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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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許弛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기온에 관한 통계자료를 들춰보지는 않았지만 경험상 최근 몇 년 사이, 아니 거의 10년 정도 안에 이렇게 더웠던 여름을 기억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체감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집에 에어컨이 있지만 그동안 거의 꺼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올해는 7월 하순 경부터 거의 매일 에어컨을 한 두 시간이라도 안 켤 때가 없었다. 기상청에 의하면 올 여름은 예년보다 평균 1~2도가 높다고 하는데 그 1~2도 차이가 아마도 이런 체감온도, 심리온도의 증폭을 불러온 것 같다. 태풍이 온다고 서울 하늘에 먹장구름이 가득 끼었는데도 집안은 온실 속이다. 지난 5월에는 올 여름은 엘니뇨가 아닌 라니냐의 영향으로 이상저온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허위예보가 되고 말았다. 이미 지난 4월의 이상저온 현상도 전혀 예측되지 못했던 터라 이젠 기존의 중・장기 기상예보시스템은 거의 신뢰성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 신문에는 러시아가 1천년만의 폭염에 휩싸여 있으며 중국, 파키스탄 등 아시아 대부분은 홍수와 산사태 등 물벼락을 맞고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세계 기상기구(WMO)에 의하면 올해는 기상관측이 시작된 19세기 중반 이래 가장 더운 여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한다. 반면 남미 대륙 등에서는 이상 저온으로 동사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하니 이젠 올 겨울 강추위를 벌써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다들 또 기후담론인가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또 기후담론이다. 인위적 온실가스량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온난화가 지구생태를 미증유의 혼란과 파국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일종의 과잉담론일 수도 있다는 일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젠 피할 수 없는 상식이 되어 버린 것은 확실하다. 거꾸로 그것이 상식이 된 만큼 이젠 언급 자체가 식상한 것이 되어 버린 측면도 없지 않다. 설마 정말 큰일이야 나겠어? 아니면 어떻게든 잘 버텨 나가겠지, 혹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들이 그 끔찍한 상식을 식상한 상식으로 바꾸는 심리기제들일 것이다. 하지만 기상이변과 그로 인한 전지구적 파국이라는 묵시록적 예측을 식상한 상식으로 바꾸어 버린 것은, 그리고 이러한 낙관적이거나 자포자기적 심리기제가 주조가 되어 버린 것은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환경의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겸손하게 대응하는 대신 그것을 인간이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치부하고 기왕에 만들어진 인공환경의 지속가능성을 확신하는 것은 또 다른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미신은 이러한 반자연적 근대문명의 지속에 목숨을 건, 아니 마치 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이제는 멈출 수도 내려올 수도 없게 된 자본주의의 파괴적 허무주의의 소산일 뿐이다. 기상이변과 그로 인한 파국을 예상하고, 반성할 것을 반성하고, 준비하고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키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럽고 상부상조하는 인간의 유적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며 근대적 합리주의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북극해의 완전한 해빙, 영구 동토대의 해빙 및 해수온도 상승과 메탄 하이드레이트 대용출, 한난류 대류 정지와 북반구 빙하화, 해수면 상승과 지구 저지대 대규모 침수, 생태계 교란..... 이런 자연적 재앙의 1차 파괴력은 물론 그로부터 예상되는 교통, 통신, 교역, 식량 등 지구시스템의 붕괴 등 사회적 재앙의 2차 파괴력이 지구 전체를 산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석유 에너지 고갈과 근대 산업문명의 종언이라는 또 하나의 파국적 시나리오까지 덧붙일 것도 없다. 아마도 이 같은 시나리오의 현실화가 진정 확실시된다면 인류사회는 이러한 재앙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종말론적 혼란에 빠져 자멸의 길로 들어설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지금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설사 그 심각성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이렇다 할 대처방법이 없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근대 이후 인간의 모든 사유는 몇 개의 허약한 전제 위에 불안하게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전제들은 첫째, 지구의 자연환경은 불변하며 거의 영원히 지속가능하다, 둘째, 따라서 생산력 발전은 지속될 것이며 그에 따라 인류사회는 물질적・정신적 진보를 위한 물적 토대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셋째, 과학기술의 발전은 어떠한 자연환경의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다 등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 중 하나라도 부정된다면 근대문명세계의 모든 패러다임은 송두리째 부정되고 자연과학, 공학, 사회과학은 물론 대부분의 인문학적 패러다임들도 모두 갑자기 패닉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지구환경의 지속가능성이 의문시되는 상황에서 인본주의에 기초한 어떠한 근대적 패러다임도 살아남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얼마간 줄이자는 논의조차도 수십 년 간 표류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경제발전의 속도를 줄이자거나 생산력 발전 수준을 제한하자거나 하는 논의가 어디 씨알이나 먹힐 것인가. 하물며 발전의 패러다임을 포기하고 다시 소농사회로 돌아가자는 논의 같은 것은 광야의 외침 정도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지구생태계의 붕괴야말로 현실적인 것이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재의 근대시스템과 사고방식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빙산으로 돌진하는 타이타닉호의 승객들처럼 무사태평하게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싸우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꿈꾸고 있다. 도무지 말이 안 먹히는 것이다.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다만 발가락 하나라도 이 필멸의 근대문명의 패러다임의 바깥에 세워보고자 가까운 근교 농촌에 무리해서 땅을 마련하고 오두막을 짓고 텃밭을 가꾸는 포즈를 취해 보지만 뼛속 깊이 근대인으로서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짓거리 외의 별다른 노력을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나만 해도 지식인이랍시고 빈곤과 불평등,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눈앞의 현실과 맞서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쩔쩔매는 형편인데,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비록 내일 지구가 깨진다 해도 오늘 지구의 안녕을 살필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엄습하는 불안이 이 가엾은 영혼을 잠식하는 것조차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근대를 사는 것이 모순을 사는 것이라 해도 이 엄청난 모순조차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여 기꺼이 그에 순사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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