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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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사용설명서

許弛

부패는 작은 양보에서부터, 작은 타협에서부터, 작은 비겁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한번 시작된 부패는 터무니없이 오래 지속된다. 마치 한 번의 장마에 핀 곰팡이꽃이 그후로도 여러 해 동안 벽 위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박박 지워도 종내 그 지운 흔적으로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이렇게 살리라, 아니 이렇게는 살지 않으리라 처음 마음을 먹은 때부터 치면 30여 년을 살아오면서, 그러니까 부끄러움을 알기 시작한 후부터 내 삶은 무수한 작은 양보와 타협과 비겁의 연속이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떳떳하고 긍지 높았던 날들은 채 열 손가락을 채우지 못했고, 나머지 날들은 대부분 이러한 소소한 양보와 타협과 비겁을 저지르고 난 뒤 밀려오는 후회와 수치감으로 범벅된 쪽팔리는날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와 내 주변을 둘러보면 그 소소한 양보와 타협과 비겁이 켜켜히 쌓여 이룬 것들뿐이다. 직업이며 재산이며 지위며 이런 것들, 한때는 초개처럼 다 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내 머리를 타고 앉아 거꾸로 내 삶을 호령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온 과정에서 조금씩 쌓여온 부끄러움조차 나는 이제는 마치 면죄부나 보험처럼, 아니면 빛바랜 통행허가증처럼 써먹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조심스럽다. 이 소소한 비겁과 타협들에 길들여져 나도 모르게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는 않을까 싶어서 늘 노심초사한다. 어쩌면 벌써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을지도 모르면서도 버릇처럼 조심하고 습관처럼 반성한다. 마치 반성이 직업인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썩어버릴 것 같아서, 나도 모르는 새 부패의 악취를 흘리고 다닐까봐서.

그러니 나는 이른바 큰 일은 못한다. 이를 테면 언필칭 진보의 이름을 내걸고 세상에 100프로 완전한 것은 없다는 말 같은 것은 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마음속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예수를 부인할 수는 있어도 그걸 차마 소리 내서 말하지는 못한다. 그게 내 알량한 마지막 양심이기도 하고 내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진보라는 이름을 걸고도 살아남는 나름의 최후전술 같은 것이다.

한국사회는 적대사회다. 한편이 생각이 다른 반대편을 절멸하다시피 하면서 만들어진 사회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 적대성과 폭력성은 여전히 전승되어 오고 있다. , 그것이야말로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세력들이 호소할 수 있는, 그리고 이미 효과를 본 바가 있는 최후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부패사회다. 돈과 권력이라는 물신과 그에 대한 무한욕망 외의 나머지 가치들은 모두 폐기처분되어 버린, 그리하여 부패하고도 그것이 부패란 것을 모르는 끔찍한 사회다.

만일 이런 한국사회를 바꾸기를 원하는 흐름을 진보라고 한다면, 그 진보는 거의 100프로 양심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반대파는 그 틈을 파고들어 절멸을 노릴 것이고,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자기도 모르는 새 스스로 부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자유에는 이만하면 되었다가 없다고 했지만, 역으로 양심에도 이만하면 되었다는 없다. 혼자 사적인 삶을 도모한다면 괜찮다. 하지만 공적으로 대중을 상대로, 아니 철옹성 같은 한국의 절대보수세력을 상대로 진보를 참칭하여 싸움을 걸기로 한다면,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 100프로 완전한 것은 없다는 말은 절대로 절대로 하면 안 된다. 그 순간 그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혓바닥부터 잘리거나 썩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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