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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보내는 짧은 편지

마당

영국에서 보내는 짧은 편지

 

  저는 지금 런던 서남부의 서비튼이라는 동네의 다운타운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까페 건물의 이층에 있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방 하나, 거실 하나, 주방, 화장실 하나씩 있는 15평 정도되는 주상복합 살림집의 거실이자 서재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서비튼이라는 곳은 ‘그레이터 런던’에는 소속되어 있지만 사실은 런던 외곽에 있는, 우리로 말하면 평촌, 산본 쯤 되는 동네입니다 올해 3월부터 학교에서 연구년을 받았는데 건강을 핑계로 집에서 펀펀 놀다가 기왕 노는 김에 이번 9월부터 내년 2월까지 후반부 반년은 좀 멀리 가서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런던대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 방문교수라는 명칭으로 신분세탁(?)을 해서 여기 와 있게 된 겁니다.

 

  한국을 떠난 지 이제 한 달이 되었는데 공간적 거리가 시간적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지 뭔가 아득합니다. 어쩌면 지독한 여름비와 끝물 더위에 쫓겨 도망치듯 떠난 길이라 그런지 떠나온 쪽 일들을 일부러 의식 속의 더 먼 곳에 배치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그렇겠지요. 물리적으로도 이쪽 IT 환경이 썩 활발하지가 않아 한동안 소식 접하기도 여의치 않았던 것도 있구요. 하지만 흉흉한 소문은 애써 접하려 하지 않아도 시공간을 접어가며 빨리 도착합니다. 오늘 도착한 금융위기 소식부터(이거 없는 내 돈 팔아 남의 돈 사서 쓰는 입장에선 좀 초조합니다) MB정권 실세들의 비리 릴레이 소식, 난데없는 정전사태 소식 등은 들으려 하지 않아도 이곳 교민사회에서조차도 단연 화제가 되고 있지요. 곁들여서 흉흉한 소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안모, 박모 등 비제도권 인사들의 정치 입문 관련 이야기들도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하지만 저에겐 모두 강 건너 불입니다. 한국에 있었어도 일개 서생이 비분강개 외엔 할 일도 없었겠지만(아닌 게 아니라 작년 말부터 올 초 사이 제가 비분강개하느라 몸이 좀 많이 상하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서 비분강개는 좀 뜬금없는 일이 되겠지요. 그리고 더구나 제가 와 있는 이 나라의 분위기가 흥분이나 감개 등과는 거리가 멀어서 더 그렇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열심히 나날의 싸움에 임하고 있는 동도(同道)들께서 들으면 무슨 도끼자루 썩는 얘긴가 하시겠지만, 제가 인사 삼아 변명 삼아 드리고 싶은 말씀도 이곳의 요지부동에 가까운 정적인 분위기와 도무지 서두르지 않는 느린 속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절대 흥분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 영국 생활 한 달 동안 가장 먼저 제 뇌리에 와 박힌 이 나라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묵묵히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새치기하는 사람도 바쁘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길을 가다 서로 부딪칠 가능성만 보여도 먼저 쏘리라고, 자기 잘못이라고 비켜섭니다. 주말의 술집에서 외에는 이 사람들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차도에서도 자동차들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양보하고 기다립니다. 모든 게 조용합니다. 세상이 하도 조용해서 변덕스러운 날씨가 오히려 무색할 지경입니다.

 

  이곳에 비교적 장기간 체류하게 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힘겨워 하는 것이 바로 느려터진 공사 간 서비스입니다. 인터넷 개통은 3주가 기본이고 자녀들 학교를 보내려고 해도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무조건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빨리 처리되면 2주 정도, 늦으면 한 달 정도 기다리다가 겨우 학교배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중고차를 사고 구청에 가면 그 즉시로 자기 명의의 등록증이 나오지요? 여기서는 20일만에 등록증이 우송되어 오더군요. 이런 나라입니다. 저는 게다가 6개월 체류자가 되어서 이곳 은행 계좌도 만들기 쉽지 않고, 계좌가 없으니 인터넷이나 케이블 TV도 신청하기 힘들고,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아 이들의 느리고 어수룩한 일처리에 대해 더 예민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만 아무튼 이곳의 모든 시간은 느리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모두들 그것을 잘 견디고 삽니다.

 

  한국에서는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이 모든 서비스산업이나 공공서비스의 금과옥조처럼 되어 있습니다만, 이곳은 그런 말이 안 통합니다. 소비자도 인간이고, 공급자 특히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나 자영업자들도 인간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결코 수요자, 소비자의 시계에 시간을 맞추지 않습니다. 다 자기들의 시계를 따릅니다. 내가 지금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있지만 자기도 다른 곳에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서비스하고 있고 내가 지금 여기서 재촉을 하면 자기도 다른 곳에서 재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일종의 반속도 반과잉노동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영국병이라구요? 그래서 이 나라가 침체되고 이 나라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 졌다구요? 그건 신자유주의자들이 만든 병적인 신화입니다. 이 사람들 잘 삽니다. 얄미울 정도로 잘 살지요. 오히려 과거 제국시절에 비하면 남의 나라 착취하지 않고 이만큼이나마 사는 게 얼마나 마음 편하겠습니까. 어찌 보면 잘 사니까, 살만 하니까 흥분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지사지하고 나눌 줄 아는 것이지요. 이 지점이 사실은 아프고도 부러운 지점입니다. 지금은 그 영광이 다 사그러졌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한 세기 이상 제국의 주인들이었습니다. 그 좋은 세월 동안 세상에서 좋은 것 즐거운 것 다 누려본 사람들이지요. 그러다가 그게 영원하지 않다는 것, 한 순간 다 스러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서두르고 흥분하고 집착하면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도 다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이들은 기본적으로 넓은 의미의 보수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좋고 화려해 보여도 저것이 나중에 어떤 화나 부작용을 가져올지 모른다, 혹은 가져올 확률이 높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불나비처럼 쏠려다니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시간의 단련을 받아서 정말 안심해도 좋을 때 취해도 상관이 없다는 거지요. 이것이 한때 세계제국을 경영한 적이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현명한 냉정이고 느림의 본질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시, 보고 싶지 않아도 우리나라, 한국을 보게 됩니다. 제국이 아니라 식민지였던 내 나라를 봅니다. 그리고 그 악다구니 같은 삶들을 봅니다. 남보다 하나만 덜 가져도, 남보다 1초만 느려도 큰 일 날 것 같은 나날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내 나라 사람들을 봅니다. 어떻게든 단 열평짜리라도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나라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든 시세가 좋은 아파트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땅 위에 살고, 우리는 허공 위에 사는 것이겠지요. 이 사람들은 태어난 곳에서 살다 죽고, 우리는 언제나 임시막사 같은 곳에서 살다가 다시는 태어난 고향에는 돌아가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겠지요.

 

  한 달이 못 되어서 저도 영국병이 드나봅니다. 하지만 떠나온 곳이 아득할수록, 이곳이 부럽고 시새울수록 계절처럼 깊어지는 것은 사실은 한국병입니다. 이제 5개월 뒷면 돌아가 뵙겠습니다. 모두들 건강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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