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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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내륙 1 (정읍, 익산)

마당

전북의 내륙 1 (익산 정읍)

우울이 넘실거리는 여름이다. 모든 게 비 때문이다. 문학기행을 오랫동안 못 한 것도, 주위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이 우울도 다 비 때문이다.

해가 반짝 나온 오늘, 더 늦추면 안 되리라. 질척이는 황토길 문학 기행. 시작은 전북의 내륙, 정읍이다.

 

  익산시와 정읍시는 전북문화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한양으로 이어진 삼남대로와 통영별로의 길목. 익산시는 천 년 전부터 내륙교통의 중심이자 문화의 교집합이었다.

익산시의 북쪽은 충청도의 경계이며 전주시와 군산시를 동서로 연결한다. 정읍시는 전남과 전북을 연결하며 남원, 부안, 고창, 순창, 김제의 교량이다. 익산시와 정읍시는 문화에서도 닮은꼴이다. 그것은 습지의 문화다. 강물이 낮은 데로 흘러 모이듯 전북지역의 문화가 익산과 정읍을 중심으로 모이고 섞여 특유의 내륙문화를 만들어 냈다. 백제의 익산시대를 열었던 미륵사지는 못을 메워 만든 곳이었으며, 정읍이라는 이름에는 물의 고장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두 지역은 정주와 이산이 가능한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기차의 역사와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이곳 출신의 작가들에게 물과 기차의 이미지는 무의식속에 원형처럼 스며있다.

 

<정읍> 샘골문학

# 정읍시의 옛 지명은 ‘샘골’, 물의 도시다. 어느 곳을 파도 맑고 깨끗한 물이 솟아난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정읍의 문학엔 물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다. 정읍 출신 소설가 손홍규는 물을 태생적으로 받아들인다.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 윤흥길의 ‘장마’다. 윤흥길은 그의 친구인 시인 정양으로부터 소설의 모티브를 듣고 밤을 세워 원고를 썼다고 했다. 좌우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계속해서 비는 내렸다. 어쩌다 한나절씩 빗발을 긋는 것으로 하늘은 잠시 선심을 쓰는 척했고, 그러면서도 찌무룩한 상태는 여전하여 낮게 뜬 그 철회색 구름으로 억누르는 손의 무게를 더한층 단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가도 갑자기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이 악의에 찬 빗줄기를 주룩주룩 흘리곤 했다. 아무 데나 손가락으로 그저 꾹 찌르기만 하면 대꾸라도 하는 양 선명한 물기가 배어나왔다.” (윤흥길 / 장마)

 

소설가 윤흥길은 정읍 시기동에서 태어나서 익산에서 성장했다. 평화롭고 풍족했으나 짧았던 정읍시절을 작가는 어머니=물=기다림으로 기억한다. 윤흥길은 이후 익산과 김제를 배경으로 ‘에미’와 ‘완장’을 발표하는데 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물의 정화 이미지가 짙게 배어있다. 정읍출신의 작가에게 ‘물’은 어떤 의미일까? 역시 이곳 출신의 소설가 손홍규는. “장마라는 낱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기라는 낱말이 주는 이국적인 인상도 퍽 좋지만 오랜 세월 우리 곁에 머무른 시절들은 우기가 아니라 장마였다.”라고 고백한다. 물은 원형적으로 여성의 생명력을 갖는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사돈지간인 두 여자의 상처와 화해의 이야기다. 어린아이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군인이 된 아들을 기다리는 외할머니와 빨치산이 된 아들을 기다리는 친할머니의 갈등이 끝나는 날 지겨운 장마도 그친다. 빨치산의 이야기는 정읍출신 소설가 신경숙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휴전협정이 이루어져 전쟁은 끝났다는데 전쟁 중일 때보다 더 뒤숭숭하던 때였다. 밤이면 산에서 배고픈 인민군이 내려와 마을을 뒤지고 다니던 때였다.”(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정읍 출신 작가들에게 ‘장마’는 특정한 기억의 순간이다. 소설이 자기 고백의 문학이요, 상처를 드러내는 자기 치유의 언술행위라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신경숙의 문학은 정읍의 아우라로 만들어졌다. 그녀의 작품에는 과거가 현재화되어 있다. 정읍이라는 지역은 과거의 이야기를 간직한 씨줄이다. “ 그 마당은 내 마음의 저기에서 타박타박 걸어온 숨겨진 방죽인지도 몰랐다.(……) 내 마음에 떠올랐던 마당은 다시 방죽 속으로 가라앉았다.”(신경숙,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 '기차'와 '마당'과 '우물'은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작품의 소재이다. 신경숙은 내륙의 중심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이곳에서 흐르는 물처럼 상상력을 흘려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경숙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가족은 우물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추억의 사건이다.

 

“오래전엔 작은 문 바로 앞에 마을 공동우물이 있었다.(……)그 우물을 기억하는 너는 작은 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문득 우물이 있던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이 골목의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고도 항상 찰랑찰랑 물이 고여 있던 그 우물은 저 캄캄한 속에서 어쩌고 있을까?(……) 메워진 우물 위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작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엄마!하고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나는 신경숙의 글을 읽으며, 그녀의 고향마을 뿐 아니라 집 어딘가도 우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계의 사연을 품고 자란 감나무 가지가 비치는 우물.  비가 잠시 그친 오후. 소설가 신경숙의 고향 집을 찾아 갔다. 찾아가는 소감은 좀 부끄러웠다. 현존하는 작가의 집이라서라기 보다 연배가 그리 나지 않아서 였다. 한때 문학을 꿈꿨던 문청의 자격지심 같은 것.

정읍시에서 그리 멀지 않는 20호가 채 되지 않을 작은 마을 이었다. 길에서 예의 파란 지붕이 보였다. 좁은 골목길은 차 한 대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다. 굽은 골목길 끝에 대문이 있고, 그녀의 부친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몸이 불편해졌다고 했다. 몇 마디 물어보고 싶었으나 말주변이 없어서 간신히 사진 촬영을 허락받았다. 와중에 그녀의 어머니가 나왔다. 집에 우물이 있느냐고 묻자. 대문 옆을 가리켰다. 상상했던 것처럼 감나무 아래는 아니었으나 길과 담을 사이에 두고 우물이 있다. 한때 식수로 썼으나 지금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작가의 부모가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나는 몇 번이고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최대의 목적이나 되는 것처럼, 신경숙 문학 자체인 것처럼,  내가 오래전에 잃어 버린 문학의 자궁으로 난 비밀의 문처럼

 

# 정읍사

현존하는 최고의 백제 가요인 <정읍사>는 기다림의 서사다. 보부상의 부인이 남편을 걱정해서 불렀다는 이 노래는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불렀다는 <선운산가>와 더불어 기다림의 노래로 전해진다. 해가 기울어도 남편이 오지 않는다면 부인의 애간장이 탈 노릇이다. 기다림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이 없다. 기다림이 지나치면 원망이 들고, 그리움이 지나치면 불길한 상상 또한 깊어진다. 정읍사를 부른 백제의 여인은 언제나 가슴을 조이며 살았던 한국 여인의 심정과도 같다.

 

집 떠난 남자와 ‘기다리는 여인’의 모티브는 서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 그리그의 페르귄트에서 나오는 ‘솔베이지의 노래’가 곧 노르웨이의 정읍사인 셈이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며 속절없이 늙어간 솔베이지의 이야기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반면 현존하는 최고의 백제가요인 정읍사는 역사로만 존재한다. 금기를 깨고 뒤를 돌아본 사람이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기다림에 지쳐 돌이 된 것은 우리 민족 특유의 인내와 한의 형상화이다. 돌처럼 단단해진 간절함으로 불러본다. 그리움으로 돌이 된 여인상 앞에서 생각한다. 정읍사에 나타난 기다림의 정서는 고려 가요 ‘가시리’나 황진이의 시조를 거쳐 김소월에 이르기까지 한국시의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다. ‘가시리’가 상대에 대한 원망과 호소를 담고 있는 것에 비해 ‘정읍사’는 상대에 대한 걱정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 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시장에 가 계시오니까) 어긔야 즌듸를 드디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데 졈그셰라(가시는 길 저물까 걱정됩니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

 

정읍사의 내용을 해석하는데 가장 이견이 많은 것이 “어긔야 즌듸를 드디욜셰라”라는 대목이다. 한때 모 작가는 이 부분을 남녀 간의 노골적인 성애의 비유로 해석해서 모 일간지에 연재소설로 게재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정읍사 문화제전위원회는 <정읍사>의 품위를 떨어트린다며 강력한 항의를 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때가 1995년의 일인데 2010년에도 비슷한 일이 남원에서 일어났다. 춘향전을 방자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영화 ‘방자전’이 정절의 대명사인 춘향을 왜곡한다면서 춘향선양회의 항의를 받은 것이다. 두 사건 모두 고전의 창조적 계승에 대한 시각차를 잘 드러낸 일화다. 차이가 있다면 신문 연재소설은 중단이 된 반면, 15년 후의 영화 방자전은 오히려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 시대가 바뀌었다는 반증이다.

 

# 내장산

정읍의 자랑인 내장산은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내장이라는 이름처럼 정읍시의 밖에서 내장산 안으로 들어오는 열기 때문에 내장산의 단풍이 더 붉게 물드는 지도 모른다. 마치 여름의 열기를 다 끌어 모았다가 피처럼 토해내는 것처럼. 시인 황지우는 「내장산」에서 ‘내장’이라는 말을 ‘내 안의 있는 나’의 고통으로 읽는다. 시인이 바라본 내장산의 모습은 ‘돌아서 울음을 참는 전라도 여인의 어깨, 혹은 상처받은 산 짐승 같은 동학농민군의 분노다.

 

“내가 몹시 견디지 못해 / 그대 근처를 거닐 때 / 내가 바람 속에 들어가 / 바람 속의 다음 세상을 엿들을 때 / 얼마나 더 커야 / 큰 산은 속에다 감추는가 / 기후대가 전지한 산등성이 잡목들, / 잔뜩 털을 곤두세운 짐승처럼 / 노여움을 속에다 감추는 / 큰 산” (황지우 / 내장산) 시인에게 내장산은 ‘세상의 끝’이며 잔뜩 털을 곧추세운 고슴도치의 마을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접근을 꺼린다. 그래서 가시를 곧추세운 짐승처럼 한여름에도 추위에 떤다. 누구나 분노에 가득 차 있으면 몸이 자연스럽게 떨리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참고 있을 때 나무는 짐승처럼 떤다. 이런 나무와 같이 울분을 터트리는 시인의 숙명은 홍세화의 표현에 따르면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관성에 젖은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그래서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소중한 무언가를 거는 사람이다. 내장산에 들어간 시인은 눈 내린 내장산에서 지식인의 숙명을 감지한다. 그것은 불의에 맞서 싸우라는 외침이다. 100년 전 동학농민군들도 눈 쌓인 고부 들녁을 몰아오는 바람의 목소리를 들었던 걸까?

 

# <칠보> 정극인 -상춘곡

「상춘곡」의 작가 불우헌 정극인의 시비와 묘가 정읍인근의 태인의 무성서원이 있는 원촌 마을에 있다. 정극인은 단종 폐위 후에 고향인 태인으로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치며 가사 ‘상춘곡’을 지었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 옛 사람 풍류랄 미찰까 못 미찰가” 상춘곡의 첫 부분은 산천에 은거중인 노선비의 안빈낙도가 그려지는 듯하다. 그러나 “공명도 날 끠우고, 부귀도 날 끠우니, 청풍 명월 외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라는 끝부분에 와서 목청이 쩌렁쩌렁하다. 왕이 바뀌고 뜻있는 선비들 또한 죽어나가는 세상에 시골에 내려와 있더라도 어찌 마음까지 내려왔겠는가. 그는 다만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정읍의 우물 정(井)자에 두레박을 던져 맑고 찰랑찰랑한 물을 붓 위에 길어 올리며 뜨거운 마음을 식혔으리라.

무성서원은 조선말 최익현이 호남의 의병장 임병찬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의병은 정읍을 거쳐 순창 회문산에서 관군과 마주치게 되는데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수백 명의 오합지졸은 규율이 없고 유생들은 큰 갓에 두루마기를 차려 입어 마치 과거보러 가는 선비 같다”고 당시의 풍경을 전한다. 이들은 결국 임금의 명을 받은 관군과 싸울 수 없다는 의병장 최익현의 주장에 따라 싸움도 못하고 해산되었으며 최익현은 대마도로 끌려가 죽게 된다.

 

# 고부 동학농민혁명

세계의 창세신화를 보면 물에 의한 창조신화가 압도적으로 많다. 물은 불보다 수동적이지만 수량이 늘어나면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갖게 된다. 그래서 예전부터 물은 민중의 상징으로 일컬어졌다. 19세기 후반 부패한 봉건 정부의 폭정과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에 대항하는 조선의 자주적 혁명이 정읍시 고부군에서 일어난 물 소동에서 비롯한 것도 바로 물의 속성이 갖는 잠재적 에너지가 원인이다.

백제는 다섯 곳에 지역거점관청을 두었는데 고부는 그 중 한 곳인 중방성이 자리한 곳이다. 조선말까지 고부는 삼례 역참과 더불어 중요 역참으로 손꼽혔다. 당시 조정의 실권자인 조대비의 친척이었던 조병갑은 평안감사도 마다하고 고부군수를 청했는데 그 이유는 너른 이평 평야에서 거둬들이는 쌀 때문이었다.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조선의 세 가지 폐단으로 전주의 아전, 호서의 사대부, 관서의 기생을 들었을 정도로 고부 군수 조병갑과 아전의 횡포는 대단했다. 조병갑은 이평 평야에 보를 쌓는다고 돈을 걷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보를 쌓은 다음 처음에 걷지 않겠다고 약속한 수세를 거뒀다.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앞세워 진정서를 냈으나 감옥신세. 참지 못해 고부관아를 습격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전주 고부 녹두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 장수 울고 간다” 그 무렵 아이들이 부른 동요의 파랑새는 한자의 조어 팔왕八王을 뜻하니 합하면 전(全)봉준을 의미한다. 한때 동학군이 30만 명에 육박한다고 했다. 이평면 조소리의 훈장이었던 전봉준은 진정서를 쓰며 무슨 각오를 했던 것일까? 글을 쓰려거든 ‘목숨을 걸고’ 써야 한다는 전라도 선비의 강기를 그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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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난초의 벗, 가람 이병기
2011.11.11. 1974
전북의 내륙 1 (정읍, 익산)
2011.08.1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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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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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1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