더라도 어디까지 읽었는지 헷갈려 한참씩 헤매는 수가 많다. 하지만 이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과 화해하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해하려 들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박솔뫼의 문장은 고유한 리듬을 내장하고 있어서, 의미와 상관없이 리듬을 타며 읽기 시작하면 어느새 몸이 그 리듬을 따라가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읽기 어려운 것이기를 그치는 순간 그것은 읽으면 괴로운 것이 되고 말며, 그러면서도 강력한 중독성을 발산하며 독자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박솔뫼 소설을 읽는 일이 괴로운 까닭은 거기에 내장되어 있는 도저한 절망과 무기력, 그리고 허무의 감각에 있다. 그 허무의 감각은 “결국엔 모든 것이 같다. 추운 겨울이든 따뜻한 봄이든 결국에는 말이다.”(「차가운 혀」, 9면)라는 말에 담긴 태도에서 나온다. 저 말은 세계와 그 안에서 주체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어떤 의문이나 욕망도 또는 주체적 행동을 위한 시도도 무의미함을 뜻한다. 이런 세계관 때문에 박솔뫼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박솔뫼의 소설에 등장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동의 시도를 멈춘 채 정신병적으로 수축된 (비)주체들뿐이다.
 
『그럼 무얼 부르지』에는 저 정신병적 비―주체가 이를테면 ‘비―운동’을 시작하던 지점이 담겨 있다. 「차가운 혀」의 화자는 스스로가 “아름답고 상쾌한 곳의 반대점”(16면)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그의 대척점에는 그가 일하는 바의 사장이 있다. 화자는 사장이 아름답고 상쾌한 곳을 산책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런 곳이 어떤 곳일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장과 같은 세계에 속하고 싶어 하는 연인의 욕망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사장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해 우는 누나가 보는 것을 평생 보지 못할 것이다.”(37면)

다른 둘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은 사장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자신의 세계는 어떤 의문도 가질 필요가 없는 자명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들은 꼭짓점만 있고 그것들을 잇는 선은 없는 삼각형의 구도를 이룬다. 사장의 현실적인 세계와 그것을 향한 누나의 욕망 어느 쪽으로도 이어진 선이 없음을 이미 체득하고 있는 화자는 세계 속에 어떤 자리도 갖지 못한 자기 처지를 타개하려는 의욕도, 자신이 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갖고 있지 않다. “하고 싶음이라는 마음이 내게 있든 없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10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 인물을 꼭짓점으로 한 삼각형 구도는 이어지는 작품인 「안 해」에서도 반복된다. ‘구름새 노래방’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그린 「안 해」의 선 없는 삼각형은 폭력의 대상인 화자와 여주, 그리고 그 주체인 ‘검은 옷 남자’로 이루어져 있다. 검은 옷 남자는 손님으로 온 화자와 여주를 감금하고 그들에게 신체적ㆍ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며 ‘열심히’ 노래를 하도록 강요한다. 노래는 노래가 아닌 무엇이든 상관없었을 일종의 미끼일 뿐, 저 ‘열심히’는 무엇을 왜 열심히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명령인바 이는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서도 화자는 무기력하다. 그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검은 옷 남자가 시키는 일을 그대로 수행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여주를 보면서도 “기세가 좋다고 생각”(41면)할 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노래방을 탈출한 뒤 돌아가 검은 옷 남자에게 보복을 하고서도 “우리가 나가면 비틀거리며 일어나 내일이면 … 다시 검은 옷만 입는 이상한 아저씨로 돌아가 내일을 시작”(67면)하리라 여길 정도다. 소설은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70)는 말과 함께 끝나는데, 이 말에 저 ‘열심히’의 명령에 대한 저항의 의미는 담겨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므로 괜한 힘을 빼지 않겠다는 무력감의 표현일 뿐이다.
 
이런 무력감은 구름새 노래방의 반복되는 폭력을 다룬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에서 남자에게 손가락을 꺾여 간지러운 곳을 긁을 힘조차 없는 주미의 모습을 통해 압축적인 형상을 얻는다. 그런가 하면 「해만」에서는 “천천히 모든 것이 사라지고 사라”(102~103면)진 곳에 무엇이 남느냐는 질문이 된다. 하지만 이내 그 질문조차도 빠져나가고 “텅 비어 버린 자신이 강렬해질 뿐”(103면)이다. 그런 텅 빈 주체는 자신을 배제한 이 세계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정작 찾아가 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리멸렬한 곳이었던 ‘해만’의 지도를 반복해서 그림으로써 스스로의 유령적 현존을 견딘다(「해만의 지도」). 결국 모든 것은 다시 「차가운 혀」의 첫 문장으로 돌아간다. “결국엔 모든 것이 같다.”
 
표제작인 「그럼 무얼 부르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명시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지시하고 있는데, 2011년 가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제목으로 보더라도 2년 앞서 있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에 대한 소설적 반응임에 틀림없다. 흥미로운 것은 광주 출신의 주인공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1980년 5월과 전혀 연결시키지 않고 있음에도 작품의 제목을 통해 그럼 무얼 불러야 하느냐는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의 광주가 정체성 형성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그에 대한 금지가 화자에게서 무언가를 덜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무(無)보다 못한(less than nothing)’ 주체가 아닌가? 어쨌거나 주인공은 자신이 1980년의 광주와 같은 명확한 세계로부터 몇 개의 장막으로 가로막혀 있다고 느낀다. 그 역시도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알지 못하는 텅 빈 주체다.
 
이런 주체의 철회가 극에 달하면 「안나의 테이블」처럼 현실과 망상이 구분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 얽히는 불안한 정신병적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박솔뫼 특유의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의 연쇄는 이성적 주체의 범주화 능력이 제거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무차별적으로 수용된 감각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성이, 지성의 종합에 앞서 모든 것을 분해하는 상상력의 광기로 퇴행한 것이다.(감각과 지성의 사이에 있는 상상력의 광기와 괴물성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 이성민 역,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 b, 2005, 1장 참조.) 의식에 떠오르는 감각들이 질서를 부여받지 않은 채 맥락 없이 이어지며 연달아 서술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이는 주체가 외부세계로부터의 자극이나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돌려받은 결과들을 일관된 질서 아래 모음으로써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상황에 기인한다.
 
박솔뫼의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에 매료되고 거기에 내장된 도저한 절망과 허무에 공명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의 폐쇄가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가 어떤 질서와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또 어떻게 해야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세계가 비록 우리가 원하는 모습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손이 닿는 곳에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때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세계의 질서 안에 편입되어 기계 부품으로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런 삶에 저항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극도로 좁아진 세계의 바깥에 남겨져 우리의 통제를 너무나도 멀리 벗어나 있는 세계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기계 부품의 삶조차도 허락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괴물 작가 박솔뫼는 바로 이런 세계의 폐쇄 가운데 태어났다. 박솔뫼가 현재 청년 세대의 허무 감각을 대변하는 작가라 일컬어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인공적인 불빛이 너무 강렬해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오히려 그 때문에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밤을 지나고 있다. 인간이 자연 상태의 근본적 우연성을 방어하기 위해 구성했던 세계가 오히려 인간을 뱉어내는 괴물이 되어 있는 지금, 박솔뫼의 소설은 세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동의 시도를 멈춘 채 정신병적으로 수축된 비―주체성이 출현하는 장소다. 그곳은 이 캄캄한 세계의 밤,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인식의 밤에 이성의 심장부에 잠자고 있던 광기의 괴물이 깨어나는 곳이다.
 
* 이 글은 계간 <자음과 모음> 2014년 여름호에 실린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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