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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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를 시작하며

김명인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김수영의 걸작 <거대한 뿌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끔찍하도록 후진적인 한국 땅에서 시를 쓰고 혁명을 꿈꾸던 시인에게 '앉는다는 것'은 주저앉는 것외에 다른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그는 앉는 대신 꼿꼿이 서고 싶었을 것이고 서 있는 대신 달리고 싶었을 것이고 달리는 대신 온몸으로 온몸을 들어올려 '그림자도 없이' 날아가고 싶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그는 앉을 일이 있으면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고 앉음으로써 '앉음'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앉는 법을 모른다'는 진술은 사실은 '앉지 않겠다'는 결기를 은폐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던 그가 이북친구들을 만나면 도사리고 앉던 예의 앉음새를 고칩니다. 그냥 이북친구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대지에 확고하게 두 발을 붙인, 아니 뿌리를 내린 강자들이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그들을 강자로 만들었는가,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게 자기는 갖지 못한 '전통'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더러운 진창을 벗어나는 것만이 능사겠는가, 그 진창을 운명으로 알고 거기 뿌리를 내리는 것이 사실은 몸 가볍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것보다 더 '선진적'인 것, 더 근대적인 것이지 않겠는가, 김수영은 5.16 쿠데타의 충격으로부터 그렇게 빠져나오는 것 같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이 시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속도'를 노래하지 않게됩니다. 대지에 뿌리내렸지만 바람에 나부껴 휘황하게 춤추는 <풀>이 보여주는 '구속과 자유의 변증법'이 여기서 발아한다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저도 앉는 법을 잘 모릅니다.

한때는 저도 김수영과 똑같은 맥락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명백하고도 투명한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존재에게 앉는 법 따위가 무슨 상관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젠 그런 투명성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지요. 그렇다고 김수영처럼 유난스럽게 전통을, 뿌리를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앉지도 서지도 뛰지도 날지도 못하는 형국이지요. 결기 대신 당황, 혹은 불안만 남은 셈인가요?

비단 삶과 세계에 대한 자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형이하학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때는 '운동가'를 자처했었고 또 '문학평론가'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선생'이기도 하고 '한국문학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잡문을 통해 일종의 '시사평론가' 노릇도 적지 않게 하는 편입니다. 목이 말라 정작 필요한 것은 시원한 샘물 한 바가지인데 그 샘물 한 바가지를 얻지 못해 똥마려운 개처럼 돌아다니면서 때로는 쓴 술 한 잔, 때로는 미지근한 물 반 잔, 녹다 만 아이스크림 한 조각, 혹은 시큼한 합성음료 한 모금...... 이렇게 임시변통으로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도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이 자리는 분명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모인 자리, 여지없이 정좌하고 문학을 논해야 할 터인데 저는 또 어설프게 '세상'을 곁눈질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인들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읽기'로는 여전히 성이 안 차니 어쩝니까. 아무튼 모처럼 마련된 자리이므로 '세상읽기'라는 이름 아래 세상읽기가 벅차면 문학읽기로 가고 문학읽기가  성에 안 차면 세상읽기로 가고 하면서 여러분들과 말문을 터보겠습니다.

 

201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30주년이 되는 날, 삼가 붓을 다시 잡으면서

 

김명인

 

 


김영 2010.05.20. 9:47 am 

한겨레과 경향신문의 지면을 통해 날카로운 시론을 보여주었고 요즘은 <시사IN>의 권말 칼럼을 쓰고 있는 우리 김 선생의 글을 통해 어지러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겠군요.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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