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 신동흔의 '옛 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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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세상의 주먹만한 아이

신동흔

옛이야기는 상상의 문학이다. 이야기 속에는 세상에서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존재들이 가득하다. 머리가 몇 개씩 달린 괴물이나 아득히 몸집이 큰 거인들이 쭉쭉 활보한다. 그런 괴물이나 거인을 보기 좋게 제압하는 힘센 용사나 신통한 재주꾼들도 속속 등장한다.

크고 위압적인 존재들 이상으로 마음을 끄는 것은 작고 미약한 존재들이다. 눈에 잘 안 띌 정도로 작은 사람들. 어느 정도냐면 크기가 보통 사람의 손바닥이나 손가락만큼밖에 안 될 정도. 외국 동화 속의 엄지둥이나 엄지공주가 유명하지만 우리 옛이야기에도 그런 주인공이 있다. 일컬어 주먹만 한 아이, 또는 ‘주먹이’다. 

옛날에 어떤 부부가 자식 두기를 고대하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크기가 방울만 했다. 밖에 나돌아 다닐 나이가 됐는데도 여전히 주먹만큼밖에 안돼서 주먹이라 불렸다. 그는 눈에 잘 안 띌 만큼 작았지만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할 일을 다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낚시를 할 때에 주머니 속에 있던 주먹이는 갑갑해서 슬쩍 밖으로 빠져나왔다. 풀밭을 쏘다니던 주먹이는 풀과 함께 누렁소한테 꿀꺽 삼켜지고 말았다. 이리저리 나뒹굴던 주먹이가 정신을 차려 배를 마구 차고 꼬집자 소가 놀라서 똥을 싸질렀다. 똥에 묻혀서 나온 주먹이가 한숨을 돌리려 할 적에 솔개가 날아와 그를 훌쩍 낚아챘다. 주먹이가 솔개에 채여 날아가면서 세상을 아득히 내려다볼 때 황조롱이가 솔개에게 달려들어 싸움이 났다. 그 서슬에 발에서 놓여난 주먹이가 까마득히 떨어지는데 다행히 땅이 아닌 물에 퐁당 떨어졌다. 그때 쏘가리가 성큼 헤엄쳐 와서 주먹이를 꿀꺽 삼켰다. 주먹이는 쏘가리 뱃속에서 숨이 막혀 가면서 힘껏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렀다. 마침 낚시로 쏘가리를 낚았던 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 쏘가리 배를 가르자 주먹이가 폴짝 튀어 나왔다. 주먹이가 그간 겪었던 일을 들려주자 사람들이 다들 놀라며 즐거워했다.

주먹 크기만 한 아이라니 상상이 잘 안 갈 정도다. 이렇게 자그마한 아이가 진짜로 살아서 빨빨거리면서 우당탕퉁탕 뛰어다닌다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일까. 하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당사자로선 여간 고단한 게 아니다. 그한테 이 세상은 참으로 크고도 험하다. 사방 천지가 아찔한 위험물로 가득하다. 어찌 황소나 솔개나 쏘가리뿐일까. 쥐나 개구리, 거미만 만나도 사투를 해야 했을 것이다. 우박이나 빗방울 하나만 잘못 맞더라도! 

이렇게 보면 주먹이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주머니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상책일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앉아 있으면 무슨 재미이겠는가. 넓은 세상을 맘껏 쏘다니며 이런저런 신기한 일들을 겪어 보는 것이 답이다. 황소 뱃속에 들어가고 솔개 발에 매달려 날아가는 것은 무척 겁나는 일이지만 신나는 모험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은 해볼 수 없는 혼자만의 일이기 때문에 그 모험은 더 놀랍고 특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얼핏 주먹이는 우리와 무척 다른 특별한 존재 같지만, 꼭 그리 볼 일은 아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주먹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참으로 크고 넓은 게 이 세상이다. 하늘이든 땅이든 아득해서 끝이 없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주먹은커녕 개미보다 작아 보일 것이다. 주먹이가 황소한테 먹히고 솔개한테 채였다고 하는데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에 우리를 통째로 삼키거나 낚아채려고 하는 무서운 함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중요한 건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세상이 크고 무섭다고 숨어서 피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주먹이가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일이 된다. 편하고 안전할지 모르지만 어둡고 지루하며 답답한 일이다. 좀 과장하면, 살아 있되 살아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움직이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다. 움직이면서 만나게 되는 문제들은 어떻게든 해법이 있기 마련이다. 저 주먹이가 거듭 위험에서 헤쳐나온 것처럼 말이다. 설령 해법을 못 찾은들 또 어떠랴. 소신껏 길을 가다 아름답게 부서지는 것 또한 하나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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