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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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기행

마당

전북의 서쪽 3 <부안, 고창>

 

  # 고창군은 ‘한국 현대시의 정부’ 미당 서정주의 고향이자, ‘근대 판소리의 대부’ 동리 신재효의 고향이다. 고창군에서는 연인을 대원군의 첩으로 뺏긴 동리의 이야기보다 국적 불명의 국화 꽃을 피우려 했던 미당을 복원하는데 관심을 갖는 듯 보인다.

  한 작가가 지역의 대표 문화상품이 된 것은 그의 문학적 위상이 높기도 하려니와 작품에 지역성이 유난하기 때문이다. 고창군은 미당을 복분자주, 풍천장어와 함께 ‘선운사 3종 세트’로 엮어서 관광 상품화한다. 부안지역으로 문학기행을 온 이들은 고창의 복분자주와 풍천장어에 마음이 바빠 곰소항의 명물인 낙조를 포기하고 서둘러 선운사로 향한다.

 

  선운사 앞에는 장어구이집 천지다. 나는 복분자주 한 잔으로 곰소항 앞바다의 이글거리는 노을을 얼굴 가득 불러 온다. 체력이 약해진 탓이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엔 이해가 안 되던 것에 수긍하는 일이 있다. 요즘엔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 좀 슬픈일 좀 있어야 겠다.’는 대목에 꽂혔다. 급격한 체력저하와 탈모로 병원을 찾은 올 봄의 일이다. 인중이 유난히 길었던 한의사는 ‘피가 잘 안 돌아서’ 그렇다며 뜸과 사혈을 처방했다. 내심 심각한 병이 아니라는 게 안심이 되었지만 몸의 노화(?)가 실감이 나서 좀 우울해 졌다. ‘사회적 소통’에 대해 잡설을 늘어 놓느라 정작 내 몸의 ‘소통’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던 모양. 그러고 보니 요즘의 우울기도 소통(?)이 잘 안 되는 탓일까? 가슴이 답답해지면 종종 찾던 선운사 방문도 오랜만이다.

 

 몸을 통한 자아정체성의 서사는 곡진한 면이 있다.

미당을 떠 올릴 때면 스님형 헤어스타일에 한복 입은 모습이 제일 먼저다.

이것도 신체-정체성 대한 관념이다. 바짝 깍은 머리는 변화와 신생에 대한 그의 갈망을, 말년에 치매예방을 위해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다는 일화도 따지고 보면 낭만파의 댄디즘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몸은 자아의 매체’라는 점에서 자꾸 비어져 나오는 나의 아랫배도 하나의 상징일까. 이 모두가 숯불 위의 불판에서 몸을 뒤트는 풍천장어를 보며 한 생각이다. 최소한 성찰(?)의 측면에선 내가 미당보다 낫다는 생각을 낮술에 취해 한다.

 

  # 주차장 지나 매표소 앞에는 두 개의 시비가 있다. 백제가요 「선운산가」와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를 새긴 것. 「선운산가」는 전승되지 않고, 다만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가 불렀다는 내용을 미당이 시로 옮겼으니 두 개의 시비 모두 서정주의 글이 새겨진 셈이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리집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서정주 / 선운사 동구)

 

 

  서정주의 시어는 관능적이다. 그는 인간 본연의 원시적 생명성에서 태초의 언어를 찾았던 것일까? 그는 ‘선운사 골째기’의 늙은 여자의 육자배기에서 한을 불러낸다. 선운산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관광버스에서 4분의 4박자 리듬이 산사 입구의 적막을 깬다. 나도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를 흥얼거리며 선운사 경내로 들어선다. 길 가의 가로수들이 바람에 어깨를 부풀린다.

 

  # 선운산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선운산가>의 유래가 전한다. ‘현의 동쪽 5리에 있는 반등산에 신라말 도적이 크게 일어나서 양가의 자녀가 많이 잡혀갔다. 그 가운데 장일현에서 잡혀온 아낙이 지아비가 구해주지 않는 것을 풍자하며 노래했다.’는 것이다. <선운산가>는 비록 전승되지 않으나 관련 내용으로 보아 신세타령이 주 내용인 ‘육자배기’의 원형으로 생각된다. 창작 배경으로 소개된 도적 이야기는 백제의 위덕왕 때 검단선사가 도적들을 교화시켰다는 기록에도 나타난다. 이 도적들은 개과천선 후 소금을 굽는 법을 배워서 생계를 꾸렸는데 그 인연으로 봄가을이면 소금(報恩鹽)을 선운사에 보냈다고 전해진다. 1,500년 동안 소금공양은 이어졌다는 기사를 보고 종무소에 직접 확인해 보니, 총무스님 말이 심원면 사등마을에 사는 박모라는 이에게 소금 공양의 전통이 이어졌다고 한다.

 

한편, 선운사는 차로 유명한 곳이다.

추사 김정희가 이곳의 차를 즐겨서 몇 편의 글을 써놓았으니 가져가라며 백파선사에게 은근히 차를 청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곳 차를 탐하는 이들을 위해 선운사에서는 대웅전 앞 만세루에서 차 한 잔 하는 여유를 제공한다.

선운사의 중심에 자리한 만세루의 낮은 차탁과 쭉 뻗은 기둥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차를 마시며 그 유명한 대웅전 뒤 동백나무 숲을 찬찬히 둘러본다. ‘저 동백꽃을 몇 번이나 보았을꼬?’ 선운사에 꽃보러 갔다가 몇 번을 헛걸음 했는지 모른다. 동백은 만개했는 가 싶으면 어느새 떨어졌기에. 한 겨울을 지낸 꽃의 낙화. 제 욕심을 주저 없이 내려놓는 꽃. 여행이란 무언가를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닌가.

 

  시인 김용택은 동백꽃을 “여자에게 버림받고 /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 맨발로 건넌다”(「선운사 동백꽃」)라고 노래한다. 시인의 말처럼 선운사 동백은 붉은 울음처럼 핀다. 그것은 마치 세월의 한 고비를 이 악물고 겨우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터지는 오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머리가 툭 꺾여서 떨어지는 동백꽃을 춘수락春首落이라 부른다고 했던가.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 아주 잠깐이더군 / 그대가 처음 /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최영미, ‘선운사에서’) 최영미의 시는 서정주와 송창식이 보지 못한 동백을 오롯이 자신의 치마에 담은 듯하다. 시간의 실타래가 풀리길 기다리는  최영미의 시가 봄의 처연함을 노래했다면 구효서의 소설 <나무남자의 아내>는 선운사의 고독한 가을을 그려낸다. “내가 이곳 선운사에 내려온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침향枕香을 좀 구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선운사 입구에서 한 부부를 만난다. 남자는 자신을 품에 안고 죽은 아버지가 그린 옛집을 재현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똑같이 생긴 고욤나무를 찾아다니는 중이다. 사로잡힌 영혼은 삶을 피폐하게 하는 것. 소설의 화자가 침향의 향기를 찾아 해메듯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아 선운사를 방문한다.

  선운사 경내를 걸어 나오며 최영미와 구효서가 보았던 선운사의 입구가 각각 선운사의 안과 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의 봄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듣는 여자와 이 세상에는 없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남자의 이야기. 오래 전 절의 담장 아래로 떨어진 동백꽃을 줍던 내 이야기다.

 

  질마재와 선운사는 서정주 문학의 뿌리다. 시인은 고향에 오면 선운사 입구에 있는 동백장에 주로 묵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제자인 여관 안주인은 늘 같은 방을 준비해 옛 스승을 묵게 했다고. 문학의 뿌리를 찾아 온 노시인과 불현듯 찾아올 스승을 위해 방을 마련해놓은 옛 제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갈증이 났다. 세상에 이런 방 하나 얻어 눕고 싶다는 생각. 상처 입은 짐승처럼 찾아와 며칠이고 숨어 들기 좋은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정보통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가슴에 맺힌 독을 삭혀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방. 미당은 역사의 물음에 힘겨울 때면 ‘보호고치’ 처럼 견고하고 안정된 그만의 세계에 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 미당 시기념관은 미당의 고향 마을인 질마재에 있다. 선운사 동구에서 5분 거리. 무창포쪽으로 진행하다가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 길로 접어 들면 곧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시집 한 권으로 천 년 전의 역사를 갖게 된 미당의 고향 질마재다. 말의 안장에서 유래한 이름 질마재는 미당이 태어나 성장한 곳. 한국시의 근대를 꿈꾸었던 시인에게는 고향은 ‘밤이 기퍼도 오지 않은 애비의 마을’이다.

 

‘현대시의 정부’가 된 미당 시 기념관의 자랑은 전면을 덮은 담쟁이 넝쿨. 폐교를 개조한 내부엔 ‘화사집’ 원본을 비롯해 시집 초판본과 시화를 서재와 함께 꾸며 놓았는데 빈 교실을 활용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복도와 계단에는 시인이 치매를 방지하기 위해 암송했다던 이름난 산의 사진을 진열해 놓아 영문 모르는 이가 보면 다른 기념관으로 착각할 만하다. 전망대에서 멀리 미당의 묘소가 보인다.

 

  미당 시 기념관을 의미 깊게 하는 것은 역시 컨텐츠의 힘이다. 전시장에 즐비한 시화를 읽다보면 허술한 관리에 대한 불만이 쑥 들어간다. 1층 전시실 구석에 미당의 친일행적을 밝힌 글 두 편을 전시했는데 구색을 맞춘 듯 유심히 살펴봐야 알아 볼 수 있다.

  시문학관에서 질마재 마을로 향하는 작은 개울을 지나면 질마재 마을이다. 고창군에서 복원한 시인의 생가는 전봉준 생가처럼 이물스럽다. 마치 민속촌을 온 것 같은 분위기, 질마재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이 크다. ‘볼 것 없는’ 생가에서 나와서 개울을 따라 ‘도깨비 집’을 찾아가는데 실망이 곱이다. 역시 질마재의 풍경은 기념관 옥상에서 느끼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 미당은 “나는 죽을 때 내 고향 질마재의 솔바람에 내 마지막 숨을 포개고 죽을 것”이라고 할 만큼 고향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다. 큰 물이 들면 마당에 숭어떼가 들어왔다던 그의 외갓집을 비롯하여 질마재 곳곳이 현대 시 문학사에 그려져 있다.

 

 

  기념관에서는 시인의 묘역을 중심으로 국화밭을 조성해서 해마다 질마재 축제를 연다고 소개한다. 나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는 시를 배울 때 만났던 사람과 가을의 질마재와 같이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 왔다.

 

<전북의 서쪽 기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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