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훈의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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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제자리걸음

양재훈

끝나지 않는 제자리걸음
이준규의 『반복』과 채호기의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우리는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들은 언어가 될 수 없는 것을 다룬다. 아니, 그것을 다루지 못한다. 시인은 언어가 될 수 없는 것을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다. 시가 시작되는 것은 시인이 아직 말이 되지 못한 것을 만날 때다. 가령 책을 읽다 밤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살다 보면 끝내 말하지 못하고 입안에 가득 찬 말을 꿀꺽 삼켜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 말은 몸 안에서 떠돌다 몸속 어둠보다 더 어둡고 깊은 이 된다.
― 채호기, 「돌」 부분, 강조는 원문

“소리가 되는 순간 그 진동이 고스란히 안으로 삼켜지는” 이 단어 앞에서 시인은 말이 되지 못한 채 몸 안을 떠돌아다니는 밤의 흔적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형체를 갖지 못한 그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해롭기만 하다. 그러나 어둠 속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시인은 그 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단단한 돌처럼 굳어 응축돼 있는 저 밤을 언어로 옮겨 놓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밤이 굳어 만들어진 돌은 저마다 글자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생각의 장소에 글자는 그치지 않고 // 내린다.”(「팽창」) “생각 속에 뒤섞이지 못하고 생각의 장소에” 쌓이는 글자들, 돌은 밤의 어둠보다도 더 어둡고 깊은 밤이어서 눈으로 볼 수가 없다. 저 밤의 돌에 적힌 글자를 보려고 하면, 수많은 글자들이 녹지 않는 눈처럼 내리며 “눈을 통과해 스며들지 않고 / 눈 속에 쌓이고 쌓여 팽창한다.”

볼 수 없으니 만져야 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밤을 만지기 위해 눈에서, 만년필에서 손가락이 뻗어 나온다.(「애무의 행로」) 채호기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만년필에서 뻗어나간 손가락으로 밤의 돌을 만지는 일이다. 그러나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고 해도 본래 형체가 없는 밤인 것을 어떻게 만질 수 있는가. 만년필이 손가락을 뻗어 형체 없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바늘구멍에 끼우기 위해 풀어낸 실이 미끄덩한 국수가 되어 잡히지 않는 것처럼(「어서, 어서 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손 안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기호학의 용어로 말하면, 기의가 기표와 결합하지 않고 그 아래에서 미끄러지는 것이다.

시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할 때 흔히 기표의 우위성이라는 개념이 거론되곤 한다. 일상 언어에서는 기표가 기의를 촉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데 비해 시에서는 그 자체로 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시는 기의를 버리고 기표만을 취하는 것일까? 분명 시에 쓰인 언어는 대상을 환기시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물질성을 가지고 시에 현존한다. 그러나 저 기표의 우위성이라는 말이 시에서는 언어 자체만이 중요하며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별다른 의미를 띠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인다면, 그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시가 대상과 분리되지 않았던 태초의 언어를 복원하려는 시도라면, 기표와 기의, 이름과 사물, 주체와 대상의 어느 하나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치하는 찰나를 보존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표가 기의보다 우위에 서는 것은 오히려 일상의 언어에서다. 어떤 단어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자기완결성을 지닌 총체로서의 언어 구조 안에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쉬르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임을 밝혀놓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저 우연적인 결합은 기의의 현존성이 아니라 기표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지속되며, 이 네트워크는 기의 없이 스스로 자명해지는 주인 기표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언어의 경험적 일관성은 결여 자체를 표상하는 저 남근적 기표에 의해 유지된다.

시의 언어가 출현하는 곳은 주인 기표가 더 이상 스스로 자명함을 유지하지 않는 곳이다. 시라는 장르가 기본적으로 여성의 언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면 그런 이유에서다. 주인 기표가 효력을 상실하는 곳에서 대상은 언어를 넘쳐 신비해지거나 제 몸에 걸맞지 않는 커다란 언어에 질식해 있다. 역설은 언어가 결코 대리할 수 없는 저 대상이 언어의 옷을 입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니 시인은 기록할 수밖에 없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나서 그 이름의 부적절함을 깨닫는 것이 시인의 일이다. 그러고 나면 하나의 기표를 통해 명명됨으로써 오히려 명명되지 못한 채 남은 대상이 시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거기에 붙들린 시인은 어떤 단어로도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려는 악무한적 반복 속으로 빠져든다.

이준규의 시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니 그의 시집이 ‘반복’이라는 표제를 달고 나온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커피 너무 적은 나의 노트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겨울 하늘 너무 적은 나의 새들 (…중략…)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해 너무 적은 나의 달 너무 적은 나의 별 너무 적은 나의 대지 너무 적은 나의 겨울 너무 적은……
― 이준규, 「너무」
 
현대시로 올수록 은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지고 환유가 승하다고들 한다. 물론 그런 시들도 있을 것이다. 대상을 잊어버린 채 기표들의 유희만으로 시종하는 시는 얼마든지 있다. 시뿐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귀와 눈에 포착되는 수많은 노래 가사들과 광고 카피와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들이 의미와 무관한 기호들의 연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준규의 시 역시 한눈에 보아도 환유의 연쇄를 따라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그의 시에 내장된 도저한 우울의 감수성은 어찌된 일일까? 그것은 저 환유적 운동을 추동하는 것이 은유적 원리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준규의 시는 명명되는 순간 자기 이름 바깥으로 미끄러지는 대상을 쫓는 움직임이다. 대상들을 붙잡을 수 없으므로 그는 ‘너무 많은’ 대상의 현존 속에서 환희에 차 있을 수가 없다. 이준규는 저 대상들을 언어로 포착하려 하지만, 그가 기록한 언어 안에는 언제나 “너무 적은” 대상들만이 담겨 있다. 그러니 그는 도대체 자신이 기록한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다. “나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나는 그따위 것들에 도대체 관심이 없다.”(「나는」) ‘끓고 있는 물’과 ‘물속으로 들어가는 타조’와 ‘지나가는 새’ 들을 도저히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우울하게 한다.

붙들 수 없는 대상과 “너무 적은” 자신의 언어 사이에서 이준규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상을 재현하는 데 부적합한 기표들을 끊임없이 나열함으로써 대상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는 것뿐이다. 어떤 것의 부재, 즉 그것이 기입될 장소는 다른 것의 현존을 통해서만 현실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없는 것은 없다. 없음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가득차 있다.”(「같다」) 밤은 낮의 현존을 통해 물질화된 자신의 부재를 배경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너무」의 시작과 끝에 붙어 있는 말줄임표가 시사하듯, 재현의 실패를 통해 실패를 재현하는 일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기표와 대상의 불일치에 대한 문제의식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정확히 포착하려 하지만 늘 실패하고 마는 주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 이준규 시에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나’라는 단어는 그런 반성의 산물이다. 대상과 만나는 순간을 유지하지 못하는 주체의 무능력을 증언하기라도 하듯, 이준규의 시에서 ‘나’는 확고한 존재감을 가진 단수의 주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저 ‘나’들은 하나의 대상을 향해 모이지 않은 채 때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또 때로는 같은 시간 속에서조차 일관성 없이 복수적으로 존재하며 흩어져 있는 상념일 뿐이다. 그러니 견고한 실체를 가진 ‘나’로서 존재하는 주체가 텅 빈 대상을 손에 잡으려 하는 것이라는 첫 번째 인상은 뒤집혀야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대상이며 주체는 텅 비어 있는 공백일 뿐이다. 공백일 뿐인 주체는 오직 대상에 접촉함으로써만 겨우겨우 스스로를 자각하고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그것이 드러날 때 상징적 자동인형이 되어 매일의 삶을 사는 일상 속의 ‘나’로부터 대상과 접촉하고 있는 동안의 쓰는 행위의 주체가 분리되어 나온다.
 
나는 겨울의 우울 속에 겨울의 그림자로 있다. 나는 있지 않았다. 나는 있으려고 했으나 있지 못했다. 나는 있지도 않은데 썼다. 나는 쓰는 나다.
― 「우울」 부분
 
겨울은 ‘겨우’와 ‘우울’이 합쳐진 말이다. 겨울 속에서 주체는 자신이 오직 쓰는 행위로서만 겨우 존재를 지속할 수 있다는 우울한 사실을 마주한다. 그러므로 이 주체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쓰는 행위를 멈출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주체가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드러나는 저 공백은 오직 주체와 대상의 사이에만, 그리고 사이로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채호기의 시에서 저 사이―존재(inter―est)는 시인이 시를 쓸 때 글자 속에서 흘러나와 ‘그’가 되어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화가의 손은 부지런히 캔버스 위에 있는 / 모델을 지워나간다. 그가 나타날 / 때까지 화가의 눈은 부지런히 모델을 문지른다. (…중략…) 그는 모델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그림자도 / 아니다. 그는 화가도 아니고, 눈의 손가락이 문지를 때 / 그 마찰의 구멍에서 나타난다.
― 「화가와 모델과 그」 부분
 
 
화가는 시인으로, 모델은 대상으로, 그림은 시로 바꿔 써도 무방하다. 시인이 시에서 무언가의 이름을 적을 때 그는 그 대상을 부른 것이 아니다. 시인은 그 이름을 말함으로써 이름을 빠져나가는 무엇을 부른 것이다. 채호기의 시에서 그 대상은 시에 적히지 못한 채 시에 쓰인 언어를 통해 압도적으로 현존한다. 그의 시는 기표의 체에 걸러지지 않는 향락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주체의 통제를 벗어나 시인의, 그리고 독자의 육체 속으로 파고든다.
 
이준규의 시가 대상을 포착하려는 무한 반복의 운동이라면 채호기의 시는 언어를 초과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촉발된 황홀경(ecstasy)의 기록이다. 그들의 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그 짧은 순간, 언어가 대상과 일치할 수 있는 찰나를 보존하려는 노력에 의해 추동된다. 그래서 그들의 시 쓰기는 능동적이지 않다. 그것은 대상에 질질 끌려 다니며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수동적인 행위다. 그 자체로 시적인 저 찰나는 언어를 통해 포착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지만 어떤 언어로도 끝내 붙잡아 둘 수 없다. 언어는 대상에 도달하는 순간 이미 그것을 지나쳐 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되돌아가 다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그들은 끝없이 제자리를 걷는다.
 
* 이 글은 『포지션』 여름호에 실린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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