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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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의 나날, 다시 문학을 생각한다

許弛

지난 4.11 총선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곤혹감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 것이다. 이런저런 분석적 접근을 떠나서 그저 감각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어불성설의 권력 아래 4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현 집권세력에게 다시 또 과반의 의석을 줄 수 있는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박정희의 딸이 등장한다고 해서, 당명을 바꾸고 약간의 개혁적 제스처를 보였다고 해서 바로 지금 자신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는 그들에게 다시 표를 찍어줄 수 있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근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입맛이 쓰디쓰다.

이 곤혹감은 절망감보다는 가벼운 감정이지만 그 뒷감당을 생각하면 어쩌면 훨씬 더 어렵고 무거운 감정이다. 절망감은 말하자면 바닥을 치는 것과 같아서 다시 치고 올라가면 되는 것이고, 그 반등의 힘은 집중적이고 전면적인 것이어서 장차 극적인 반전을 기대해 볼 수도 있는, 차라리 건강한 감정이다. 반면에 곤혹감은 희망/절망처럼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걸고 들어가는 기투적인 것이 아니고 나름의 운산을 거쳐 도모한 일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았을 때 생기는, 그 안에 어떤 역동성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대단히 소모적이고 무기력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곤혹감이 지금 내 가슴을 꽉 메우고 있는 것이다. 세상 참 어렵다는 생각, 어떻게 해 보려 해도 계산이 잘 들어맞지 않는 다는 생각, 뭔가 보이지 않는 장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부쩍 들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그렇다. 여기엔 기분 나쁜 기시감이 있다. 20년 전 1990년대 초반의 기분이 꼭 이랬다. 198712월 대선에서 맛본 허탈함을 넘어 변혁운동이 다시 기운을 차려 노태우정권과 전면전을 시작했던 그 시절, 거리는 연일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했고 죽음의 굿판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목숨을 버리며 그 싸움에 임했지만 결국 운동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고 재가 식어가듯 서서히 그 생명을 다해가던 그 시절, 그때도 나는 절망감보다는 곤혹감에 더 사로잡혔었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그때의 곤혹감이 되살아난다.

20년 전과 지금, 결국 기시감으로 연결된 두 시기의 특징은 한 마디로 대중의 배반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대중은 노태우 정권이 위장한 군부독재권력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직선제 개헌 이상의 어떠한 변혁 프로그램에도 지지를 보내지 않고 기꺼이 운동권을 고립시켰다. 2012년 봄, 대중은 새누리당 정권이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특권세력을 위한 권력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다시 그들을 선택했다. 가을에 대선이 있지만 지금으로선 대선이 희망적이리라는 아무런 보장도 운산도 없다.

1990년대 초반의 배반에는 이유가 있다. 그때 대중은 사상초유의 호황에 따른 물적인 안락함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낡은 변혁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였다. 하지만 지금은 왜? 신자유주의에 의한 고통이 극에 달한 지금 대중은 왜 여전히 보수편향인가. 생각해 보면 역시 이번에도 배반의 이유는 있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 한줌도 안 되는 이른바 운동권에게 유사군부독재정권보다 더 나은 세상을 가져오리란 믿음을 갖지 못했듯, 지금 대중 역시 자신들의 가시권 안에 있는 대안세력인 야당세력 또한 다를 바 없는 부르주아정당에 불과하며 신자유주의의 막강한 힘을 제어할 수 있는 힘도 비젼도 갖지 못했음을 현명하게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므로 20년 전의 곤혹감이 낡고 시대착오적인 변혁이론의 잘못된 운산에서 온 것처럼, 이 봄 내가 다시 느끼는 곤혹감은 그 반대로 대중의 보다 발본적 요구에 못 미치는 개량주의적 정치프로그램의 잘못된 운산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발본적 사유가, 발본적 대안이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현실적 조건이나 제약들, 내면화된 억압이나 금기들로부터 자유로운, 곧이 곧대로 자유와 해방을, 그리고 그것에 이루는 방법들을 솔직히 말하고 그것이 왜 필요한가, 왜 우리에게 그것이 옳은가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이런 나날은 노예의 나날이고 지금 당신의 작은 위안이란 한갓 노예의 휴식이며 죽음의 춤에 불과한 것이라고 깨놓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나는 말이 칼처럼 쓰이던 시절들을 떠올렸고 다시 문학을 생각해 냈다. “문학은 영구혁명중인 사회의 주체성이라는, 사르트르가 발신인이고 되어 있고 가라타니 고진이 한번 중개했던 바 있던 그 유명한 한 구절을 생각해 냈다. 나는 문학에 대해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나의 시대에는 문학은 혁명과 동의어였고, 그렇지 않은 문학은 내겐 허접쓰레기나 마찬가지였다. 과학의 이름으로 된 거시적인 변혁프로그램도, 현실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소소한 개량적 정치프로그램도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과 아귀가 맞아들어가지 않을 때, 어쩌면 더 요긴한 것은 일찍이 문학이 그 이름 아래 세상을 바꾸는 힘이었던, 불가능한 것을 꿈꾸며 가장 불온한 것에 열광하는 낭만적 기획, 유토피아적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그 상상력, 그 기획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뜨거운 어떤 것을 위해 문학이 다시 앞장설 수 있는가 어떤가 지금 나는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가능할까? 문학이, 문학은, 문학으로?

 


신동흔 2012.05.01. 9:29 am 

잘 읽었습니다. 그날 밤, 저도 잠을 이룰 수 없었지요..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조금 달랐지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더랍니다. '머리'로는, '논리'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는 거라고. 가슴을 움직여야 하고, 그보다 몸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회의나 비판에 앞서, 모든 잘못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절감하며 기꺼이 두 손 내밀어 끌어안는 것이 답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등등...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감상적이 되는 걸 보면 아직도 제가 세상 경험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떻든 제가 믿는 것은 문학의 힘! 특히 이야기의 힘!! 함께 힘내도록 하시지요.

許弛 2012.05.02. 10:47 pm 

신동흔선생, 선거 전날 뜨거운 독려 메시지가 생각나는군요. 우리에게 모든 잘못이 있단 말이 맞습니다.

차원현 2012.05.11. 8:15 pm 

평소 존걍하는 두 분이 의기투합하셨군요.^^. 두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생각할 꺼리가 많은 정치 이벤트였어요. 먹물로서, 문학으로 밥벌이하는 처지에서...뭘 해야 할지 저도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許弛 2012.05.15. 4:12 pm 

차선생, 역시 비평가 답게 비판적 거리를 냉정히 유지하는군. 차마 '존경'한다고 하지 않고 짐짓 오타를 가장해 '존걍'한다고 하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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