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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지 않는 <난쏘공> - 최인석의 <연애, 하는 날>

許弛

최인석의 근작 <연애, 하는 날>을 읽었다.

 

 이 작품은 낡은 방식으로 말하면 부르주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 사이의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대립의 기록이며 일말의 감상적 유보도 없는 냉혹한 파멸의 기록이다. 

이 소설은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빈틈없이 부동산 투기사업을 벌여 나가는 장우라는 인물과 그의 처남이면서 친구로 장우의 투기행각을 보조하지만 자신의 무분별한 욕망 때문에 룸펜적 지위로 전락하는 두영이라는 인물, 장우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기혼인 상태에서 장우와 겉잡을 수 없는 불륜의 늪으로 빠져드는 수진, 비정규직으로의 전락을 눈앞에 두고 다니던 기업에서 파업투쟁에 참여하다 투신하여 큰 부상을 입는 수진의 남편 상곤 등 네 명을 중심인물로 두고 전개된다.

당연하게도 장우와 수진의 불륜행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난다. 수진과 연애를 하는 동안 장우는 자신의 삶과 다른 삶, 다른 세계를 엿보고 언뜻 그 세계를 동경도 해 보지만 결국은 가차없고 냉혹한 방식으로 수진과 관계를 단절한다.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장우와의 불안한 삶을 선택했던 수진은 장우와의 이별 이후 거의 생을 포기하다시피 하지만 마지막에 상곤을 다시 만남으로써 생의 의지를 겨우 다잡게 되고, 상곤 역시 승산없는 파업투쟁과 함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려 하지만 결국 수진과 함께 다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남은 것은? 부르주아 장우는 이 사건과 동시에 다가온 사업상의 위기 때문에 잠시 동요하지만 이내 다시 냉정하게 부르주아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대신 그는 어느덧 돌이킬 수 없이 괴물로 변해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반면 어설픈 룸펜 부르주아 흉내를 내던 두영은 감옥으로 가고, 상곤과 수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두 남녀는 다시 살아가게는 되었지만 더 끔찍한 가난과 야만적 세계로의 전락을 피하지 못한다.

 

적대적 계급 간의 사랑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근대소설의 오랜 주제다. 가능하다고 보면 멜로드라마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쪽에 선다. 부르주아 편에서 본다면 그것은 잠시의 쾌락 이외에는 결과적으로는 어떤 이윤도 남지 않는 손해보는 장사이기 때문이고, 프롤레타리아 편에서 보면 그것은 결국 노동 피착취의 연장에 선 성적 피착취의 경험 이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작가는 냉혹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물론 부르주아 계급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남성 간의 연애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이 소설의 메시지는 단지 그 사실의 확인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나아가 지금 이 세상에서 이 적대적인 두 계급의 대립은 어떤 화해도 어떤 개량적 해결도 불가능한, 서로가 서로를 괴물로 인식하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가능하다면 그것은 혁명이나 그에 준하는 비약적 계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무엇보다 전편에 흐르는 하드보일드한 톤과 속도에 의해 웅변하고 있다. 이 소설은 어떤 감상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시종 거칠고 무자비한 속도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 거친 속도감 뒤에 도저한 환멸과 분노가 가로놓여 있음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이 소설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2010년대 버전으로 읽힌다.

이미 AALA포럼 발제문에서 평론가 노지영이 굴뚝청소부 모티프나 난쟁이의 투신 모티프, 뫼비우스의 띠 상징 등을 들어 두 소설 간의 상호텍스트성을 언급한 바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부르-프로 두 계급 간의 적대적 모순관계를 기본 구조로 한다는 점에서나 '사랑'을 그 문제 해결의 시금석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많이 닮았다.

하지만 1970년대의 <난쏘공>은 사랑을 믿었고, 2010년대의 <난쏘공>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 뿐만 아니라 두 계급 사이에 냉혹한 지배-종속 관계 이외에, 무자비한 착취-피착취 관계 이외에 어떤 비물질적 관계-화해, 타협, 용서, 연민, 동정 따위-도 믿지 않는다. 비록 이 소설이 절망적 결말에 이르는 대신 막연하나마 어떤 전망을 향해 열려있기는 하지만, 그 전망은 사랑이나 타협이나 동정에서 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다음 세대인 수진의 딸 주미가 포함된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플래시 몹의 역동적 움직임이 희미하게 암시하는 다른 힘, 말하자면 보다 전면적이고 새로워 이전의 방식으로는 잘 수용될 수 없는 제 3의 어떤 힘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안에 물리적, 정치적 힘을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문화적 힘이기는 하지만, 사랑 따위의 관념적인 것의 힘은 아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두 소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이와는 다른 것이다. <연애, 하는 날>을 읽는 동안 이 소설이 드러내는 대립의 이미지가 왜 유독 더 무자비하고 가차없어 보이는가 생각하던 끝에 나는 이 소설과 <난쏘공>을 구별짓게 하는 결정적 차이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 두 계급간의 투쟁에는 어떠한 중재도 매개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난쏘공>에는 반성하는 중산층 신애가 있고, 학생운동가에서 노동운동가로 전신한 지섭이 있고, 동요하는 부르주아 윤호가 있다. 이들이 자본과 노동 사이에 끼어들어 부르주아들의 양심의 동요를 일으키고, 중산층을 공분하게 하고, 나아가 노동계급의 편에 서서 싸우게 한다. 그 때문에 <난쏘공>의 난제인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씨의 병은 난제인 동시에 희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연애, 하는 날>에는 지섭도 신애도 윤호도 없다. 따라서 어떤 중재도 제3지대도 등거리지점도 없다. 70년대와 80년대에는 있던 것, 중간계급의 완충적 역할이, 양심적 지식인과 운동가들의 동반자적 투신과 헌신적 개입이, 그 사회문화적, 정치적 존재감이 이 소설의 세계에서는, 이 작가의 시야에서는 깡그리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대립은 막막하고, 결코 적당한 지점에서 멈출 수가 없다. 갈데까지 갈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보다 허무적이고 마치 파국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처럼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의 현실과 잘 부합된다. 90년대 이후 신애와 지섭, 윤호는 사회적으로 고갈되어가는 존재들이다. 현실은 갈수록 극악해지지만, 그 극악성에 정면으로 맞설만한 이념적 지표도 그 이념을 운반하고 실천하는 사람들도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연애, 하는 날>에 그런 '운동권' 캐릭터가 설 자리가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40년 동안, 한국의 이른바 변혁운동세력은 자멸하거나 기득권세력화함으로써 연민/자기연민, 혹은 풍자의 대상으로밖에는 문학 속에 들어올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바로 이 점이 이 소설을 읽는 나에겐 제일 아프고 무서운 지점이며, 이 소설의 뒷맛이 쓰디쓴 가장 큰 이유다.


- 최인석의 <연애, 하는 날>'>

차원현 2012.05.11. 8:16 pm 

재밌는 작품이네요. 요즘 웬만한 작품은 챙겨 읽는데...과문이라 그런지 여기서 처음 듣습니다.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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