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훈의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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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시 만나야 한다 - 최은영, <쇼코의 미소>

양재훈

그들은 다시 만나야 한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독특한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이 작품은 참신한 기교나 실험적인 형식 따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으며 딱히 긴장감을 형성하는 문장으로 쓰이지도 않았다. 치밀하게 짜인 구조라든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삽입된 소설적 장치 같은 것도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담담한 필치로 차분히 자기 할 말을 해나갔을 뿐인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그러나 독자 역시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을 지녔다.

분량으로 따지면 웬만한 단편소설의 두 배가 넘는 긴 소설이 이렇게 편하게 읽히면서도 지루하지 않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갖추기 힘든 덕목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익숙한 것들로만 이루어진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쇼코의 미소」의 낯익은 외관 뒤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서사의 유형에 따라 분류하면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라는 흔한 명칭으로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기존의 것과 같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성장의 형태다.

간단히 말하면 「쇼코의 미소」는 할아버지로 대변되는 가족관계의 굴레에 가로막혀 있을 뿐 자기 안에 특별한 가능성이 있음을 의심치 않던 주인공이 자신의 평범함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주인공 소유가 자기 가능성의 표출을 가로막는 가족의 굴레에 절망하거나 그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출발점에서 소유의 의식은 자기 존재의 특별함이나 그것이 가로막혀 있는 상황 따위에 대한 자각 없이 주어진 환경에 매몰되어 있었다. 소유가 그것들을 의식하는 데는 외부의 계기가 필요했으니, 그것이 바로 시작 부분에서 쇼코가 하는 역할이다. 이 이야기는 이를테면 유년의 상태에 머물러 있던 소유가 쇼코의 등장을 계기로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 ‘쇼코의 미소’이니만큼 쇼코가 짓는 미소의 의미가 변주되는 양상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쇼코는 늘 같은 표정으로 미소짓지만, 서사가 진행되고 소유가 변화/성장하면서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달라진다. 그렇게 쇼코의 미소는 각기 다른 의미로 세 번 반복된다. 처음 그것은 “알 수 없는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 한정된 상상력을 지니고 살아가던 소유에게 쇼코의 등장은 저 바깥에 전혀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낯선 외래자의 침입과 같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소유에게는 쇼코를 향한 동일시가 발생한다.

동일시는 대상과의 거리가 도저히 좁힐 수 없을 만큼 먼 경우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소유가 쇼코를 동일시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쇼코는 이질적인 세계에서 건너온 대상이면서도 일본 안에서는 소유처럼 소읍의 작은 학교 학생이었다. 그리고 쇼코의 등장 이후 알 수 있게 된 것이긴 하지만, 소유 자신에게도 스스로를 특별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여길 만한 조건이 있었다. 소유는 예컨대 “언젠가는 유두 근처에 애벌레 모양의 타투를 할 거”라는 쇼코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지던 여자애들 사이에서 혼자서만 웃었다든가 자신이 일학년 중에서 더듬거리면서라도 영어로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는 점 등에서 그녀를 둘러싼 그 좁은 세계에 한정되지 않는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들 안에서 소유는 “세상은 넓고, 우리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쇼코의 말에 즉각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세계지도의 대도시들 위에 찍어둔 점들을 보며 아득함을 느낀다.

쇼코와의 동일시는 그러한 동질감 위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데는 자신에겐 없는 무언가가 쇼코에게는 있다는 일종의 전이적 믿음이 필요했다. 소유가 쇼코에게서 느낀 이질감은 결국 이런 전이의 효과였다. 소유는 이제 막 자신이 가족 내지 천변의 작은 마을이라는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음을 자각했다. 그것은 아렌트(Hannah Arendt)적인 의미에서 사적 영역에 해당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인 그 안에는 타인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자신을 향한 쇼코의 미소를 “다 커버린 어른이 유치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웃음”으로 여긴다거나 할아버지 앞에서 웃는 쇼코를 보고 “정말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 그냥 상대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포즈를 취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곧 쇼코가 자신과 달리 유기적 공동체의 바깥을 마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의식 속에는 없는 타인을 위한 자리가 그녀에게 있음을 확인시키는 일이었다.

쇼코의 미소가 그러한 전이적 믿음에서 분리되는 것은 소유가 일본에 찾아가 그녀를 만났을 때다. 일본에서 본 쇼코의 미소는 소유에게 “이상한 우월감”을 안겨준다. 쇼코의 집에서 소유는 자신이 쇼코보다 “정신적으로 더 강하고 힘센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토록 떠나려 했던 고향 땅에 박혀 “속물적이고 답답한” 삶에 안주해버린 쇼코의 미소는, 더는 자신을 둘러싼 답답한 환경을 뚫고 저 넓은 세계로 나가 자기 안의 가능성을 실현해 보이겠다는 강렬한 욕망이 들어 있지 않은, 그저 안면 근육의 관성적인 움직임으로만 남아 있었다.

소유는 쇼코가 자신의 동일시를 유발하던 것을 더이상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쇼코에게 없었던 것이다. 쇼코에 대한 소유의 동일시는 자신이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보잘것없는 조건 속에서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데 대한 것이었다. 소유에게 쇼코는 욕망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였던 셈이다. 물론 이것은 동일시의 작동에 불가결한 전이의 효과일 뿐 쇼코 자신과는 무관하다. 이를 통해 작동하던 소유의 욕망은 실체적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쇼코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욕망 자체를 향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런 한에서 철저히 쇼코에게 매개되어 있었다. “어쩌면 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쇼코의 말 한마디가 소유의 마음에 분명한 자국을 남겼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 한쪽이 부서져버린” 쇼코의 모습은 더이상의 동일시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 점이 확인되자 소유는 “열일곱 살의 쇼코를 기억하고 끊어져버린 연락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렇게 서서히 잊어버렸으면 좋았으리라”고 말한다. 이런 후회는 욕망의 진짜 대상인 욕망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동일시는 불가능해졌어도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전이는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았다. 단지 쇼코라는 외부의 대상을 향해 있던 전이적 믿음이 자기 안의 가능성을 향해 옮겨졌을 뿐이다. 때문에 소유는 여전히 영화감독을 꿈꾸며, 자신의 특별한 잠재력이 그 꿈의 실현으로 현실화되리라 믿는다.

전이의 해소는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쇼코와 무관하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할아버지야말로 드러나지 않은 채 숨어 있던 근본적 환상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 번 소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욕망의 중심적 계기로 보였던 쇼코에 대한 동일시가 실은 할아버지를 향한 감정에 종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유의 동일시는 처음부터 쇼코를 대하는 할아버지(와 엄마)의 태도에 대한 의문과 함께 발생했다. “애정표현에 서툴고 서로에게 웃어주는 일조차 어색해하던 가족”의 분위기가 쇼코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달라졌던 것이다.
 
쇼코가 머물렀던 그 일주일 동안 집에는 이상한 활력이 돌았다. 쇼코가 좋아한다는 수박을 사러 슈퍼에 간 할아버지, 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나름의 목표를 정한 엄마, 쇼코가 만든 주먹밥을 먹으며 주고받던 삼 개 국어의 시간들.
 
‘사람을 사귀는 일에 서투르고 무기력’하던, “작동하지 않아 해마다 먼지가 쌓여가고 색이 바래가는 괘종시계 같”던 엄마와 할아버지가, 처음 만나는 쇼코를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반겨주던 모습이라든가 사진을 찍는 쇼코 앞에서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그런 관심이 싫지 않다는 식으로 웃어넘”긴다든가 하는 일은, 소유에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재떨이 가져와라, 물 떠와라, 발을 데울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명령만 할” 뿐 어떤 대화도 하지 않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텔레비전을 끄고 자신감이 밴 목소리로 쇼코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가방을 까먹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온 일이라든지 귀신 이야기를 듣다가 오줌을 싼 일” 등 늘 불같이 화를 냈던 소유의 어릴 적 실수들을 재미있는 추억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미스터 김’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하며 쇼코에게는 “다 늙은 교장선생 같은 사람”이 아닌 친구가 되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할아버지(와 엄마)의 이런 불가해한 태도는 소유에게 ‘Che Vuoi?’의 질문을 불러일으킨다.―――‘저들은 쇼코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쇼코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쇼코 안의 X는 무엇인가?’ 쇼코를 향한 동일시는 자기 안에 발생한 이런 의문에 대한 반응이었다. 요컨대 쇼코를 향한 상상적 동일시는 할아버지를 향한 상징적 동일시에 매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쇼코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도 전이가 해소되지 않았던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소유는 욕망할 만한 어떤 것도 쇼코에게 없음을 확인한 후로도 쇼코를 향한 할아버지의 우정 어린 태도에 불쾌함을 느낀다. “매사에 화를 내는 사람”이었던 할아버지가 예순 살이나 차이 나는 외국인 펜팔 친구인 쇼코에게만은 너그럽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 소유는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다른 생생한 삶”을 꿈꾸며 영화 아카데미에 등록하고, 아카데미를 마친 후에는 단편영화 독립영화제에 작품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꿈도 아니었다”는 소유 자신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소유가 실제로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런 삶을 통해 표현된 소유의 욕망은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욕망을 향한 것이었다.

욕망의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은 부인됨으로써만 욕망을 유지시키는 환상인바 할아버지야말로 소유의 근본적 환상의 대상이었다. 이는 자신은 몰랐던 할아버지의 병을 쇼코가 알고 있었음을 들은 소유가 다시 한번 불쾌함을 표출하는 장면을 통해 확인된다. 소유가 줄곧 할아버지와 엄마에게 얽혀 있는 삶의 속박을 끊어내려는 욕망을 표출해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욕망은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진짜 대상, 충동의 맹목적 운동이 향하는 대상인 공백(void)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그 은유적 대체물을 향하며, 그것에 도달하자마자 다른 대상을 향해 미끄러지는 환유적 운동의 악무한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한 욕망의 틀은 충동을 은폐하는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환상에 의해 마련된다. 따라서 저 악무한에서 벗어나려면 환상을 넘어서야 하겠지만 환상은 제거할 수도 없고 해석되지도 않는다. 때문에 정신분석의 최종 단계는 증상과의 동일시를 성취함으로써 환상을 횡단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전후한 할아버지와 쇼코의 방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선 갑자기 소유를 찾아온 할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소유가 멋지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고향에서 물리치료사가 된 쇼코의 얼굴이 실린 병원 팸플릿을 가리키며 “얘는 무슨 화장을 가부키처럼 했”느냐는 소유에게 “가부키든 경극이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라며 “예쁘기만 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정받지 못하리라 여겼던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더는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쇼코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는 소유에게 불가해한 타자의 욕망의 수수께끼를 가리고 있으리라 여겼던 베일 뒤에 실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확인시키는 일이었다. 그에 따라 소유는 드디어 아무런 열정도 없이 관성적으로만 지속하던 영화감독 지망생의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할아버지의 방문과,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진 그의 죽음 이후 소유는 취업을 위해 토플을 공부하며 매일 백 개씩의 영어단어를 암기하는 평범한 생활을 시작한다. 이를 통해 소유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창의적인 인간이 아니며 오히려 제도권 교육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임을 확인한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가족의 굴레에 가로막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미지의 바깥 세계를 꿈꾸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확인시켜줄 저 바깥의 세계가 실은 스스로 만든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소유는 그토록 경멸하고 벗어나고자 했던 평범한 삶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저 바깥의 세계를 향한 강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환상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환상은 해석도 제거도 불가능하며 오직 횡단만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몰랐던 할아버지의 병을 쇼코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유를 그렇게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소유가 다시 한번 증상의 매듭에 얽혀들 수 있는 상황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사가 완결되기 위해서는 쇼코의 방문을 통해 그녀와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했다.

쇼코의 방문을 통해 소유는 “변화할 의지도,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할아버지가 실은 어린 시절에는 화가의 삶을 꿈꾸었으며, 그것을 포기한 후로도 줄곧 주변을 관찰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그림을 그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할아버지가 이제 정말 죽고 없음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유는 줄곧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내재된 가능성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고 여겼지만 할아버지가 실제로 했던 역할은 바로 그런 핑곗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소유 자신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아픈 자각을 막아주는 것이었다. 이는 소유의 거울상인 쇼코 역시 마찬가지인바 이제 그들은 각자의 할아버지들 없이 홀로 세계 안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바로 그런 자각 아래 쇼코는 “우린 이제 혼자”라고 말하며 예의 그 예의바른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다시 한번 반복되는 쇼코의 미소 앞에서 소유의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을 이정표로 삼아 소유의 성장을 따라왔다. 이제 이 성장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매혹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그러려면 작품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던 발걸음을 돌려 작품 밖으로 나와야 한다. 작품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작품이 그것을 둘러싼 맥락 속의 어떤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수동적으로 말‘하게 된’ 것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쇼코의 미소」가 보여준 성장 서사가 이만큼이나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근대 이후 우리 사회가 밟아온 과정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근대가 시작된 이래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의 역할과 의미를 확인시켜 줄 사회적 영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 일 년 만에 무너져 버린 아주 짧은 꿈이 한 번 있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빠 없이 할아버지–엄마–손녀의 삼대로 이루어진 가족은 중요한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를 위한 상징계를 건설하는 데 실패한 우리 사회 안에 있는 주체들이란 역사의 격랑 속에서 꿈이 좌절당한 채 늙어버려 아버지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박제된 천재들과 그렇게 집에 틀어박힌 아버지나 너무 일찍 죽어 버린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려야 했던 엄마들, 그리고 무기력한 자신의 기원적 지점을 부정하면서도 남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세계밖에는 눈 돌릴 데가 없는 손녀들인 것이다.

「쇼코의 미소」에 그려진 소유의 성장은 동시에 결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의 속박을 끊어낼 수 없었던 세 사람 모두의 성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성장을 통해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죽음과 서울에서의 소유의 실패가 보여주는바 그러한 화해 이후로도 소유의 삶은 세계 안에 그녀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한 채 그것의 부재에 대한 자각을 막아주는 데 그쳐야 했던, 그리고 그나마 이제는 사라져버린 기원적 지점으로도 그리고 결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바깥 세계로도 향할 수 없다. 결국 소유의 가족은 각자의 성장을 통해 이중적으로 탈구되어 있는 삶을 받아들이는 데 그친다. 성장을 통한 화해가 가족의 화합이 아닌 해체로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고향 집으로 돌아올지 묻는 엄마에게 소유는 “서울에 살든 고향에 살든 엄마와는 같이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탈구된 삶을 바꿀 수 없는 화해는 근대 이후 스스로 건설한 사회를 가져보지 못한 채 이어져온 우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려질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화합을 통해 이중적 탈구를 은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처럼 이중적으로 탈구되어 있는 주체의 자기 및 세계 인식까지를 그릴 수 있을 뿐이지만 우리의 사고는 더 나아갈 수 있다. ‘이제 혼자’라는 쇼코의 말의 주어는 술어와 모순되는 ‘우리’였다. 증상과의 동일시를 성취함으로써 바깥을 향한 강박에서 벗어난 소유와 쇼코는 그렇게 혼자 남겨진 삶을 긍정하며 각자 살아갈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은 우정을 유지하면서도 굳이 먼 곳까지 찾아가 주기적으로 만나려 하거나 전처럼 열정적으로 편지를 교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나라 안에 혼자 남겨진 ‘우리’로서 바로 자신들을 위한 세계를 건설하려는 목적 아래 연대를 구축하는 ‘행위’에 돌입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희박한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그들은 다시 만나야 한다. 그것만이 모든 장소로부터 탈구된 채 유령적으로 떠돌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바꿀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2014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해설을 옮긴 것입니다.

마당 2014.05.19. 4:15 pm 

양재훈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 원고가 벌써 기다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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