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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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의 벗, 가람 이병기

마당

난초의 벗, 가람 이병기

올 가을엔 학교에서 가람 탄생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벌였다. 하여, 평소에는 찾기 힘들던 여산읍 가람생가도 자주 찾게 되었다. 가람생가로 가는 길은 금마에서 논산방향으로 새로 난 국도에서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여 다시 길 아래로 뚫린 길을 되 집어 와야 한다. 목포에서부터 시작해 금마를 거쳐 여산으로 흐르는 국도 1호선은 천년도 더 된 길이다. 전라도에서 서울을 가던 이 길은 전봉준이 압송되던 길이며, 동학꾼들이 삼례봉기를 위해 부지런히 오갔을 길이다. 지금은 넓어진 보폭만큼 여유 없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철모르는 매미소리 같다. 진사골 생가까지는 가람생가의 거의 전용도로가 된 2차선 포장도로가 나 있다. 가람의 생가를 찾아가는 늦봄엔 황사가 자욱했다. 곰솔이 유명한 신 작리를 통과하는 새로 난 큰 도로는 차들이 씽씽 달린다. 가람생가 가는 소롯길은 그 아래 말줄임표처럼 펼쳐져 있다. 여기서부터 가람의 고향 ‘진사마을’이다. 마을 입구의 자목련이 자욱한 먼지에 얼굴을 찌푸린다.

 

가람 이병기는 1891년 3월 5일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진사동)에서 변호사인 이채의 6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8년 11월 29일 생가인 수우제守愚齊에서 뇌일혈로 10여년의 투병 끝에 78세로 사망했다. 9세부터 상투를 틀고 10년 동안 익산의 한 사숙에서 한문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중국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陰氷室文集』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19세의 나이로 70리 길을 걸어 전주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만인 1910년에 졸업했다. 이어 관립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에 졸업했다.

 

이 기간 중 국어에 흥미를 느껴 밤이면 조선어강습원을 다니면서 주시경선생의 문법 강의를 듣고 국어와 국문학연구에 매진한다. 1919년 기미 독립선언 사실을 접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갔다. 그 후 독립지사들이 많이 있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상경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다. 고향인 여산에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광복을 맞았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 조선어표준어의 사정위원으로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여 활약했다. 이 일로 홍원형무소에서 1년을 복역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전북의 전시연합대학, 원광대학 강사를 거쳐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까지 후진양성과 시조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랑채의 당호인 ‘수우재’. 조부의 당호인 ‘동우거사東愚居士에서 이름을 받았다 한다. 후박나무, 배롱나무, 산수유등이 아담한 모정을 둘러 심어있다. 우리는 200년도 넘었다는 탱자나무를 한참이나 보았다. 저 푸른 가시로 제 몸을 지키는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할까? 3.1만세 운동의 충격으로 보통학교 훈도직을 그만둔 가람은 해외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곧 실패한다. 이후 가람은 동광, 휘문, 보성 등 여러 고보에서 우리말 문법 및 작문과 습자를 가르치며 방학이면 조선어연구회원들과 전국을 순회하며 한글계몽 운동에도 열성을 보인다. 그 와중에 ‘조선어 학회 사건(1942. 10. 22)’으로 피검되어 홍원, 함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가람은 감방에서 시시때때로 고문을 당하면서도 낙천적이었으며 ‘가없이 어질고 부드러웠다(같은 감방에 복역한 김선기 증언)’ 그는 영어의 생활에도 이쑤시개로 바늘을 만들어 헤진 수의를 꿰매고 밥풀을 이겨 단추를 달았으며, 미래를 낙담하는 이들에게 ‘손을 꼼작거려 사주팔자를 보고’ 종이를 접어 개구리를 만들어 보여주는 등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 가람의 낙천적인 면모에 대해 이희승은 ‘감방에서 수난당한 동지들이 창씨를 강요당해 대부분 이에 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유독 가람만은 완강히 불응하였다.’(‘가람형의 영면을 곡함’, 동아일보, 1968. 12. 1)고 전한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가람의 면모는 고향집의 당호를 ‘어리석음을 지키는 집’(守愚齎)으로 부르고 그 기둥에 ‘욕됨이 없으니 편하다’(安兮身無辱)라는 주렴을 걸 정도의 기개를 품은 선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가람을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남긴 일이 없는 영광된 작가”라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최근 제기된 가람의 친일 행적의 여부는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생가를 둘러보고 인근의 정자에 앉아 우리는 가람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 했다. ‘국어학자’와 ‘독립투사’등 가람을 지칭하는 말들은 많아도 가장 어울리는 말은 삼복지인三福之人이란 말일 것이다. 스스로 술복, 난초복, 제자복이 있다고 자청했거니와 풍류객, 선비, 교육자등의 성격을 고백한 셈이니 가장 적절하지 않나 싶다. 우리는 모두 현대시를 전공하고 있었지만 이광수의 신시운동과 함께 새로운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람의 정신을 이야기했다. 시조의 풍모를 이야기 하는 데는 빠질 수 없는 것. 몇몇은 가람이 평생 일기를 썼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언어의 절제와 시경의 은유와 또 무슨 이야길 했던가? 가람의 시조를 한편씩 낭송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 문득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L이 양태사의「야청도의성夜聽衣聲」의 한 구절을 낭송한다. “긴긴 밤 근심에 겨워 오래 앉았노라니/ 홀연 들리는 이웃집 여인의 다듬이 소리” 그는 긴 여행 중이었다.

 

시에서 조성해 놓은 ‘가람생가’ 뒤편 단층 슬래브 집에는 현재 가람의 막내자부인 윤옥병씨가 살고 있다. 찾아 온 이유를 전하자 얼마동안 집을 비워놨더니 풀이 우북하다고 계면 적어 한다. 묘소는 생가입구 흉상 뒤에 있다. 50여 미터도 안 되지만 계단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인지 찾는 이가 없는 티가 났다. 대나무들이 산소 입구를 주렴처럼 가로막는다. 봉분은 우북한 잡풀로 뒤 덮혔다. 가람생가의 번듯하게 꾸민 공원화 사업엔 너른 주차장은 포함되어 있어도 ‘묘지관리’는 빠져있는 듯했다. 일행과 참배를 한 후 봉분 위 풀을 뽑는다. 노시인에게 맨손으로 드리는 후학의 경의. 이크, 중지를 벤다. 손금을 타고 스미는 피!. 피에 젖은 풀잎이 희귀한 난초 같다.

 

자부의 말에 따르면 현재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용주인 이강주는 가람의 누이를 통해 사돈집에 건너가서 개발 시판되고 있단다. 가람 생가입구에 세워진 비문을 쓴 사위 작촌 조병희 선생이 딸만 데려간 것이 아니라 술 담그는 기술까지 데려간 셈이다. 술을 좋아하는 선비 가람의 집에선 또 하나의 명주가 이어졌는데 이것이 조선조 문인이자 화가인 이하곤이 ‘남유록’에서 명주로 언급한 호산춘이다. 그러나 익산시에서 복원(지방기념물 6호)한 생가 어디에도 술 익는 냄새는 없다. 적막한 정자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들어 지혈을 한다. 흔들리는 마음을 구급 밴드로 꼭꼭 동여맨다. 백일홍 가지가 바람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운다.

 

가람에 대한 일화 중 술에 관련한 것들이 많다. 해방 후 원광대에 출강할 때에는 당시 초대 학장이었던 박길진(원불교 창시자의 아들)의 배려로 강의탁자 옆에 언제나 탁주가 준비되었단다. 가람은 긴 수염을 적시며 한잔씩 마시곤 해서 강의가 끝나면 으레 술동이가 비었다. 술을 마시면 그는 얼굴이 늘 붉어졌는데 그럴 때의 강의가 더욱 재미있었단다.

 

강의실에 여학생이 앉아 있을 경우 모심기 노래인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 연적 같은 저 젓 보소 / 많이 보면 병난단다 / 쌀 낟같이 살짝 보고 가소’를 빙긋이 웃으며 불러주는 것이다. 그러면 수줍은 여학생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듣고 가람은 더욱 신나서 야담을 풀어 놓았다. 전북문단사에 구전되는 가람과 수많은 야담들을 어찌 다 옮기랴. 허나 그 출처가 일제시절 가람이 전답을 팔아 모으던 고서적(고금소총)중 하나라는 점과 가람이 지켜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해방 후 우리문학의 기틀을 세우는데 이바지 했다는 점은 단지 웃음으로 넘길 얘기가 아님을 생각해 한다.

이렇듯 고서적 모으기에 열심이었던 그는 좋은 책이 나왔다면 소달구지에 쌀을 싣고 가서라도 기어코 사왔다고. 이렇게 모은 책을 투병후 얼마지나지 않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다(4,345권). 자칫 사라져버릴 뻔한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지키려 했던 것. 1920년∼1930년대에 집중적으로 모은 귀중한 고전들은 가루지기타령, 인현왕후전, 어우야담, 금강경삼가해 등이다.

남편이 가정살림을 돌보기보다 장서 수집에 열중하다 보면 살림은 궁핍해지기 마련이다. 선비의 아내는 고달프다. 가람은 이에 개의치 않고 전국을 돌며 가요연구회를 발족하고 우리문학에 대한 강연에 열심이었다. 변변한 가제도구 갖출 여력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 그래도 그는 선비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 한번은 신석정, 박희선 시인등과 통음을 하다가 주안상을 물리치고 지필묵을 청했단다. 주인은 이게 웬 횡재인가 해서 얼른 내주었더니 “때로는 개도 사람보다 낫다.” 라는 엉뚱한 글을 써주었다고. 해방 후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정치인들을 경계한다는 뜻이리라. 그의 솔직함은 이처럼 종종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기도 한다. 동족상쟁으로 통금이 있던 험악한 시절엔 술이 불콰해 여산지서 앞을 지나다가 불심검문에 걸리자 ‘나 이병기야! 몰라?’ 호통을 쳤다 한다. 다행히 검문초소에 서울대에서 학생으로 있던 이가 그를 알아보고 낭패를 면했단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하나만 더 소개한다. 인근의 ‘여산남초등학교’에서 교가의 작사를 부탁한 일이 있었단다. 교육에는 적극적인 가람의 성품에 흔쾌히 가사를 써주었는데 그 후 이학교의 조회시간에는 전교생의 합창으로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내 고장~”하는 여산사람으로서는 좀 듣기 민망한 교가가 울려 퍼졌다 한다. 이곳엔 그의 흉상과 ‘별’이 새겨진 시비가 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 산듯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이곳은 용화산 맞은편인 천호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천호성지로 향하는 푯말을 따라 이어진 길에 있다.

 

가람의 시조는 종래의 고식적인 정형을 과감히 깨뜨리고 실험적인 형식탐구를 통해 현대시로서의 정신과 정서를 껴안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좀 더 자유스러운 표현을 가능하게 한 것이 그의 시조였다. 양주동은 300부 한정판으로 나온『가람시조집』(문장사) 발문에서 ‘가람 전에 가람 없고 가람 이후에도 가람 없다.’고 하여 극찬을 하였다.

 

빼어난 가는 닢새 굳은 듯 보드롭고 / 가짓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대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어 사느리라

「난초. 4」전문

 

가람을 기억하는 이는 두루마기 차림에 홍안백발의 자태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전북대 문리과 학장으로 재직시절 그는 전주시 교동 오목대 밑 양사재란 한옥에 거처했는데 서재에도 두어 그루의 난은 꼭 있었다. 가람은 전주에서는 남문 부근의 선술집에서 문인들과 자주 어울려 통음을 했으며 1950년대 중반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어 전국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십년의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두 되의 술을 마셨다. 그에게 술은 음식이었으며 난은 벗이었다.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에게 항상 ‘영양가가 밥보다도 술’이라고 말했던 그는 ‘내 병과 술은 무관’이라며 재차 술잔을 기울였으며, 고급 요정보다는 선술집을 즐겨 찾았다. 그의 제자인 최승범 교수에 따르면 사망 당일에도 그날의 정량만큼 술을 들었을 것이라 했다. 유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을 잘 보살피라는 말’이었을까? 1968년 11월 29일 78세로 사망한 가람의 장례는 전라북도문화인장으로 5일간 치러졌고 묘소는 수우재 뒷동산에 정하였다.

 

 

가람사후 1주기를 기하여 전주시 다가산에는 일제하에 쓴 시 ‘시름’을 새긴 가람시비가 세워졌고 그가 전북대 인문대학장으로 재직시절 거처했던 전주시 교동 오목대 밑에 있는 ‘양사재’는 현재 전주를 찾는 이들에게 숙박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중풍으로 언변이 자유롭지 못할 때도 한 문병객에게 한참 끙끙 대며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을 써주던 가람. 꽃 피면 지인들과 꽃그늘 아래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평생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써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에 투철했던 그의 풍모와 현대시조 발전을 기려 익산시에서는 매년 5월 10일 가람시조문학상을 운영한다. 지금은 폐교된 여산남초등학교는 가람의 모교이자 그의 장례식이 열렸던 곳. 교사 뒤편에 동요로 널리 불리는 ‘별’이 새겨진 가람시비와 가람의 흉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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