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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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기행 1

마당

전북의 서쪽 1 <부안, 고창>

  '글을 시작하며'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게으른 내게 연재란 부담스러운 약속이다. 걱정스럽다. 나는 각오같은 것은 해 본 적이 별로 없으며 또 그것을 지킬 의지와 완성할 사유도 역시 부족하다.

  나의 한계를 운명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듣고 자란 위인과의 가장 큰 차이-가출에 성공하지 못한 탓으-라고 자위했었다. 캄캄한 밤. 가출해 실패해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얼마나 어둡고 무서웠던가. 글을 쓰는 것은 나만의 길을 찾아 떠나는 것임을 알고 나는 얼마나 좌절했던가.  다만, 가출을 꿈꾸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나의 가벼운 생각을 적는 것으로 한다. 지역과 작가의 길을 따라 가는 나의 게으른 문학기행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시작한다. 자주 해찰하며 갈지라도 언젠가 돌아 올 것이다. 당부컨데 독자 제위는 웅숭깊은 사유와 문학적 견해에 대해선 기대하지 말아 주기를... 다만 지역과 그곳을 거쳐간 소소한 인연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 글을 연재함에 있어 언제 완성할 지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원고 <전북의 재발견>에 쓰려고 모아 두었던 사진과 메모를 기초로 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 부안이라는 곳

  부안은 변혁을 꿈꾸는 이들과 은둔자들이 동거하던 곳이다.  백제 부흥군의 최후의 저항처이며 그 댓가로 잔혹한 살육이 벌어지기도 했다.(백제-신라의 오랜 연원은 '익산-무왕편'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하여 진표율사가  '부사의방'에서 '투신수련' 끝에 법상종을 창시한 것도 희망없는 민중을 제도하기 위한 용맹정진이었으며, 신라가 당대의 고승 원효를 보내 망국의 한을 위무케 한 것도 이러한 전후 사정이 있었다. 그후 부안은 한반도 안의 변산반도라는 별칭처럼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어업과 농업이 발전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다. 고려시대에는 강진과 더불어 최대의 도요지가 이곳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실학의 거두 반계 유형원이 이곳에 유배와서 '실습'을 겸한 저술 활동을 했다. 

  사상적 측면에서도 부안은 흥미로운 곳이다. 구한말 남원의 매천 황현은 자결을 한 반면 간재 전우는 부안 개화도에 들어와 칩거하며 제자를 양성한다. 한일병합에 있어 아무런 포즈를 취하지 않은 간재의 처신은 후세의 비판을 받는데 나는 그의 행동이 회피가 아닌 일종의 액션(?)이라는 가정하에서 신중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 지역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간재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 부안은 좌익 지식인들이 많이 나왔다. 지주 집안의 출생인 지운 김철수가 민족의식에 눈을 띄게 된 것도 한학자 서택환의 서당을 다니면서였다고 하니 전통 유학과 독립을 위한 사회주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학풍이 형성된 것이다. 또한 파스큘라의 동인이면서 KAPF의 발기인이었던 성해 이익상이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부안 공립보통학교에서 신석정의 담임을 맡은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신석정과 사촌매부지간인 이익상은 그후 조선, 동아의 학예부장을 지내며 신석정의 작품 발표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신석정 등은 ‘야인사’라는 문학서클을 조직하여 서양문학작품을 번역해서 읽고 ‘김억(岸曙)'을 초청하여 에스페란토어 강의를 듣는 등 시대 조류를 배우기 위해 열심이었다. 부안이 해방후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한국전쟁 직후엔 전북에서 빨치산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도 이런 역사적 전통이 좌우했기 때문이다. 나의 문학기행 1번지는 그래서 바람의 도시 부안이다.

 

# 새만금에서

  군산 야미도에서 새만금을 지나 부안으로 간다. 얼마 전까지 바다였던 곳. 길은 명확하다. 수천 년 내려온 영토 확장의 욕망. 바다와 바다였던 곳을 가로지른 도로는 분명하다. 선진국先進國으로 달려가려는 의지. 바벨탑이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욕망이었다면 새만금방조제는 바다의 신과 벌인 땅따먹기 게임이다. 길 끝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위에 건설할 ‘꿈의 신도시’는 아직 건설 중이다.

 

  방조제의 끝은 부안군의 입구다. 한때 해창이라 불리는 바다의 언덕에 있던 신석정 시비는 얼마 전 새만금전시관 옆에 조성된 서두터 공원으로 옮겨졌다. 육지화 된 해창 갯벌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여론에 의해서다. “소나무 성근 숲 너머 / 파도소리가 /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 부르르 떨리는 손은 / 주먹으로 달래 놓고 / 파도 밖에 트여 올 한 줄기 빛을 본다.”(신석정 ‘파도’) 시인이 노래한 바다는 지금 없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어떤 파도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신석정 시비 앞으로 난 길은 부안온천을 가리킨다. 늦은 점심으로 이곳의 별식인 반지락 죽을 먹을 셈이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차를 세우고 묻는다. ‘반지락 죽은 어느 집이 맛있니?’ 아이들이 멀뚱하게 나를 보다가 그중 하나가 ‘아무데나 다 맛있어요’ 하자 재미있다는 듯이 따라서 합창한다. ‘아무데나 다 맛있어요.’ 무엇이듯 일등을 따지는 도시병이 이곳에선 안 통한다. 바닷가 도로를 따라 문을 연 반지락 집은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식당이다.

  반지락 죽을 먹으며 식당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계절별로 변산 바다를 찾아오는 성별과 나이가 다르단다. 20대와 낚시꾼들은 봄에 많이 찾아오고, 가을엔 40대와 짝이 없는 사람이 많이 온다고. ‘그럼 겨울은요?’ “…….”겨울바다는 실연한 사람이 찾아 온단다. 이곳에 추억을 찾아 혼자 오는 이들의 마음은 언제나 겨울이었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해창바다에서 격포 채석강으로 방향을 잡는다. 해안 단애가 책을 쌓아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채석강은 밀물 때면 물에 잠기는데 그때는 바다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는 독서시간인 셈이다. 기묘한 형태의 갯바위를 걸으며 요즘 바다가 읽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학부 때 만난 선배는 지금도 첫 인사가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그와의 만남에  긴장한다. 그는 생계를 위해 대학 앞에서 통닭집을 개업한 후에도 튀김기 옆에 책을 접어놓고 읽는 강한 자다. 

   

# 박영근

  변산 바다를 보고 자란 시인이 있다. 노동자 시인 박영근이다. 가수 안치환이 불러 널리 알려진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가사는 그의 시에서 따온 것. 아직 유족과의 저작권 협의가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박영근은 변산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인천으로 이사하여 구로 3공단 등지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다.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그는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시는 치열한 삶을 언어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절절함이 호흡으로 묻어나는 것은 평생 현장의 삶을 유지했기 때문.  그가 떠난지 4주기를 맞아 그의 모교인 부안 마포초등학교에서 추모식을 한 적이 있다. 머리가 희끗한 그의 지인들이 멀리서 찾아와 그를 회고했다. 나는 주위에서 권하는 막걸리를 사양하지 않아서 마구 취해 버렸다. 박영근을 생각하며 취하지 않는 것은 가슴에 뜨거움을 잊은 자라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다.

  박영근은 근동에서 수재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는 지역 명문인 전주고등학교 재학 중 억압적인 학교 생활에 반발하여 17세의 나이로 자퇴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문학 서클에 가입하여 일명 불온한 사상시를 쓰기 시작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다.

 

“동진강 하구역 강물은 오래 흘러온 길을 갯물에 씻고 / 물때가 온다 / 물골을 트고 / 갯벌이 논다 / (……) / 뻘밑 깊은 곳에서는 / 백합이 숨 쉬는 소리 / 한 숨 / 한 숨 / 살이 오르는 소리 / (……) / 갯벌에 / 강물에 / 댕기물떼새 한 마리 기진한 허공을 내려와 / 뻘 한 점을 물고 있다

(박영근 / 물때)

 

  노동 현장에서 벼려진 정신도 고향 바다 앞에 서면 서정으로 충전되는 걸까? 나는 백합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 세상의 온갖 소외된 것들에 귀를 기울였던 박영근을 생각한다. 그가 다녔던 마포초등학교는 폐교되고 ‘부안 생태 문화활력소’라는 단체에서 운영한다. 이름처럼 생태적인 간판이 붙어 있으나 작아서 찾기가 쉽지 않다. 간간히 지역민을 위한 예술체험 장소로 활용된다고. 이곳은 부안지역의 방폐장유치를 반대하며 생겨난 진보적인 지역 일꾼들의 아지트인 셈. 이 지역이 아직도 방폐장 찬반 투표의 몸살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부안의 사례를 안면도의 방폐장 사건과 비교 연구를 해 보고 싶은 것도 오래 전 부터 모셔둔(?) 생각이다.  

  새만금 공사가 완료되고 갯펄이 다 망한 요즘 해창바다를 지날 때면 박영근 생각을 가끔 한다. 마포초등학교 주변의 소나무 숲은 오지랖 넓은 박영근의 영혼이 머무는 듯 "샛바람에도 떨지 않고" 부안의 해방구로 남아 있다.

 

# 신석정

  고창의 봄 바다가 동백꽃 같은 여인의 설렘을 품고 있다면 부안의 바다는 중년 남자의 눈빛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년 남자의 바다는 큰 변화없이 늘 진지한 표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는 슬쩍 던지는 온기어린 눈빛 같은 것, 젊은 날의 열정을 무리해놓은 연륜같은 것이 묻어난 달까? 내가 희망하는 바다다.

목가시인으로 알려진 시인 신석정. 그는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날개가 돋쳤다면」)라며 일제강점기의 상실감과 허무를 유토피아적 희망으로 노래했다. 그는 자연의 인내와 견딤 속에서 일제 강점기를 견디는 희망을 보았다. 일제 강점기가 영원할 것으로 믿는 이들의 목소리를 덮고 이상향에 대한 강렬한 믿음을 쓴다. 그것은 시집 ‘촛불’에서 노래한 것처럼 밤이 깊으면 아침이 멀지 않다는 것이다.

 

  도시의 삶에서 자연을 찾는 이들에겐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상처를 치유하려는 방법론과 자연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목적론. 세상에 지고 지친 이들이 자연을 찾아가는 것이 수동적 의미에서 치유로의 회귀라고 한다면, 신석정은 오히려 자연의 생리를 가지고 도시의 삶을 견뎌내려 했다. 진보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이들 중에는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꿈은 결국 환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최대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신석정은 식민지의 자연에서 어머니를 발견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떠올 릴 때 누구나 소년,소녀가 되듯 그의 마음도 순수해진다. 순수한 마음은 곧 뜨거운 마음이다. 평생 소년의 마음으로 산 박영근이 그렇듯이.

 

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 소나무 / 참나무 /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신석정 / ‘작은 짐승’ 일부)

 

  차를 세워두고 시인처럼 말없이 앉아 바다를 본다. 사실 ‘전망 좋은 곳’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곳은 끝없이 왔다가는 차량과 사진의 포즈를 취하는 이들로 인해 소란스럽다. 그러나 차를 세워두고 조금만 걸어가면 인적이 드문 곳이 나타난다. 바다와 대화하기엔 이런 곳이 금상첨화다. 신석정이 태어난 부안군 선은리도 바다와 산이 인접한 곳이다. 시인은 “蘭이와 나는 /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을 꿈꾼다. 그는 바다를 보며 일제강점기를 폭폭한 마음을 달랬던 것일까? 바다와 작중 화자의 거리 감각이 의미심장하다. 나와 바다, 나무와 나무, 나와 란이 시 속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실 거리, 혹은 차이라는 말은 사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차이를 틈, 균열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자연도 사람이 너무 가까이 하면 병이 든다. 자연은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며 스스로 균형을 맞춰가는 질서를 보여준다.

 

  신석정은 고창의 시조시인 조운과 흠모하는 익산의 이병기를 초청 해 변산바다에서 휴가를 즐기곤 했다. “신석정을 만나보다. 이중학 군이 고창 집에서 음식을 내고 또 자동차 한 대를 내어 맥주와 안주를 싣고, 조운(曺雲), 조희충(曺喜忠) 두 군과 신석정과 김정기(金正基) 군 부자와 안인수(安仁秀)군과 함께 대항리 해수욕장에 갔다. 오전 3시까지 천막 밑에서 맥주를 마시며 밤을 새우다’('가람일기' 1935. 8. 10) '이병기', '조운', '신석정'은 조선문학자대회’에 같이 참가했으며 <건설기의 조선문학> 등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절친한 사이였다. 좌파 지식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신석정은 한국전쟁 당시 부안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게 된다. 이러한 전력은 후에 그의 무덤을 부안에 쓰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011년 현재 부안군 선은리에는 오랜 논란 끝에 석정문학관의 개관을 앞두고 있다. 시인의 초기시 대부분을 창작한 곳이다.

 

# 매창

  진짜 사랑을 알아가는 건 중년부터라고 이야기 한 사람은 누굴까? 나는 아직 그 뜻을 모른다. 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을 아비로 둔 한 소녀가 있었다. 한 남자를 대책 없이 사랑한 그녀의 애틋한 편지는 절절한 사랑시가 되었다. 소녀의 나이 겨우 열여덟. 부안의 여류시인 매창이다.   운명처럼 그녀를 떠난 그를 기다려 여자는 봄 항구처럼 사내를 기다렸다지. 그러다 병이 깊어 서른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녀는 숱한 사내의 구애를 거절했다. 현존하는 사랑시 중 최고의 절창인 ‘이화우’는 그렇게 쓰여 졌다.

 

이화우 흩날릴 제 /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 오락가락 하더라

(매창, ‘이화우梨花雨’)

 

  학생 때 배운 시를 부안군 매창공원에 와서 본다. 매창과 “울며 잡고 이별한 님”은 시인 유희경이다. 세상의 것들이 모두 먼지가 되어도 결국 남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 이 이야기는 약 오백년 전 조선조 광해군 때 일어난 유명한 삼각관계다. 매창의 본명은 이향금, 평시에는 계생 혹은 계랑으로 불렸다. 부안현 아전 이양종의 서녀라고 하는데 어머니의 출신에 따라 자녀의 신분이 결정되던 경국대전의 법에 따라서 매창의 어머니도 기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매창의 연정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매창을 기녀가 아닌 한 인간으로 존중해준 유희경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절절하다.

 황진이가 사랑을 쟁취하려고 했다면, 매창은 사랑의 아픔을 끌어안았다. 그래서일까 부안사람들은 매창을 자신의 누이처럼 혹은 정인처럼 기린다. 한 평생 부안을 떠나지 않았던 그녀는 말년에 이르러 외로움과 눈물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한다.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이 / 굶고 떨며 사십년 길기도 하지 /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사는가 / 가슴 서글퍼 하루도 안 운적 없네”(매창, ‘병중수사病中愁思’)

 

  부안문화예술회관의 뒷동산격인 매창 공원은 2001년에 묘역 정화사업을 통해 재 단장했다. 벌초한 지 얼마 안된 봉분위의 잔디를 손으로 쓰다 듬는다. 그녀와 함께 무덤 속에 넣어 주었다는 거문고 소리를 생각한다. 여린 풀잎을 쓰윽 훔치면 봉분 아래 슬픔으로 당겨진 현들도 울릴 건가? 내 아둔한 귀는 못 듣는다. 때론 결핍이 사람을 깊게 한다는 생각만 어두커니 기댄다.

  변산을 사랑해서 아예 부안에 살게 된 시인 송수권은 매창의 부안을 이렇게 노래한다.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팔십 리 해안 절벽 변산 진달래가 / 산벼랑마다 드러눕는 봄날 오후에.” 그녀는 배꽃 아래 하염없이 서 있을 것 같은 여자다. 떠나는 남자를 잡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을 것만 같은 여자다. 송수권은 매창의 무덤에 찾아와서 “이 세상 남자라면 변산에 와서 / 하룻밤 그녀의 집에 들러 불 끄고 갈 만하다”고 노래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것은 사내의 탓인가? 변화 많은 세상 탓인가? 사랑을 가슴에 묻고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이용악 「전라도 가시내」)가 부안의 매창공원에 누워 있다.

 

   매창은 당대 문사였던 유희경, 허균과 교류하면서 많은 한시를 남겼다. 당대 문사로는 최고였던 그들과 시적 교감을 나누었을 때 매창의 나이는 고작 18세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삼각관계였다는 것이다. 매창과 사귀었을 때 유희경과 허균의 나이가 궁금하다. 유희경은 1545년생이고 허균은 1569년, 매창이 1573년생이니. 각각 40대와 20대다. 시간차 양다리였을까. 아니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무너뜨리는 파도의 열애였을까? 중년의 유희경과 혈기 넘치는 허균 모두 당대의 문인이면서 각 세대를 대표하는 킹카였기에 그들의 열애는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매창은 젊고 패기만만한 허균과 서민출생의 시인 유희경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했을까? 나이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경쟁이 안 되었을 텐데.... 유희경이 떠난 후에도 못 잊어 하는 매창을 허균이 집중 공략(?) 했으나 그녀는 첫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홍길동전’의 율도국이 부안의 위도를 이상향으로 쓴 것이라는 주장은 허균의 러브스토리를 완성한다. 그는 정녕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매창과 위도로 떠나고 싶었던 것일까?

 

  조숙한 여자아이들은 나이 차이가 많은 상대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문학적 유명세는 허균보다 유희경이 더 높았다. 유희경이 문단의 대부로 군림할 적에 허균은 첫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낸 패기만만한 20대 젊은이에 불과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것이 이때로부터 한참 지난 40대 중반이니 연륜에 진 것인가? 매창은 아마도 정신적 사랑을 더 높게 생각했었나 보다. 유희경에 대한 매창의 사랑은 설움의 동질적 표현이었을까. 술 취한 손님의 희롱을 받고 쓴 매창의 시 한편을 보자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당겨 / 끝내는 비단 적삼 찢어 놓았네. / 적삼 하나를 아끼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다오, / 맺은 정 끊어질까 두려워서라오.(증취객贈醉客) 매창은 황진이처럼 미모가 출중하지는 않았으나 거문고에 능했고, 한시는 오히려 매창이 더 뛰어났다고 한다.

 

  매창에 대한 기록은 유희경과 허균의 교류 말고도 이수광의 『지봉유설』, 임방의『수촌만록』, 장지연의『대동시선』, 안왕거의 『열상규조』, 박효관의『가곡원류』에 수록되어 전한다. 또한 매창이 남긴 수백 수의 한시는 이후 1668년 12월 부안현의 아전들이 58수를 모아 부안의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는데 찾는 이가 너무 많아 결국 목판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당시 시집을 발간하는 일로 절의 사세가 기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고. 현재 『매창집』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미국 하버드대에도 한 권 보관중이나 그가 평생을 보낸 부안에는 남아 있지 않다. 무덤 앞의 비는 매창이 죽은 뒤 45년 만인 1655년에 세워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석의 글이 상하자,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이었던 ‘부풍시사’에서 ‘명원이매창지묘’라 새겨진 비석을 새로 세웠다. 새 비석을 세우며 옛 것을 없애지 않고 나란히 세웠다.

 

  1974년 세워진 매창공원의 시비의 앞부분에는 유명한 시조 ‘이화우’가 새겨있고 뒷부분에는 매창의 행적이 보인다. 시비 위쪽에는 매창이 앉아 거문고를 타곤 했다는 바위 금대琴臺가 있다. 주 바위 아래에 깨끗하기로 유명한 혜천惠泉이 솟아나는 이곳에서 매창은 시인들과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하는데 시인 묵객들의 시구들이 주변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지금도 이곳에선 전국 시조대회를 비롯하여 해마다 ‘매창 백일장’이 열린다.

 

<부안 기행 2에서 계속>


장경남 2011.06.15. 4:42 pm 

박선생이 시작했으니, 이제 저만 남았나요? 잘 읽고 갑니다.

마당 2011.06.17. 9:03 am 

조금씩 고쳐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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