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 신동흔의 '옛 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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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그네와 옛이야기의 정치학

신동흔



두 나그네와 옛이야기의 정치학

- 상생의 평화와 상쇄의 쟁투 사이

 

 

두 나그네의 상반된 행보

어느 날 구두장이와 재봉사가 여행길에서 마주쳤다. 작고 예쁘고 명랑했던 재봉사는 마주 오는 구두장이를 보며 놀림 섞인 노래를 불렀다. 구두장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멱살을 잡으려 하자 재봉사는 웃으며 술병을 건네고 화해를 청했다. 술을 얻어 마신 구두장이와 재봉사는 동행이 되어 큰 도시로 향했다. 늘 쾌활한 덕에 벌이가 좋았던 재봉사는 삐딱한 구두장이한테 번 것을 기꺼이 나누어주고 함께 맛난 음식을 먹었다.

그들은 수도로 이어지는 숲 앞의 갈림길에서 한 길을 택했다. 길은 이틀 아니면 이레가 걸릴 터였다. 구두장이는 이레분의 빵을 챙겨서 짊어졌지만, 재봉사는 행운을 믿고 이틀분의 빵만 준비했다. 구두장이가 끙끙거리며 길을 갈 때 재봉사는 쾌활하게 숲속을 다니며 즐겼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돼도 숲은 끝나지 않았다. 닷새째 되는 날 굶주림을 못 견딘 재봉사가 빵을 청하자 구두장이는 그를 비웃으며 한쪽 눈을 도려내는 조건으로 빵을 주었다. 그 다음날 재봉사는 빵을 얻기 위해 또 다른 눈을 내놓아야 했다.

숲을 나온 구두장이는 눈먼 재봉사를 들판의 교수대 앞에 눕혀 놓고 길을 떠났다. 어둠 속에서 괴로워하던 재봉사한테 교수대에 매달린 시체들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교수대에서 떨어진 이슬로 눈을 씻으면 눈이 떠진다는 것이었다. 재봉사가 그 말대로 하자 정말로 눈이 되살아났다. 그는 하느님한테 감사하고 죄인을 위해 기도한 뒤 다시 즐겁게 길을 나아갔다. 그는 길에서 망아지와 황새와 오리 새끼와 꿀벌들을 포획할 뻔했지만 그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피로와 배고픔을 무릅쓰고 그들을 놓아주었다.

시내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한 재봉사는 남다른 솜씨로 금세 유명해졌다. 그는 머지않아 궁정의 재단사로 임명되었는데 공교롭게 구두장이도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구두장이는 자기가 당하기 전에 선수를 칠 양으로 임금한테 재봉사를 모함해서 실행 불가능한 과업을 맡기게 했다. 잃어버린 왕관을 찾고, 수많은 밀랍 모형을 만들고, 궁정에 우물이 솟구치게 하고, 없는 아들을 데려오도록 하는 일이었다. 포기하고 떠나려던 재봉사는 오리와 꿀벌과 망아지와 황새의 도움으로 과업을 차례로 완수했다. 그 보상으로 재봉사는 큰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 구두장이는 재봉사가 결혼식 때 신을 신발을 만들어야 했다.

구두가 만들어지자 왕은 구두장이에게 영원히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길을 떠나 교수대에 도착한 구두장이는 화나고 지친 채로 그 아래 주저앉았다. 그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에 교수대 위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내리 닥쳐서 두 눈을 쪼아버렸다. 구두장이는 미친 듯 숲속으로 달려갔다. 그 후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시 굶어죽었을 것이다.

 

()의 길과 귀()의 길

그림형제 민담 <두 나그네(Die beiden Wanderer; KHM 107)>의 사연이다. 같은 길 위에 선 두 나그네. 하는 일도 큰 차이가 없다. 하나는 재봉사, 하나는 구두장이. 지체도 비슷하고 체구도 엇비슷했을 것 같은 두 사람은 겉보기에 별달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달라도 아주 달랐다. 어느 정도로 다른가 하면 뼛속에서부터. 재봉사는 밝고 가벼운 믿음의 존재였고, 구두장이는 어둡게 뒤틀린 불신의 존재였다. 반대되는 몸을 가진 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가게 된 터였다.

이야기는 재봉사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 속에서 즐겁게 움직였다고 말하고 있다. 밝음과 믿음으로 가득한 그의 길은 하느님의 길, ()의 길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 맞은편에서 재봉사를 뒤틀어 주저앉히려 하는 구두장이는 악마의 길, 또는 ()의 길을 가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굶주린 재봉사를 비웃으며 눈을 도려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악귀이다. 그림형제 민담에 많은 악인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도 극단이라 할 정도다. 더군다나 그는 마녀나 거인도 아니고 난쟁이도 아닌 보통 사람이다. 나란히 길을 가고 있는 이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어찌 인간이 그럴 수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헤아려 보면 만만치가 않다. 갖은 협박과 폭력으로 채무자를 괴롭혀 피를 짜내고 파멸로까지 몰아넣는 악덕 사채업자 같은 인간이 실재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당연한 자기 일로 생각하며 누군가의 아버지나 친구로 잘 살아가고 있을 테니 저 구두장이의 행보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어쩌면 타인이 아닌 우리 자신 속에도 저 비슷한 악귀가 앉아있을지 모른다. 내 옆에 나란히 있는 사람이 더 잘 나가는 걸 참지 못하는 마음속에 말이다.

실상 이 이야기는 서사의 대립구도와 주제가 워낙 명료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바른 길과 그른 길을 가는 사람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결국 정도(正道)의 삶이 하늘의 보상을 받게 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기본 틀이 된다. 눈을 되찾은 재봉사가 공주와 결혼하고 구두장이가 눈을 잃고 죽었다는 결말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의 주제를 확인시켜 주는 완전한 결말이 된다. 이야기는 구두장이가 스스로 교수대 밑에 누웠다고 함으로써 그 비참한 종말이 자기 자신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상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왠지 마음을 무겁게 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야기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는 재봉사가 숲에서 나온 그날 밤 눈을 되찾고서 다시 명랑해졌다고 말하지만, 악귀 같은 폭력으로부터의 회복이 그리 쉽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기에는 상처와 배반감이 너무 컸을 것 같다. 이와 함께 이 이야기가 마음을 무겁게 한 또 다른 맥락이 있다. 좀 엉뚱하게도 이 이야기에서 인간세상의 좌우 대립이라는 의미 요소가 읽히는 것이다.

 

상호부조의 공생과 적자생존의 경쟁

내가 이 이야기에서 좌우 대립의 요소를 보게 된 것은 아마도 김어준 식 정치담론의 영향일 듯하다. 그가 풀어내는 좌파와 우파에 대한 설명은 꽤나 인상적이고 설득적이다. 그는 좌파가 상호부조의 공생을 통해 삶이라는 정글을 헤쳐 나가려는 이상주의자라면 우파는 약육강식의 경쟁논리로 무장한 현실주의자라고 설명한다. 무서운 것은 그게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생물학적 차이라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저 재봉사와 구두장이가 어떤가 하면 꼭 이와 같다. 몸이 다른 두 사람. 함께 길을 가지만 한 사람은 왼쪽으로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고 있다. 동행자의 선의를 믿고 가진 것을 나누어 누리려는 재봉사가 낙관적 이상주의자로서 좌파 쪽이라면 자기 것을 철저히 챙기며 늘 경계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구두장이는 본능적 현실주의자로서 우파라 할 수 있다. 재봉사가 숲속에서 약점을 보이자 구두장이가 가차 없이 그를 짓밟는 것은 전형적인 우파적 생존 방식이 된다. 먼저 자기 배를 채우고 난 뒤에 남은 찌꺼기로 상대방을 길들이는 것, 그게 바로 자본가의 삶의 방식이 아닌가 말이다. 구두장이가 빵의 대가로 재봉사의 눈알을 뽑는 것은 이면에서 볼 때 무척 현실적인 의미 맥락을 지니는 셈이다.

앞서 이야기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말했거니와, 좌우 대립이라는 화두를 놓고 보면 그 거리감은 더 커 보인다.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짓밟는 적자생존의 경쟁논리가 갈수록 득세하는 형국이다. 논리보다 본능에 가까운 그 경쟁의 몸짓은 참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꾀하는 평화의 몸짓이 몇몇 소수의 폭력적 공세에 의해 무참히 훼손되는 것이 세상살이의 실상이다. 이야기는 재봉사가 보기 좋게 구두장이한테 이겼다고 말하지만, 아니 구두장이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스러졌다 하지만, 우리 사는 현실도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야기의 힘을 믿고 옛이야기의 철학을 신뢰하는 입장에서, 세상은 결국 순리로 돌아가 상생의 평화가 펼쳐지리라고 믿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눈을 잃은 것처럼 깜깜하기만 하더라도, 역사는 이미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감이 자꾸 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구두장이의 음모로 큰 시험 앞에 직면한 재봉사가 자신감을 잃고 도망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과연 그 시험은 극복될 수 있을까? 망아지와 오리, 황새, 꿀벌들로 표상되는 약한 존재들의 수평적 연대를 통해서? 하긴 그렇다. 그렇게 믿고 노력하는 길 외에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스스로 구두장이가 될 수 없다면 말이다.

 

날아오르는 종달새가 되고 싶지만

옛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는 세상의 맨얼굴을 돌아볼 때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제목은 <굴뚝새(Der Zaunkoenig ; KHM 171)>. 우화의 성격을 지니는 길지 않은 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에도 옛이야기의 정치학이 오롯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있다.


먼 옛날, 모든 소리마다 뜻이 있던 시절의 일이다. 이때는 새들도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새들은 무리를 이끌 왕을 뽑기로 뜻을 모았다. 단 하나, 푸른 도요새만은 반대였다. 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유롭게 죽기를 바랐다. 그는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늪으로 가서 잠적했다.

아름다운 오월의 어느 아침, 수많은 새들이 시끌벅적 떠든 끝에 가장 높이 나는 새를 왕으로 삼기로 했다. 새들은 곧바로 시합에 나섰다. 요란하게 새들이 날아오른 뒤 점차 승부가 가려지기 시작했다. 작은 새들부터 시작해서 많은 새들이 차례로 떨어져 나간 뒤 맨 마지막까지 남은 건 독수리였다. 독수리가 땅에 내리자 다들 그가 왕이라고 소리쳤다. 이때 독수리 깃털 속에서 작은 새 하나가 나오며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혼자서 하늘로 솟구쳐 보인 다음 자기가 왕이라고 소리쳤다. 새들의 항의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새들은 다시 땅속에 제일 깊이 들어가는 새를 왕으로 뽑기로 했다. 다들 헤매고 있을 때에 다시 작은 새가 쥐구멍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나와서는 자기가 왕이라고 소리쳤다. 새들은 이번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작은 새를 구멍에 가두어 굶겨 죽이려 했다. 올빼미가 감시를 맡았는데, 피곤해서 두 눈을 감은 사이에 작은 새가 구멍에서 나와 날아갔다. 자기보호를 위해 산울타리 속에 기어들어간 작은 새는 안전하다 싶으면 머리를 내밀고서 자기가 왕이라고 외쳤다. 그 새는 울타리의 왕(굴뚝새)’이라는 조롱 섞인 이름을 얻게 되었다.

울타리의 왕, 그러니까 굴뚝새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어서 제일 기뻐한 것은 종달새였다. 해가 비치는 날이면 종달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이렇게 외친다. “, 아름답구나! 정말 아름다워!”


이솝 우화를 보는 듯 해학적이고도 풍자적인 이야기다. 여러 새들의 가지각색 행동거지가 꽤나 희화적이다. 하지만 그 우스꽝스런 모습들 속에는 세상 사람들의 발가벗은 모습이 담겨 있다. 경쟁과 술수의 정치현실 속에서 아웅다웅 우격다짐하며 서로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모습이.

처음부터 그랬었던 것은 아니다. 저 새들은 본래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존재였다. 하지만 으로 표상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퍼지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겉으로 내세워진 것은 규율과 질서, 또는 안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래 작동하는 것은 서로가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올라서고자 하는 무한의 생존경쟁이었다. 그 정점의 자리를 놓고서 힘센 자와 술수에 능한 자가 경합한다. 결국 술수의 존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다른 자들은 이를 부정하며 화를 내고 항의한다. 그렇게 분란은 끊이지 않는다. 저 모습은 우리네 정치현실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만약 왕을 뽑기 위한 경쟁에 굴뚝새가 끼어들지 않아서 독수리가 순조롭게 왕의 자리를 차지했다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을까? 그럴 리 없다. 땅으로 들어가기 시합이 이어진 것처럼, 또 다른 기준을 내세운 불만과 저항이 이어졌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권력을 쥔 독수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경쟁과 분란이 가득했을 것이다. 너나없이 서로를 짓누르며 올라서려 하는 세상에서, ‘구두장이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와 공생을 기대하는 것은 사막에서 물고기 잡기와 같을 것이다.

그 분란의 와중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두 존재는 도요새와 종달새다. 애초부터 권력을 구속으로 여겨서 거부한 푸른 도요새에서 우리는 아나키스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남다른 혜안(慧眼)이었으나, 그의 운명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수자 아웃사이더가 되어 잦아지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쓸쓸하고 허무한 일이다. 한편 종달새에게서는 도요새와 또 다른 형태의 자유주의자를 보게 된다. 세상과 단절하지 않고 공존의 길을 취했으면서도 얽매임 없이 자기 식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가 종달새다. 남들이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르며 노래하는 저 종달새는 얼마나 멋진지! 사람으로 치자면 종달새는 앞의 재봉사와 통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한테 종달새처럼 살라고 말한다. 사람들을 밟고 올라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별로 없으니 가능할 것도 같다. 하지만 한편에서 다른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잡는다. 세상일을 밀쳐놓고 혼자 편하게 즐기는 건 도피이고 방관이라 말한다. 그리하면 세상은 더 혼탁해질 것이라 한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무리 속에서 한몫의 역할을 하면서 자기 삶을 사는 종달새? 글쎄, 이번 화두는 어렵고 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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